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기
최형준 지음 / 부크럼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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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랄까, 이렇게만 얘기하면 단순한 얘기 같을지 모르지만, 조금 더 깊게 들어가면 꽤 고달픈 얘기가 되고 만다.

고도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한 탓에 '컬러'를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달리 말해 나는 이 세계로부터 다양성을 박탈당했다는 얘기가 된다.

p.16

해변에 자리를 잡는다. 모래사장 위에 비치 타월을 깔고, 그 위에 누워 한동안 가만히 볕을 쫴 준다. 이윽고 땀이 맺힐 무렵에 바다로 뛰어들어 그동안 무지하게 참았다는 듯이 전투적으로 수영한다. 상어에게 쫓기듯 전력을 다한 자유형! 더 이상 팔을 저을 힘이 없어지면 물 밖으로 나와 냅다 드러누워 책을 읽기 시작한다. 서너 페이지쯤을 읽다 말기를 수십 번 반복하며 필시 되팔 수 없을 만큼 모래와 바닷물로 책을 오염시키는 거다. 그로써 독자의 권위를 바로 세워보는 거다.

pp.28~29

오후 4:00

확실히 가을은 무언인가의 시작을 도모하기에 좋은 계절이다. 아무리 봐도 사장이 건물주인 듯 보이는 커피숍에 앉아 실제로 내 삶의 주요한 (갸륵한 야망을 등에 업은) 모의 대부분은 이 가을에 이뤄졌다는 사실을 돌이켜본다.

오후 4:15

이처럼 쉽게 용기가 솟는 계절에 나는 또 한 번의 시작을 도모하고 있다. 앞으로 쓰려는 이야기들을 하나로 아우를 단어를 찾아 고민하는 것이다.

p.90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말에 따르면 빙산 이론이란, 작가가 자신이 쓰고 있는 것에 관해 충분히 잘 알고 있다면 본인이 알고 있는 것의 상당 부분을 작품 속에서 생략하더라도 독자는 그 생략된 부분이 마치 명백하게 진술된 것처럼 강렬하게 읽게 되는 거라고 한다.

p.139

궁여지책으로 음악도 듣고 운동도 해 보고 책도 읽어 보지만 침울한 기분만 고조될 뿐이었다. 눈은 점점 더 많이 쏟아졌고, 고요한 작업실의 시간은 그렇게 덧없이 흘러갔다. 이윽고 나는 기운을 회복하지 못한 채 이부자리로 기어들어 마음 속으로 훌쩍훌쩍 울어대기에 이른다. 얼마나 긴 밤이었는지. 평소 좋아라 하던 차분하게 가라앉은 분위기 따위는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했다.

p.155

침대를 향해 간다. 사람의 마음이 말로 늘어놓다 보면 구원받는 구석이 있듯 새벽의 고독은 침대를 통해 구원받는다고 믿는 사람처럼. 그러나 침대가 우리로부터 구원할 줄 아는 것은 육체의 피로뿐이다. 육체가 편안한 자세를 찾으면 상념은 그 틈을 타 사방을 향해 뻗쳐 나가고 베개는 머리통이 아니라 그 무거운 상념의 무게에 짓눌려 해지는 것이다.

p.175

그러나 인간은 언제나 모든 불안의 배후로부터 용기를 발견했다. 인류의 메커니즘은 얼추 그런 공식으로 설정된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나면 불안이라는 것을 사뭇 다른 태도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불안의 배후에는 용기가 있고, 용기의 배후에는 가능성이 있다.

p.215

최형준, <방랑기> 中

+) 이 책은 저자의 일상과 생활 패턴에 대해, 혹은 비슷한 누군가의 일상 생활일 수도 있는 것에 대해 써내려간 글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마치 일기를 쓰듯 줄곧 솔직한 감정을 풀어낸다.

대부분 관찰하거나 체험한 것들에 대해 구체적이고 끈질기게 묘사하는데, 간혹 그 소재를 독자들의 추천으로 선택하기도 한다.

이 책에 실린 카페에 대한 단상들이 그런 것이다. 커피숍에 관해 쓰고 싶다는 말에 독자들의 커피숍 추전이 이어졌고, 저자는 그 중 몇 곳을 찾아 취재일기를 작성한다.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은 저자는 소소한 것도 끈질기게 관찰하는 힘이 있고, 그것을 문장으로 포착하고자 어떻게든 묘사해내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아마 소설을 쓰기 위해 몇몇 장면들을 구체화하는 게 아닐까 싶다.

저자에게 글을 쓰는 시공간이란 어떤 것일까. 그에게 작업실은 글쓰기를 위한 연습장 같은 곳이다. 그는 꼭 사범님이 잠깐 자리를 비운 도장의 연습생 같다랄까.

착실하고 성실하게 연습하는 순간도 있지만, 가끔은 멍도 때리고, 혼자서 놀기도 하고, 잠도 자고, 청소도 하고, 식사도 하는. 그러면서 글을 써야 하는데 하는 자책감도 느끼는 그런 곳 말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자기만의 작업실을 찾기 위해 꽤 공을 들인다.

거기서의 시간은 저자의 감정을 키우기도 하고 누르기도 한다. 저자는 스스로를 '시종일관 슬퍼하는 사람'이라고 칭하는데, 그 표현에는 사실 낮과 밤이 필요 없다. 낮과 밤이라는 시간은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만들어지고 사라진다.

이 수필집을 읽으면서 저자가 소설쓰기를 꽤 오래도록 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느꼈다. 그렇기에 저자의 소설들을 만나보고 싶기도 하다. 꾸준히 관찰해온 것들과 묘사해낸 것들을 어떻게 담아냈을지 궁금하다.

이 책에는 글과 몇 장의 흑백 사진이 같이 담겨 있다. 사진에 대한 저자의 애정이 묻어나는 것 같다. 작업실을 만들어 글을 쓰는 사람의 일상을 들여다본 것 같은 느낌의 책이었다.

* 이 서평은 해당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것입니다. 평소와 다름없이 읽고 제 생각을 기록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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