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외자들 랜덤 시선 11
여태천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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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상대하는 일
 

바람이 분다 아스팔트 위에 하얗게 눈칠을 하고 바람은 조금씩 또 다른 바람에게 자신을 숨긴다 파랗거나 노랗거나, 바람의 색은 무수하다 상계(上溪)에서 하계(下溪)로 서로를 지우거나 섞이면서 물은 흐르고, 버스는 하루 종일 같은 곳을 스쳐 지나간다

바람은 지나온 정류소와 이정표를 아무렇지도 않게 옮긴다 바람 속에는 어제의 바람이 있고, 당신의 눈을 아프게 하는 먼지가 있고, 버스 속에는 바람 든 무처럼 먼지를 묻히고 내가 맥없이 앉아 있다 사람들은 버스 안에서 아무렇게나 어울린다

버스를 막 올라탄 소녀의 귓가에 바람은 묻어다닌다 소녀의 저 환한 꽃다발 속에 바람의 씨앗이 있다 바람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세상을 쓰다듬는 법을 알고 있다 차창에 남아 있는 바람의 문신들이 떠나는 이의 뒤숭숭한 마음을 전해준다 졸지 말라고

바람을 피하는 건 무모한 일이다 틈새로 불어온 녹색 바람에 놀라 벌떡 일어선 머리를 보니 당신도 바람이 들었다 얌전히 바람의 세상을 빠져나갈 수 있다면, 하고 내뱉는 당신의 입에도 소리를 내며 바람은 분다 바람이 눈비를 몰고 월릉교를 지나면 새로운 바람의 지도가 만들어질 것이다



여태천, 『국외자들』中

 

+) 시인에게 "불확실"하고 "불명확"한 것들은 "생의 기록"으로 남는다. 이 시집에는 유달리 '말', '소리', '노래', '읽다', '편지' 등의 소재가 많이 쓰였는데, 그것은 "불안"이나 "근심"을 느끼는 현대인의 내면심리를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의사소통의 행위로서 '말'이나 '글'은 존재와 존재 사이에서 매개의 기능을 한다. 각각의 존재들 간에 발생하는 생의 흔적들을 "이야기"하거나 "기록"한다. 그것은 소외받는 것들에 대해 마지막 기회를 주는 것이며, 잊혀져가는 기억에게 간직하고 싶은 장면들을 선물하는 것이다.

"바람"은 "문"과 마찬가지로 "안과 바깥(밖)"을 연결해주는 선로에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우선 "문"은 정적인 존재로서 안과 밖 사이에 놓여서, 주체의 위치에 따라 다른 관점을 제시할 수 있다. "바람"은 안과 밖 사이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니나, 어느 한 곳에 정착하는 존재가 아닌만큼 동적인 존재로서 안과 밖 사이를 오고간다.

사실과 사실 사이, 명확한 것들과 불명확한 것들 사이, 추상적인 것들과 구체저긴 것들 사이에 "문"과 "바람"이 있다. 그렇다면 좀 더 깊이있게 시를 파고들었을 때, 그것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시집에서는 표층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뚜렷하지 않다. 그것이 시인의 장점일수도 있겠지만, 어쩐지 말하고자 하는 것 앞에서 주춤거리다 마는 기분이 자꾸 든다. 상징이 많은 것도 아니고, 난해한 용어가 많은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의 시를 읽는 것은 만만치 않다. 왜일까.

그것은 여태천의 시가 개인의 경험적인 부분을 무리하여 사회 속으로 끌어내려 하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기에 선명한 주제를 발견하기 보다 보여주기와 들려주기에 몰입한 것이 아닐까 싶다. 흔들리는 생의 거리에서 "중심"을 찾기란 어려운 법이다. 안과 밖의 경계에 선 화자는 주변과 중심의 경계에서도 적절한 대응법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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