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소설 읽는 노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23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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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콰도르의 아마존 지역의 부락마을 '엘 이딜리오'에 암살쾡이가 접근해 온다. 살쾡이의 위협은 금발 백인 남성의 시신을 발견하는 것에서 시작되고, 노다지꾼 '나폴레온 살리나스'가 도주 중에 사망한 사건을 거쳐, '플라센시오'라는 가게를 운영하는 미란다의 노새가 주인을 잃고 도망쳐 오면서 점차 고조된다. 잇따르는 사건이 살쾡이의 소행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수색대를 이끄는 것은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라는 일흔 즈음의 노인이다. 루이스 세풀베다의 [연애소설 읽는 노인]은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와 암살쾡이의 대결을 그리면서 매 국면마다 현재와 긴밀하게 연결되는 노인의 과거를 엮어가는 소설이다.

 

정신적 고향을 찾는 안토니오

 

안토니오는 게오르그 루카치가 [소설의 이론]에서 가리키는 '문제적 개인'에 속하는 인물이다. 안토니오의 과거와 현재가 얽혀 있는 소설 구성 방식은 "모든 체험은 자기인식을 위한 과정 속에서 삶의 의미를 향해 나아가는 주인공의 방향에 의해서 유기적으로 조직되""각각의 요소들이 중심 인물과 삶의 전개과정에서 구체화되는 삶의 문제와 관계를 맺음으로써 하나의 통일적인 구조를 획득하게 되는" 소설의 모범을 보여준다. 소설의 처음과 끝이 주인공 인생의 탄생과 죽음과 일치할 필요는 없을 것이나, 작가는 서사적 총체성을 획득하기 위해 삶의 전개과정을 성실하게 직조하고 있다.


안토니오가 태어난 고향은 산간 지방인 '산 루이스'. 그러나 그곳은 루카치가 말하는 "본래의 정신적 고향과 삶의 의미를 찾아 길을 나서는 동경과 모험에 가득 찬 자기인식에로의 여정"에서의 고향은 아니다. 아내 '돌로레스 엔카르나시 온 델 산티시모 사크라멘토 에스투피냔 오타발로'와의 사이에서 아이가 생기지 않자 안토니오는 고향을 떠나 개간지인 '엘 이딜리오'에 자리를 잡는다. 혹독한 열대 우림의 기후는 부부에게 정착을 허용하지 않고, 돌로레스는 말라리아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홀로 남은 안토니오에게 '엘 이딜리오'는 정신적 고향이 될 수 없다.


안토니오를 받아들이는 장소는 아마존의 밀림이다. 아내와 모든 것을 빼앗은 밀림, 실패를 떠안겨 귀향을 막아선 밀림은 한때 그에게 "푸른 지옥의 세계"였다. 그러나 인디오인 수아르 족의 안내를 받아 사냥을 비롯해 자연에서 사는 법을 배운 안토니오는 "주인 없는 푸른 세계에 매료"되고만다. 안토니오가 밀림에 받아들여지는 최초의 통과의례는 'X'에 물린 사건이다. 비록 독이빨에 당했지만 자신의 공격자를 토막 내고 돌아와 고열을 이겨낸 안토니오는 그제야 수아르 족에게 밀림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진다.

 

노란 눈과의 예정된 싸움과 패배

 

안토니오는 X뱀에 물린 뒤 죽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들을 위한 <뱀의 축제>에서 환각제인 '나테마'를 마시고 "무한한 녹색 밀림의 세계의 일원이 되어 있는, 마치 수아르 족처럼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본다. 이 환상에서 그는 형체, 크기, 냄새, 소리가 없이 두 개의 노란 눈만이 번득이는 어떤 동물의 발자국을 쫓는다. 이 동물의 실체는 소설 후반부에, 전반부와 마찬가지로 꿈속 환상에서 드러난다. 수색대가 떠나고 혼자 남아 암살쾡이와 대면하기로 결심한 노인은 야영지의 카노 속에서 잠이 든다. 꿈에 나타난 무언가는 잉꼬, 금강앵무새메기, 수염수리매로 변신하는데 규정할 수 없는 생명체인 그것에서 노란 눈만이 변함없이 반짝인다. 가는 곳마다 노란 눈이 막아서는 꿈은 현실로 이어지고, 노인은 드디어 암살쾡이와 맞닥뜨린다.


노란 눈의 암살쾡이는 노인이 찾아 헤매던 삶의 목표다. 진정한 사냥꾼으로서 성장한 짐승과 용기 있게 맞대결하기 위해서 안토니오는 이 수색을, 전 인생을 걸어왔다. 그러나 이 목표는 실패할 것이 예정된 것이었고, 안토니오 자신도 "길은 시작되었는데도 여행은 완결된"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안토니오가 수아르 족의 세계, 밀림에서 추방된 계기가 된 누시뇨의 죽음에서 이미 확인된 사실이다. 백인 노다지꾼들은 다이너마이트 터지는 소리에 놀라 달려온 인디오들에게 총을 난사했고, 누시뇨는 그 총에 맞아 숨을 거둔다. 안토니오는 친구의 죽음에 상응하는 복수를 하려 했지만 독화살이 빗나가 총을 쏘게 된다. 인디오들의 믿음에 따르면 누시뇨의 영혼은 불행에 처하게 된 것이다. 백인과 용감하게 싸우고 끝을 보지 못한 안토니오는 암살쾡이와의 대결에서도 총을 사용한다. 살쾡이는 두 발의 총을 맞고 숨을 거두고 안토니오 역시 빗나간 총탄에 부상을 입게 된다. 승리자가 없는 대결이 끝나고 안토니오는 연애소설이 기다리는 엘 이딜리오의 오두막으로 돌아간다.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싸우는 자기인식과 자기지양의 아이러니가 실현된 것이다.

 

현대 문명이 에콰도르에 남긴 그림자

 

한편 [연애소설 읽는 노인]'환경소설'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고, 세풀베다 스스로도 작가의 말을 통해 환경운동가인 '치코 멘데스'에게 바치고 있다. 때문에 이 소설을 문명과 야만의 대립으로 읽어내는 것은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다소 이분법적인 도식으로 분석한 후, 이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 보고자 한다.


문명 세계는 뚱보 읍장이 지배하는 부락 '엘 이딜리오'로 상징된다. 소설에는 안토니오가 읍사무소에 가서 철 지난 신문을 읽는 장면이 지나가는데, 부카람 의원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1996년 에콰도르 대통령이 된 실존인물 '압달라 부카람'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가 정치를 시작한 1981년부터 이 책이 출판된 1989년 사이의 언젠가를 이 소설의 현재 시점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따르면 "1980년대 전반에 걸쳐 에콰도르의 경제는 기름값의 하락세, 높은 인플레이션, 지진과 폭풍 재해에 따른 혼란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스페인 식민지 시기 이후 수백 년간 누적된 원주민 차별, 1970년대 석유수출국이 되면서 발전한 경제, 증대되는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와 무분별한 아마존 개발 등이 맞물리면서 혼란을 겪고 있는 에콰도르의 모순이 작은 부락 엘 이딜리오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에콰도르 내부의 인종 문제도 소설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이베리아반도 출신의 서자를 아버지로 둔 치과의사는 에콰도르 인구중 대다수를 차지하는 유럽인과 원주민의 혼혈인 메스티소일 것이다. 그들 아래에는 밀림에 사는 수아르 족, 문명에 투항한 히바로 족과 같은 원주민 인디오가 있다. 같은 에콰도르 국민은 아니지만 백인인 양키들은 금을 노리고 남쪽으로 몰려와 부락과 밀림을 휘젓는 사람들이다.

 

야만적인 인간, 인간적인 야생

 

문명 세계에 사는 인간의 대표로는 읍장이 등장한다. 읍장은 소설에서 유일하게 이름이 없는 중요인물이다. 문명 세계의 지배자로서 종이 한 장으로 노인을 주거지에서 내쫓을 수 있는 사람이지만, 야생 세계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기에 아무에게도 권위를 가지지 못한다. 그저 무용한 것을 넘어서서 해악이 된다. 자신의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하고, 야생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함부로 총질을 하고, 같이 있는 생명체를 위험에 처하게 한다. 주인공의 시점에서 보면 한심하고 우스꽝스러운 인물이다. 그러나 나를 포함하여 도시에 사는 독자 대부분은 읍장과 같을 것이다. 읍장은 하나의 스테레오타입이면서 우리 자신이기도 하기에 단순히 '사람'으로 부르거나 우리 자신의 이름을 넣어도 무방할 것이다.


야생 세계의 인간으로는 '누시뇨'가 있다. 다른 수아르 족 부락에서 떠내려 온 누시뇨는 주인공 노인과 다르게 수아르 족에게 온전히 동족으로 받아들여진다. 인디오 전사이자 "사냥이나 수영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누시뇨는 안토니오의 친구가 되었다. 작가는 누시뇨의 입을 빌어 '나무늘보'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수아르 족은 총을 휴대한 백인처럼 애꿎은 살쾡이를 쫓지 않고, 게으른 나무늘보를 찾아다닌다. 왜냐하면 옛날에 착한 동족을 죽이는 잔인한 족장이 있었는데, 부락의 원로들이 그를 죽이기로 결정하자 나무늘보로 변장해 꼬리긴원숭이들 사이로 숨었기 때문이다. 이 나무늘보가 동족을 죽이고 자연을 파괴하는 읍장, 다시 말해 우리 인간에 대한 알레고리임은 쉽게 짐작할 수가 있다.


흔히 야생은 야만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이 소설에서는 거꾸로 야만적인 것이 인간이고 인간적인 것이 야생이다. 암살쾡이는 최후의 결전을 벌이기 전에 주인공 노인을 어딘가로 이끈다. 총을 맞아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수놈을 편안히 죽여 달라는 의도였다. 밀림의 짐승들과 수아르 족에게 죽음은 신성하고 존귀한 것이다. 수아르 족은 죽은 자의 용기와 영원한 평화를 기원하는 <어넨트>를 부르며 임종에 가까운 사람들을 떠나보낸다.

 

1의 자연에 대한 감상적 태도

 

[연애소설 읽는 노인]의 재밌는 점은 주인공 노인이 연애소설을 읽는다는 것이다. 문명과 자연을 대립시키는 소설은 대개 자연을 이상화하여 우리가 회복하거나 돌아 가야할 곳으로 그리기 쉽다. 그러나 이 소설은 야생의 상태에 합일될 수 없는 주인공이 연애소설을 읽기 위해 문명으로 돌아오는 장면에서 끝난다. 문자와 독서를 문명의 상징으로 본다면 갸우뚱해질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루카치에 따르면 "관습의 세계는 제2의 자연이다. 1의 자연과 마찬가지로 이 제2의 자연은 단지 알려져 있는 필연성의 체계라고 정의될 수 있다." "1의 자연에 대한 제2의 자연의 낯설음, 즉 자연에 대한 현대의 감상적인 태도는 스스로가 만든 환경이 인간에게는 이제 그들이 안주할 고향이 아니라 감옥이 되어 버렸다는 체험의 투영에 불과하다."


자연을 감상적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제2의 자연, 엘 이딜리오의 무차별적이고 맹목적인 지배를 고발하는 것은 치과의사 '로비쿤도 로아차민'이다. 그는 환자가 아픈 것도 정부 탓이요, 모든 것에 정부 탓을 하는 사람이다. 그의 거친 입담은 흠이 아니라 호감 가는 요소로 그려진다. 그는 양키에게도 직설적인 욕설을 날리는 사람이다.


관습의 세계는 엘 이딜리오만이 아니라 소설 속 소설에 나오는 베네치아도 예가 될 수 있다. 안토니오와 수색대는 카누가 아닌 배, 곤돌라를 이해할 수가 없다. 나아가 늪지 위에 세워졌다는 도시의 전체상을 제대로 상상할 수가 없다. 큰 배처럼 집을 몰고 다니지 않고 곤돌라로 통행을 하는 것도 수수께끼다. 물에 뜨는 가벼운 돌로 집을 짓고 판자를 대었으리라는 것이 그나마 납득 가능한 설명이다. 소설 속의 읍장처럼 문명화된 우리는 물의 도시 베네치아를 다른 인물들처럼 낯설게 보지 못한다. "비인간적인 환경의 생소함"을 극복하려는 윤리적 주체가 아니었던 것이다.


루카치 이론에 있어서 자연을 체험하는 실체인 주체는 '윤리적인 주체'로서만 구성적일 수 있다. 안토니오에게는 제1의 자연으로서 밀림과 제2의 자연으로서 엘 이딜리오가 놓여 있다. 안토니오의 내면으로부터 길어 올린 윤리는 그가 밀림을 감상적으로만 바라볼 수 없게 만든다. 엘 이딜리오의 관습과는 일치하지 않는 영혼의 규범에 따라 그는 소외를 극복하려고 나선 것이다.

 

소외를 극복하는 소설에 대한 찬미

 

소설은 실패할 줄 알면서 실패에 도전하는, 문제적 개인의 여정을 이야기하면서도 제2의 자연에서 소외된 주체가 '연애소설'을 선택하도록 했다. 왜 연애소설인가. 소설이라는 것은 관습의 세계에서 만들어진 창작물이 아닌가.


안토니오는 단순한 소설이 아니라 연애소설을 읽는다. 그는 모든 연애소설이 아니라 특정한 내용의 소설을 고른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나서 고통과 불행을 겪다가 결국은 행복하게 되는 내용"이다. 그의 취향을 결정지은 것은 '엘 도라도'까지 찾아가 읽게 된 [로사리오]. "그 책은 어쩌면 그가 진작부터 찾아 헤매던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 책에 담긴 것은 사랑, 온통 사랑이었다. 그 책은 등장인물들의 아픔과 인내를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으로 묘사해 놓았는지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에 돋보기가 흥건히 젖을 정도였다."


안토니오가 좋아하는 소설은 자연적인 충동으로 열정적인 사랑을 나누는 연인들이 관습의 세계가 지배하는 무자비한 폭력 때문에 시련을 겪고 끝내는 사랑을 성취하는 이야기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 이야기를 읽고 난 독자로서 노인도 소설 속 연인들과 마찬가지로 순수한 감정을 느끼는 것이다. 수아르 족과 함께 있을 때는 연애소설이 필요 없었고, 사랑 그 자체를 위한 영원한 사랑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세계에서 안토니오는 연애소설 없이는 그러한 사랑을 체험할 수 없는 것이다.


루이스 세풀베다는 [연애소설 읽는 노인]에서 인간은 소설을 통해 윤리적 주체가 된다는 말을 하려는 것 같다. 다시 말해 영혼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인 소설을 통해 인간은 세계를 윤리적으로 구성하게 된다는 말이다. [연애소설 읽는 노인]은 야생에 대한 희구와 문명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는 환경 소설이라기보다 주체의 소외를 극복하는 문학에 대해 바치는 찬미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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