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 are all patients! 우리는 모두 환자야."는 내가 정신과 전공의 1년 차로 들어갔을 때 3년 차 선배가 해 준 말이다.
"우리 머릿속에는 나만의 색안경이 있어. 살아오면서 저절로 생긴 거지. 내 머릿속 안경이 빨간색이면 하얀 세상을 빨갛게 보고 세상은 빨갛다고 믿고 살아가지. 이런 게 투사야. 내 꼴대로 세상을 보는 거야. 바깥세상의 진실은 상관없고 내가 보는 게 진실이 되는 거지. 투사는 한마디로 망상이지."
세상이 동그란데 나는 세모라 하고 누구는 네모라 하고 누구는 별 모양이라 한다. 각자 자기가 본 세상이 맞다며 우기고 싸운다. 진실은 어디 가고 망상의 싸움만 한다. 내가 정상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착각 속에 살고 있을 수 있다. 내가 보는 세상은 모두 내가 만든 투사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pp.26~27
30대 남자 환자다. 연애를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모태 솔로다. 여자 목소리 환청이 들리는데 두 가지 버전으로 나타난다. 사랑한다, 좋아한다는 애인 목소리와 바보, 멍청이라고 욕하는 엄마 목소리다. 환청이 애인 목소리일 때는 기분 좋게 웃다가 엄마 목소리로 바뀌면 시무룩해진다. 그 환자가 시무룩하게 있어서 물었다.
"왜요? 오늘은 엄마 목소리가 들려요?"
"아니요. 오늘은 아무 소리도 안 들려요."
"소리가 안 들리니 편하겠네요."
"아니에요. 소리가 안 들리면 이상해요. 둘 다 나를 버린 것 같아요. 애인도 엄마도요..."
pp.51~52
공간을 바꾸면 삶이 바뀐다. 내 삶을 바꾸고 싶다면 공간을 바꾸는 방법이 가장 간단하다.
다만 공간 바꾸는 게 쉽지는 않다. 걸리는 게 많기 때문이다. 무엇이 걸릴까? 내적인 이유와 외적인 이유가 있다.
내적인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불안, 의심, 귀찮음이다.
외적인 이유도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시간, 돈, 가족이다.
새로운 공간으로 들어갈 때는 그냥 방해물을 주렁주렁 매달고 들어가야 한다. 불안과 의심을 품에 안고, 돈과 시간과 가족의 문제를 등에 업고 뚜벅뚜벅 움직여야 한다. 신기한 점은 해결 안 날 것 같은 문제도 새로운 공간으로 들어가면 어떻게든 정리된다는 것이다.
pp.63~65
나는 지금도 이렇게 생각한다.
'나의 혀는 메스다. 나의 혀 놀림이 집도의의 칼과 같다. 내 혀 놀림으로 상처를 봉합하고, 내 혀 놀림으로 암을 제거하고, 내 혀 놀림으로 심장을 다시 뛰게 한다. 잘 못하면 내 혀 놀림으로 상처를 주고, 멀쩡한 혈관을 자르고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내 혀는 칼이다.'
지금도 몸 컨디션이 안 좋으면 나태해지고 흔들린다. 그때 다시 생각하고 정신 차린다. 나는 수술하는 사람이다. 오늘 수술하는 날이다. 나의 혀, 나의 말 한마디가 그의 삶을 좌우할 수 있다!
p.179
몸의 고통은 혼자서 겪을 수밖에 없지만 마음의 고통은 나눌 수 있다. 누군가 그의 고통을 알아주고 받아 주면 그 고통이 덜어진다. 몸의 고통은 의사가 치료해 주지만 마음의 고통은 같이 아파해 주는 사람이 치료해 줄 수 있다.
p.233
그녀는 머릿속에 가혹한 재판관을 모시고 산다. 자기 행동 하나하나를 판단해서 죄를 묻고 벌을 내린다. 그러니 늘 불안하고 두렵다. 가혹한 재판관은 '병적인 초자아' 때문이다. 초자아는 '착하게 살아라', '좋은 사람이 돼라'와 같이 도덕과 윤리를 추구하고 이상적인 자신을 추구하는 정신 기능이다.
그러나 초자아도 너무 강하면 병이 된다. 내 안의 초자아가 너무 가혹하면 가벼운 실수에도 하루 종일 바보라고 구박하고, 남에게 살짝 민폐 끼쳐도 죄책감에 시달리고, 남보다 조금만 부족해도 심한 열등감에 허덕인다. 매일 자책과 자학이 번갈아 온다.
pp.269~270
윤우상, <명랑한 정신과> 中
+) 이 책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저자가 30년이 넘게 환자와 함께 해온 일상을 담고 있다. 마음이 아픈 이들을 돌보는 의사와 간호사의 삶, 그리고 자기만의 철학과 생각이 확고한 환자들의 삶이 기록되어 있다.
'명랑한 정신과'라는 책의 제목만큼 화사하고 귀여운 그림들로 가득 찬 명랑한 책 표지를 보며 책의 분위기를 상상했다.
그리고 책을 펼치면서 환자들의 짠하고 아픈 이야기, 그러면서 되게 유쾌하고 신기한 이야기, 또 그들 나름의 우직하고 흔들림 없는 이야기 등을 접하며 웃다가 울고, 울다가 다시 웃었다.
저자는 말한다. 우리는 모두 환자라고. 세상은 자기만의 시선으로 파악되기 때문에 그게 진실인지의 여부는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다. 본인이 본 세상이 정상이라고 믿고 사실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깊이 공감했다. 우리는 대부분 자기가 경험한 것 위주로, 자기가 보고 들은 것 위주로 세상을 판단한다. 사람들을 분석하고 세상 돌아가는 이치도 파악한다.
그리고 그 틀에서 자기만의 철학을 쌓고 자기만의 잣대를 만든다. 문제는 모든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럼 과연 누가 정상일까.
이 책을 읽으면서 정신건강의학과를 방문하는 환자들에 대한 편견이 좀 줄어들었다. 그들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생겼다고나 할까.
그들이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왜 다른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환영과 들리지 않는 환청이 들리는지, 또 그 순간 그들은 얼마나 혼란스러울지 등을 우선 생각하게 되었다.
이 책은 유쾌하고 발랄하며 제목 그대로 명랑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물론 걱정하고 안타까워하는 마음도 갖지만 시원하게 웃으면서 가볍게 지나갈 수 있는 길을 떠올리게 한다.
어떤 스토리에서는 마음이 아파 훌쩍이다가, 환자를 생각하는 의사와 간호사 선생님들 그리고 환자들 곁에서 응원해 주는 이들의 모습에 감동을 받기도 한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사이코드라마에 대한 의구심이 있었다. 타인이 하는 연기일 뿐인데 감정 몰입이 될까, 그게 당사자들에게 와닿을까 싶었다.
그런데 사이코드라마를 통해 자기의 솔직한 심리를 토로하는 이들의 사연을 보기만 했는데도 감정 이입이 되어 훌쩍이다가 엉엉 울고 말았다.
마음이 아픈 이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힘이 된다던 저자의 말이 기억난다. 사람 사이에서 받은 상처도, 어쩌면 사람 사이에서 나을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는 책이었다.
정신 병원의 일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한 사람들, 그리고 마음이 아픈 이들이 왜 그렇게까지 되었는지 이해하고 싶은 사람들, 정신과 의사와 간호사의 삶이 어떤 것인지 궁금한 사람들이 읽으면 좋을 듯하다.
더불어 스스로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싶은 사람들, 마음이 아파 힘든 사람들, 따뜻하고 유쾌한 이들의 대화로 한바탕 웃고 싶은 사람들에게도 권하고 싶다. 사람 사는 이야기를 읽기만 했는데도 위로가 되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