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도둑 가족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6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장선정 옮김 / 비채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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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백번 양보해서 친절함이라 한대도 거기에 책임감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이 남자의 성격인 것이다.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그런 순간의 연속이 그의 인생이었다. 다시 말해 어제를 반성하는 오늘도, 내일을 전망하는 오늘도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이 즐거우면 그만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어린아이 같은 것이다.

p.30

"...... 고마워. ...... 이제 안 아파 ...... 괜찮아."

노부요가 말했지만 린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노부요의 상처를 계속해서 어루만져주었다.

린은 분명 자신의 화상을 만지는 것이다. 그 상처는 아직 아프고 아물지 않은 것이다.

그 대신 나의 상처를 어루만진다.

p.152

손에 쥔 젤리봉이 차가웠다. 쇼타는 린이 뒤따라오는 기척을 느꼈다. "동생한테는 시키지 마라." 할아버지의 한 마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쇼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가슴 깊은 곳에서 몇 번이고 씁쓸한 무언가가가 올라왔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p.162

한참 동안 버스를 뒤쫓던 오사무의 의지는 신호를 세 개 지났을 무렵 말끔히 사그라들었다. 그때까지 기다린 뒤 쇼타는 드디어 창밖을 돌아보았다. 등 뒤로 눈이 남아 있는 포장도로의 가로수가 흘러갔다.

"...... 아빠 ......"

쇼타는 입속으로, 처음으로 그렇게 불러보았다.

버스를 뒤쫓던 오사무는 멈춰서서 눈물을 흘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이처럼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자신이 잃어버린 것의 거대함을 깨닫고 목 놓아 울었다. 오사무는 이제 어디에도 갈 곳이 없었다. 누구도 그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p.295

고레에다 히로카즈, <좀도둑 가족> 中

+) 이 책은 영화 [어느 가족]을 소설화한 작품이다. 아직 영화를 보지 못한 상태에서 소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먼저 읽어보았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각자 나름의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그 상처는 내면에 깊이 간직해둔 것으로 '가족'이란 이름 아래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언급한 적은 없다.

하지만 그들이 가족으로 모여 살게 되면서 각자 자기 안의 상처를 들여다볼 일들이 생긴다. 자신도 모르게 아파하다가 쓰다듬다가 다독인다. 책임감 없이 살아온 오사무는 가족의 아빠 역할을 맡게 되면서 묵직한 책임감을 배워간다. 나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을 생각해야 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전남편의 폭력에 시달려온 노부요는 유리와 함께 하게 되면서 진짜 엄마처럼 모성애가 싹튼다. 아이의 상처를 마음 아파하지만 그것은 곧 본인의 상처고, 스스로를 지키지 못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아이를 지키겠다는 다짐을 한다.

물건을 훔치는 것을 일로 알고 살아가던 쇼타는 가게 할아버지의 조언에 큰 충격을 받고 이유를 알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것이 쇼타가 성장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아키는 하쓰에 할머니의 손을 잡고 가족이 되었다. 하지만 생판 남과는 다른, 조금은 불편한 가족이었다는 걸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알게 된다. 그 불편함은 아키가 자신의 진짜 가족에게 느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와 비슷한 불편함을 앞에 두고 아키와 하쓰에 할머니는 다른 선택을 했다. 그걸 알게 되면서 아키도 다른 선택을 시도하지는 않을까.

이 소설은 가족이 아닌 사람들이 같이 살면서 가족의 의미가 무엇인지 되새기게 해주는 작품이다. 각자 상처를 간직한 사람들이 모여 작지만 따뜻한 위안이 되어주는 순간이 그들에게는 가족의 품처럼 다가오지 않았을까 싶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 꽤 인상적이었는데 영화에서 어떻게 그것을 담고 있는지 궁금하다. 오사무와 쇼타의 찡한 사랑이 눈 내리는 겨울처럼 아름답지만 시리다. 잔잔한 울림을 주는 소설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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