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인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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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하고 번식하는 것은 인간을 포함해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가 지키고 있는 정언명령이다. 인간과 생명체가 유일하게 구분되는 지점은 ‘죽음에 대한 인식’이다. ‘아담’과 ‘하와’가 인간으로서 최초로 생존하고 번식한 인간이라면, 그들의 첫째 아들 ‘카인’은 최초로 죽음을 인식한 자다. [카인]에서 생존하고 번식하려는 자는 ‘노아’다. 아이러니컬한 점은 주어진 과제를 성실하게 수행하려는 두 명의 ‘노아’에게는 생식능력이 없다. 카인은 근친 살해를 통해 죽음에 관한 인식을 얻었으며, 그가 최초에 살인을 저지른 이유는 인정 욕구에서 비롯된 인간적 모욕감이었다. 여호와는 ‘카인’의 제사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었으며 ‘아벨’의 죽음을 막을 수도 있었다.

[카인]의 내용을 더 살펴보는 일은 결말 누설이 될 것이기에 간략하게 질문들을 남긴다. 여호와는 무엇을 시험하는 신인가? 왜 시험하는가? 여호와의 약속은 무엇이고 어떻게 지켜지는가? [카인]에서 진짜 신은 어떤 인물인가? [카인]에서 카인과 여호와는 공범인가? 어떤 범죄에서 공범인가?

형식 측면에서 [카인]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이후에 만들어진 서양 세계의 서사 전통을 떠올리게 한다. [고백록]은 자각하지 못한 신의 사랑(1권), 신에게서 멀어진 상태(2권 애욕, 3권 출세, 4권 이교), 돌아서서 다시 다가가는 상태(5~7권), 회심(8권), 신의 사랑을 자각하는 상태(9권), 지나온 삶의 관조(10권), 신의 본질(11권), 신의 행위(12권), 신이 만든 세계(13권)의 구성으로 되어 있다. 신과 합일된 상태에서 신에게서 멀어졌다가 다시 그에게 돌아가 크게 깨우치고 신과 재합일할 때의 나는 처음의 나와 달라져 있다.


[카인]도 모두 13장의 구성이다. 카인은 아우구스티누스와 달리, 주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멀어진다. 카인 이전에 인간은 이미 낙원에서 추방된 상태였다. [카인]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1. 에덴의 아담과 하와 2. 추방된 아담과 하와의 고통 3. 카인의 아벨 살해 4. 놋의 땅에서 진흙 밟기 5. 릴리스와의 에로스 6. 이삭 번제와 바벨탑의 멸망 7. 소돔과 고모라 8. 모세가 시나이 산 올라간 중의 광야 9. 여리고성부터 기브온까지 여호수아의 전투 10. ‘에녹’이라는 이름이 붙은 놋의 땅에서 릴리스와 다시 만남 11. 욥의 시험 12. 노아의 방주 13. 대홍수


6장에서 카인은 인간과 여호와는 서로 오해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 이후의 여정을 통해 카인은 인간을 구원할 생각은 조금도 없으면서 끊임없이 그들을 시험하기만 하는 비열하고 악한 여호와를 발견한다. 구조상 4장과 10장은 대칭을 이룬다. 4장에서 추방된 자들의 이름없는 땅이었던 놋은 10장에서 카인의 아들 이름을 따 ‘에녹’이 되어 있다. 10장의 카인은 4장의 카인과 자신이 다른 사람이라고 스스로 말한다.


[카인]은 결말에 이르러 이전의 자기 서사를 전면 부정하는 일종의 서술 트릭을 사용한 소설이기도 하다. 이 결말을 받아들인다면 독자는 자신이 끝까지 읽어 내려온 사건들을 전면 재배치해야 한다. 이야기 안에 갇힌 여호와, 이야기를 가로지르는 카인, 이야기 바깥에 있는 독자라는 각각의 위치 설정이 이 소설의 내용형식을 풍부하게 해주고 있으며, 이 소설을 좋은 소설에서 훌륭한 소설로 끌어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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