첫 여름 완주: 읽는 소설 읽는 소설 1
김금희 지음 / 무제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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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열매도 태풍으로 집 벽이 날아가 버린 동화 속 돼지 삼 형제 같은 기분이었으니까. 한동안 요양 병원에서 지내느라 자주 만날 수 없었는데도 '어딘가에' 할아버지가 있는 것과 '어디를 가도' 없는 것은 너무 달랐다. 항상 허전했다.

26%

자신은 지금 저 아래까지 떨어지고 있는 중이라고. 어디가 끝인지 알지도 못한 채로 중력에 이끌려 하강 중이라고. 컴컴한 어둠 속에는 손잡이가 없어서 아무리 버둥거려도 뭔가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어디에 도움을 바라야 할지 알 수 없고 부를 수 있는 이름도 없는. 수미 언니조차 모습을 감췄으니까 이제 정말 아무도 없네, 하고 떠올리자 슬픔이 몰려왔고 몸이 아주 무거워졌다. 이래서 옆집 아이가 슬픔을 싫어하는구나. 무거운 몸으로는 춤은커녕 몸풀기도 할 수가 없으니까.

30%

"열매 니 심 좀 내야지, 안 되겄다. 근데 여기서 뭐하는 겨."

"암것도 안 혀."

열매가 카운터의 먼지를 닦으며 딴청을 피웠다. 꿈에서 이상하게 그것은 합동 장의사 카운터랑 모양이 같았다.

"이게 암것도 안 하는 거면 송장 돼서 누워 있는 나는 우찌 되는 겨? 눈코 뜰 새가 없어 보이는디."

"그라게 내가 지금 빚 받으러 와서 이 집 일을 봐주고 앉았네."

손열매가 자조 섞인 웃음을 내뱉자 할아버지가 "부처여" 하고 받았다. 그 농담은 무겁지 않고 꽃가루처럼 가볍게 들렸다.

35%

"이 언니 서울 살았다며 순진하네. 나 전학 가면 학생 수 미달로 폐교되니까 그러죠. 어른들 참 웃겨, 부모가 버려둔 애 인생은 자기들이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나 봐. 그런 말을 와서 막 제안이랍시고 한다?"

"나는 그렇게 불러도 되는데 다른 사람이 그러는 건 용인 안 됨. 언니는 어른이잖아요. 어른이 그러면 돼요?"

"야, 자꾸 어른 어른 하지 마. 어른이면 뭐, 어른들도 실수하고 멍청한 짓도 하고 막막하고 그런 거야."

"어른이 어른이 싫으면 어떡해? 어른인데?"

"그러면 너는 학생이 학생이 싫으면 어떡해? 학생인데?"

"난 학교에서도 포기한 문제아고."

"나도 낙제점 받은 사회 부적응자야."

남들은 인생 이모작 삼모작 하겠다며 열을 올리는 판국에 나는 왜 중학교 일 학년하고 싸우고 있나. 열매는 자괴감이 들었다.

39%

온장고는 다리가 휘청일 정도로 무거웠다. 마치 인생의 무게처럼. 열매는 팔에 힘을 주고 눈을 부릅뜬 채로 그 '인생'이라는 것을 들고 뚜벅뚜벅 걸었다. 이제 한동안 전철이 오가지 않을 자정 무렵의 철로 곁을. 완주 마을은커녕 역 밖으로 나갈 수나 있을까 싶었지만 뒤에서 매점 주인이 지켜볼 것 같아 어금니를 꽉 깨물고 걸었다. 턱이 아플 때까지.

"술 먹고 우는 인간만 있는 줄 알았더니 웃는 인간도 있네."

47%

"나는 여기가 좋아. 우리 같은 애들이 대부분이고. 나 너무 맞다가 이 시골까지 온 거야."

그런 사정까지는 모르고 있던 양미는 파드마 말에 화부터 냈다.

"어떤 새끼들이 그런 짓을 해?"

파드마는 수가 많아지면 애들은 이유 없이 변하더라며 무리 짓는 인간들의 마음을 짚어 냈다.

"근데 우리 이런 얘기는 하지 말자."

파드마의 제안에 "그래, 하지 말자" 하고 율리아가 답했고 양미도 결심을 보탰다.

"그래, 그런 슬픈 얘기는 이제 하지 말자."

금세 밝아진 아이들이 걷는 길에는 이제 막 시작된 아침의 무구함이 깃들어 있었다. 모든 것이 새것이었다. 시간이라는 것이 형체를 지닌다면 그 역시 지금의 풍경처럼 투명하고 깨끗할 것 같았다.

49%

"얼래, 새파랗게 젊은 아가씨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어?"

"그냥 속이 좀 답답해서."

"하기는 나도 그 나이에 완주산 날아갈 듯이 한숨을 쉬었어. 완주산 나무들은 내 한숨으로 저렇게 키가 큰 거여. 근데 그렇게 심각할 필요 없어. 인생은 독고다이. 혼자 심으로 가는 거야. 닭알도 있잖아? 지가 깨서 나오면 병아리, 남이 깨서 나오면 후라이라고 했어."

85%

김금희, <첫 여름, 완주> 中

+) 이 소설은 수년을 같이 살아온 대학 선배 '수미'가 '열매'에게 돈을 빌려 자취를 감춘 지점부터 시작된다. 열매는 친한 언니 수미를 가족보다 가까운이라고 생각하며 지냈는데 무던한 척했지만 상처가 크다.

이 일이 계기가 된 것인지, 그간의 상처가 쌓여서 그런 건인지, 열매는 인간관계에서 오는 무력감에 목소리가 흔들린다. 성우로서는 치명적인 병이기에 정신과 상담을 다니며 흔들리는 생을 잡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다가 수미의 고향을 방문하게 되고 거기서 열매는 자신도 모르게 사람 사이 관계의 의미와 감정의 솔직함을 알아가게 된다.

전철과 버스를 몇 번이나 갈아타고 가야 하는 곳. 궁벽한 시골은 아니나 시골이라고 불러도 어색하지 않은 그곳에서 열매는 여러 사람들을 만난다.

매점과 장의사를 같이 하는 수미 엄마, 춤을 좋아하지만 학교는 가기 싫은 양미, 그런 양미와 꼭 학교에 같이 가려고 슬픈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결심하는 친구들 파드마와 율리아,

무엇이든 잘 해내서 진짜 외계인이라 의심되는 청년 어저귀, 똥 먹는 개 시고르자브르종 '샤넬'을 키우는 배우 정애라, 닭과 닭알로 인심을 베푸는 할머니, 수미 엄마 눈에는 빚다 만 만두처럼 보이는 구 회장 등등

이들과의 만남에서 열매는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보듬어간다. 무엇보다 열매의 곁에 항상 함께하는 돌아가신 할아버지와의 꿈속 대화가 그녀를 살아가게 한다.

너무 재미있지만 아련한 순간이 많은 이 소설을 손에 쥐고 쉼 없이 읽었다. 그리고 이 작가에 대한 굳건한 믿음은 한층 더 두터워졌다. 어쩜 이렇게 아슴푸레하고 먹먹한데 진실한 문장들이 많을까.

열매가 처한 도시에서의 난처한 상황이 현실적이라 씁쓸한 만큼, 완주에서의 몽환적인 상황이 절망에서 조금씩 멀어지게 만들어 희망적이다.

슬픈 순간이 깊어 진짜로 슬퍼지려고 할 때마다 열매와 완주 사람들의 대화가 구수하고 맛있게 드러나서 다시 미소 짓게 만든다.

할아버지의 맛깔스러운 사투리는 읽는 이로 하여금 우리 할아버지도 이럴 거라는 상상을 하게 한다. 어색함 없이 다가오는 건 작가의 노련미가 아닐까 싶다.

어린아이들의 상처와 어른들의 상처, 삶과 죽음의 의미, 그리고 사람과 사랑의 가치를 아름답게 묘사한 소설이었다.

한여름 밤, 쉴 틈 없이, 아름답고 가슴 저리며 재미있는 소설이 읽고 싶다면 이 책을 적극 추천한다. 마음 한편을 오래도록 울릴, 조금은 슬프지만 따뜻하고 애틋하지만 진실한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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