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의 도시
폴 오스터 지음, 윤희기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6월
평점 :
절판


1987년 뉴욕여자는 도시에 있다. “살고 싶은 마음을 들게 하면서도 그 삶을 빼앗아 가려고 애쓰는 것이 이 도시다.(11)” 폴 오스터의 [폐허의 도시]에 시간과 공간은 특정되어 있지 않다그러나 작가는 미국의 유대인으로서 습관적으로 살아가다가 만나는 낯섦삶의 부조리함을 바라보고 있다그 공간이 익명이기에 우리가 사는 바로 이곳을 바로 대입하기가 오히려 어렵지 않다모든 것이 불확실하고죽는다는 것만은 확실하지만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삶은 현대사회에서 현대인이 겪고 있는 그것이다.


폴 오스터가 그린 마지막 며칠[폐허의 도시]의 원제는 [In The Country of Last Things이다은 성이 완전히 무너져 버린 이후 세계 곳곳에 나타나고 있는 증상이다. 유태인인 주인공 안나 블룸은 도서관에서 만난 라비에게 자신은 어릴 적 이미 하느님을 포기했다고 말한다. 당장의 일도 알 수 없는 도시에서 안나가 가장 바라는 유일한 것은 하루만 더 살게 해달라는 것이다.


안나 블룸, 익명과 운명의 이름

 

[폐허의 도시]에서도 도시는 그저 도시이고 주인공의 거처는 3구역, 5구역, 도서관일 뿐이다. 주인공 안나 블룸의 이름 역시 자주 언급되지 않는다. 소설의 익명성이나 특정하지 않은 명칭들은 소설의 마을이나 도시가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라는 점과 세상에는 도처에 이런 곳이 있다는 점을 동시에 상기시킨다.


[폐허의 도시]에서 폴 오스터는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안나 블룸(Anna Bloom)이라는 이름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블룸은 운명(Doom)과 우울(Gloom) 사이에 핀 꽃 또는 자궁(Womb)과 무덤(Tomb) 사이에 핀 꽃이다. 인간은 탄생과 사망 사이, 죽기 전까지는 우울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견뎌야 하는 존재다. 그리고 이 운명에는 끝도 없다. 끝이 있어도 알 수가 없다. “내 이름이 오토Otto인데, 이 단어가 앞에서 시작하나 뒤에서 시작하나 똑같단 말이지요. 그러니 끝이 없어요. 끝났다 싶으면 다시 시작해도 똑같으니 말입니다. () 안나Anna도 앞에서 시작하나 뒤에서 시작하나 똑같지 않습니까. 그래서 아가씨가 죽음에서 다시 태어난 거랍니다. 안나 양, 그게 바로 운명의 축복입니다.(199)”


안나 블룸의 이름이 암시하는 여자의 운명은 카뮈가 시지프 신화에서 부조리한 영웅으로 제시한 시지프의 운명과도 같다. “부조리한 인간의 대답은 긍정이며 그의 노력에는 끝이 없을 것이다. 개인적인 운명은 있어도 초월적인 운명이란 없다. 혹 있다면 오직 숙명적이기에 경멸해야 할 것으로 판단되는 단 한 가지 운명이 있을 뿐이다. 그 외의 것에 관한 한, 인간은 스스로 자신이 살아가는 날들의 주인이라는 것을 안다.([시지프 신화], 188)”


[폐허의 도시]에서 안나 블룸은 옛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이렇게 말한다. “주변의 모든 것이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면서 매일 새로운 행동을 낳는다. 예전의 그 흔들림 없어 보이던 가정(假定)이나 전제가 한순간에 헛된 것, 무의미한 것이 되어 버린다. 이것이 딜레마다. 한편으로 우리 모두는 환경에 적응하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잘 이용하여 살아남기를 원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그렇게 해서 살아남는다는 것이 한때는 우리를 인간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던 그 모든 것을 다 없애 버려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니 이 얼마나 황당한 모순인가? 당신은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는가? 살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다는 의미다. 많은 사람들이 삶을 포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무리 기를 쓰고 발버둥쳐도 모든 것을 잃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런 점에서 보면 애쓰고 노력하는 일이 허무한 짓거리가 아니겠는가.” 이런 상황 아래 살아가는 안나의 모습에서 우리는 습관적으로 살거나 자살하지 않고, 좌절을 각오한 채 매일을 살아가는 인간인 카뮈의 부조리한 영웅을 발견할 수 있다.

 

약속의 땅을 밟지 못하는 디아스포라

 

폴 오스터는 미국 뉴욕을 떠올리게 하는 작가지만 아버지 쪽이 오스트리아계 유대인이다. 폴 오스터는 [달의 궁전]이나 [고독의 발명]에서 아버지의 부재를 통해 역으로 아버지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유대인의 혈통이라는 사실이 작품에서 중심 주제로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폐허의 도시]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흩어진 유대 민족의 디아스포라를 떠오르게 한다. 고향을 잃고 방황하며, 소속된 공동체 없이 서로가 타인이기만한 현대에는 디아스포라가 유대 민족만의 고유한 현상이 아니라 현대인 모두에게 벌어지는 현상이 된다.


[폐허의 도시]의 안나 블룸은 오빠 윌리엄 블룸을 찾기 위해 도시로 왔다. 신문기자인 윌리엄이 어디 있는지는 알 수 없고, 소설 끝까지 나오지 않는다. 오빠를 찾기 위해 왔지만 오빠를 찾는 일은 중요하지가 않다. 측량사가 되기 위해 왔지만 측량사로 일하는 것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K와도 같다. 안나는 오빠의 생사를 모르는 상태이기 때문에 살아갈 수 있다. “모르는 상태에서는 희망을 품을 수도 절망할 수도 없다. 이 상황에서 최선은 이런저런 의심만 하는 것, 그게 축복이다.(63)” 안나는 날씨가 따뜻해지면 도시를 떠날 계획이다. “상상할 수 없으니 무슨 일이든 다 가능하다는 점에서 그것은 곧 무()의 세계이기도 하다.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어떤 새로운 세계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다. 어쩌면 이 도시를 떠난 뒤 우리는 윌리엄을 찾아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크게 기대하지 않는다.(280~281)” [폐허의 도시]는 완성작임에도 미완성이다.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폴 오스터는 카프카의 사망 15주년에 붙여 카프카를 위한 페이지들을 남겼다. 이 짧은 산문은 카프카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오스터 자신의 주인공인 안나 블룸에게도 들어맞는다. “만일 그의 여행이 어떤 최종 목적이라도 갖고 있다면, 그것은 오직 최종적으로, 그가 시작했던 그곳에서 그 자신을 발견함으로써일 것이다. () 약속된 땅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것에 가까워진다는 것에 절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그는 모든 것을 자기로부터 떨어진, 한 팔만한 거리에, 한 삶만한 거리에 두고, 그리하여 도착에 가장 가까이 갈 때가 자신의 목적지로부터 가장 멀어질 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나아간다. 그리고 한 걸음에서 다음 한 걸음까지 자기 자신 이외의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아니, 그 자신조차도 아니고, 그가 될 것의 그림자이다. 아니, 그 약속된 땅조차도 아니고, 그것의 그림자이다.([굶기의 예술] 30~31)”

 

보이지 않는 신, 해체된 권력

 

[폐허의 도시]의 도시는 마치 무정부상태를 방불케 한다. 시 권력은 자주 바뀌고, 따라서 정책도 자주 바뀐다. 대부분의 건물에 건물주가 없고, 따라서 부동산 사기와 약탈이 횡행한다. 도시 행정이 엄격한 것은 단 하나 쓰레기와 시체의 처리다. 똥을 허락 없이 수거하는 일이 두 번 적발되면 사형이다. 물품 재활용은 부활 센터에서, 시체 재활용은 변형 센터에서 이뤄져야 한다. 이른바 공권력은 오토 프릭의 시체를 몰래 매장했을 때만 등장한다. 그밖에는 50년짜리 방파제 프로젝트의 실패와 여행 허가증을 받는 데 늘어선 줄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정부는 완전히 무능하다.


[폐허의 도시]에 구원은 없다. 폐허의 도시 사람들 역시 각자도생을 추구할 뿐이다. 넝마주이를 하며 살아남거나 아니면 자살을 해야 한다. 때문에 도시에는 빨리 달려서 기력을 소진하고 죽으려는 죽음의 질주자’, ‘최후의 점프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추락사’, 자살을 돕는 안락사 클리닉’, 대신 죽여주는 암살클럽이 있다. 도시의 사람들은 점점 기억이 사라지는데, 다른 장소에 대한 기억이 있을 경우 회상은 고통을 더하기만 한다. 두 세계에서 권력은 마을과 도시의 사람들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들지만, 정작 사람들의 삶이 해결을 요청할 때 그 자리는 텅 비어 있다.

 

[시지프 신화]에서 알베르 카뮈는 모든 자명한 사실들, 진리는 결실이 없다고 말한다. 폴 오스터의 [폐허의 도시] 역시 마찬가지 이유에서 보편성을 지닐 수 있을 것이다. 안나 블룸이 떠나려는 도시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다. 그 속에서 불안을 느끼며 부조리와 직면해야 하는 우리는 또 다른 안나 블룸이다.

"주변의 모든 것이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면서 매일 새로운 행동을 낳는다. 예전의 그 흔들림 없어 보이던 가정(假定)이나 전제가 한순간에 헛된 것, 무의미한 것이 되어 버린다. 이것이 딜레마다. 한편으로 우리 모두는 환경에 적응하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잘 이용하여 살아남기를 원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그렇게 해서 살아남는다는 것이 한때는 우리를 인간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던 그 모든 것을 다 없애 버려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니 이 얼마나 황당한 모순인가? 당신은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는가? 살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다는 의미다. 많은 사람들이 삶을 포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무리 기를 쓰고 발버둥쳐도 모든 것을 잃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런 점에서 보면 애쓰고 노력하는 일이 허무한 짓거리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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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범우 사르비아 총서 630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송관식 옮김 / 범우사 / 2003년 7월
평점 :
품절


소설 [위대한 개츠비]는 미국 중서부 출신에 서른 살을 앞둔 닉 캐러웨이가 동부로 이주했다가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왔던 1922년 여름의 이야기다. 닉 캐러웨이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니라 관찰자여서, 이 이야기는 그의 눈에 비친 제이 개츠비라는 인간의 마지막 몇 달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소설의 서두에서 닉은 이야기의 주인공이 개츠비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어서 독자는 닉의 서술에 기대어 개츠비가 누구인지, 어떠한 성격의 인물인지, 닉의 판단이 적절한 것인지를 발견하기 위한 마음의 준비를 마치게 된다. 닉에 의하면 개츠비는 "희망을 갖게 하는 비상한 천성이요, 내가 지금껏 그 누구에게서도 발견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장차도 발견하지 못할 일종의 낭만적 감수성"을 가진 인물이다. 독자는 닉의 시점을 따라가며, 또는 의심하며 기대와 배반을 반복하고 닉과 비슷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모종의 결론에 이르게 된다.

 

주인공에 대해 말하지 않는, 의심스러운 화자

 

[위대한 개츠비]는 총 9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개츠비라는 인물은 3장이 되어서야 독자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1장에서 개츠비라는 이름이 살짝 언급되고 부두를 바라보는 모습이 잠깐 목격되는 정도다. 1장과 2장에서 독자는 톰 뷰캐넌과 데이지 부부의 결혼생활이 무료한 것이고, 톰은 머틀이라는 정부를 둔 방탕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3장에서야 겨우 등장하는 개츠비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독일 황제의 조카라는 둥, 사람을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둥 비밀스러운 분위기를 품고 있다. 닉은 파티의 주인인 개츠비가 외로워 보인다고 생각한다. 3장이 지나도록 독자는 주인공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데, 기껏해야 30대 초반에 파티를 자주 여는, 적어도 닉의 눈에는 외로워 보이는 독신남이라는 정도다.


독자가 개츠비 이야기는 언제 할 셈이냐, 고 고함치고 싶은 지경이 될 때까지 피츠제럴드는 고집스럽고 태연하다. 작가는 마치 동부에 처음 온 닉의 관점에서 이 타락의 아수라장을 통과하고 난 뒤에야 독자가 개츠비를 제대로 알 수 있으리라는 듯 초반부를 서술해 나간다. 드디어 7월말의 어느 날 아침 9시 개츠비가 점심을 같이하자고 닉을 찾아왔을 때에야 독자는 주인공을 마주하게 된다. 겨우 만난 주인공은 더더욱 미심쩍은 인물이다. 스스로가 설명하는 개츠비의 과거는 신뢰할 수가 없다. 신뢰할 수 없다고 하면서도 개츠비에게 호감을 표출하는 닉의 태도 때문에 독자는 여전히 개츠비에 대해 어떤 뚜렷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술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소설이 절반 가까이 진행된 즈음에야 독자는 개츠비라는 인물에 대해 확실한 정보를 손에 얻는다. 그가 웨스트웨그에 집을 얻고 본인은 즐기지도 않는 것 같은 파티를 열었던 이유는 데이지 때문이었다. 데이지는 이성적인 매력이 넘치고,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으며, 어딘가 불안정해 보이는 여자다. 독자들이 데이지가 사랑스럽다고 느끼는 이유는 전적으로 닉의 서술 때문이다. 닉은 "그녀의 얼굴은 그 속에 있는 빛나는 것들, 즉 빛나는 눈과 빛나는 열정적인 입술 등으로 슬픈 듯하면서도 사랑스럽게 보였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다소 흥분되어 있어서 그녀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남자라면 여간해서 그것을 잊을 수 없게 했다."고 말한다. 반면 앞서 등장한 그녀의 남편 톰은 남을 깔보는 기미가 엿보이고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소개하고 있다. 또한 루빌에 살던 처녀 시절과 톰과 결혼하던 무렵의 데이지의 행동은 조던 베이커의 전언에 의지한다. 허나 톰의 부정한 행실은 닉이 소설 2장에서 머틀네와 함께 움직임으로써 좀 더 실감나고 부정적으로 다가온다. 닉이 등장인물에게 어떠한 태도를 취하는지에 따라 각 인물들에 대한 독자의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


닉은 자신의 집에서 개츠비와 데이지의 만남을 주선한다. 데이지도 그녀의 인생에서 무언가 가치 있는 일을 만들어야 한다는 조던의 말 외에 왜 이런 주선을 하는지 닉의 동기를 뚜렷하게 알 수는 없다. 이미 이 지점에서 닉에 대한 독자의 의심은 커져 있다. 닉은 개츠비, 데이지, , 조던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피력해 왔는데, 그 말들 사이 그리고 말과 행동 사이에는 모순이 있다. 조던 베이커를 남의 말을 잘 옮기고 부정직한 일을 저지르기 일쑤인 인간으로 묘사해 놓고는 그녀와 사귀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톰에 대해서는 일관되게 부정적 관점을 유지하는 것 같지만 막상 그의 행동에 제지를 한다거나 반발을 하는 경우는 없다. 1인칭 관찰자인 서술자를 완전히 신뢰할 수 없게 되면서 독자는 개츠비, , 데이지, 조던, 심지어 닉에 대한 판단까지도 유보하거나 닉과는 전혀 다른 위치에 서게 된다.

 

전지적인 위치에 선 1인칭 관찰자

 

독자의 마음이 완전히 돌아서려고 할 때 닉은 개츠비에 관한 진짜 정보를 들려 준다. 그의 본명은 제임스 개츠이고 북쪽의 노스다코타 출신으로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다. 시간상으로 이 정보는 모든 일이 끝난 후에 개츠비가 닉에게 들려준 것이다. 닉은 모든 일을 치르고 난 2년 후에 사건을 서술하고 있으므로 서술의 순서를 마음대로 할 수 있으나, 대체로는 시간에 따라서 소설이 진행된다. 닉은 가끔씩 나중에 알게 된 사실들을 먼저 들려주기도 한다. 1인칭 관찰자로서 닉의 서술은 제한적이지만, 이러한 서술 방식은 일종의 전지적 성격을 띠어서 제한적 시점을 보강해주는 역할을 한다. 닉은 마치 신처럼 창조에서 종말을 내다보고 종말에서 시작을 꿰고 있는 서술자이다. 때문에 개츠비라는 비상한 인물에게 비극적 결말이 예정되어 있다는 것을 독자도 내내 인식하게 된다.


독자는 후반부로 치달으면서 인물들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다시 한 번 점검해야 한다. 닉의 모순된 서술에는 파국적인 사건이 자리하고 있으며, 인물들에 대한 닉의 평가는 그 사건의 결과에 결부되어 있다. 사건이 드러날수록 소설 중반부에 가장 멀어졌던 독자와 닉의 거리는 점점 좁혀 들어간다. 소설이 끝날 때 기분은 개운치 않을지라도 미심쩍은 부분은 거의 남지 않는다.


개츠비는 성공을 위해 혹은 사랑하는 여인을 손에 넣기 위해 메이어 울프심 같은 악당과 손을 잡고 도박과 밀거래 같은 일에 손을 댄다. 5년만에 데이지의 집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 대저택을 소유하고, 전속 스타일리스트가 영국에서 셔츠들을 골라 보내주고, 수백 명이 모이는 파티를 개최할 수 있을 정도로 부자가 된다. 개츠비는 데이지 자체를 사랑한 것이 아니다. 데이지는 아름다운 집에 살고 있는 아름다운 여자였고, 더욱이 많은 남자들이 그녀를 사랑했다. 개츠비는 데이지와 같은 계층에 속한 것처럼 그녀를 속여서 사랑을 얻을 수 있었다. 개츠비가 이룬 성공의 결정적인 마지막, 화룡점정은 데이지를 소유하는 것이다. 갖은 수단을 써서 성공의 완성에 근접했다가 배신당한 이 남자에게 닉이 가질 수 있는 동정심을 소설을 다 읽은 독자는 납득할 수 있게 된다. 아름답지만 위태로운 데이지, 미워할 가치조차 없는 톰, 욕망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이없이 희생당한 머틀 등에 관하여 닉은 개츠비와 마찬가지로 객관적으로는 모순되어 보이는 서술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모든 일이 끝난 후 전지적 시점에 서 있는 닉이지만 어디까지나 1인칭 관찰자로서 그는 이곳저곳에 편재할 수는 없다. 이때 조던 베이커는 닉의 여자친구이자 충실한 사건 전달자로서 기능한다. 루빌 시절의 데이지와 개츠비의 연애담, 톰이 뉴욕에 정부를 둔 사실, 개츠비가 웨스트에그에 정착한 이유처럼 중요한 정보의 큰 조각을 맞춰주는 사람은 조던 베이커다. 메이어나 개츠비의 아버지 헨리 개츠, 톰 등은 개츠비의 행적에 대해 작은 조각들을 제공한다. 이렇게 전개되는 닉의 제한적 시점에서 조각 맞추기는 독자의 조각 맞추기이기도 하다.

 

사건의 숨가쁜 전개와 극적 효과

 

닉의 시점에 대한 독자의 신뢰도에 따라 [위대한 개츠비]의 인물들은 다르게 읽힐 수 있다. 허나 자동차 사고가 일어난 더운 여름날 이야기가 담긴 7장 만큼은 닉이 전통적인 1인칭 관찰자에 가까운 역할을 한다. 아내의 불륜을 알게 된 톰, 데이지가 톰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고백하길 바라는 개츠비, 톰의 폭로 때문에 개츠비에 대한 마음이 흔들리는 데이지 이 세 사람의 대화가 거의 그대로 펼쳐진다. 닉의 매개 없이 진행되는 대화는 팽팽한 긴장을 독자에게 그대로 전해주는 효과가 있다. 무언가 사고가 터질 것 같은 긴박감이 더해진다.


사건의 속도감 있는 전개 사이에 짧게 배치된 닉의 내적 독백들은 적합하고 절묘하다. 뷰캐넌의 집에서 시내 호텔로 가기 직전에 닉은 이렇게 서술한다. 돈으로 가득 차 있는 데이지의 "그 목소리는 딸랑딸랑 울리기도 하고 심벌의 노래 같기도 했다. 그녀는 하얀 궁전에 높이 앉은 공주이자 황금의 숙녀였다." 그 전후로는 대사와 상황 묘사가 길게 자리한다.


집에서 시내,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세 사람의 인물이 나누는 대화는 시종 불안하고 위태롭다. 관찰자의 역할에 충실한 닉이 이 상황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브레이크를 걸어 주기를 바라고 싶을 정도다. 그러나 작가인 피츠제럴드도, 화자인 닉 캐러웨이도 개츠비의 몰락에 제동을 걸 생각은 전혀 없다. 머틀, 조지 윌슨, 개츠비는 여기저기 깔려 있던 불길한 예감을 그대로 밟아가며 최후를 향해 돌진한다.


사고가 난 후 9장의 닉은 개츠비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분주하게 행동하는 인물이다. 장례를 준비하는 내내 자유화법으로 닉 자신의 심리를 묘사하는 부분은 현저히 적다. 어떻게든 지인을 찾아 장례식다운 장례식을 해보려는 닉의 행동이 오히려 닉의 슬픈 마음을 잘 나타낸다. 이때는 올빼미 안경을 쓴 남자의 뜻하지 않은 조문 같은 것이 소설의 문학성을 도드라지게 한다. 이 인물은 닉이 개츠비의 집을 처음 방문한 날 서재에서 만난 인물이다. 그는 개츠비가 진짜 인쇄물로 서재를 채웠다면서 하나의 승리이자 완벽하기 이를 데 없는 '기막힌 리얼리즘'이라고 감탄한다. 그는 파티가 끝난 후 차가 도랑에 처박히면서 운전석과 조수석에 탄 사람이 오인된 것이라는 암시를 하기도 한다. 그는 재의 골짜기 근처의 광고판에 인쇄된, 어마어마한 노란색 안경을 쓰고 있는 'T.J. 에클버그 박사'의 현신이기도 하다. 올빼미 안경을 쓴 남자이자 T.J. 에클버그 박사는 모든 것을 지켜보는 하느님이자 죽은 개츠비를 가엾게 여기는 유일한 사람이다. 7장과 9장에서 닉은 주변 인물들의 말과 행동을 전하는 성실한 관찰자로서 제 역할을 다하고, 그러한 시점이 절정과 결말 부분에서 더욱 극적인 효과를 빚어낸다.

 

닉 캐러웨이의 성장 소설로서 [위대한 개츠비] 읽기

 

닉 캐러웨이는 1인칭 제한적 시점의 화자치고는 독특한 인물형이다. 보통 이런 화자들의 역할은 사건에 개입하기보다 보거나 들은 사건을 서술하는 데에 그친다. 닉은 개츠비의 짧고 비극적인 인생의 관찰자이자 스스로 사건에 참여하고 개입한다. 사건을 통과하면서 개츠비를 만나기 전의 닉과 그 후의 닉은 전혀 다른 인물이 되었다.


닉은 사건이 벌어지기 7년 전에 예일대를 졸업하고 그 이후 1차세계대전에 참전했다. 닉의 아버지도 예일대를 나왔고 동부에서 증권업을 배우는 1년 동안 아들에게 생활비를 대주겠다는 것으로 미뤄볼 때 닉은 부유한 집안 출신이다. 그는 고향을 떠나올 때만 해도 자신이 살던 중서부 지방이 "우주의 초라한 변두리"같이 느끼고 있었고 동부에 아주 정착할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닉의 입장에서 1922년 자신의 신상에 일어난 중요한 사건은 조던 베이커와의 연애다. 골프선수인 그녀에 대한 닉의 첫인상은 "철저하게 자부심을 과시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나를 멍하게 하고 나로 하여금 찬사를 바치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고나서 닉은 정부에게 온 전화를 받으려고 방을 나간 톰과 잠시 후 따라 나간 데이지와의 대화를 엿들으려고 하는 조던을 좋지 않게 묘사한다. 개츠비의 파티에서 우연히 만나고 한여름부터 닉은 조던과 가까워진다. 닉은 조던의 자부심 넘치는 겉모습 뒤에는 말할 수 없는 부정직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만 그녀와 계속 교제한다.


조던은 닉에게 "활기찬 육체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육체' 그 자체다. "개츠비나 톰 뷰캐넌의 경우와는 달리 내게는 육체를 떠난 얼굴이 어두운 처마 끝이나 현란한 전광 간판을 따라 떠돌아다니는 그런 여인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두 팔에 힘을 주어 내 곁의 여자를 끌어당겼다.(4)" 더욱 속물적인 부분은 교제 초기, 유명한 골프선수와 다니며 받는 시선에 대한 으쓱함으로 닉이 고무된다는 점이다.


속임수에 능하고 부정직한 인물로 묘사됐던 조던은 닉과의 마지막 만남에서 반대로 그의 부정직을 비판한다. "당신은 서투른 운전자는 또 한 사람의 서투른 운전자를 만날 때까지만 안전하다고 했지요? 그렇다면 저는 또 한 사람의 서투른 운전자를 만난 셈이지요? 제가 말하고 싶은 건 이런 억측을 하는 건 제가 생각이 깊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저는 당신을 비교적 정직하고 솔직한 사람인 줄 알았어요. 그것이 당신의 은밀한 자랑인 줄 생각했었어요.(9)" 닉은 자신이 서른 살이고 "나 자신을 속이고 그걸 명예라고 부르기엔 나이를" 먹었다고 답한다. 스스로 의심해보지 않는 정직만큼 신뢰하기 어려운 것도 없다. 닉은 자신이 정직하고 명예를 아는 사람이라고 스스럼 없이 말했던 초반보다는 더욱 정직하고 솔직한 사람이 된 것이다.


개츠비가 죽고난 후 닉에게 우주의 변두리 같았던 중서부가 돌아가고 싶은 고향으로 다시 인식된다. "젊은 시절의 가슴 울렁거리는 귀향 기차와 서리 내리는 밤의 가로등과 썰매의 방울 소리, 불 켜진 창문에서 눈 위로 던져진 접시꽃 다발의 그림자들"이 닉의 중서부다. 이제 동부는 닉에게 자줏빛에 뒤틀어진 공간이 되어버린다. 닉의 동부 도전은 실패했을지 모르나, 스물아홉에서 서른이 되는 무렵 그의 내면은 성장한 것이다. 어쩌면 개츠비와 같은 성공을 동경했을지도 모르는 닉 캐러웨이는 개츠비와 다르게 향락과 위선의 도시에서 빠져나와 살아남는다. [위대한 개츠비]는 미국이라는 공동체에 물질적 풍요와 발전보다 정직과 명예라는 가치가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역설하는, 개츠비의 죽음을 통해 공동체의 가치를 내면화하게 되는 닉 캐러웨이의 성장소설로도 읽을 수 있다.

 

* 1988년 범우사 판 송관식 역의 [위대한 개츠비] 인칭과 명칭만 현대식으로 다듬었다.

"당신은 서투른 운전자는 또 한 사람의 서투른 운전자를 만날 때까지만 안전하다고 했지요? 그렇다면 저는 또 한 사람의 서투른 운전자를 만난 셈이지요? 제가 말하고 싶은 건 이런 억측을 하는 건 제가 생각이 깊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저는 당신을 비교적 정직하고 솔직한 사람인 줄 알았어요. 그것이 당신의 은밀한 자랑인 줄 생각했었어요."(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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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의 축제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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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밀란 쿤데라의 [무의미의 축제]가 독자에게 최종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소설 속 다양한 층위의 거짓말을 읽어내고 그 거짓말들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이다. 그러나 독자를 혼란스럽게 할 만큼 이야기 속에 많은 이야기들이 중첩되어 있다. 알랭의 어머니는 알랭이 뱃속에 있을 때 자살할 의도로 강물에 뛰어들었다가 구조하려는 청년을 죽이고 정작 자신은 살아난다. 알랭은 어머니의 사진만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을 버린 어머니와 자신을 이었던 흔적인 어머니의 배꼽에 집착한다. 그가 느끼는 여성들의 배꼽에 대한 에로티시즘은 어머니에 대한 집착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샤를이라는 인물의 어머니는 병들어 죽어가고 있다.


소설 속 현재에서 진행되는 사건들만큼 중요한 또 하나의 축은 스탈린과 칼리닌의 일화다. 작가 밀란 쿤데라는 역사적 사실과 뒤섞인 거짓말을 통해 농담을 해도 웃지 않는 무거운 시대와 사람이 죽어나가는 동안 가벼움으로 시대를 버텨내는 아이러니컬한 삶의 태도를 그려내고 있다. 오줌이 하찮기 때문에, 칼리닌이 초라한 인물이기 때문에 가벼운 농담에도 무게가 생겨난다.


독자는 소설의 누가 어떤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를 질문해야 한다. 다르델로는 라몽에게 자신이 암에 걸렸다고 급작스럽게 거짓말을 하고, 칼리방은 파키스탄인을 가장한 채 자신이 창조해 낸 언어로 칵테일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을 속인다. 알랭이 전하는 어머니의 일화 역시 알랭의 상상인지, 아버지가 들려준 것인지 알 수 없고 어느 쪽이 진실인지도 독자는 판단할 수가 없다.


쿤데라는 소설의 인물들, "이 친구들"이 내가 만들어낸 인물들이라고 말하고 인물들은 우리를 창조한 주인이 있다는 것을 안다고 고백한다. 독자는 난처해진다. 독자는 작가가 인물을 창조했다는 사실을 물론 알고 있다. 하지만 소설을 읽을 때만큼은 인물과 독자가 이 사실을 모른다고 서로 가정하기로 약속하지 않았는가. 거짓말을 늘어놓는 인물들로도 모자라 작가도 거짓말을 하는 셈인데, 이 모든 것이 거짓말이라는 사실만이 이 소설 안팎에 놓인 유일한 진실이 된다.


작가가 창조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고 있는 소설 속 인물이라는 설정을 받아들이고 나서도 [무의미의 축제]를 읽는 독자의 곤혹스러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소설 속 인물들이 또 다른 인물을 창조하며, 이차 창작된 이 인물들이 자신의 세계의 바깥인 소설 속 세계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알랭의 어머니다. 알랭의 어머니라는 인물은 독자에게는 처치곤란의 존재가 된다. 독자는 쿤데라의 뜻에 따라 알랭도, 알랭의 어머니도 작가가 창조한 인물이라는 것을 안다. 그런데 어머니는 작가가 제시하는 인물이 아니라 알랭의 상상으로 나타난다. 알랭은 아버지에게서 들은 어머니의 이야기를 전하는 듯하다가 아예 어머니의 목소리와 직접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어머니가 자신을 왜 낳았는지가 이 대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 자체가 하나의 농담이자 거짓말이 된다. 알랭은 밀란 쿤데라가 낳았기 때문이다. 탯줄로 이어진 배꼽에 대한 알랭의 집착이 반복될수록 이 존재의 기원에 대한 탐구는 점점 더 가벼워진다.


스탈린 일당을 둘러싼 이야기는 알랭의 어머니 일화보다 더욱 복잡하게 꼬여 있고 이제 소설은 뫼비우스의 띠나 에셔의 그림처럼 서로가 서로를 만들어 내는 형국이 된다. 소설의 마지막에는 샤를의 인형극 속 인물인 칼리닌이 자신의 이야기 밖으로 뛰어나가 공원의 사냥꾼으로 나타난다. 심지어 이 인형극을 상상하던 샤를은 어머니의 죽음 때문에 친구들을 떠난 상태다. 라몽과 알랭은 자신들 곁에 없는 샤를의 상상이 실제로 나타난 것에도 전혀 놀라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들이 등장인물인 이 소설을 밀란 쿤데라가 쓴 것이며, 자신들과 같은 소설 속 인물이 또 다른 이야기를 지어낸다고 해도 이 역시 밀란 쿤데라가 쓴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끝까지 독자만이 속는 기분이다.


그러나 다르델로라는 인물만은 이 연극을 사실이라고 믿는다. 라몽은 그에게 이 소설의 주제라고도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제 나한테 하찮고 의미없다는 것은 그때와는 완전히 다르게, 더 강력하고 더 의미심장하게 보여요.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심지어 아무도 그걸 보려 하지 않는 곳에도, 그러니까 공포 속에도, 참혹한 전투 속에도, 최악의 불행 속에도 말이에요. 그렇게 극적인 상황에서 그걸 인정하려면, 그리고 그걸 무의미라는 이름 그대로 부르려면 대체로 용기가 필요하죠. 하지만 단지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사랑해야 해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여기, 이 공원에, 우리 앞에, 무의미는 절대적으로 명백하게, 절대적으로 무구하게, 절대적으로 아름답게 존재하고 있어요. 그래요. 아름답게요.”(147쪽)


위대한 진리의 엄숙함에 애착을 가지고 있는 다르델로에게 이런 말을 통하지 않는다. 마지막까지 다르델로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유명한 여인 프랑크 부인과 그가 연인 사이라는 사실을 안다는 라몽의 거짓말이다. 거짓말만을 남기고 프랑스 국가, 다시 말해 프랑스혁명가가 울려 펴지는 가운데 퇴장하는 스탈린과 칼리닌의 모습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나 자신한테 화가 나서 그래. 나는 왜 틈만 나면 죄책감을 느끼는 걸까?"
"괜찮아."
"죄책감을 느끼느냐 안 느끼느냐. 모든 문제는 여기에 있는 것 같아. 삶이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지. 다들 알아. 하지만 어느 정도 문명화된 사회에서 그 투쟁은 어떻게 펼쳐지지? 보자마자 사람들이 서로 달려들 수는 없잖아. 그 대신 다른 사람한테 잘못을 뒤집어씌우는 거야. 다른 이를 죄인으로 만드는 자는 승리하리라. 자기 잘못이라 고백하는 자는 패하리라. (……) 사과를 하는 건 자기 잘못이라고 밝히는 거라고. 그리고 자기 잘못이라고 밝힌다는 건 상대방이 너한테 계속 욕을 퍼붓고 네가 죽을 때까지 만천하에 너를 고발하라고 부추기는 거야. 이게 바로 먼저 사과하는 것의 치명적인 결과야."
"맞아. 사과하지 말아야 해. 하지만 그래도 나는 사람들이 모두 빠짐없이, 쓸데없이, 지나치게, 괜히, 서로 사과하는 세상, 사과로 서로를 뒤덮어 버리는 세상이 더 좋을 것 같아.(58쪽)

"이제 나한테 하찮고 의미없다는 것은 그때와는 완전히 다르게, 더 강력하고 더 의미심장하게 보여요.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심지어 아무도 그걸 보려 하지 않는 곳에도, 그러니까 공포 속에도, 참혹한 전투 속에도, 최악의 불행 속에도 말이에요. 그렇게 극적인 상황에서 그걸 인정하려면, 그리고 그걸 무의미라는 이름 그대로 부르려면 대체로 용기가 필요하죠. 하지만 단지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사랑해야 해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여기, 이 공원에, 우리 앞에, 무의미는 절대적으로 명백하게, 절대적으로 무구하게, 절대적으로 아름답게 존재하고 있어요. 그래요. 아름답게요."(1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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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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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하고 번식하는 것은 인간을 포함해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가 지키고 있는 정언명령이다. 인간과 생명체가 유일하게 구분되는 지점은 ‘죽음에 대한 인식’이다. ‘아담’과 ‘하와’가 인간으로서 최초로 생존하고 번식한 인간이라면, 그들의 첫째 아들 ‘카인’은 최초로 죽음을 인식한 자다. [카인]에서 생존하고 번식하려는 자는 ‘노아’다. 아이러니컬한 점은 주어진 과제를 성실하게 수행하려는 두 명의 ‘노아’에게는 생식능력이 없다. 카인은 근친 살해를 통해 죽음에 관한 인식을 얻었으며, 그가 최초에 살인을 저지른 이유는 인정 욕구에서 비롯된 인간적 모욕감이었다. 여호와는 ‘카인’의 제사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었으며 ‘아벨’의 죽음을 막을 수도 있었다.

[카인]의 내용을 더 살펴보는 일은 결말 누설이 될 것이기에 간략하게 질문들을 남긴다. 여호와는 무엇을 시험하는 신인가? 왜 시험하는가? 여호와의 약속은 무엇이고 어떻게 지켜지는가? [카인]에서 진짜 신은 어떤 인물인가? [카인]에서 카인과 여호와는 공범인가? 어떤 범죄에서 공범인가?

형식 측면에서 [카인]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이후에 만들어진 서양 세계의 서사 전통을 떠올리게 한다. [고백록]은 자각하지 못한 신의 사랑(1권), 신에게서 멀어진 상태(2권 애욕, 3권 출세, 4권 이교), 돌아서서 다시 다가가는 상태(5~7권), 회심(8권), 신의 사랑을 자각하는 상태(9권), 지나온 삶의 관조(10권), 신의 본질(11권), 신의 행위(12권), 신이 만든 세계(13권)의 구성으로 되어 있다. 신과 합일된 상태에서 신에게서 멀어졌다가 다시 그에게 돌아가 크게 깨우치고 신과 재합일할 때의 나는 처음의 나와 달라져 있다.


[카인]도 모두 13장의 구성이다. 카인은 아우구스티누스와 달리, 주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멀어진다. 카인 이전에 인간은 이미 낙원에서 추방된 상태였다. [카인]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1. 에덴의 아담과 하와 2. 추방된 아담과 하와의 고통 3. 카인의 아벨 살해 4. 놋의 땅에서 진흙 밟기 5. 릴리스와의 에로스 6. 이삭 번제와 바벨탑의 멸망 7. 소돔과 고모라 8. 모세가 시나이 산 올라간 중의 광야 9. 여리고성부터 기브온까지 여호수아의 전투 10. ‘에녹’이라는 이름이 붙은 놋의 땅에서 릴리스와 다시 만남 11. 욥의 시험 12. 노아의 방주 13. 대홍수


6장에서 카인은 인간과 여호와는 서로 오해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 이후의 여정을 통해 카인은 인간을 구원할 생각은 조금도 없으면서 끊임없이 그들을 시험하기만 하는 비열하고 악한 여호와를 발견한다. 구조상 4장과 10장은 대칭을 이룬다. 4장에서 추방된 자들의 이름없는 땅이었던 놋은 10장에서 카인의 아들 이름을 따 ‘에녹’이 되어 있다. 10장의 카인은 4장의 카인과 자신이 다른 사람이라고 스스로 말한다.


[카인]은 결말에 이르러 이전의 자기 서사를 전면 부정하는 일종의 서술 트릭을 사용한 소설이기도 하다. 이 결말을 받아들인다면 독자는 자신이 끝까지 읽어 내려온 사건들을 전면 재배치해야 한다. 이야기 안에 갇힌 여호와, 이야기를 가로지르는 카인, 이야기 바깥에 있는 독자라는 각각의 위치 설정이 이 소설의 내용형식을 풍부하게 해주고 있으며, 이 소설을 좋은 소설에서 훌륭한 소설로 끌어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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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즈비언 선택 여성학 강의 6
클로디아 카드 지음, 강수영 옮김 / 인간사랑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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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위계가 없는 사이의 성애와 폭력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레즈비언 선택뿐 아니라 섹슈얼리티 전반에 걸쳐 생각해볼 지점을 거의 다 짚어내고 있다.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 기본서라 할만하다.

섹슈얼리티가 이런 의미에서 구성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제도화되었다는 것, 즉 정교한 인련의 규칙과 기대들(변화가능하다고 추정되는)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53쪽)

나는 "레즈비언"을 정체성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나는 경험, 환상, 관계와 욕망 등에 사용되는 형용사 "레즈비언"의 용례를 기본으로 취해서, 명사 "레즈비언"은 거기서 파생되어 나와서 삶에서 레즈비언 관계가 차지하는 중요성에 대한 판단을 지칭하고 또 최근에 와서는 정치적 도구가 된 것으로서 처리했다.(69쪽)

그들은 억압적인 사회에서 진정한 지배와 복종, 동의 없는 지배와 복종을 즐기게 될 것인가? (4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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