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붕거리는 추억의 한때 문학과지성 시인선 108
장석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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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 시집을 읽는 오후

 

 

하루종일

가는 빗발들이 날개 달고 떠다닌다.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막 중환자실을 나서는 환자 같은 하늘을

철없는 비둘기들이 연한 부리로 무심코 쪼고 있다.

절망한 것도 아니고

공연히 헛것에 홀린 것도 아니다.

 

세상에 딱 한 번 새로 오는 봄이

길 잘못 든 사람처럼

방범대원 없는 주택가 빈 골목길을 서성거린다.

 

지금은 죽은 자에 대한 기억들로 심란해지는 때,

모든 완강한 죽음과 재의 차가운 시간을 딛고

무청에서 샛노란 움이 터오기 시작하는 때!

 

오후는 빠른 채무자의 발걸음으로 지나가버린다.

죽은 기형도의 시집을 덮는다.

 

 

장석주, 『붕붕거리는 추억의 한때』中

 

 

+) 이 시집에서 드러나는 '죽음'은 괴롭거나, 아프거나, 슬픈 것처럼 감정이 격화된 것이 아니다. 뭐랄까. 시인에게 죽음은 예정된 선로에서 만나는 일부분이랄까. 외롭게 걷다가 만나게 되는, 그리 반갑지 않은, 그러니까 어색한 벗 같다. 그것은 어둠과 외로움 속에서 발현하는데, 잊고 있다가 삶 위에서 순간순간 마주치게 된다.

 

시인에게 '비'는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서 소통의 역할을 한다. 비를 통해 죽은 자에게 접할 수 있다. 사는 것 자체가 상실과 절망을 동반한 일이지만 무엇보다 외로움 끝의 두려움이 그를 가장 고통스럽게 만든다. 그때의 비는 위로의 손이 되어주기도 한다. 어쩌면 삶과 죽음을 같이 이끌고 가는 것처럼 비 역시 그의 삶을 무조건 받아주는 존재가 아닐까 싶다.

 

희망을 간직하고 살지만 시인이 세상 속에 있는 한, 그것을 표면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고 세상을 버릴 수도 없다. 그가 느끼는 세상에 대한 담담한 시선은 마치 일흔이 다 된 할아버지의 관조적인 시선이랄까. 그렇게 다가왔다.

 

시집은 전체적으로 차분한 분위기였는데. 감정이 격렬하게 일지 않아도 이렇게 무게감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은 놀라웠다. 그러나 주어진 소재가 한전된 느낌이 드는 것은 색깔이 너무 비슷한 시편들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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