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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에게
정영욱 지음 / 부크럼 / 2026년 2월
평점 :
* 이 서평은 해당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것입니다. 평소와 다름없이 읽고 제 생각을 기록한 글입니다.
모든 불운은 과거의 세계가 범하고 당해 온 업보이자 역사다. 비극은 대개 어떤 한 지점에서 파생되는 것이 아니라 켜켜이 쌓인 과거로부터 천천히 지층이 마련된다. 어린 시절의 어떤 상황이 그를 형성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그는 어떤 잘못을 행하며, 그 잘못은 지금에 와서 비극으로 작동한다. 그러니 어떤 불행에 '갑자기'라는 개념은 결국 깊이 내재된 마음의 회피일 뿐이다.
생이란 그렇다. 과거의 경험이 지금의 나를 언젠가의 나에게로 견인한다. 부정적인 과거를 청산하느냐, 긍정적인 과거를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당장의 삶으로 나타난다.
pp.45~47
그에게 틀린 것은 잘못되어 고쳐먹어야 할 것이 아니라 외려 다정스러워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었다. 틀렸기에 특별하고 잘못 쓰였기에 쓰다듬게 되는 것. 그렇게 뒤틀린 모든 단어와 감정들은 그의 세계에서 빛이 되고 꽃이 되었다.
틀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누군가는 그것을 극도로 기피하고 또 누군가는 부정의 잣대로 삼는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1분 1초마다 새로운 오류가 생겨난다.
그러니 틀렸다는 것은 스스로를 질책해야 한다는 개념을 넘어, 알아 가는 과정임을 기억해야 한다. 깨달음의 환희 속에서 자신이 저지른 지식의 과오를 받아들이고 새롭게 드러난 진실을 인정하면 될 뿐이다.
틀린 것이 외려 다정스러울 수 있다는 것. 좁디좁은 비의 세상 안에서 내가 배운 것 중 가장 넓고 깊은 시선이었다.
pp.107~111
"어디 보관해 두면 어때?"
"그럼 쓰지 못하잖아요."
"써야만 의미가 있는 건 아니잖아."
"아니. 선물은 써야 해. 그래야 그 의미가 완성되지. 쓰지 않으면, 그 마음이 와해되는 거잖아요."
"가지고만 있어도 마음은 남는 거 아냐?"
"그럴 거면 주식을 줬어야지. 닳아 없어질 때까지, 지문 자국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쓰라고 준 거야. 이것들은."
p.125
삶을 살아 보니 아득바득 무언갈 해야만 할 때가 있으면, 이어진 악독한 습관과 낡은 관습을 끊어 내야 하는 시기도 있었다.
내 마음이 고인 늪처럼 썩어 문드러지지 않으려면 어떤 걸 그만두어야 할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업에 관련된 것도, 도덕성에 관련된 것도 아닌 한 사람에 대한 감정이었다. 자꾸만 내 안에 우울을 심어 대는 사람이 있었다.
무엇을 어떻게 거부하기, 이렇게 또는 저렇게 멀어지기 따위로 계획하고 다짐하면 시작부터 부담스럽지만, 그저 기다리지 않을 뿐이라 생각하면 그것대로 나름 할 만한 일이 될 것이다.
누군가를 기다리지 않기.
pp.193~195
"말 돌리지 말고, 오빠." 아차차. 둘 사이에 해결할 게 있었지. '나도 사랑해.'라는 문장을 둘러싼 줄다리기는 어느새 한 시간을 훌쩍 넘겼고, 원은 지쳤는지 꾸벅꾸벅 졸고 있다. 크음, 헛기침으로 무언가 말하려는 신호를 보냈다. 그는 졸린 고개를 곧추세우고 귀를 쫑긋했다. '네 머리카락을 치우는 게 즐거워."
사랑, 사랑. 분명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것 같다고 했다. 걱정과는 달리 내 마음을 알게 되었다는 아주 다정한 어감과 내용이었다.
내가 자는 동안 머리칼을 치워 보니 생각보다 훨씬 고된 일이었다고. 욕실에도, 거울 밑에도, 그리고 탁상 밑에도 머리칼이 이렇게 많을 줄이야... 매번 오빠가 다 치웠던 거야?
사랑한다는 건 뭐랄까, 조금 더 뒤늦게 발현되고 발견되는 마음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pp.251~253
정영욱, <구원에게> 中
+) 이 책은 누군가를 사랑하던 나날과 그 사랑이 끝난 후의 나날을 담은 에세이집이다. 사랑한 상대에 대한 기억만큼 사랑했던 순간의 자신에 대한 기억까지 솔직하게 풀어낸 글이 가득하다.
저자는 결핍과 죽음, 우울과 눈물, 운명과 다정을 간직하고 사는 이들을 만나며 그들과의 일화에서 느낀 감정을 차분하게 적어 내려간다.
그들이 각기 다른 사람임에도 결이 비슷하게 느껴진 건 저자의 기억 속 상대이기 때문이라 여긴다. 책의 초반부를 읽으며 이 작가가 이번 책에서는 개인적인 사랑을 이야기하려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읽을수록 분명 사랑에 대한 단상이 맞는데 왜 이리 울적하고 아프고 가슴 찡한 이야기로 와닿나 싶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아픈 사랑이려니 하기에는 깊이 몰입되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건 이 글을 쓴 이의 마음에 읽는 이의 마음이 보태진 게 아닐까 생각한다. 떠올리면 아직도 아릿한 혹은 비릿한 느낌의 추억. 책 표지의 붉은 색감과 달리 사랑을 읊었음에도 암흑의 색이 떠오르는 건 그래서일까.
그에게 두 번의 사랑이 지나갔을 때쯤 이렇게 중얼거렸다. 평범한 사람 만나서 산뜻한 사랑을 하면 좋겠다고. 그러면 저자가 조금은 가뿐한 감정을 간직하게 되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이 책에 수록된 마지막 사랑은 평범한 사랑을 나눌 귀여운 상대 같았다.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어둠의 골이 깊은 저자에게는 맑고 밝은 상대방과 보통의 사랑을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지난 책에 대한 글들을 살펴보았다. 거기서 개인적으로 쓴 서평이 아니라, 오히려 작가의 문장을 곱씹어 보았다.
그러면서 확신했다. 지난 책들과 달리 이번 책의 문장은 확실히 다른 결을 지녔다. 촘촘하고 꼼꼼하며 가득 찬 문장.
심지어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느껴지는 호흡까지 그랬다. 속을 드러내는 걸 어려워하는 저자가 이 책에서 내면 안 깊은 것까지 쏟아내서 그런 걸까.
이 에세이집을 읽는 내내 '소설'이라는 두 글자가 떠올랐다. 이 책의 인물과 이야기를 살려 소설로 만들면 어떨까. 이번 책에서 본 그의 촘촘한 문장으로 시니컬하면서 감수성으로 꽉 찬 소설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사랑한 상대만큼 사랑했던 자신을 기억하고 수용하는, 사랑 이후의 이야기였다고 생각한다. 사랑이라는 글자 옆에 누군가의 얼굴이 스치는 사람들이 읽으면 좋을 듯하다.
행복한 사랑 옆에 아픈 사랑이 나란히 선 이들, 사랑 이후의 고통으로 아픈 이들, 지금의 사랑을 충분히 느끼고 싶은 이들에게도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