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사람의 십 년
펑지차이 지음, 박현숙 옮김 / 후마니타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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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 무렵 그러니까 문화대혁명 30년 종료 20년에는 자아비판 상대비판(자비상비)을 하고 잘못을 하면 대자보를 써야하는 조직에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신랄한 성격임에도 자비상비는 무척 싫어했다. 타인은 타인을 알 수 없고 비판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다고 막연히 생각했던 것 같다.

[백 사람의 십 년]을 읽다보면 문혁은 1966년 이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중국 역사 2000년 전에 이미 시작되었다는 구술이 더러 나온다.

인류 역사부터겠지. 나는 씁쓸히 웃는다. 우파로 몰릴 것은 확실한데, 내가 남을 고발하게 될지 그걸 잘 모르겠다. 사는 게 죽는 것보다 무서워서 스스로 죽은 이들도 많았고 인간으로서 존엄하고 싶어서 스스로 죽은 이들도 있었다. 나는 문혁의 순간에 자살하는 인간이고 싶지만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문혁의 자장에서 살았구나, 살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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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소설 읽는 노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23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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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콰도르의 아마존 지역의 부락마을 '엘 이딜리오'에 암살쾡이가 접근해 온다. 살쾡이의 위협은 금발 백인 남성의 시신을 발견하는 것에서 시작되고, 노다지꾼 '나폴레온 살리나스'가 도주 중에 사망한 사건을 거쳐, '플라센시오'라는 가게를 운영하는 미란다의 노새가 주인을 잃고 도망쳐 오면서 점차 고조된다. 잇따르는 사건이 살쾡이의 소행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수색대를 이끄는 것은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라는 일흔 즈음의 노인이다. 루이스 세풀베다의 [연애소설 읽는 노인]은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와 암살쾡이의 대결을 그리면서 매 국면마다 현재와 긴밀하게 연결되는 노인의 과거를 엮어가는 소설이다.

 

정신적 고향을 찾는 안토니오

 

안토니오는 게오르그 루카치가 [소설의 이론]에서 가리키는 '문제적 개인'에 속하는 인물이다. 안토니오의 과거와 현재가 얽혀 있는 소설 구성 방식은 "모든 체험은 자기인식을 위한 과정 속에서 삶의 의미를 향해 나아가는 주인공의 방향에 의해서 유기적으로 조직되""각각의 요소들이 중심 인물과 삶의 전개과정에서 구체화되는 삶의 문제와 관계를 맺음으로써 하나의 통일적인 구조를 획득하게 되는" 소설의 모범을 보여준다. 소설의 처음과 끝이 주인공 인생의 탄생과 죽음과 일치할 필요는 없을 것이나, 작가는 서사적 총체성을 획득하기 위해 삶의 전개과정을 성실하게 직조하고 있다.


안토니오가 태어난 고향은 산간 지방인 '산 루이스'. 그러나 그곳은 루카치가 말하는 "본래의 정신적 고향과 삶의 의미를 찾아 길을 나서는 동경과 모험에 가득 찬 자기인식에로의 여정"에서의 고향은 아니다. 아내 '돌로레스 엔카르나시 온 델 산티시모 사크라멘토 에스투피냔 오타발로'와의 사이에서 아이가 생기지 않자 안토니오는 고향을 떠나 개간지인 '엘 이딜리오'에 자리를 잡는다. 혹독한 열대 우림의 기후는 부부에게 정착을 허용하지 않고, 돌로레스는 말라리아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홀로 남은 안토니오에게 '엘 이딜리오'는 정신적 고향이 될 수 없다.


안토니오를 받아들이는 장소는 아마존의 밀림이다. 아내와 모든 것을 빼앗은 밀림, 실패를 떠안겨 귀향을 막아선 밀림은 한때 그에게 "푸른 지옥의 세계"였다. 그러나 인디오인 수아르 족의 안내를 받아 사냥을 비롯해 자연에서 사는 법을 배운 안토니오는 "주인 없는 푸른 세계에 매료"되고만다. 안토니오가 밀림에 받아들여지는 최초의 통과의례는 'X'에 물린 사건이다. 비록 독이빨에 당했지만 자신의 공격자를 토막 내고 돌아와 고열을 이겨낸 안토니오는 그제야 수아르 족에게 밀림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진다.

 

노란 눈과의 예정된 싸움과 패배

 

안토니오는 X뱀에 물린 뒤 죽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들을 위한 <뱀의 축제>에서 환각제인 '나테마'를 마시고 "무한한 녹색 밀림의 세계의 일원이 되어 있는, 마치 수아르 족처럼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본다. 이 환상에서 그는 형체, 크기, 냄새, 소리가 없이 두 개의 노란 눈만이 번득이는 어떤 동물의 발자국을 쫓는다. 이 동물의 실체는 소설 후반부에, 전반부와 마찬가지로 꿈속 환상에서 드러난다. 수색대가 떠나고 혼자 남아 암살쾡이와 대면하기로 결심한 노인은 야영지의 카노 속에서 잠이 든다. 꿈에 나타난 무언가는 잉꼬, 금강앵무새메기, 수염수리매로 변신하는데 규정할 수 없는 생명체인 그것에서 노란 눈만이 변함없이 반짝인다. 가는 곳마다 노란 눈이 막아서는 꿈은 현실로 이어지고, 노인은 드디어 암살쾡이와 맞닥뜨린다.


노란 눈의 암살쾡이는 노인이 찾아 헤매던 삶의 목표다. 진정한 사냥꾼으로서 성장한 짐승과 용기 있게 맞대결하기 위해서 안토니오는 이 수색을, 전 인생을 걸어왔다. 그러나 이 목표는 실패할 것이 예정된 것이었고, 안토니오 자신도 "길은 시작되었는데도 여행은 완결된"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안토니오가 수아르 족의 세계, 밀림에서 추방된 계기가 된 누시뇨의 죽음에서 이미 확인된 사실이다. 백인 노다지꾼들은 다이너마이트 터지는 소리에 놀라 달려온 인디오들에게 총을 난사했고, 누시뇨는 그 총에 맞아 숨을 거둔다. 안토니오는 친구의 죽음에 상응하는 복수를 하려 했지만 독화살이 빗나가 총을 쏘게 된다. 인디오들의 믿음에 따르면 누시뇨의 영혼은 불행에 처하게 된 것이다. 백인과 용감하게 싸우고 끝을 보지 못한 안토니오는 암살쾡이와의 대결에서도 총을 사용한다. 살쾡이는 두 발의 총을 맞고 숨을 거두고 안토니오 역시 빗나간 총탄에 부상을 입게 된다. 승리자가 없는 대결이 끝나고 안토니오는 연애소설이 기다리는 엘 이딜리오의 오두막으로 돌아간다.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싸우는 자기인식과 자기지양의 아이러니가 실현된 것이다.

 

현대 문명이 에콰도르에 남긴 그림자

 

한편 [연애소설 읽는 노인]'환경소설'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고, 세풀베다 스스로도 작가의 말을 통해 환경운동가인 '치코 멘데스'에게 바치고 있다. 때문에 이 소설을 문명과 야만의 대립으로 읽어내는 것은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다소 이분법적인 도식으로 분석한 후, 이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 보고자 한다.


문명 세계는 뚱보 읍장이 지배하는 부락 '엘 이딜리오'로 상징된다. 소설에는 안토니오가 읍사무소에 가서 철 지난 신문을 읽는 장면이 지나가는데, 부카람 의원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1996년 에콰도르 대통령이 된 실존인물 '압달라 부카람'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가 정치를 시작한 1981년부터 이 책이 출판된 1989년 사이의 언젠가를 이 소설의 현재 시점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따르면 "1980년대 전반에 걸쳐 에콰도르의 경제는 기름값의 하락세, 높은 인플레이션, 지진과 폭풍 재해에 따른 혼란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스페인 식민지 시기 이후 수백 년간 누적된 원주민 차별, 1970년대 석유수출국이 되면서 발전한 경제, 증대되는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와 무분별한 아마존 개발 등이 맞물리면서 혼란을 겪고 있는 에콰도르의 모순이 작은 부락 엘 이딜리오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에콰도르 내부의 인종 문제도 소설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이베리아반도 출신의 서자를 아버지로 둔 치과의사는 에콰도르 인구중 대다수를 차지하는 유럽인과 원주민의 혼혈인 메스티소일 것이다. 그들 아래에는 밀림에 사는 수아르 족, 문명에 투항한 히바로 족과 같은 원주민 인디오가 있다. 같은 에콰도르 국민은 아니지만 백인인 양키들은 금을 노리고 남쪽으로 몰려와 부락과 밀림을 휘젓는 사람들이다.

 

야만적인 인간, 인간적인 야생

 

문명 세계에 사는 인간의 대표로는 읍장이 등장한다. 읍장은 소설에서 유일하게 이름이 없는 중요인물이다. 문명 세계의 지배자로서 종이 한 장으로 노인을 주거지에서 내쫓을 수 있는 사람이지만, 야생 세계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기에 아무에게도 권위를 가지지 못한다. 그저 무용한 것을 넘어서서 해악이 된다. 자신의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하고, 야생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함부로 총질을 하고, 같이 있는 생명체를 위험에 처하게 한다. 주인공의 시점에서 보면 한심하고 우스꽝스러운 인물이다. 그러나 나를 포함하여 도시에 사는 독자 대부분은 읍장과 같을 것이다. 읍장은 하나의 스테레오타입이면서 우리 자신이기도 하기에 단순히 '사람'으로 부르거나 우리 자신의 이름을 넣어도 무방할 것이다.


야생 세계의 인간으로는 '누시뇨'가 있다. 다른 수아르 족 부락에서 떠내려 온 누시뇨는 주인공 노인과 다르게 수아르 족에게 온전히 동족으로 받아들여진다. 인디오 전사이자 "사냥이나 수영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누시뇨는 안토니오의 친구가 되었다. 작가는 누시뇨의 입을 빌어 '나무늘보'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수아르 족은 총을 휴대한 백인처럼 애꿎은 살쾡이를 쫓지 않고, 게으른 나무늘보를 찾아다닌다. 왜냐하면 옛날에 착한 동족을 죽이는 잔인한 족장이 있었는데, 부락의 원로들이 그를 죽이기로 결정하자 나무늘보로 변장해 꼬리긴원숭이들 사이로 숨었기 때문이다. 이 나무늘보가 동족을 죽이고 자연을 파괴하는 읍장, 다시 말해 우리 인간에 대한 알레고리임은 쉽게 짐작할 수가 있다.


흔히 야생은 야만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이 소설에서는 거꾸로 야만적인 것이 인간이고 인간적인 것이 야생이다. 암살쾡이는 최후의 결전을 벌이기 전에 주인공 노인을 어딘가로 이끈다. 총을 맞아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수놈을 편안히 죽여 달라는 의도였다. 밀림의 짐승들과 수아르 족에게 죽음은 신성하고 존귀한 것이다. 수아르 족은 죽은 자의 용기와 영원한 평화를 기원하는 <어넨트>를 부르며 임종에 가까운 사람들을 떠나보낸다.

 

1의 자연에 대한 감상적 태도

 

[연애소설 읽는 노인]의 재밌는 점은 주인공 노인이 연애소설을 읽는다는 것이다. 문명과 자연을 대립시키는 소설은 대개 자연을 이상화하여 우리가 회복하거나 돌아 가야할 곳으로 그리기 쉽다. 그러나 이 소설은 야생의 상태에 합일될 수 없는 주인공이 연애소설을 읽기 위해 문명으로 돌아오는 장면에서 끝난다. 문자와 독서를 문명의 상징으로 본다면 갸우뚱해질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루카치에 따르면 "관습의 세계는 제2의 자연이다. 1의 자연과 마찬가지로 이 제2의 자연은 단지 알려져 있는 필연성의 체계라고 정의될 수 있다." "1의 자연에 대한 제2의 자연의 낯설음, 즉 자연에 대한 현대의 감상적인 태도는 스스로가 만든 환경이 인간에게는 이제 그들이 안주할 고향이 아니라 감옥이 되어 버렸다는 체험의 투영에 불과하다."


자연을 감상적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제2의 자연, 엘 이딜리오의 무차별적이고 맹목적인 지배를 고발하는 것은 치과의사 '로비쿤도 로아차민'이다. 그는 환자가 아픈 것도 정부 탓이요, 모든 것에 정부 탓을 하는 사람이다. 그의 거친 입담은 흠이 아니라 호감 가는 요소로 그려진다. 그는 양키에게도 직설적인 욕설을 날리는 사람이다.


관습의 세계는 엘 이딜리오만이 아니라 소설 속 소설에 나오는 베네치아도 예가 될 수 있다. 안토니오와 수색대는 카누가 아닌 배, 곤돌라를 이해할 수가 없다. 나아가 늪지 위에 세워졌다는 도시의 전체상을 제대로 상상할 수가 없다. 큰 배처럼 집을 몰고 다니지 않고 곤돌라로 통행을 하는 것도 수수께끼다. 물에 뜨는 가벼운 돌로 집을 짓고 판자를 대었으리라는 것이 그나마 납득 가능한 설명이다. 소설 속의 읍장처럼 문명화된 우리는 물의 도시 베네치아를 다른 인물들처럼 낯설게 보지 못한다. "비인간적인 환경의 생소함"을 극복하려는 윤리적 주체가 아니었던 것이다.


루카치 이론에 있어서 자연을 체험하는 실체인 주체는 '윤리적인 주체'로서만 구성적일 수 있다. 안토니오에게는 제1의 자연으로서 밀림과 제2의 자연으로서 엘 이딜리오가 놓여 있다. 안토니오의 내면으로부터 길어 올린 윤리는 그가 밀림을 감상적으로만 바라볼 수 없게 만든다. 엘 이딜리오의 관습과는 일치하지 않는 영혼의 규범에 따라 그는 소외를 극복하려고 나선 것이다.

 

소외를 극복하는 소설에 대한 찬미

 

소설은 실패할 줄 알면서 실패에 도전하는, 문제적 개인의 여정을 이야기하면서도 제2의 자연에서 소외된 주체가 '연애소설'을 선택하도록 했다. 왜 연애소설인가. 소설이라는 것은 관습의 세계에서 만들어진 창작물이 아닌가.


안토니오는 단순한 소설이 아니라 연애소설을 읽는다. 그는 모든 연애소설이 아니라 특정한 내용의 소설을 고른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나서 고통과 불행을 겪다가 결국은 행복하게 되는 내용"이다. 그의 취향을 결정지은 것은 '엘 도라도'까지 찾아가 읽게 된 [로사리오]. "그 책은 어쩌면 그가 진작부터 찾아 헤매던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 책에 담긴 것은 사랑, 온통 사랑이었다. 그 책은 등장인물들의 아픔과 인내를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으로 묘사해 놓았는지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에 돋보기가 흥건히 젖을 정도였다."


안토니오가 좋아하는 소설은 자연적인 충동으로 열정적인 사랑을 나누는 연인들이 관습의 세계가 지배하는 무자비한 폭력 때문에 시련을 겪고 끝내는 사랑을 성취하는 이야기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 이야기를 읽고 난 독자로서 노인도 소설 속 연인들과 마찬가지로 순수한 감정을 느끼는 것이다. 수아르 족과 함께 있을 때는 연애소설이 필요 없었고, 사랑 그 자체를 위한 영원한 사랑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세계에서 안토니오는 연애소설 없이는 그러한 사랑을 체험할 수 없는 것이다.


루이스 세풀베다는 [연애소설 읽는 노인]에서 인간은 소설을 통해 윤리적 주체가 된다는 말을 하려는 것 같다. 다시 말해 영혼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인 소설을 통해 인간은 세계를 윤리적으로 구성하게 된다는 말이다. [연애소설 읽는 노인]은 야생에 대한 희구와 문명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는 환경 소설이라기보다 주체의 소외를 극복하는 문학에 대해 바치는 찬미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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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당한 몸 - 장애와 질병에 대한 여성주의 철학 그린비 장애학 컬렉션 2
수전 웬델 지음, 강진영.김은정.황지성 옮김 / 그린비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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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도, 밑줄도 부족할 정도로 전 구절이 좋은 책.


나는 자신의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한계를 구체적으로 선명하게 깨닫고 있는 사람들이나, 모든 것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도 마음대로 할 수 없음을 경험을 통해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장애인과 쉽게 동일시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사람들은 장애인을 타자로 생각하고 대우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 하지만 나는 반대로 장애의 범주를 너무 확장시켜서 장애인이 경험하는 타자화를 가볍게 치부해 버리는 시도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기도 한다. 모두가 한계와 불완전함을 갖고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어떤 면에서 장애인이라는 말이 그런 예이다. 이 말은 타자화되는 것 이외에도 신체와 정신적인 조건 때문에 그리고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걸림돌 때문에 한계와 괴로움을 겪는 사람들의 어려움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133쪽)

한 사회 내의 삶의 속도가 빨라질 때 더 많은 사람들이 장애를 가지게 되는 경향이 있다. 더 빨리 하려고 애쓸수록 결과적으로 더 많은 신체적 손상을 만들어 낼 뿐만 아니라, 그러한 ‘정상적인‘ 수행능력에 대한 기대치에 미칠 수 있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이기도 하다.(82쪽)

우리는 사람들이 언제나 자신의 몸을 통제할 수는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법을 알고, 그들에게 불가능한 일을 해내도록 하는 책임을 지우지 않는 것을 배워야 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몸으로 사는 삶의 현실을 좀더 기꺼이 마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213쪽)

메이 사턴은 [뇌졸중 그 후]라는 일기에서 "나에게 젊음이라는 것은 몸을 의식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과 연관되어 있는 반면, 노년은 종종 고통이나 몸 내부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의식적으로 극복해 나가는 일이다. 누구나 실제로 그것을 의식한다"라고 적었다.(3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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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덕 성령충만기
이기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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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만 봐서는 어느 기독교인의 간증 에세이 같기도 한 '최순덕 성령충만기'는 이기호 소설집 [최순덕 성령충만기]의 표제작이다. 만화적인 표지 일러스트를 보건대 우스꽝스러운 내용이 담겨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최순덕 성령충만기'를 펼쳐들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것은 성경책과 같은 구성이다. 이 소설은 성경과 마찬가지로 장과 절로 되어 있고, 페이지 디자인마저 성경처럼 2단으로 해놓았다. 인터넷이 발달하고 미디어가 범람하는 요즘과 같은 시대에 문자 텍스트를 부여잡고 있는 소설이 어떤 형식을 취해야 하는지는 모든 소설가들이 고민하는 부분일 것이다. 이기호는 그에 대한 나름의 응답으로 '성경'을 빌어온 것 같다. 소설집 [최순덕 성령충만기]에는 표제작 외에도 랩 가사를 여기저기 들여온 '버니', 피의자 질의응답으로 되어 있는 '햄릿 포에버'처럼 소설 형식에 대한 작가의 분투를 볼 수 있는 소설들이 있었다.


성경을 차용한 것이 흥미로웠던 이유는 문체를 구사하는 방식 때문이기도 했다. "~하기를", "~하되", "~하더라", "~나이다" 등의 어미만을 사용해서 작가의 특징이 드러나는 문체를 쓸 수 있을지의 문제, 문장 하나당 한 절인 것이 아니라 때로는 두세 문장이 한 절에 때로는 한 문장이 두 절에 걸쳐서 등장하는 것 등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틀에 박힌 형식 같지만 거기에도 이기호라는 작가 개인의 표지가 드러나 있다는 점에서 재미있는 소설이었다.


형식이 다소 새롭다고 해서 무조건 신선하다거나 좋은 소설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최순덕 성령충만기'는 주인공인 '최순덕'이라는 인물을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설정함으로써 엄숙해야 할 성경과 신앙을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비틀고 있다. 성경이라는 외피를 입고 있기에 차츰 속살을 들여다볼수록 독자가 키득댈 수밖에 없는 효과를 빚어낸 것이다. 최순덕은 소설 내의 타인들, 소설 밖의 타인(독자)들이 보기에는 매우 답답하고 진지한 인물인데, 스스로 진지한 인물만큼 희극적인 인물은 없는 법인지라 소설 내내 웃음을 유발한다.


또 하나의 중요인물인 바바리맨 '아담'이 순덕과 짝을 이루면서 소설의 희극성은 한층 배가된다. 아담은 어머니 약값, 아이들 학원비에 시달리는 간호조무사 학원 총무다. 남성의 상징인 성기마저도 작고 어디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왜소한 인간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아담이 순덕보다 사회적으로 나은 인물일 수도 있다. 순덕은 대학도 떨어지고, 변변한 직장도 없으며, 신앙을 빙자해 현실 도피를 하는 인물이다. 아담은 직장과 가족이 있지만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는 흔하디흔한 인물이다. 두 인물 모두 현대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독자 자신이거나 주변 사람들과 조금씩 겹칠 수 있는 모습을 하고 있고, 그것 때문에 독자들은 깔깔대던 유머에서 코끝 시린 페이소스로 나아가게 된다.


최순덕이 '()'을 상징한다면 아담은 '()'을 대변할 텐데, 삶의 속속들이 성스러움으로 시종하는 순덕의 삶이 눈물 어린 웃음을 자아내는 것만큼이나 삶의 무게에 억눌려 있는 노출증 환자의 삶도 알싸한 웃음을 선사한다.


두 남녀의 결합으로 인해 속에서 살면서도 성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당연한 욕망이라는 생각이 뒤집힌다. 결말에 이르러 최순덕과 아담이 야채 행상을 하며 신실한 부부로 사는 것이 순덕이 비로소 현실에 뿌리내린 것인지 또는 아담에게 참다운 구원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여지가 많다. 작가는 범속한 것이 성스럽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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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가족
공선옥 지음 / 실천문학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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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선옥의 [유랑가족]은 농촌 마을과 서울 변두리를 배경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유랑가족]에는 '겨울의 정취', '가리봉 연가', '그들의 웃음소리', '남쪽 바다, 푸른 나라', '먼 바다'의 다섯 편이 묶여 있다. 각 편의 이야기가 연결이 되고 등장인물들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연작소설의 형식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고단하고 끔찍스러운 삶, 거기서 벗어나려는 악다구니와 몸부림을 그리고 있기에 이 소설의 모든 인물들이 욕망하는 것은 ''이다. ''은 유랑하는 가족이 모여살 수 있게 하는 어떤 것이기도 하다.


먼저 '먼 바다'의 등장인물들을 르네 지라르의 '욕망의 삼각형' 개념에 대입하여 살펴보았다. 전라도 금진에 사는 영녀는 박종만과 결혼하기 전에 희다방 '미스 조'로 통했다. 박종만이 사는 마을이 곧 수몰될 예정이어서 보상금이 나왔고, 그 보상금은 영녀가 읍내 다방에 진 빚을 갚는 데 쓰였다. 영녀가 종만과 결혼까지 한 것은 고마움이기보다는 남은 보상금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가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남은 보상금은 농협 빚을 갚느라 사라졌다. 영녀는 술만 마시는 남편, 자신을 구박하는 시어머니, 그리고 좀체 말을 듣지 않는 동생뻘의 의붓아들 기찬에게서 탈출하고 싶다. 이런 상황에서 종만은 노덕필의 하우스를 빌려 국화 모종을 심기로 한다. 시설 작물에 대한 보상금을 노리고, 일이 잘 되면 자신과 덕필이 73으로 보상금을 나누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덕필은 종만의 아내 영녀에게 관심이 있고, 돈이 나오면 영녀와 도망을 할 생각이다.


박종만이 갖고 싶어 하는 것은 영녀를 만족시킬 수 있는 돈이다. 그 돈은 덕필을 잘 구슬려야 자신의 것이 될 수가 있다. 하우스를 임대해 주겠다는 덕필의 허락이 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조영녀가 욕망하는 것은 재밌는 삶을 살게 해줄 돈이다. 그녀에게 있어서 돈 없는 세상은 재미 없는 삶을 허락할 뿐이다. 처음에 그 중개자는 종만이었지만, 보상금을 빚 갚느라 날려버린 그는 더 이상 효용이 없다. 그녀에게 욕망의 중개자는 노덕필이 된다. 덕필도 돈이 있어야 자신이 욕망하는 대상인 영녀를 데리고 올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종만과 달리, 매개나 중개자 없이 보상금을 모을 수가 있다. 종만의 국화 모종을 통해 나올지 말지 모르는 보상금은 그에게는 있으면 좋고 없어도 괜찮은 것이다.


박종만의 욕망은 조영녀의 욕망보다 비극적이다. 중개자인 노덕필과 경쟁관계에 놓인 내면적 간접화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종만은 덕필과의 경쟁관계에서 실패했다. 덕필과 영녀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고, 덕필이 자신의 여자와 보상금을 가로챌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덕필에게 따지기보다는 아들과 어머니를 단속하여 영녀의 마음을 붙잡으려는 소극적 행동을 취할 뿐이다.


이 외에도 [유랑가족]의 각 단편에는 영녀처럼 도망치는 여자들의 이야기가 많다. 이야기의 중심 무대인 '신리'에서 달곤의 처이자 미정이 엄마였던 서용자도 그렇다. 서용자에게 서울로 가자고 한 '명화'는 중국 해림의 남편 용철에게서, 한국 신리의 남편 기석에게서 두 번 도망쳤다. 부대동에 사는 인숙도 종수 아빠를 피해 아들을 두고 나왔다. 이들에게는 사랑하는 남자와의 삶, 또는 자식과 함께 사는 삶이 욕망하는 대상이다. 그러한 삶에는 반드시 돈이 필요하고 이 돈을 약속하는 사람들이 중개자로 자리한다.


'겨울의 정취''가리봉 연가'에 등장하는 명화는 오빠의 간암 치료비가 필요해 결혼을 택한 이주 여성이다. 처음에는 기석과 결혼하면 식구들도 한국으로 부를 수 있고 오빠의 병도 고칠 수가 있다고 믿었다. 명화는 그것이 자신의 착각이었음을 알자 남편과의 결혼생활에 흥미를 잃는다. 가족들을 불러들이고 멋쟁이로 사는 삶에 대한 욕망은 읍내 식당에서 만난 배 사장이라는 새로운 중개자를 찾는다.


명화를 따라 상경한 용자의 욕망은 애초에는 조금 불분명하다. 용자는 가리봉동 공장 시다를 하다가 고향에 돌아왔고 마을의 달곤에게 겁탈을 당해 그와 결혼을 하고 11년을 살았다. 달곤은 술을 마시면 폭력을 저지르는 남편이었고, 용자는 돈이 있으면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막연하게 돈이 있으면 좋겠다는 그녀의 생각은 명화를 만나면서 구체화된다. 새로운 삶이라는 대상의 중개자인 명화의 욕망을 용자의 욕망이 닮아간다. 얼굴 안 타고 "보얀하게 멋쟁이로 살"아가는 서울 여자라는 명화의 욕망은 용자를 두근거리게 한다. 명화에게 배신을 당하고, 카센터 훈이와 살림을 차릴 기대가 무너진 후에도 용자는 명화가 어떻게 사는지를 궁금해 하고, 명화를 만나 자신의 삶이 조금이나마 나아지리라는 실낱 같은 기대를 품는다. 용자의 욕망은 명화를 통해 암시 받은 가짜 욕망이다. 그러나 도시에 나와 서울 멋쟁이처럼 변한 자신의 모습이 용자 자신도 싫지가 않다. 시골 노인들의 눈총과 간섭을 받으며 흙과 거름을 만지는 삶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스스로 결론을 내린다. 마을에 있을 때 유난히 피부에 신경을 쓰던 명화의 모습은 서울에 올라와 노래방 도우미로 일하는 용자의 모습이 된다.


[유랑가족]은 도시 빈민, 이주 여성, 농촌 총각의 가난한 현실을 다루고 있기에 독자는 읽는 내내 불편한 느낌이 들 수밖에 없다. 특히 인물들은 가난을 탈피하게 위해 돈을 간절하게 욕망하고, 그 돈에 가까이 가기 위해 만나게 되는 중개자들은 거개가 주체를 배신한다. 주체가 매개를 통해, 또는 중개자와 협력해서 돈을 벌 수 있으면 좋으련만 각 인물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사기치고 배신하면서 근근이 살아갈 수밖에 없을 만큼 사정이 녹녹치 않은 것이다. 이 소설집에는 아이들도 많이 나온다. 미정, 영기, 명호, 공주, 영주 등이다. 부모를 잃었거나 부모와 떠도는 이 아이들도 돈을 욕망할 것이고, 또 한 번 배신을 당할 것이다. 책의 말미에 펑크 난 트럭에 탄 명호를 남겨두고 책장을 덮는 마음이 무척이나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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