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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빛나는 삶
마일스 프랭클린 지음, 고상숙 옮김 / 북레시피 / 2026년 1월
평점 :
* 이 서평은 해당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것입니다. 평소와 다름없이 읽고 제 생각을 기록한 글입니다.
시인으로 태어나느니 차라리 노예로 태어나는 게 낫습니다. 시인은 항상 혼자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어도 무서울 정도로 외로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조차 혼자입니다. 왜냐하면 시인의 영혼은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어서, 마치 우리 인간이 원숭이와 다른 차원에 있는 것처럼 시인 역시 세상과 동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p.10
게다가 나는 생각이라는 무거운 저주를 안고 태어나 송아지에게 젖을 먹이는 동안 온갖 생각을 하곤 했다. 세상을 살아가며 '왜'라는 의문을 품지 않고 그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자가 더 행복하게 산다. 특히 여자에게는 그 말이 두세 배는 더 절실한 게 사실이다.
p.36
삶의 고단함이여, 삶의 고단함이여...
이것이 내 삶, 내 인생, 내 찬란한 경력이란 말인가? 나는 겨우 열다섯이었다. 나도 곧 이들처럼 나이가 들 게 불을 보듯 뻔했다. 지금 내 앞에 선 이들처럼 말이다. 그들 역시 젊을 땐 꿈도 꾸고 희망도 품었을지 모르는데. 아니, 아마도 한때는 그런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 보이는 모습이 곧 그들의 삶이었다.
pp.44~45
가난과 곤궁에 빠지면 잘살 땐 절대 알 수 없는 사람의 진심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오직 우정과 사랑만으로 다가올 때, 그 마음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그런 의미에서 살면서 한 번쯤은 가난을 겪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다.
p.49
"네 마음 잘 알아, 시빌라." 이모는 천천히,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용기를 잃지 마. 세상에는 사랑과 선의가 얼마든지 있어. 단지 네가 그걸 찾으려 나서야 할 뿐이야. 오해받는 건 우리 모두가 감수해야 할 시련 중 하나야.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누구나 자신만의 생각과 감정을 지니고 있어. 근데 그걸 남이 완전히 이해하는 건 불가능해. 사람은 섬세하고 고결할수록 더 고독할 수밖에 없는 거야."
pp.92~93
"너도 여자니까 그렇지 뭐. 여자애들은 죄다 해럴드의 매력에 단번에 무너진다니까. 운명에 순순히 굴복하고 싶지 않으면, '불씨를 경계하라, 아니면 불길을 두려워하게 되리니.' 이 말 외엔 해줄 조언이 없구나.'
그의 침묵은 결코 멍청하거나 무뚝뚝한 사람의 그것과는 달랐다.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우울하고 공허한 침묵도 아니었고, 어딘가 삐딱하거나 멍하니 꿈꾸는 사람의 침잠도 아니었다. 그의 침묵에는 묘한 지성이 깃들어 있었다.
p.150
"시빌라, 절대로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장난치지 말거라. 남자의 마음을 가지고 노는 건 우리 여자들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비열한 행동이야. 절대 해서는 안 될 짓이지."
"그 말은 남자들한테 진짜 마음이란 게 있다는 얘기처럼 들리네요. 이모. 여자들이 할 수 있는 최악의 짓이라 해봐야 며칠간 그들의 자존심을 좀 상하게 하는 게 전부예요."
"시빌라, 너 지금 너 말을 막 하는구나. 남자들의 부족함이 네가 여자로서 해야 할 도리를 무시해도 된다는 핑계는 될 수 없어."
pp.206~207
"절대 가난한 놈이랑은 결혼하지 마라. 우리 딸 같아서 하는 말이야. 내 말 명심해. 가난한 놈이랑 결혼하면 마귀가 깃든다고.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말이야. 서두르지 마."
p.350
시간은 자기 일을 철저히 해내고, 가장 교묘한 사기꾼인 희망이 서서히 과거의 허깨비로 변해갈수록 목구멍은 제 멍에에 익숙해져간다.
p.411
마일스 프랭클린, <나의 빛나는 삶> 中
+) 이 책은 어린 소녀 '시빌라'가 사랑이나 남성과의 인연에 흔들리지 않고 자기 주도적인 삶을 선택하는 과정을 담은 장편소설이다.
생각이 많고 감수성이 풍부한 소녀 시빌라는 집안의 가세가 점차 기울자 생전 처음 고된 노동을 경험한다. 겪어보지 못한 농장의 현실에 지친 시빌라는 스스로를 비관주의자로 선언하며 인생을 암흑으로 본다.
그러다가 집을 떠나 외할머니의 댁에서 지내며 본인의 매력과 예술적 가치에 관심을 갖는 남자들을 알게 된다. 외할머니의 양아들인 '에러버드'는 시빌라가 무대 위에서 공연할 수 있도록 돕고 싶어 한다.
또 ' 해럴드 비첨'은 그녀와 매혹적인 관계를 맺으며 아슬아슬한 줄다리기 연애를 한다. 이를 통해 시빌라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남자들이 어떤 존재인지, 만남에 앞서 남자에게 여자란 어떤 의미인지 생각하게 된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기억해야 할 점은 소설의 배경이 1890년대 호주라는 점이다. 1890년대의 보수적인 시대에서, 여성이 주체적인 삶을 꿈꾸며 꿋꿋하게 자기의 주관을 지켜가는 모습을 섬세하게 잘 담아낸 소설이다.
시빌라는 피아노를 연주하고 노래 부르는 걸 즐기며,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작가를 꿈꾼다. 예술적 감각이 뛰어난 그녀는 누군가의 아내와 엄마이기 이전에 자기 자신으로 먼저 서야 하는 것이 인생임을 깨닫게 된다.
시빌라의 섬세한 심리 묘사를 통해 그녀가 겪고 있는 인생의 고뇌와 갈등이 자기 길을 찾는 과정임을 잘 보여준다. 흐릿했던 정체성이 또렷해지는 과정을 담아낸 소설이라고 느낀다.
결국에는 비첨과의 인연이 소중하고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시빌라는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을 먼저 선택한다. 그게 스스로를 존재하게 만든다고 느끼는 것이다.
물론 이모의 말처럼 그의 마음을 떠보거나 그를 시험하는 듯한 시빌라의 언행을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1890년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담아낸 부분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소설에는 독립적인 시빌라와 다른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남편의 사업 실패로 자식의 도움을 당연시하는 엄마, 여자가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한다는 건 천박하다고 여기는 외할머니, 여자로서 해야 할 도리가 있다고 믿는 이모 등이 그들이다.
소설은 이들이 틀렸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시빌라가 이들과 다름을 보여줄 뿐이다. 작가가 드러내고 싶었던 건 시빌라가 가정에 귀속된 삶보다 스스로의 삶을 우선하는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 책을 읽으면 몇몇 고전 작품이 떠오른다.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당당하게 주도적 삶을 꿈꾸던 수많은 여성들이 생각난다.
주체적인 여성을 묘사하기 어려운 시대임에도, 어린 소녀가 스스로를 알아가는 과정, 성숙한 어른으로 성장하는 과정, 자기의 정체성을 알아가는 과정, 여성이 자기 주도적인 삶을 꿈꾸는 과정 등을 섬세하고 흥미롭게 그린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