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끔씩 알라딘 US에 들어가 책을 구경하고 마음에 드는 책이 있으면 도토리를 모으는 다람쥐마냥 장바구니에 추가해둔다. 이 책도 장바구니 속에 약 반 년 가량 머물러있다가 열흘 쯤 전에 실제로 구매를 하였다. 책 리뷰를 쓰는 지금까지도 제목이 "내 이웃의 식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네 이웃의 식탁"이었고, 아무리 봐도 이중적인 의미를 가진 제목이다.
반 년동안이나 장바구니 속에 머물러있던 책이라, 처음에 어떤 생각으로 골라서 넣어두었는지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다만 "위저드 베이커리"를 읽었던 기억으로부터 구병모 작가를 어렴풋이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공동체 생활! 정말 꿈같은 개념이다. '공동체 생활'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마치 이웃끼리 상부상조하여 어려운 일은 나누어 들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그렇지만 이 것 만큼이나 이상적이고 실재하기 힘든 개념이 또 있을까.
"누구 엄마, 누구 아빠라고 부르는 거 재미없잖아요.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분명히 밝히고 나누는 걸 선호합니다."
"우리 아이들 모아 놓고 부모들이 돌아가면서 케어해 주는 활동 프로그램 같은 걸 짜 보면 어떤가 하는 얘길 나눴습니다."
이야기는 정말로 서울 근교 어딘가에 존재할 것만 같이 현실적이다.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 서울 근교에 정부가 지었다는 공동주택. 제각각 다른 사정을 가지고 네 가족이 모여든다. (이름을 기억하기가 어려워 두 번째 읽었을 때에야 모든 것이 정리되었다.)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인 효내. 내가 감정이입을 가장 많이 할 수 있었던 인물이다.
"예정일을 잘 계산하여 출산을 앞두고 걸려 있던 모든 외주를 마친 뒤 새로운 일 받기를 일시 중단한 참이었는데 사람 일이란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이라, 전년도에 회사 내부 사정으로 출간이 지연됐던 책이 뒤늦게 후반 작업에 들어간다며 그림 수정 요청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효내의 머릿속에서는 지키지 못한 마감과 반쯤 그리다 만 채로 말라 가는 수채화가 멤돌고 있었다. 일상과의 분리를 꾀할 수 없는 자신의 능력이나 의욕이 엊그제 지어 놓고 잊은 밥처럼 누렇게 떠서 굳어 가는 걸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는 동안에는 그 어떤 선을 긋지도 면을 칠하지도 못했다."
어쩌면 내가 머릿속으로 수십 번 시뮬레이션 해 보던 그, 직업을 가진 여성이 출산을 하고 집에 머물면서도 자신의 일을 놓지 못하는 그 상황이랑 자꾸 겹쳐서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대체적으로 정리를 잘 하는 편이고 모든 것을 깔끔하게 해치우고 싶어하는 편이지만, 자꾸만 본인의 일과 육아 사이에서 무게중심을 못 잡고 너저분하게 지내게 되는 효내를 비난할 수 없었다. 내가 실제 저 상황이 되면 비슷한 꼴로 지내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 내 사정으로 번역을 해 보자면 쓰다 만 논문, 고치다 만 원고, 다듬다 만 figure 정도가 되겠지.
그리고 또 한 명, 요진. 사실상 본인이 너무 잘 나가서 일을 계속 하는 것이 아닌, 남편도 본인도 뾰족한 기술은 없지만 본인이 아르바이트처럼 약국 카운터를 보고 있는 인물. (나는 이런 사람을 보면 허생전을 생각한다. 가난하지만 책읽을 줄밖에 모르는 허생과 그를 먹여살리느라 삯바느질을 끊임없이 해대는 그의 아내.)
"신재강네 SUV가 약간의 접촉 사고로 인해 센터에 들어갔다 하니 그럼 저의 집사람과 카풀로 출근하시라는 이야기를 선뜻 먼저 꺼낸 쪽은 요진의 남편 은오였다. ... 요진으로선 곤경에 빠진 이웃을 위해 10분 먼저 나서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그 10분만큼 은오가 시율이를 빈틈없이 케어한다는 전제하에. 그러나 은오는 오늘도 여지없이 시율이의 양말이며 간식이나 어린이 치약의 위치를 물었고, 그것은 평소 그 물건들에 누가 더 자주 손대는지를 알려 주는 표지였다."
"차라리 요진 자신이 먼저 합승을 제안했더라면 그리 꺼림칙한 기분까지는 들지 않았을지도......를 생각하자, 객관적으로 정말 별것 아닌 일인데도 요진은 자신이 고작 선의를 드러내고 보장받기 ('보상받기'였을까?) 위한 선후 관계에 집착하는 예민함의 결정체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 "너 내가 카드 좀 긁었다고 그러는 거야? 돈 좀 번다고 유세 부리냐고!" 요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돈 좀 번다고...... 그런 푼돈으로 유세나 부릴 수 있을까. 하루벌이로 쪼들리는 생활에서 갑자기 초과한 지출이 결정적인 이유였을까. 아주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하기 어려울까. 그러나 문제의 근본 원인이 그런 다럽고 ('더럽고'의 오타인 듯 함) 치졸한 것으로 규명되어도 좋은 걸까."
사실 돈을 버는 것은 남자가 하나 여자가 하나 당사자들만 괜찮다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싫어해 마지 않는 상황은, 돈도 여자가 버는데 아이 케어도 여자가 하고 남자는 하는 척만 하는 상황이다. 은오는 밖에서는 가정적인 남편인 것처럼 굴고 (게다가 부인이 돈을 번다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먼저 이야기 한 것도 은오였다) 가정 내에서는 시율(딸)의 옷가지나 간식 등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카풀하는 문제도 일단 다른 사람들에게 먼저 결정해서 이야기해둔 후 요진에게는 통보하듯이 이야기하고, 시내 키즈카페에 가는 비용을 '한 턱 쏘기'로 결정한 것도 혼자 한 후 요진에게 말도 특별히 하지 않는다. 그래서 요진이 서운해하자 유세부린다고 화를 내는 것은 다시 은오다.
그런 요진-은오간 요상한 권력관계를 떠나서도 몇 가지 더 공감되는 상황들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요진이 가장 비중있게 다루어지는 인물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무언가를 씻어서 찢거나 토막 내고 물에 끓이는 행위 자체가 얼마나 시간과 비용과...... 무엇보다도 건강하고 넉넉한 육체와 정신을 필요로 하는 일인지."
"웃음, 이상하지 않고 자연스러웠겠지. 표정에는 애매모호한 고까움 대신 세심한 구석까지 신경 써 준 홍단희를 향한 진심 어린 고마움이 담겨 있었겠지."
"신재강에게 다른 궁꿍이가 있어서라고 생각지는 않았으나 공연히 애매한 분위기가 만들어질 건수를 줄 필요는 없었다."
"요진이 불편하고 불쾌하면 곧 그것이 선을 넘는 일이었다. 그러나 요진은 가능한 한 '누가 봐도 이상하며 그럴듯하지 않은' 일에 반응하고 싶었다. 해석의 방식과 범위에 따라 불쾌지수가 널뛰는 일에 낱낱이 발끈함으로써 서로에게 개운치 않은 뒷맛을 초래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구겨진 종잇장 같은 요진의 신경을 쏠아 대는 지점은 따로 있었다. 어른이 셋이나 있는데 왜 시율이는 동생들을 돌보는 역할을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나."
소설이다 보니 등장인물의 사고 과정이나 생각 등이 담담하지만 자세하게 묘사되는데, 소설가의 능력은 정말 놀랍다. 섬세하게 모든 것을 훑지만, 또 무심한 듯 묘사된다. 특히 신재강의 부자연스러운 행동에 고민하는 요진의 모습에서 그 점을 많이 느꼈다.
시율이는 아이들 사이에서도 혼자 여섯 살이라는 이유 만으로 자연스레 다른 어린 아이들을 챙기는 포지션이 된다. 이 일이 단순히 엄마로써 속상한 일일 수도 있는데, 그 외에도 요진은 본인이 가정에서 생활비를 버는 역할을 도맡으면서도 아이 케어도 대부분을 책임지고 있다는 점에서 시율이에게 자신을 투영해 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어렸을 적에 가정 주부였던 우리 엄마가 나더러 '너는 꼭 돈을 벌었으면 좋겠다.' 라는 이야기를 했던 것과 같은 맥락일 것이며, 오늘날 많은 어머니들이 본인들의 딸의 아기들을 돌봐주고 있는 것도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그 외에 교원이나 다희는 내가 공감하기에는 조금 어려운 인물들이었지만, 주변에서 본 것으로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이렇게 어린애를 키우는 엄마가 피지 못하게 주위에 지기 마련인 천 냥 빚을 갚을 방법은,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얼마든지 널려 있었다."
"두 아이를 키운 경험에 비추어, 엄마란 자신이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더라도 죄송합니다와 고맙습니다를 입에 달고 살아야 마땅한 존재였다."
"정말이지 교원은 제 몫으로 주어지고 대부분 스스로 선택했던 모든 일과 그것의 결과들에 이즈음 환멸을 느꼈다. 당연한 줄로 여기고 품을 들였던 매순간의 노동과 의무가 10원어치의 의미도 없다고 선고받기란 자주 있는 일이었으며, 일상에서 여산과 일가친척의 입을 통해 확인 사살 당하기도 여러 번이었다. 그때마다 교원은 스스로마저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면 끝이라는 절박감에 살림과 육아를 더욱 밀도있게 사수하는 데 골몰했고, 그 결과는 누구나 부러워하며 좋아요 버튼을 클릭하는 각종 사진과 짧은 동영상으로 남았었다."
"남편이 신통치 않게 벌어다 주어도 편안한 승차감으로 아이의 척추를 보호하는 영국산 유모차를 시중의 절반가로 구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능력이었다."
교원과 다희는 아무래도 전업 주부들의 모습을 대변한다. 아이를 둘씩 데리고 있으며, 유기농, 집밥 등에 집착한다. 특히 교원은 아이들이 잘못하면 서로 불러다 놓고 사과까지 철저히 시키는 확실한 성격이고, 다희는 어린이집을 운영해봤던 경험으로 공동 육아 프로그램을 맡는다. 사실 굳이 전업 엄마가 되어보지 않더라도 "환멸을 느끼는" 상황이 올 것이라는 것은 쉽게 상상 가능하다. 그래도 그 둘은 공동 주택에서 요구한 "셋째까지 낳는 것"을 본인들은 요진과 효내보다 쉽게 달성할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결국 결론은 파탄이었으나, 개미지옥과 같이 공동 주택에는 또다시 새로운 입주민들이 들어올 것이라는 암시와 함께 이야기는 끝이 난다. 경제적 능력을 가지고 있던 효내와 요진은 결국 각자의 남편과 갈라선다. 다희와 신재강은 크게 다투고 퇴거했다. 우습게도, 끝까지 남아서 셋째 임신에도 성공한 교원은, 수입이 일정치 않은 (오히려 날려먹은) 남편이 폭력을 휘둘러 병원신세를 진 적이 있는 전업 주부이다. 교원도 경제적 능력이 있었으면 남편과 갈라서고 공동주택에서 퇴거했을까?
첫 번째로 다 읽고 나서, 작가가 공동체 생활이 얼마나 덧없는 지 이야기하며 우리나라 정부의 출산정책에 냉소를 날리는 것 (물론 실제로 이런 정책은 내가 아는 한 없었다) 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두 번째로 다 읽고 나서는, 그 외에, 경제적 활동을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여성이 주인공인 이야기에 (아마도 내가 여성이기 때문에) 얼마나 깊이 몰입되어 공감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했다. 나는 여성이기 때문에 세상을 바라볼 때 '디폴트 값'이 여성이다. 그러나 세상은 항상 '그'를 '남성'으로 가정한다. 앞으로 여성 작가의 책을 더 많이 구매하기로 마음먹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