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즙 배달원 강정민
김현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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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는 나를 파악하고 싶다고 했지만 나는 나 자신을 파악하고 싶지 않다. 나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알아봤자 좋은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의사에게 들키고 싶지 않다. 내가 의학 용어로 말하자면 '양가감정'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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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끊고 싶다. 그렇지만 두렵다. 술을 끊으면 도대체 무슨 낙으로 산단 말인가. 끊고 싶으면서도 끊고 싶지 않다. 끊고 싶다. 그렇지만 끊고 싶지 않다.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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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제국주의의 습속과 서구의 천박한 상업자본주의의 산물인 생일 케이크를 아이들의 생일상에 굳이 올려야 하는가, 그보다는 우리 고유의 떡을 찧어 나누어 먹는 것이 전통적이면서도 민족적인 가치가 있지 않겠는가. 좋다 이거야. 근데 그 떡을 누가 찧을 건데! 토끼가 찧어줄 건 아니잖아? 결국 내가 찧겠지! 알다시피 내가 거기서 맡은 직분이 한두 개가 아니지 않겠어? 그런데 이 민주적인 사람들이 왜 나한테만 김민주 선생님, 까라면 까야죠, 이런 식으로 나오는지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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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가 씁쓸하게 말했다. 그렇다. 역시 단가가 저렴한 사람인 나도 함께 탄식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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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값이 제일 싸다니까! 사람이 제일 싸다고!"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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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젊은데, 언제 멀쩡한 일 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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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노력하고 있어요, 그러게 말이에요, 이런 말들과 함께 대강 넘어가긴 하는데, 뭐는 멀쩡한 일이고 뭐는 안 멀쩡한 일이란 말인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건 멀쩡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냐고 물어보고 싶지만 늘 꾹 눌러 참는다. 멀쩡한 일과 멀쩡하지 못한 일의 경계는 아직 모르겠지만 이런 사람들이 내 노동의 값을 얼마나 후려치고 있는지는, 오늘 유독 야구를 좋아하는 어느 손님 때문에 알게 되고 말았다.

"할머니~"

"왜, 아가?"

"저 이렇게 술 많이 마셔서 어떡해요......?"

할머니는 솥을 휘젓던 국자를 잠시 내려놓더니 나에게 환하게 웃어 보였다.

"아가, 걱정하지 마라. 안 들어갈 날이 곧 온다."

"정말요?"

"그럼, 기다리고 있으면 저절로 안 들어갈 날이 곧 와. 그런께 걱정하지 말어."

4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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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주책을 너무 떤 거 아닌가 모르겠네요."

"네, 많이 떠셨어요."

문을 열려던 팀장이 놀란 표정으로 돌아섰다.

"지금 뭐라고요?"

"주책 너무 떨었냐고 물어보셨잖아요. 맞다고요. 너무 떠셨어요. 저는 이미 다 봤으니 할 수 없고, 다른 지원자들한테는 안 하시는 게 좋겠어요. 개인사 캐묻는 불쾌감은 물론이고 업무 이야기는 하나도 없는 이게 무슨 면접입니까? 제가 써낸 희망 연봉 아실 텐데요. 겨우 그 푼돈 받겠다고 왔는데 정견 발표회도 아니고 면접과 무관한 주장을 한참 하시니 굉장히 무례하시네요. 앞으로 주의하셔야 할 것 같아요. 아,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다 팀장님이 오빠 같고 아버지 같아서 드리는 말씀인 거 아시죠?"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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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한 번 더 과자를 뿌리며 느긋하게 대답했다.

"다 살겠다고 그러는데, 얼마나 이뻐. 살겠다고 하는 것들은 다 이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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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겠다는 것들은 다 이뻐. 물론 잘 살겠다고 악에 받친 사람들은 무섭지만 그저 살겠다는 것들은 이쁘다. 그리고 이제 함부로 비둘기가 징그럽다고 말하지 않는다. 누가 그럴 자격이 있단 말인가. 살겠다고 하는 것들끼리.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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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비겁한 인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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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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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나는 준비 기간을 가지고 있는 것뿐이라고 생각했어요. 지금 내 인생은 진짜가 아니라고, 나는 아직 출발하지 않았다고. 내가 진심으로 마음먹고 출발하면, 금방 뭐든지 해낼 수 있다고. 내가 녹즙 배달을 1년 반 넘게 한 것도, 어떤 사람들은 내가 궂은일 해내서 대단하다고 말하지만 전혀 그런 게 아니었어요. 그걸 그만두면, 진짜 인생을 살아야 되니까. 삶에 대한 핑곗거리가 없어지니까."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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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진, <녹즙 배달원 강정민>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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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소설은 알코올의존증을 치료하러 병원에 다니면서도 계속 술을 마시는, 웹툰 작가가 되고자 애썼지만 쉽지 않은 현실에 퇴사해 녹즙 배달 일을 하는, '강정민'씨의 일상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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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표지에 실린 캐릭터로 강정민의 삶 혹은 성격이 어느 정도 예상되는 작품이었는데, 읽으면서 내내 짠하지만 유쾌한 소설이라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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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원작의 감수성을 살려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하면 어떨까 바라기도 했다. 인물 캐릭터가 분명하고 그들이 처한 상황이 꽤나 현실적이라 공감하는 이들이 많을 거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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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즙을 판매한 만큼 수당을 받는 특수고용직 노동자 강정민과, 어린이집 양호 선생님이나 실제로는 어린이집의 온갖 일을 다 하는 '김민주'의 일상을 통해 작가는 여성 청년의 사회생활을 현실감 있게 그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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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과 뼈아픈 현실을 핑계로 끝없이 술을 마시고 술 없는 인생은 상상조차 못하는 강정민은 단짝 김민주와 함께 낮술과 밤술을 지속적으로 이어가며 삶에서 지우고 싶은 순간들을 만들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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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이 재미있는 건 이렇게 위태롭고 안타깝게 보이는 순간도 어느새 피식, 하고 웃게 만드는 뼈 있는 대사와 흡입력 있는 상황 묘사가 함께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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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거나 웃픈 현실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위트와 재치 혹은 유머로 그 순간을 가려보는 젊은 청춘들. 이 작품에는 이들이 마주 선 현실과 그 안에서 버티는 이들의 마음이 잘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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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들 외에 열심히 살려고 애쓰는, '정말 참 열심히들 산다'는 말이 나오게 하는 이들도 다양한 캐릭터로 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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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노동자로서 살아가는 게 얼마나 호락호락하지 않은지 씁쓸하면서도 발랄하게 그리고 적나라하게 담아낸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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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코올의존증 문제, 데이트 폭력, 노동자의 처우 개선 문제, 성희롱 문제, 취업의 어려움, 먹고살기 고단한 현실 등등 사회적으로 심각한 소재를 담았음에도 어쩌면 이렇게 재미있게 읽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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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내내 몇 번을 웃으며 참 재미있게 잘 본 소설이다. 슬픈데 명랑한, 어린 시절에 보던 유쾌한 만화들이 떠오른다. 묵직하면서도 유쾌 상쾌 통쾌한 사실을 가득 담아낸 그런 구성을 이 소설에서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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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픈 현실에서, 그리고 알코올의존증에서, 진솔한 자기 객관화와 적당한 거리 두기를 시작한 어른 강정민의 삶을 응원하며 소설 읽기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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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다른 책을 읽어봐야겠다. 생존의 어려움과 사는 것의 고단함을 이렇게 슬프게, 아프게, 그런데 재미있게 담아내다니. 서사를 이어가는 힘이 탁월한 작가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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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하고 발랄하며 현실적인 소설을 읽고 싶은 이들에게, 알코올의존증으로 걱정인 이들에게, 취업 전선에서 상처받은 이들에게, 그리고 사회에서 받은 차별로 속상한 이들에게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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