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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몸이 세계라면 

김승섭 지음 

동아시아 


 깔끔한 문체에, 따스한 시선이 느껴지고, 학자로서의 정신이 느껴지는 옹골찬 책이었다. 어쩌다 처음 접하게 되었는 지는 모르겠지만, 첫 번째 장의 제목 ('여성의 몸이 사라진 과학')을 보고 구매를 결정했다. 제목만 봐서는 어떤 내용이 전개될 지 전혀 알 수가 없었지만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저자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으므로- 처음 몇 개의 장 제목을 보고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책을 읽는 내내 너무나 즐거웠고, 간혹은 울 뻔했다. 머릿말에서도 몇몇 구절이 너무나 감동적이었다.


"이 책은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켜온 학자의 그 보이지 않는 노력에 빚지고 있습니다."

"어떤 주제를 다루더라도 그 논의가 왜, 지금, 여기 필요한 지에 대해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글을 쓰고자 했습니다."

"연구실에서 함께 공부하는 대학원생들에게 감사하다는 말 전합니다."

"전력을 다해 공부하는 학생들이 있어, 저도 긴장을 놓지 않고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매일같이 만나는 그들에게 더 나은 모습을 보이고 싶다는 욕심이 제게는 계속 공부할 수 있는 큰 원동력이었습니다."


 이것은 정말 학자의 교과서와 같은 표현이다. 이런 문장은 본인의 반듯한 성품 없이는 나올 수 없는 표현이라 생각했다. 진짜 학자, 가짜 학자를 가르는 것이 정당한 일은 아닐지라도, 학자다운 사람이란 이런거구나, 정화되는 기분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기분을, 어쩌면 많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학자란 일상생활에 잘 등장하지 않으니까. 그렇지만 이미 10년 넘게 대학에서 학생 신분으로 있는 학생 입장에서, 학자라 자신하는 사람들을 보며 지내왔으므로 학자다움에 집중하게 될 수 밖에 없다. 이런 사람이 쓴 글은 단순히 지식이 되었든, 지식 외에 다른 부분이 되었든 배울 점이 많을 수밖에 없다. 학계에는 정말로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들이 많아서 종종 혼란에 빠진다.


 이 책에서 다루는 꼭지들은 지금껏 살면서 어렴풋이 생각해보기만 했거나, 혹은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담론들이었다.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의 건강. 계급 불평등과 재화의 불평등이 초래하는 건강 불평등. 특히 대부분의 주제에 관해서는 한국에서 지낼 때는 생각해본 적이 거의 없었던 것들이었다. 아플 때는 병원에 갔고, 아프면 집에서 쉴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에 오고 나서는 병원에 가기도 망설여지고, 보험이 될 지 안될지도 모르겠고, 일단은 있는 약을 먹고 버텨보게 되었다. 소외되는 계층 중 하나가 '외국인' 이라는 것을 고려했을 때, 이것은 소외계층 튜토리얼같은 느낌이다. (일반적인 '외국인'이라기 보다는 저소득 계층의 외국인 - 언어 장벽이 있고 금전적으로 풍족하지 않으며 종종 신분 문제까지 겹치기도 하는 '외국인 노동자'가 좀 더 '소외되는 계층으로서의 외국인'에 가까울 테니.) 내가 미국에 나오지 않았으면, "주어진 것"으로 생각했던 나와 관련한 모든 조건들이 송두리째 변화하는 경험을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차별을 인지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만약은 없다" (남궁인 저) 에서 외국이 노동자가 응급실에 실려오던 에피소드에서도 비슷한 생각을 많이 했다.)


"이러한 제도적 차별을 인지하고 질문을 던지는 일은 간단치 않습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이 태어나고 성장한 조건을 주어진, 바꿀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제도가 사람을 모욕할 때" 그것을 모욕이라고 인지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태어난 장소에 따라 삶을 시작하는 신체적 조건과 사망률이 달라진다는 사실은 명백한 제도적 차별입니다. 우리가 쉽게 보이지 않는 사회적 폭력에 촉각을 세우고 질문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좋아했던 부분은, 군데군데 저자의 통찰력 있는 질문과 그에 대한 고민을 공유해주었던 부분들이다. 이 책은 저자가 머릿말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저자의 강의를 모은 자료이다. 군데군데 녹아있는 저자의 통찰은 그 수업이 얼마나 알찬 수업이었는가를 간접적으로 알려준다. 분명히 대학원 수업이었거나, 학부생들의 교양 혹은 전공 선택 과목이었을 텐데, 교과서가 없는 수업이 이렇게 까지 알차게 구성되기 쉽지 않다. 바람직한 질문을 하고 답을 찾는 과정을 오롯이 보여준다.


"그럼, 우리는 이 역사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제게는 오랫동안 그 질문이 큰 숙제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시를 만났습니다. 1963년 김수영이 발표한 <거대한 뿌리>의 세 번째 연입니다. ... 제가 이 시를 좋아하는 이유는 승리한 강자의 시간만 역사일 수 없다고, 지배받고 비참하게 통과한 시간도 함께 역사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더러운 진창"인 역사에 뿌리내린 사람만이 걸을 수 있는 길이 있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역사 속에 거대한 뿌리를 박고 그 위에 서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 역사를 미화하지도 폄하하지도 않으며 그 뿌리를 직시할 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과 함께 우리 길을 열 수 있으리라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600년 전 중세 유럽에서 유행하던 흑사병에 대해 왜 공부할까요? ... 앞으로도 원인을 파악할 수 없는, 설사 원인을 알더라도 당장은 치료법을 가지고 있지 못한 치명적인 전염병이 계속해서 등장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우리는 그 무지의 공포 속에서 계속해서 선택을 해야 할 겁니다. 그 때 흑사병과 제 2의 흑사병이라고 불리며 등장했던 수많은 전염병 유행의 경험을 기억하며 우리가 조금 더 윤리적이고 과학적인 대응을 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앞으로도, 실은, 내가 이런 문제들에 대해 아주 자주 생각하게 될 지는 미지수다. 아마도 높은 확률로 나는 나의 인생을 열심히 살아가고 이런 문제들은 부차적인 문제들로 치부 되겠지만, 내 인생에서 이런 것들을 만난 작은 변곡점 하나하나가 모여 나의 사고 체계에 변화를 주고, 더 성숙한 사고를 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나도 계속해서 공부하고 고민 해보고 싶다.


"하지만 부조리한 사회로 상처받은 사람들의 고통을 과학의 언어로 세상에 내놓는 것은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계속해보겠습니다."


 절치부심하여 계속 하고자 하는 학자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구절이었고, 내가 계속해서 김승섭교수님의 연구를 응원하고 싶은 이유이다.


 박사 과정을 공부하는 학생 입장에서, 또 박사 학위를 받고 나서 맹목적으로 학문의 세계에 머물기 보다는 세상과 소통하는 박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학자의 입장에서 다음의 내용이 나의 심금을 울렸다.


"박사과정 학생 때, 학위를 받고 나면 어떤 주제를 연구할 지 미국인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어떤 친구는 HIV 감염을 다루는 전문가가 되겠다고, 또 다른 친구는 인종차별과 건강에 대해 계속 연구해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제 차례가 되었을 때, 한참을 머뭇거렸습니다. 제게 그 질문은 '당신은 어떤 연구자가 되고 싶은가?'라고 묻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망설임 끝에 "한국에서 사회적 약자의 건강을 연구하는 사람의 수는 적고, 필요한 연구는 너무나 많다. 이곳에서 배운 방법론으로 한국사회의 절박하고 중요한 문제를 연구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라고 답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부분에서는 깊이 동의했다.


"한국어로 연구 논문을 출판하는 것은 오늘날 대학 연구업적 평가에서 가장 낮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한국어가 모국어인 나라에서 한국어로 쓰인 논문이 가장 낮은 평가를 받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어 학술지는 영어학술지라는 '메이저리그'에 밀린 '마이너리그'가 됩니다. ... 그러나 오늘날 대다수의 학자는 한국 사회의 문제를 다루는 연구까지도 해외 학술지에 발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 결과를 영어로 작상해 발표하고 외국 학자들이 그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권장할 만한 일이지요. 하지만 그 내용이 한국 사회에서 공유되지 않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읽을 수 없게 되고, 그래서 검토하고 논쟁하고 또 활용할 수 없다면 그것은 바람직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연구결과를 영어와 한국어로 모두 공유할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 두 가지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먼저 영어로 출판하지만 원할 경우 부록으로 한국어판을 함께 출판해주는 <<한국역학회지>>에 논문을 출판했습니다. 한국어판으로 논문 심사를 받고 출판이 확정된 이후, 영어 초벌번역을 학술지에서 도와주었지만, 저희 연구팀은 모든 영어 문장을 수정해야 했습니다.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지만, 연구 실적은 한 편으로만 계산됩니다. 또 하나는 트랜스젠더 건강 연구를 진행하며 배우고 고민했던 내용을 묶어, 연구실에서 함께 공부하는 학생들과 <오롯한 당신>이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판한 것입니다. 기존의 출판 논문을 모은 게 아니라 글을 새로 써서 책을 출판하는 작업이었기에 논문을 쓰는 일보다 몇 배의 노력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단행본 작업은 대학 순위 평가에 항목조차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도 학부 시절부터 깊이 고민하던 일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영어로 논문을 내면서 낭비되는 자원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 점이다. 가장 큰 손해는 (나는 공학 계열을 공부하고 있어 관련 분야의 사정만 어설프게 알고 있지만) 우리나라 국민의 세금으로 지원한 연구 결과를 우리나라 국민들이 자유롭게 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물론 저널 측에서 논문을 유료 공개를 주로 하는 것이 제 1의 이유이겠으나 -그래서 또 open access 관련한 담론이 나오고 있으나- 논문이 무료 공개된다고 해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논문을 읽는 데에 크게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학교에서 배우는 영어로 문장 단위의 해석은 어렵지 않겠으나, 전공 지식이 난무하는 논문을 통째로 읽는 것은 너무나도 힘들다. (전공자인 대학원생도 처음에는 영어 논문 읽기에 상당한 어려움을 느낀다. 그러나 국문으로 쓰인 논문을 읽으면 전혀 다른 분야의 논문이라도 어느 정도 내용 파악이 된다.) 저자 입장에서도 논문을 써보면 "의미가 통하는 문장을 쓰는 것" 외에도 "영어 식의 논리 전개"법을 배우는 데 상당한 시간이 든다. 전공자인 대학원생 입장에서도 그런 과학 외의 것들을 익히는 데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고 어쨌든 간에 어른이 되어 언어적인 것을 배우다 보니 영원히 원어민들처럼 글을 쓰는 것은 불가능하겠지 라는 식의 좌절감이 시시각각으로 몰려온다.


 가장 시급한 것은 한국 사회나 문화를 연구하는 분야에서 출판되는 논문들이 한국어 사용자들이 읽기 편안한 환경을 조성해주는 것이 가장 먼저이겠다. 그러나 그 이후로 차차 모든 분야 학문 출판이 한국어로 더 많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앞으로 내가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서 기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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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어디서 살 것인가 - 우리가 살고 싶은 곳의 기준을 바꾸다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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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건축에 대한 좋은 입문서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특정 분야의 전문가에게서 그의 견해를 듣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으니까 읽어보고 문제의식을 갖는 데에는 크게 도움이 된다. 그러나 논리가 치밀하지 못한 구석이 왕왕 있어서 조금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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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살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의식주의 한 구성요소로서 인간 생에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내가 어디서 살 것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미국에 와서 집을 구할 때. 그 전에는 부모님과 함께 중학교때까지 살았고, 고등학교 부터 유학나오기 전까지는 기숙사에서 살았기 때문에 크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대학 시절 한 가지 고려했던 것은 어떤 기숙사동이 기숙사비가 싸고 비싼가였다. 그러나 미국에 와서는 그 생각이 크게 달라졌는데, 어떤 집에 사는지에 따라 생활 패턴과 심리적인 안정 등이 달라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기준 여러 개를 늘어놓고 집을 고르기 시작했던 기억이 났다.


이런것들을 생각하며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의외로 거주 공간 보다는 건축 전부를 아우르는 내용이였다. 내가 가장 주의깊게 보았던 것은 학교 건물 이야기였는데, 실제로 공립학교들은 모두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감옥 건물처럼 생겼다. 이 책을 읽으며 같이 읽었던 책이 '파놉티콘'이어서 더더욱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 외에도 주변에 있는 소소한 건축물과 건축물의 구성요소 (단상, 계단, 광장 등) 을 보며 깨닫는 바가 많았다. 그 중에 하나가, 로마와 몽골 제국의 건축과 지속 햇수를 논하는 부분이었다.


"통일된 디자인의 대형 벽돌 건축물들은 로마의 상징이 되어 어느 곳에서나 로마제국의 권력을 느끼게 하였다."


건축이 로마제국의 위력을 광고하는 좋은 매개체가 되었고, 문화를 전파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그에 반해 몽골 제국은 빠른 속도로 모든 곳을 점령하기는 했으나,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으므로 원주민들에게 전쟁 이상의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을 것이다.


또한 고대 건축물에 대한 저자의 견해를 듣는 것도 흥미로웠다.


"여기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점은 과시를 하려면 쓸데없는 데 돈을 써야 한다는 점이다. ... 마찬가지로 피라미드 같은 건축도 쓸모가 없어서 과시가 되는 것이다. 죽은 사람을 위한 돌무더기를 만드는 데 20년 넘게 국가의 모든 재원을 낭비했기 때문에 과시가 되는 것이다. 만약에 피라미드가 꼭 필요한 건축물이었다면 과시가 되지 않는다. 서두에서 말했듯이 고인돌은 특별한 기능이 없다. 그래서 고인돌이 과시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시형 건축물 이야기를 하면서 저자가 제안한 '위치에너지' 개념도 흥미로웠다. 어쩌면 좀 추상적일 수도 있는 개념을 수치로 나타내려는 저자의 기회가 엿보이는 시도였다.

그 외에도 건축가의 시점에서 본 도시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저자가 인용해온 부분은 사실 경제학자의 주장이었지만)


"하지만 하버드대학 경제학과의 에드워드 글레이지 교수는 인류 최고의 발명품은 '도시'라고 말한다. 다양한 사람이 도시에 모여들면서 생각의 교류가 많아졌고 그로 인한 시너지 효과로 혁신적인 발명과 발전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덕분에 건축가가 세상을 보는 방법을 엿볼 수 있어 재미있었고, 나와는 매우 다른 접근이라 신선한 느낌도 들었다. 그리고 여러 가지를 건축가의 입장에서 이해하려는 개개의 시도들이 흥미로웠고, 글 쓴이의 성향을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했다.


아쉬운 점이 두가지 있었는데, 첫번째로는, 전체적인 내용이 '건축 업계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가설/사실들'을 기반으로 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참고문헌이 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이 책이 학술서라기 보다는 대중서라 그래서 아마도 참고문헌을 굳이 더 많이 넣지 않은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다른 한가지는 가끔씩 논리 전개가 치밀하지 않은 구석이 보이는게 아쉬웠다. 경수필처럼 완전히 가벼운 신변잡기적 주제를 다루는 것도 아니면서 치밀한 전개가 돋보이는 책도 아니라서 조금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느낌이다. 친구들과 가볍게 토론한다고 생각하고 읽으면 괜찮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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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 2019-01-17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쨌든 특정 분야의 전문가에게서 그 스스로의 견해를 듣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으니까, 읽어보고 문제의식을 갖는 데에는 크게 도움이 된다.
 
[전자책] 네 이웃의 식탁 오늘의 젊은 작가 19
구병모 지음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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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현실적이라 몰입감이 엄청나다. 실제로 어디에선가 일어나고 있을 것만 같은 이야기인데, 자세히 읽으며 생각해보면 작가는 냉소를 날리고 있고 치밀하게 짜여진 이야기다. 공동체라는 환상, 출산율을 높이려는 일차원적인 제도, 현실적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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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끔씩 알라딘 US에 들어가 책을 구경하고 마음에 드는 책이 있으면 도토리를 모으는 다람쥐마냥 장바구니에 추가해둔다. 이 책도 장바구니 속에 약 반 년 가량 머물러있다가 열흘 쯤 전에 실제로 구매를 하였다. 책 리뷰를 쓰는 지금까지도 제목이 "내 이웃의 식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네 이웃의 식탁"이었고, 아무리 봐도 이중적인 의미를 가진 제목이다.


반 년동안이나 장바구니 속에 머물러있던 책이라, 처음에 어떤 생각으로 골라서 넣어두었는지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다만 "위저드 베이커리"를 읽었던 기억으로부터 구병모 작가를 어렴풋이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공동체 생활! 정말 꿈같은 개념이다. '공동체 생활'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마치 이웃끼리 상부상조하여 어려운 일은 나누어 들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그렇지만 이 것 만큼이나 이상적이고 실재하기 힘든 개념이 또 있을까.


"누구 엄마, 누구 아빠라고 부르는 거 재미없잖아요.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분명히 밝히고 나누는 걸 선호합니다."

"우리 아이들 모아 놓고 부모들이 돌아가면서 케어해 주는 활동 프로그램 같은 걸 짜 보면 어떤가 하는 얘길 나눴습니다."


이야기는 정말로 서울 근교 어딘가에 존재할 것만 같이 현실적이다.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 서울 근교에 정부가 지었다는 공동주택. 제각각 다른 사정을 가지고 네 가족이 모여든다. (이름을 기억하기가 어려워 두 번째 읽었을 때에야 모든 것이 정리되었다.)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인 효내. 내가 감정이입을 가장 많이 할 수 있었던 인물이다.


"예정일을 잘 계산하여 출산을 앞두고 걸려 있던 모든 외주를 마친 뒤 새로운 일 받기를 일시 중단한 참이었는데 사람 일이란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이라, 전년도에 회사 내부 사정으로 출간이 지연됐던 책이 뒤늦게 후반 작업에 들어간다며 그림 수정 요청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효내의 머릿속에서는 지키지 못한 마감과 반쯤 그리다 만 채로 말라 가는 수채화가 멤돌고 있었다. 일상과의 분리를 꾀할 수 없는 자신의 능력이나 의욕이 엊그제 지어 놓고 잊은 밥처럼 누렇게 떠서 굳어 가는 걸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는 동안에는 그 어떤 선을 긋지도 면을 칠하지도 못했다."


어쩌면 내가 머릿속으로 수십 번 시뮬레이션 해 보던 그, 직업을 가진 여성이 출산을 하고 집에 머물면서도 자신의 일을 놓지 못하는 그 상황이랑 자꾸 겹쳐서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대체적으로 정리를 잘 하는 편이고 모든 것을 깔끔하게 해치우고 싶어하는 편이지만, 자꾸만 본인의 일과 육아 사이에서 무게중심을 못 잡고 너저분하게 지내게 되는 효내를 비난할 수 없었다. 내가 실제 저 상황이 되면 비슷한 꼴로 지내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 내 사정으로 번역을 해 보자면 쓰다 만 논문, 고치다 만 원고, 다듬다 만 figure 정도가 되겠지.


그리고 또 한 명, 요진. 사실상 본인이 너무 잘 나가서 일을 계속 하는 것이 아닌, 남편도 본인도 뾰족한 기술은 없지만 본인이 아르바이트처럼 약국 카운터를 보고 있는 인물. (나는 이런 사람을 보면 허생전을 생각한다. 가난하지만 책읽을 줄밖에 모르는 허생과 그를 먹여살리느라 삯바느질을 끊임없이 해대는 그의 아내.)


"신재강네 SUV가 약간의 접촉 사고로 인해 센터에 들어갔다 하니 그럼 저의 집사람과 카풀로 출근하시라는 이야기를 선뜻 먼저 꺼낸 쪽은 요진의 남편 은오였다. ... 요진으로선 곤경에 빠진 이웃을 위해 10분 먼저 나서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그 10분만큼 은오가 시율이를 빈틈없이 케어한다는 전제하에. 그러나 은오는 오늘도 여지없이 시율이의 양말이며 간식이나 어린이 치약의 위치를 물었고, 그것은 평소 그 물건들에 누가 더 자주 손대는지를 알려 주는 표지였다."

"차라리 요진 자신이 먼저 합승을 제안했더라면 그리 꺼림칙한 기분까지는 들지 않았을지도......를 생각하자, 객관적으로 정말 별것 아닌 일인데도 요진은 자신이 고작 선의를 드러내고 보장받기 ('보상받기'였을까?) 위한 선후 관계에 집착하는 예민함의 결정체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 "너 내가 카드 좀 긁었다고 그러는 거야? 돈 좀 번다고 유세 부리냐고!" 요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돈 좀 번다고...... 그런 푼돈으로 유세나 부릴 수 있을까. 하루벌이로 쪼들리는 생활에서 갑자기 초과한 지출이 결정적인 이유였을까. 아주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하기 어려울까. 그러나 문제의 근본 원인이 그런 다럽고 ('더럽고'의 오타인 듯 함) 치졸한 것으로 규명되어도 좋은 걸까."


사실 돈을 버는 것은 남자가 하나 여자가 하나 당사자들만 괜찮다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싫어해 마지 않는 상황은, 돈도 여자가 버는데 아이 케어도 여자가 하고 남자는 하는 척만 하는 상황이다. 은오는 밖에서는 가정적인 남편인 것처럼 굴고 (게다가 부인이 돈을 번다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먼저 이야기 한 것도 은오였다) 가정 내에서는 시율(딸)의 옷가지나 간식 등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카풀하는 문제도 일단 다른 사람들에게 먼저 결정해서 이야기해둔 후 요진에게는 통보하듯이 이야기하고, 시내 키즈카페에 가는 비용을 '한 턱 쏘기'로 결정한 것도 혼자 한 후 요진에게 말도 특별히 하지 않는다. 그래서 요진이 서운해하자 유세부린다고 화를 내는 것은 다시 은오다.


그런 요진-은오간 요상한 권력관계를 떠나서도 몇 가지 더 공감되는 상황들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요진이 가장 비중있게 다루어지는 인물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무언가를 씻어서 찢거나 토막 내고 물에 끓이는 행위 자체가 얼마나 시간과 비용과...... 무엇보다도 건강하고 넉넉한 육체와 정신을 필요로 하는 일인지."

"웃음, 이상하지 않고 자연스러웠겠지. 표정에는 애매모호한 고까움 대신 세심한 구석까지 신경 써 준 홍단희를 향한 진심 어린 고마움이 담겨 있었겠지."

"신재강에게 다른 궁꿍이가 있어서라고 생각지는 않았으나 공연히 애매한 분위기가 만들어질 건수를 줄 필요는 없었다."

"요진이 불편하고 불쾌하면 곧 그것이 선을 넘는 일이었다. 그러나 요진은 가능한 한 '누가 봐도 이상하며 그럴듯하지 않은' 일에 반응하고 싶었다. 해석의 방식과 범위에 따라 불쾌지수가 널뛰는 일에 낱낱이 발끈함으로써 서로에게 개운치 않은 뒷맛을 초래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구겨진 종잇장 같은 요진의 신경을 쏠아 대는 지점은 따로 있었다. 어른이 셋이나 있는데 왜 시율이는 동생들을 돌보는 역할을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나."


소설이다 보니 등장인물의 사고 과정이나 생각 등이 담담하지만 자세하게 묘사되는데, 소설가의 능력은 정말 놀랍다. 섬세하게 모든 것을 훑지만, 또 무심한 듯 묘사된다. 특히 신재강의 부자연스러운 행동에 고민하는 요진의 모습에서 그 점을 많이 느꼈다.


시율이는 아이들 사이에서도 혼자 여섯 살이라는 이유 만으로 자연스레 다른 어린 아이들을 챙기는 포지션이 된다. 이 일이 단순히 엄마로써 속상한 일일 수도 있는데, 그 외에도 요진은 본인이 가정에서 생활비를 버는 역할을 도맡으면서도 아이 케어도 대부분을 책임지고 있다는 점에서 시율이에게 자신을 투영해 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어렸을 적에 가정 주부였던 우리 엄마가 나더러 '너는 꼭 돈을 벌었으면 좋겠다.' 라는 이야기를 했던 것과 같은 맥락일 것이며, 오늘날 많은 어머니들이 본인들의 딸의 아기들을 돌봐주고 있는 것도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그 외에 교원이나 다희는 내가 공감하기에는 조금 어려운 인물들이었지만, 주변에서 본 것으로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이렇게 어린애를 키우는 엄마가 피지 못하게 주위에 지기 마련인 천 냥 빚을 갚을 방법은,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얼마든지 널려 있었다."

"두 아이를 키운 경험에 비추어, 엄마란 자신이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더라도 죄송합니다와 고맙습니다를 입에 달고 살아야 마땅한 존재였다."

"정말이지 교원은 제 몫으로 주어지고 대부분 스스로 선택했던 모든 일과 그것의 결과들에 이즈음 환멸을 느꼈다. 당연한 줄로 여기고 품을 들였던 매순간의 노동과 의무가 10원어치의 의미도 없다고 선고받기란 자주 있는 일이었으며, 일상에서 여산과 일가친척의 입을 통해 확인 사살 당하기도 여러 번이었다. 그때마다 교원은 스스로마저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면 끝이라는 절박감에 살림과 육아를 더욱 밀도있게 사수하는 데 골몰했고, 그 결과는 누구나 부러워하며 좋아요 버튼을 클릭하는 각종 사진과 짧은 동영상으로 남았었다."

"남편이 신통치 않게 벌어다 주어도 편안한 승차감으로 아이의 척추를 보호하는 영국산 유모차를 시중의 절반가로 구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능력이었다."


교원과 다희는 아무래도 전업 주부들의 모습을 대변한다. 아이를 둘씩 데리고 있으며, 유기농, 집밥 등에 집착한다. 특히 교원은 아이들이 잘못하면 서로 불러다 놓고 사과까지 철저히 시키는 확실한 성격이고, 다희는 어린이집을 운영해봤던 경험으로 공동 육아 프로그램을 맡는다. 사실 굳이 전업 엄마가 되어보지 않더라도 "환멸을 느끼는" 상황이 올 것이라는 것은 쉽게 상상 가능하다. 그래도 그 둘은 공동 주택에서 요구한 "셋째까지 낳는 것"을 본인들은 요진과 효내보다 쉽게 달성할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결국 결론은 파탄이었으나, 개미지옥과 같이 공동 주택에는 또다시 새로운 입주민들이 들어올 것이라는 암시와 함께 이야기는 끝이 난다. 경제적 능력을 가지고 있던 효내와 요진은 결국 각자의 남편과 갈라선다. 다희와 신재강은 크게 다투고 퇴거했다. 우습게도, 끝까지 남아서 셋째 임신에도 성공한 교원은, 수입이 일정치 않은 (오히려 날려먹은) 남편이 폭력을 휘둘러 병원신세를 진 적이 있는 전업 주부이다. 교원도 경제적 능력이 있었으면 남편과 갈라서고 공동주택에서 퇴거했을까?


첫 번째로 다 읽고 나서, 작가가 공동체 생활이 얼마나 덧없는 지 이야기하며 우리나라 정부의 출산정책에 냉소를 날리는 것 (물론 실제로 이런 정책은 내가 아는 한 없었다) 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두 번째로 다 읽고 나서는, 그 외에, 경제적 활동을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여성이 주인공인 이야기에 (아마도 내가 여성이기 때문에) 얼마나 깊이 몰입되어 공감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했다. 나는 여성이기 때문에 세상을 바라볼 때 '디폴트 값'이 여성이다. 그러나 세상은 항상 '그'를 '남성'으로 가정한다. 앞으로 여성 작가의 책을 더 많이 구매하기로 마음먹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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