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미의 축제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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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의 [무의미의 축제]가 독자에게 최종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소설 속 다양한 층위의 거짓말을 읽어내고 그 거짓말들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이다. 그러나 독자를 혼란스럽게 할 만큼 이야기 속에 많은 이야기들이 중첩되어 있다. 알랭의 어머니는 알랭이 뱃속에 있을 때 자살할 의도로 강물에 뛰어들었다가 구조하려는 청년을 죽이고 정작 자신은 살아난다. 알랭은 어머니의 사진만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을 버린 어머니와 자신을 이었던 흔적인 어머니의 배꼽에 집착한다. 그가 느끼는 여성들의 배꼽에 대한 에로티시즘은 어머니에 대한 집착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샤를이라는 인물의 어머니는 병들어 죽어가고 있다.


소설 속 현재에서 진행되는 사건들만큼 중요한 또 하나의 축은 스탈린과 칼리닌의 일화다. 작가 밀란 쿤데라는 역사적 사실과 뒤섞인 거짓말을 통해 농담을 해도 웃지 않는 무거운 시대와 사람이 죽어나가는 동안 가벼움으로 시대를 버텨내는 아이러니컬한 삶의 태도를 그려내고 있다. 오줌이 하찮기 때문에, 칼리닌이 초라한 인물이기 때문에 가벼운 농담에도 무게가 생겨난다.


독자는 소설의 누가 어떤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를 질문해야 한다. 다르델로는 라몽에게 자신이 암에 걸렸다고 급작스럽게 거짓말을 하고, 칼리방은 파키스탄인을 가장한 채 자신이 창조해 낸 언어로 칵테일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을 속인다. 알랭이 전하는 어머니의 일화 역시 알랭의 상상인지, 아버지가 들려준 것인지 알 수 없고 어느 쪽이 진실인지도 독자는 판단할 수가 없다.


쿤데라는 소설의 인물들, "이 친구들"이 내가 만들어낸 인물들이라고 말하고 인물들은 우리를 창조한 주인이 있다는 것을 안다고 고백한다. 독자는 난처해진다. 독자는 작가가 인물을 창조했다는 사실을 물론 알고 있다. 하지만 소설을 읽을 때만큼은 인물과 독자가 이 사실을 모른다고 서로 가정하기로 약속하지 않았는가. 거짓말을 늘어놓는 인물들로도 모자라 작가도 거짓말을 하는 셈인데, 이 모든 것이 거짓말이라는 사실만이 이 소설 안팎에 놓인 유일한 진실이 된다.


작가가 창조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고 있는 소설 속 인물이라는 설정을 받아들이고 나서도 [무의미의 축제]를 읽는 독자의 곤혹스러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소설 속 인물들이 또 다른 인물을 창조하며, 이차 창작된 이 인물들이 자신의 세계의 바깥인 소설 속 세계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알랭의 어머니다. 알랭의 어머니라는 인물은 독자에게는 처치곤란의 존재가 된다. 독자는 쿤데라의 뜻에 따라 알랭도, 알랭의 어머니도 작가가 창조한 인물이라는 것을 안다. 그런데 어머니는 작가가 제시하는 인물이 아니라 알랭의 상상으로 나타난다. 알랭은 아버지에게서 들은 어머니의 이야기를 전하는 듯하다가 아예 어머니의 목소리와 직접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어머니가 자신을 왜 낳았는지가 이 대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 자체가 하나의 농담이자 거짓말이 된다. 알랭은 밀란 쿤데라가 낳았기 때문이다. 탯줄로 이어진 배꼽에 대한 알랭의 집착이 반복될수록 이 존재의 기원에 대한 탐구는 점점 더 가벼워진다.


스탈린 일당을 둘러싼 이야기는 알랭의 어머니 일화보다 더욱 복잡하게 꼬여 있고 이제 소설은 뫼비우스의 띠나 에셔의 그림처럼 서로가 서로를 만들어 내는 형국이 된다. 소설의 마지막에는 샤를의 인형극 속 인물인 칼리닌이 자신의 이야기 밖으로 뛰어나가 공원의 사냥꾼으로 나타난다. 심지어 이 인형극을 상상하던 샤를은 어머니의 죽음 때문에 친구들을 떠난 상태다. 라몽과 알랭은 자신들 곁에 없는 샤를의 상상이 실제로 나타난 것에도 전혀 놀라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들이 등장인물인 이 소설을 밀란 쿤데라가 쓴 것이며, 자신들과 같은 소설 속 인물이 또 다른 이야기를 지어낸다고 해도 이 역시 밀란 쿤데라가 쓴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끝까지 독자만이 속는 기분이다.


그러나 다르델로라는 인물만은 이 연극을 사실이라고 믿는다. 라몽은 그에게 이 소설의 주제라고도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제 나한테 하찮고 의미없다는 것은 그때와는 완전히 다르게, 더 강력하고 더 의미심장하게 보여요.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심지어 아무도 그걸 보려 하지 않는 곳에도, 그러니까 공포 속에도, 참혹한 전투 속에도, 최악의 불행 속에도 말이에요. 그렇게 극적인 상황에서 그걸 인정하려면, 그리고 그걸 무의미라는 이름 그대로 부르려면 대체로 용기가 필요하죠. 하지만 단지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사랑해야 해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여기, 이 공원에, 우리 앞에, 무의미는 절대적으로 명백하게, 절대적으로 무구하게, 절대적으로 아름답게 존재하고 있어요. 그래요. 아름답게요.”(147쪽)


위대한 진리의 엄숙함에 애착을 가지고 있는 다르델로에게 이런 말을 통하지 않는다. 마지막까지 다르델로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유명한 여인 프랑크 부인과 그가 연인 사이라는 사실을 안다는 라몽의 거짓말이다. 거짓말만을 남기고 프랑스 국가, 다시 말해 프랑스혁명가가 울려 펴지는 가운데 퇴장하는 스탈린과 칼리닌의 모습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나 자신한테 화가 나서 그래. 나는 왜 틈만 나면 죄책감을 느끼는 걸까?"
"괜찮아."
"죄책감을 느끼느냐 안 느끼느냐. 모든 문제는 여기에 있는 것 같아. 삶이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지. 다들 알아. 하지만 어느 정도 문명화된 사회에서 그 투쟁은 어떻게 펼쳐지지? 보자마자 사람들이 서로 달려들 수는 없잖아. 그 대신 다른 사람한테 잘못을 뒤집어씌우는 거야. 다른 이를 죄인으로 만드는 자는 승리하리라. 자기 잘못이라 고백하는 자는 패하리라. (……) 사과를 하는 건 자기 잘못이라고 밝히는 거라고. 그리고 자기 잘못이라고 밝힌다는 건 상대방이 너한테 계속 욕을 퍼붓고 네가 죽을 때까지 만천하에 너를 고발하라고 부추기는 거야. 이게 바로 먼저 사과하는 것의 치명적인 결과야."
"맞아. 사과하지 말아야 해. 하지만 그래도 나는 사람들이 모두 빠짐없이, 쓸데없이, 지나치게, 괜히, 서로 사과하는 세상, 사과로 서로를 뒤덮어 버리는 세상이 더 좋을 것 같아.(58쪽)

"이제 나한테 하찮고 의미없다는 것은 그때와는 완전히 다르게, 더 강력하고 더 의미심장하게 보여요.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심지어 아무도 그걸 보려 하지 않는 곳에도, 그러니까 공포 속에도, 참혹한 전투 속에도, 최악의 불행 속에도 말이에요. 그렇게 극적인 상황에서 그걸 인정하려면, 그리고 그걸 무의미라는 이름 그대로 부르려면 대체로 용기가 필요하죠. 하지만 단지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사랑해야 해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여기, 이 공원에, 우리 앞에, 무의미는 절대적으로 명백하게, 절대적으로 무구하게, 절대적으로 아름답게 존재하고 있어요. 그래요. 아름답게요."(1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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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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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하고 번식하는 것은 인간을 포함해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가 지키고 있는 정언명령이다. 인간과 생명체가 유일하게 구분되는 지점은 ‘죽음에 대한 인식’이다. ‘아담’과 ‘하와’가 인간으로서 최초로 생존하고 번식한 인간이라면, 그들의 첫째 아들 ‘카인’은 최초로 죽음을 인식한 자다. [카인]에서 생존하고 번식하려는 자는 ‘노아’다. 아이러니컬한 점은 주어진 과제를 성실하게 수행하려는 두 명의 ‘노아’에게는 생식능력이 없다. 카인은 근친 살해를 통해 죽음에 관한 인식을 얻었으며, 그가 최초에 살인을 저지른 이유는 인정 욕구에서 비롯된 인간적 모욕감이었다. 여호와는 ‘카인’의 제사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었으며 ‘아벨’의 죽음을 막을 수도 있었다.

[카인]의 내용을 더 살펴보는 일은 결말 누설이 될 것이기에 간략하게 질문들을 남긴다. 여호와는 무엇을 시험하는 신인가? 왜 시험하는가? 여호와의 약속은 무엇이고 어떻게 지켜지는가? [카인]에서 진짜 신은 어떤 인물인가? [카인]에서 카인과 여호와는 공범인가? 어떤 범죄에서 공범인가?

형식 측면에서 [카인]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이후에 만들어진 서양 세계의 서사 전통을 떠올리게 한다. [고백록]은 자각하지 못한 신의 사랑(1권), 신에게서 멀어진 상태(2권 애욕, 3권 출세, 4권 이교), 돌아서서 다시 다가가는 상태(5~7권), 회심(8권), 신의 사랑을 자각하는 상태(9권), 지나온 삶의 관조(10권), 신의 본질(11권), 신의 행위(12권), 신이 만든 세계(13권)의 구성으로 되어 있다. 신과 합일된 상태에서 신에게서 멀어졌다가 다시 그에게 돌아가 크게 깨우치고 신과 재합일할 때의 나는 처음의 나와 달라져 있다.


[카인]도 모두 13장의 구성이다. 카인은 아우구스티누스와 달리, 주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멀어진다. 카인 이전에 인간은 이미 낙원에서 추방된 상태였다. [카인]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1. 에덴의 아담과 하와 2. 추방된 아담과 하와의 고통 3. 카인의 아벨 살해 4. 놋의 땅에서 진흙 밟기 5. 릴리스와의 에로스 6. 이삭 번제와 바벨탑의 멸망 7. 소돔과 고모라 8. 모세가 시나이 산 올라간 중의 광야 9. 여리고성부터 기브온까지 여호수아의 전투 10. ‘에녹’이라는 이름이 붙은 놋의 땅에서 릴리스와 다시 만남 11. 욥의 시험 12. 노아의 방주 13. 대홍수


6장에서 카인은 인간과 여호와는 서로 오해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 이후의 여정을 통해 카인은 인간을 구원할 생각은 조금도 없으면서 끊임없이 그들을 시험하기만 하는 비열하고 악한 여호와를 발견한다. 구조상 4장과 10장은 대칭을 이룬다. 4장에서 추방된 자들의 이름없는 땅이었던 놋은 10장에서 카인의 아들 이름을 따 ‘에녹’이 되어 있다. 10장의 카인은 4장의 카인과 자신이 다른 사람이라고 스스로 말한다.


[카인]은 결말에 이르러 이전의 자기 서사를 전면 부정하는 일종의 서술 트릭을 사용한 소설이기도 하다. 이 결말을 받아들인다면 독자는 자신이 끝까지 읽어 내려온 사건들을 전면 재배치해야 한다. 이야기 안에 갇힌 여호와, 이야기를 가로지르는 카인, 이야기 바깥에 있는 독자라는 각각의 위치 설정이 이 소설의 내용형식을 풍부하게 해주고 있으며, 이 소설을 좋은 소설에서 훌륭한 소설로 끌어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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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즈비언 선택 여성학 강의 6
클로디아 카드 지음, 강수영 옮김 / 인간사랑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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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위계가 없는 사이의 성애와 폭력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레즈비언 선택뿐 아니라 섹슈얼리티 전반에 걸쳐 생각해볼 지점을 거의 다 짚어내고 있다.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 기본서라 할만하다.

섹슈얼리티가 이런 의미에서 구성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제도화되었다는 것, 즉 정교한 인련의 규칙과 기대들(변화가능하다고 추정되는)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53쪽)

나는 "레즈비언"을 정체성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나는 경험, 환상, 관계와 욕망 등에 사용되는 형용사 "레즈비언"의 용례를 기본으로 취해서, 명사 "레즈비언"은 거기서 파생되어 나와서 삶에서 레즈비언 관계가 차지하는 중요성에 대한 판단을 지칭하고 또 최근에 와서는 정치적 도구가 된 것으로서 처리했다.(69쪽)

그들은 억압적인 사회에서 진정한 지배와 복종, 동의 없는 지배와 복종을 즐기게 될 것인가? (4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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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 세계 역사를 바꾼 스탈린그라드 전투 590일의 기록 서해역사책방 7
안토니 비버 지음, 안종설 옮김 / 서해문집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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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참한 전쟁을 부른 그 우둔함이 1940년대 스탈린그라드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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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복의 랑데부 동서 미스터리 북스 54
코넬 울릿치 지음, 김종휘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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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 초등학생이 던진 벽돌에 근처 사는 한 남자 교사가 맞아 죽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약간 특이한 사건이다보니 뉴스나 신문 사회단신에 소개되어서 아시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저희 집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일어난 사건이라 주변 사람들에게 뒷얘기들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옆에 같이 걸어가고 있던 사람이 누구 남편이라더라, 한발 차이로 죽음을 면했다 등등.

결론적으로 초등학생이 한 일이고 살인의 의도도 전혀 없었으므로 특별한 처벌은 없었던 것으로 압니다. 다만 이 초등학생의 집에서 유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하고자 살던 집 전세금을 빼서 2~3천 정도를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죽은 교사의 아버지가 이 돈을 받지 않고 돌려 주면서 아이나 잘 키우라고 했다네요. 전달할 수 있는 돈이 살던 집 전세금 정도밖에 없는 집이고보니 넉넉치 않은 살림임은 분명한 터고, 또 나중에 아이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상처도 배려한 것일 테지요.

오늘 문득 코넬 울리치의 <상복의 랑데부>가 생각났습니다. 사냥을 위해 비행기에 탄 남자들, 그 가운데 하나가 부주의하게 술병을 창밖으로 떨어뜨리고, 그 술병에 맞아 한 여성이 죽습니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남자는 복수를 다짐하지요.

소설에서는 그 술병을 던진 남자가 약간 부도덕한 남자였다고 부연하고 있습니다만, 어찌 되었든 그도 살인을 의도한 건 아니었지요. 하지만 그때 그 비행기에 함께 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고통을 겪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살인자의 처벌을 받습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소설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도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잠자리를 같이 한 오이디푸스는 그 모든 일이 본인이 전혀 모르고 있는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임에도 스스로 자신의 눈을 찔러 형벌을 달게 받습니다. 모르고 지은 죄를 처벌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대해 계속 이야기하면서 밀란 쿤데라는 처벌할 수 없다는 식의 결론을 맺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모르고 지은 죄는 처벌할 수 없을까? 우리가 모르고 쏜 화살들이 얼마나 많은 곳에 가서 박혀 있을까? 저는 가끔 괴로운 일을 겪게 되면 예전에 내가 모르고 지었던 죄가 돌아온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벌 받는다라는 말보다 죄 받는다라는 말을 더 자주 쓰게 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는다." 참으로 소설같은 이야기, <상복의 랑데부> 작가만이 상상할 법한 이야기지만 실제로 이런 일이 생기고 보니 소설은 있을 법한 이야기라는 것, 또한 현실은 소설보다 더 소설같다는 점을 실감하게 됩니다. 아이는 평생 멍에를 지고 살 것입니다. 누구나 어린 시절 한번은 했을만한 장난을 친 것뿐이지만 한 사람이 죽었으니까요.

2004년 2월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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