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돌아갈 날짜를 세어보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152
이진명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11월
평점 :
품절


쉰 냄새

 

 

쉰 냄새는

지나친 냄새

모든 익은 것들이 이상해질 때는

쉰 냄새가 난다

분명 알맞게 익어서

처음에는 향기로웠을 그것이 쉬는 데는

수십 년 만의 이상 기온

섭씨 삼십팔, 구 도의 장마철 찌는 더위 한낮으로 금방이다

알맞게 익었던 그것이 향기로웠던 그것이

한낮 잠깐 사이

쉰다는 것은 슬픈 일

이상 기온뿐이 아닌 이상 정황 이상 심리 속에서일지라도

쉽게 쉰 냄새 피우지 않으려면

무엇을 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알맞게 잘 익은 다음에도

소금을 더

물기를 아주 싹

쉰 냄새는

지나친 냄새

모든 익은 것들이 익은 그 다음에도

어떻게 지나치지 말아야 할 것인지를 생각한다면

이상 기온도 탓은 탕시지만

그보다 먼저 스스로

무엇을 속에 계속 넣고 있지 말고 비우기를

자리를 고집하지 말고 구멍 숭숭한 허한 곳으로 나가 앉기를

 

이진명, 『집에 돌아갈 날짜를 세어보다』中

 

 

+) 이 시집에는 공간이 중요하다.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화자가 머무를 수 있는 심리적인 공간이 존재한다. 그것이 동굴이든, 집이든, 길이든 화자에게 그 공간은 도착지가 된다. 편안히 쉴 수 있는 안정된 공간. 화자는 그것을 소망하는데 늘 거기까지 가는 주변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하나 하나 세밀하게 살펴보는데, 그 과정은 화자 내면의 길찾기가 된다.

 

화자는 길을 잃어버린 존재가 아니다. 출발지도 있으며 목적지도 있고, 도착지도 알고 있다. 그에게는 그곳에 도착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거기까지 자신이 어떻게 견뎌내는가가 더 의미있다. 물론 여담이다 싶을 정도로 잡담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짧은 순간의 장면을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도록 긴 시간의 과정을 잡아내는 화자의 시선 때문이다. 그에게 과정은 전부가 된다.

 

이 시집을 읽으면서 시인의 다양한 화법이 신기했는데. 한 사람이 쓴 시집답지 않게 꽤 다양한 필법이 돋보였다. 다른 시집을 한번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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