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차와 히치하이커
윤고은 지음 / 한겨레출판 / 201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처음에는 단지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 때문에 이 달력을 사는 사람들이 있는 게 아닐까 싶었는데 그게 전부는 아니고 어떤 관성의 법칙도 작용하는 것 같다. 장옥정 여사의 말처럼 매일 달력을 한 장씩 뜯어야만 정말 하루가 넘어갈 것 같은, 그런 것 말이다. 어떤 시간이 두렵다면 미리 뭉텅이로 며칠을 뜯어내버릴 수도 있다. 그렇다고 시간이 단 하루라도 건너뛰는 경우는 없지만, 심리적인 효과는 좀 있는 것 같다.

24%

모든 것이 복제된 시대, 내 경험도 네 경험도 뒤섞여 출처가 어디였는지조차 불분명한 시대, 이 시대에 고유한 것이 존재할까. 이 시대에 창의성이란 건 결국 절도 행위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 아닐까.

30% [전설적인 존재]

누구나 책상 하나의 무게는 다 짊어지고 걸어가는 게 아닐까. 오늘 내가 뭔가에 짓눌린 듯한 기분을 느끼는 것도 결국은 내게 할당된 양이니 감당해야 한다고 말이죠. 빼면 다시 채우고 빼면 다시 채우기를 반복하는 저 늙은 선생도 있는데, 나라고 여기서 물러날쏘냐 싶었던 겁니다. 누구든 인생이 몇 조각으로 큼직하게 부서지는 순간이 있지 않을까요. 통으로 붙어 있는 인생은 없다. 그건 어머니가 늘 하던 말이었습니다.

48% [책상]

이 끝에서 시작해서 저 끝까지 한 줄 공사를 끝마치면, 다시 이 끝으로 돌아와서 가장 덜 새로운 공간들을 또 하나씩 건드리기 시작하는 거죠. 마치 새롭지 않으면 멈춰 있는 거고, 멈추어 있으면 뒤떠어지는 것처럼, 조급증에 걸린 사람들처럼요. 늘 새롭기 위해 애쓰지만, 이상하게도 그 새로움은 또 획일적이어서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고요.

57% [다옥정 7번지]

캥거루가 원래 '나도 모른다'는 뜻의 원주민 언어였다는 사실 말이다. 그건 늘 나를 따라다녔던 물음에 대한 답이기도 했다. 한 사람이 짊어질 수 있는 최소한의 무게, 그 마지막 무게라는 건 어쩌면 저울로 잴 수 있는 게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83% [늙은 차와 히치하이커]

윤고은, <늙은 차와 히치하이커> 中

+) 이 소설집 속의 단편들은 하나같이 일관된 무게를 갖고 있다. 그것은 저자가 풍기는 문장의 느낌이랄까, 문장의 무게감이랄까 하는 것을 말한다. 저울 위에 올려 놓으면 비슷할 것 같은 무게감. 묵직해서 우울하다는 말이 아니다. 한결같다고 해야 할까?

대체로 단문보다는 장문에 비문이 더 많은 법이고, 긴 문장이 글의 맥락을 끊게 할 때가 더 많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집에는 장문들이 좀 있는 편이었는데, 어색하거나 하지 않고 매끈하게 잘 읽힌다. 이런 점도 소설을 끌어가는 힘이 되는구나 싶어서 작가가 성실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소설들을 살펴보면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지만 전혀 새롭지 않은 현대인의 면모를 볼 수 있다. 새롭다고 생각하지만 거기서 거기인 삶. 또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이 어쩌면 사실이 아닐 수도 있으니 한번쯤은 의심해봐야 한다는 충고. 너무나 명확하게 보이는 시각적인 자료들도 우리의 착각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사람들이 각자 지닌 삶의 무게를 감당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무게가 무엇인지 찾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그 삶의 무게는 생존 배낭 하나에 들어갈 그 무엇의 무게와 같을 수도 있다. 혹은 생존 배낭 하나에서 꺼내어 버릴 그 무엇의 무게와 같을 수도 있다. 우리는 그것을 등에 매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삶의 가치와 무게의 양면성을 생각하게 한 소설집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