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 문학과지성 시인선 334
이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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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을 지운 것들은 전신이 날개다

 

                                           

한쪽짜리 창이 바다의 세계를 잡아당긴다 겹겹의 물길이 미래를 놓친다 팽팽해진 세계의 사방이 끌려와 잠긴다 출구가 없는 바다가 오래된 시간인 돌들을 뒤덮으며 창으로 들어닥친다 물의 뿌리들이 창에 달라붙는다 온몸을 들이밀어도 밀리지 않는 생이 있다 바다는 닫힌 채 폭발한다 몸을 터뜨려도 안과 밖이 뒤섞이지 않는다 그러나 중심을 지운 것들은 전신이 날개여서 바다와 창은 함께 반짝인다 창의 어두운 시간을 견디던 허공들이 튀어오른다 검은 바다의 날개를 따라 돌들도 새처럼 난다

 

 

이원,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中

 

 

+) '그림자'는 홀로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다. 언제든 자신을 형성하게 만드는 주체와 함께 해야 한다. 비록 물체의 뒷면에 드리워지는 검은 그늘이지만, 그것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늘 따라다닌다. 때로 불행이나 우울, 근심을 상징하기도 하는데, 그만큼의 어둠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시인에게 "때로 어두운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아니 때로 아름다운 것은 어두운 것"이다. 그림자는 계속 어둡고 깊은 것이다. 그것은 "무슨 상징처럼 부풀어오른 검은 비닐봉지가 그림자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으로 구체화되는데, "그림자와 함께 간다"는 점이 중요하다. 혼자가 아니라 언제나 그림자와 함께인 것이다.([사막에서는 그림자도 장엄하다])

 

그런데 왜 시인에게 어두운 것은 아름다운 것일까. 이 작품에서 그림자는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매개물이다. "거울"에 비춘 자신을 바라보듯 "그림자를 낳는다"([아파트에서 3])는 것은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아파트는 허공에서도 제 그림자를 다시 꾸역꾸역 삼키고 있"([오토바이])는데, 허공은 화자의 낱낱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공간이다. 그곳은 비었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게 아니라, 빈 곳을 채울 수 있기 때문에 의미 있는 장소다.

 

 "검은 비닐봉지 하나가 허공을 난다" "허공이 주렁주렁하다" "나는 것들은 그림자를 만들지 않는다"([비닐봉지가 난다]) 왜냐하면 그림자는 붙박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존재에 고착된 채 자기동일화를 꾀하는 것이 그림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 유동적인 특성은 존재를 멈췄다가도 다시 움직이게 만드는데, 그것은 허공 뿐만 아니라 시간의 틈에서도 파닥거린다.

 

그런 그림자는 어느새 거울로 의미를 전이시킨다. "어제의 시간과 내일의 시간이 거울로 걸어 들어와 조우한다" ([거울을 위하여]) 자아의 다른 표현으로 묘사되는 "얼굴"이 "거울을 열고 들어"가면 "얼굴은 어느새 거울을 잠가버린다." "얼굴이 낯설어"지면, 그러니까 자신이 낯설어지는 순간 "나는 거울 밖으로 걸어나온다."([얼굴이 그립다]) 끝없이 들여다보아도 낯선 것이 자아다. 화자는 끝없이 자기 내면을 비춰보며 스스로를 정비하는데, 그 바탕에는 '허공, 시간, 그림자, 거울, 얼굴'등이 잔류한다.

 

이미지들이 부유하는 이원의 시집에서는 "모래들이 물을 찾아 떠나간 사막처럼 그 텅 빈 곳에 그림자가 내려앉는다." "그림자도 시간도 아직 절지 않은 생살이다." 그의 "몸에서 그림자가 빠져나가고 있"지만, "심장은 아직 그림자와 몸을 공유하고 있다"([시간과 나에 관한 노트]) 다시 말해서 그림자는 시간처럼 묻어나진 않지만 속속들이 스며드는 역할을 한다. 시인이 제시한 이미지들은 그를 꾸미는 것이 아니라 그를 채우며 존재한다. 화자를 장식하는 것이 아니라 화자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것을 굳이 사람에 한정시킬 필요는 없다. 시간, 공간, 과거, 기억까지도 이미지로 채우는 것이 이번 이원 시집의 특징이다. 그런데 유의할 점은 그 "길"의 끝에는 언제나 "나"가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게 다리가 있다는 것은 길은 계속 증식된다는 뜻이다 길을 증식시키는 것은 바로 우리의 다리다 우리는 우리가 증식시키는 길의 숙주다"([나는 부재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즉, 아이러니하게도 시인은 부재함으로 존재하는 방법을 깨달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일정한 궤도를 유지하고 있는데, 그 길에서 주체는 부정하면서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길과 주체는 서로 기생하며 생존한다. 서로가 서로의 숙주가 된다. 역설적이지만 "시간"은 "생기는 순간 상한다" 과거에 사라진 시간이 "지금은 잘리며 반짝이며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잔영처럼 사라지지만 흔적을 남기는것. 그것이 부재하며 존재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삼면화])

 

"내 몸으로 가는 길의 시간이 끊어졌다 다시 이어지는 곳"에서 길은 계속된다.([닫힌 것들]) 그 시간동안 수없이 반복되는 고투로 인해 "길에서는 늘 시간의 피비린내가" 나는 것이다. "길은 여기에 서서 멀리까지 간 제 몸을 그리워한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제 속에서 제 몸을 천천히 빼내고 있다"([길, 오토바이, 나이키])

 

길 위에 몸이 있고, 몸 속에 길이 있다. 나에게 그림자가 있고 허공에 집이 있다. 거울에 내가 있고 시간에 길이 있다. 모든 것들은 그렇게 복잡하게 얽히며 존재하기 위한 고민을 한다. 결국 세계와 세계 내 존재의 부산한 몸부림이 이미지로 형상화된 시집이라고 생각된다. 다만, 그 이미지들이 너무 어수선하게 어우려진 것이 단점으로 생각되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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