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나무 아래서 - 제3의 詩 8
권혁웅 지음 / 문학세계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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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십리

 

 

새로 두시에 산등성이를 건너온 비는

내 방 창을 두드린다 창문에

조팝나무 잎이 붙어 있다 먼데 있는 것들이

문득 소식을 전하는 거다

지나쳐온 것들이 자금성(紫金城)이나 땡삐치틴처럼

문 앞까지 다가와 다닥다닥,

붙어 있을 때 그걸 흔적 없이 긁어낼 수 있나?

웃기고 있네, 나는 요금별납처럼 살았어

내 자리 어디선가 조금씩 내가 빠져나간 거지

세시가 되니 비는 더 심해져서

파도치는 소리를 낸다 창문을 여니

먼데 불빛이 어렵게 깜박인다

누군가 구조신호를 보내는 거지

구름 뒤에 둥글게 빛나는 달이 있듯이

저곳 어디에 왕십리가 있을 것이다

나는 외도(外道)가 지나쳤다, 라고 목월은 말했지만

아니다, 나는 처음부터 저 길 너머에 있었다

새로 세시에서 네시로 지나가는 저 비처럼

나는 세상을 건너갈 수 없었다

왕십리, 십리가 멀다 하고 찾아가던 곳

하지만 늘 십리는 더 가야 하던 곳

내게도 밤을 디디고 가야 할 곳이 있다

물론 왕십리에 가기 전에, 왕십리도 못 가서

나는 발병(發病)이 날지도 모르지만

 

권혁웅, 『황금나무 아래서』中

 

 

+) 권혁웅의 첫 시집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분명 두번째 시집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라고 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읽은 그의 첫 시집은 두번째 시집과 전혀 다르지 않다. 그의 시집은 '사략(史略)'이다.

 

간략하게 기술한 역사. 그것은 한 시대를 담고 있는 이야기와, 그 기간을 거쳐 온 한 개인의 이야기다. 사람과 사회 사이에서, "당신과 그 사람 사이"에서, "부재와 부재 사이에서" 시인이 존재한다.[파문] 그 틈에는 간략하게 적은 역사가 숨어 있다. 개인의 이야기임과 동시에 시대사의 흐름이 녹아있다.

 

 그의 시가 갖고 있는 매력은 독자로 하여금, 화자의 생을 훔쳐보며 그 사회의 면면들을 조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시인은 시조, 그림(르네 마르리트), 영화(안소영) 등의 다양한 예술 문화 장르를 시로 끌어들인다. 그것은 소재가 될 수도 있고, 형식이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것들을 바탕으로 그의 시는 숨쉬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권혁웅의 두번째 시집과 이번 시집을 함께 읽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두 시집을 함께 살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간략하게 적은 역사, 어쩌면 그가 바라보는 생(生)이 한 마디로 그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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