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ppysf의 행복한책읽기 2
문제는 유통이다
-유통이 변해야 출판이 산다
앞서의 글에서 도서정가제 개정안을 둘러싼 문제를 살펴보면서, 도서정가제 문제를 논의함에 있어서 어느 한쪽 이해 당사자만의 의견을 수렴하여 다른 이해 당사자의 희생을 강요하는 지금의 도서정가제 논의는 문제가 있다는 점을 짚어보았다.
이번에 이야기할 출판 유통에 관한 문제도 도서정가제 문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까닭에 지난번 <도서정가제 유감>이란 글에서 명확하게 지적하지 못한 문제 두 가지만 더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첫째는, 기존의 도서정가제 법안인 <출판및인쇄진흥법>이 온오프라인의 합의에 의해 만들어진 한시적인 법이라는 점이다. 그 이전에 무한 출혈경쟁상태에 있던 도서할인제도에 대한 문제를 놓고 온오프라인서점이 극적으로 합의하여 온라인서점에 한해 1년 이내의 신간에 한해 10% 할인을 허용하였는데, 이러한 도서정가제 법안도 2007년까지 시한이 정해져 있는 한시적인 법안이었다는 것을 반드시 확인할 필요가 있다. 2008년 이후에는 도서할인을 다시 허용하기로 하면서 이런 한시적인 법안을 합의 도출한 것은 2007년까지 오프라인서점이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시간을 갖자는 의미에서였다.
그런데 지금 발의된 <출판및인쇄진흥법 개정안>은 ‘10% 할인’과 ‘2007년까지 한시적 허용’이라고 하는 기존 합의의 틀을 전면부정하고 전적으로 출판사들과 오프라인서점만의 입장을 반영하고 있다.
2007년까지 오프라인서점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한시적 성격의 합의 결과를 이렇듯 무시한다면, 도대체 대한민국의 출판사들과 오프라인서점은 도서정가제 외에는 전혀 경쟁력 있는 장치를 갖추지 못했다는 고해성사를 하자는 것인지 나는 궁금하다.
둘째로, 현재의 도서정가제 법이 가진 한계 또는 문제점을 논의하면서 거의 모든 전적인 비난의 화살을 10% 할인과 그 이상을 넘어서는 마일리지 제도를 교묘히 이용한 온라인서점 에게만 돌리는 것이 온당한가 하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다.
지금의 도서정가제 법안에는 온라인서점에서 신간을 10% 할인하는 것을 허용하는 예외를 제외하고는, 서점과 독자에게는 모든 신간 도서를 정가에 판매하고 구입할 것을 의무화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온라인서점의 10% 할인과 마일리지, 또는 1+1할인 판매가 출판시장 붕괴의 직접적인 원인이란 말인가? 온라인서점의 시장점유율은 고장 15%를 넘지 못하고 있는데, 이 15%가 나머지 85%보다 더 큰 책임이 있다는 말인가?
나는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15%도 15% 또는 15% 이상의 책임이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현재의 출판시장 문제의 최소한 85% 또는 그 언저리에 해당하는 분량만큼의 책임은 출판사와 오프라인서점 그리고 도매상들에게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출판 유통이 변해야 출판이 산다
스스로에게 솔직히 한번 물어보자.
독자들에게는 책값의 100%를 주고 살 것을 법으로까지 강제하면서, 그리고 일반 소매서점들에게는 65~70%에 책을 공급하면서, 유독 대형서점에만 45%~55%(심지어는 37%까지!) 공급하는 출판사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는가? 독자가 오프라인서점에서 100% 제값 주고 사는 것보다 10% 할인에 마일리지 더 얹어 사는 것이 문제라고 한다면, 서점에 따라 (업계의 관행에도 어긋나게) 들쭉날쭉 제멋대로인 공급률로 책을 공급하는 출판사들은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말인가?
그렇게 할인 받은 책의 이익을 독자에게 환원하기보다는 전부 서점의 몫으로 가져가는 서점들은 문제가 없다는 말인가? 온라인서점의 마일리지와 1+1 행사가 문제라면, 대형오프라인 서점들의 회원제 마일리지 적립과 오프라인서점에서의 1+1 행사는 문제가 아니란 말인가?
책을 가져간 지 2개월 이상 지나서 그것도 4개월짜리 어음으로, 그나마 은행권 어음도 아닌 자가어음(문방구어음)을 발행하면서, 바로 옆 책상에서 4개월 이자 떼고 현금으로 할인해주는 도매상들은 정말 아무런 책임도 없다는 말인가? 수금 날짜가 가까워 오면 창고에 있는 재고도서들을 대량으로 반품한 후에 수금일이 지나서 다시 주문하는 일을 반복하는 일부 도매상들은 아무 문제가 없다는 말인가?
어떤 책이 얼마나 팔릴지, 초판 발행부수는 어느 정도가 적당한지, 도매상의 재고는 어느 정도 가지고 있을지 체계적으로 계산하는 시스템이나 능력 없이 ‘감으로’ 출판하고 주문하는 출판사나 도매상들은 전적으로 무죄하다는 말인가?
이런 문제의식 위에 현재의 출판 유통구조를 살펴보고, 그리고 그 문제점들을 하나하나 짚어보기로 하자.
책을 사고팔고 유통하는 과정으로 나누자면 책의 판매구조는 도매상(중대형 유통회사)과 소매상(중소형 서점)으로 나눌 수 있겠고, 서점의 규모에 따라 이야기 하자면 출판사와 직거래할 수 있는 중대형서점과 도매상을 통해 거래하는 소형서점으로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출판사가 서점과 거래하는 방식에 따라 크게 세 가지 방식으로 출판 유통을 나누어 보기로 한다.
첫째로, 대형 출판사라면 대부분 자체적인 영업망을 가지고 전국의 중대형 서점들을 직거래한다. 제대로 규모를 갖춘 곳이라면 지방서점까지도 직접 배송 차량을 가지고 책을 배송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곳은 책의 주문 및 수금 등의 영업은 자체 영업팀에서 하고 책의 배송만 따로 외부 용역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대형 출판사로서도 전국의 모든 소형 서점을 전부 관리할 수는 없으므로 소형서점들을 위해서는 대형도매상을 이용한다.
두 번째로, 중형 출판사라면 전국의 중대형 서점 중 출판사의 규모에 따라 적게는 70~80개의 중대형 서점과 많게는 120~150개 정도의 중대형 서점은 직거래를 하고 나머지 서점들은 도매상을 통해 거래한다. 중형 출판사들은 자체 배송시스템을 갖춘 경우가 드문 까닭에 창고관리나 배송 등은 외부 업체에 위탁한다.
세 번째로, 소형 출판사나 신생 출판사의 경우는 처음부터 전부 대형 도매상에 총판(또는 일원화)을 맡기거나 대형 서점 서너 곳만 직거래하고 나머지는 도매상에 총판을 준다.
여기에서 통상적으로 어떤 출판사가 도매상에 도서를 전적으로 총판(일원화)을 맡길 때는 도서 정가의 50%~55%에 맡기게 된다. 그리고 직거래하는 서점이 있는 경우에는 소매서점에는 대개 70%(출판사에 따라, 서점에 따라 65%~75% 정도로 편차가 있다), 도매상에는 60%(역시 여기도 ±5% 정도의 편차가 있다)에 맡기게 된다. 여기에 이른바 ‘매절’이라고 해서 현찰로 도서를 대량 구입하는 경우에는 5%~10%의 추가 할인을 하는 것이 출판계의 관례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관례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출판되는 종수가 많고 신간 시장에서의 책의 수명이 짧은 아동도서일수록 이런 관례는 더 잘 안 지켜지며, 일부 전집류의 경우는 상상을 초월하는 낮은 공급률로 서점이나 도매상에 공급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더더욱 심한 문제는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상도에 어긋난 일들이 대형 출판사들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다가 아르바이트생들을 동원한 ‘사재기’를 통해인위적인 베스트셀러를 만드는 일들이 최근까지도 버젓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고도 출판사나 오프라인서점이 온라인서점 탓하고 현행 도서정가제 핑계를 대는 것이 타당한 일일까? 일체의 도서할인과 마일리지를 금지하고 한시적이 아니라 항구적인 도서정가제를 도입하면 이런 일들은 사라질까?
천만의 말씀! 가능하면 한 푼이라도 더 싼 곳에서 책을 구입하고자 하는 독자들의 욕구가 사라질 수 없듯, 온갖 편법을 동원해서 나만이라도 잘 먹고 잘 살아보겠다는 이기적인 출판사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출판사는 도매상이나 서점에 마음대로 공급률을 조정하여 책을 공급하면서 독자에게는 일률적으로 정가의 100% 다 주고 책을 사라고 하는 것은 공정한 게임이 아니다. 만약 서점과 독자가 정가대로만 책을 사고팔아야 한다는 것을 법률로 정해야 한다면, 동시에 출판사가 도매상이나 서점에 책을 공급하는 공급률도 법률로 정해 놓아야 공정하다.
어느 한쪽은 선택의 여지없이 법률로 규제하면서 다른 한쪽은 책값을 얼마로 정하든, 그 책을 얼마의 공급률로 공급하든 전적으로 자유롭게 한다면 이것은 절대 공정한 게임이라고 할 수 없다. 책값을 정하는 문제와 도소매상에 책을 공급하는 문제를 출판사 자율에 맡겨놓을 수밖에 없다면 서점과 독자가 얼마에 책을 사고팔든 그것도 자율에 맡겨놓는 것이 옳지 않을까?
출판 유통 문제의 핵심은 지불 방식에 있다
나는 현재의 출판계의 불황과 유통 구조 왜곡의 핵심에는 도서대금 지불 방식의 문제가 있다고 본다. 온라인서점이 짧은 시간 급성장할 수 있었던 원인도 도서할인, 다양한 도서정보 제공, 새로운 독자문화의 형성 등 여러 가지 원인(독자 지향적 원인) 외에, 정확하게 팔리는 만큼의 책을 주문하고 그것을 곧바로 현금으로 결재하는 도서대금 지불 방식에도 원인(출판사 지향적 원인)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현재로선 한 종의 책이 유통되어 출판사로 대금이 지불되는 방식은 다음의 두 가지이다.
하나는 ‘매절’이라고 부르는 판매 방식으로서, 출판계에서 관례화된 공급률보다 5~10% 정도 추가 할인을 해주는 대신 통상 1개월 이내에 현금이나 은행권 어음으로 그 대금을 지불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런 방식은 대형 도매상이나 대형 서점, 그리고 온라인서점 등에서 일부 통용되는 방식일 뿐 일상적인 도서 유통의 방식은 아니다. 이 경우 도서의 소유권은 대금을 지불한 서점이나 도매상에 있으며, 파본 등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출판사로 반품되는 경우는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매절’로 책을 거래할 수 있는 것은 소수의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위탁’이라고 부르는 판매 방식으로서, 출판사에서 도매상이나 서점으로 책을 공급하지만 도매상이나 서점은 책이 팔리는 만큼 출판사에 대금 결재를 하는 방식이다. 도매상이나 서점에서 일종의 외상으로 책을 가져다가 팔고 팔린 책 대금은 결재해주되, 안 팔린 책은 다시 출판사로 반품을 하게 된다. 이 경우는 책의 소유권은 출판사에 있다. 대한민국에서 판매되는 책의 대부분이 이런 방식을 통해 판매되고 있다.
문제는 이 ‘위탁’이라는 독특한 거래 방식에 있다. 쉽게 말해, 서점에서는 어떤 출판사의 책을 ‘위탁’ 받아 짧게는 2개월 후에서 길게는 6개월 후에 현금(현금으로 결재해 주면 감사할 따름)이나 3~4개월짜리 어음(그나마 은행어음이면 이 역시 감사할 따름)으로 결재를 해주는 방식이다. 이러다보니 한 권의 책이 서점에 깔리고 독자에게 팔려서 출판사로 그 대금이 회수되기까지 6개월 이상이 걸리는 일은 부지기수이다.
여기에 만에 하나라도 잘못되어 도매상이나 서점이 부도라도 나는 날이면 그 사이에 밀린 판매대금은 고스란히 허공으로 날리게 되는 것이다. 이럴 경우에는 간신히 도매상이나 서점에 남아 있는 재고라도 다시 회수하게 되면 다행이지만, 어떨 때는 서점에 남아 있는 재고조차도 채권단에게 넘어가 책값도 못 받고 책도 회수하지 못하는 설상가상의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그래서 대형 출판사들이 담보를 잡고 한도액을 정하는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 주관적인 판단으로는 현재 출판계가 맞이하고 있는 총체적인 위기는 매출 15%의 온라인서점보다는 나머지 85% 오프라인 서점들의 이같이 불합리한 도서유통 구조 때문에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
내 돈 선불 주고 책을 사오는 방식이 되어야 팔릴 책과 그렇지 않은 책을 구분하려고 하는 노력이 뒤따를 것이며, 내 돈 주고 사온 책이라야 어떻게든 독자의 눈길을 끌어 판매하기 위한 온갖 노력을 기울일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위탁 방식으로는 일단 주문해놓고 안 팔리면 반품하면 그뿐이다.
나는 이런 도서 거래 방식이 바뀌지 않고는 출판계가 살아나기는 힘들다고 생각한다. 도서판매 점유율 15%인 온라인서점의 도서할인 판매보다 몇 배나 더 심각한 문제가 이런 ‘위탁 판매’와 ‘어음 결재’ 문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렇게 ‘위탁’ 받은 도서에 자기네 도매상이나 서점을 표시하는 도장을 찍어두는 것까지는 이해를 한다고 하더라도 잘 떼어지지도 않는 스티커나, 심지어는 책이 찢어지지 않고는 도저히 분리가 불가능한 전자감응센서까지 부착한 상태로 버젓이 반품을 보내버리는 일부 서점들의 형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멀쩡한 책을 찢기고 긁히고 오물 뒤집어쓰고 햇볕에 바랜 채 판매 불가능한 악성 재고도서로 만들어 반품시키는, 책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도 모르는 서점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나는 이 모든 일들이 ‘위탁’이라는 독특한 판매방식 때문에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만약 한 권이라도 책이 훼손되어 그 손실이 자기네 도매상이나 서점으로 돌아오게 되는 경우라면 이런 식으로 책을 함부로 취급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도서정가제가 ‘스크린쿼터’처럼 되기 위해서는
얼마 전 우리 출판사에서 출간한 김기덕 감독 평전이 일본에 판권 수출되어 4월에 일본판이 나왔다. 이 일로 이 책의 책임편집자인 영화평론가 정성일 선생과 자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우연한 기회에 스크린쿼터 문제가 화제로 떠올라, 한국 영화 발전에 스크린쿼터가 큰 기여를 한 것이 아닌가라는 나의 질문에 정성일 선생의 대답이 아주 의미 있는 것이어서 기억에 남아 있다.
정성일 선생의 대답은 스크린쿼터가 한국 영화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나, 이제는 ‘한국 영화’에 방점을 두어 스크린쿼터를 할 것이 아니라 ‘독립영화’ 나 ‘저예산영화’에 방점을 두어 스크린쿼터를 해야 할 시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었다. 굳이 <태극기 휘날리며>나 <실미도> 같은 영화를 스크린쿼터로 보호할 것이 아니라 <고양이를 부탁해>나 <송환> <빈집> 같은 저예산영화, 예술영화, 독립영화를 위한 스크린쿼터를 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요지의 이야기였다. 이제는 자생력을 가진 블록버스터형 한국영화가 아니라 스크린을 잡기도 힘들 뿐 아니라 힘들게 스크린을 잡아도 1주일도 안돼 막을 내려버리는 이런 ‘작은 영화’들을 위한 스크린쿼터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였다.
충분히 공감을 하며, 출판계를 위한 스크린쿼터쯤으로 여겨지는 도서정가제에 대해서도 이런 접근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굳이 출판사와 오프라인 서점(그것도 주로 메이저들만) 먹여 살리는 도서정가제가 아니라 온라인서점도 살고, 작은 출판사와 작은 서점, 그리고 독자들도 함께 공생할 수 있는 도서정가제는 불가능한 것일까를 생각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출판사가 책값이며 도서공급률이며 모든 것을 자율적으로 매길 수 있다면 서점과 독자도 자율적으로 할인하여 책을 사고팔도록 내버려 두어야 하고, 만약 그렇지 않고 굳이 도서정가제를 법으로 명시하여 정가 구입을 강제하겠다면 동시에 출판사에 대해서도 도매상과 소매서점에 일정 공급률로 책을 공급하도록 강제하여야 한다. 그래야 대형 출판사라고 베스트셀러를 가지고 있다고 함부로 책의 공급률을 출판사 멋대로 낮추거나 높이는 일이 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야 대형서점 뿐만 아니라 소형서점들도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 생길 것이다.
아울러, 심지어 “사재기도 마케팅 기법”이라고 황당한 궤변을 늘어놓는 일부 양식 없는 출판사들이 더 이상 출판계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사재기 같은 부당 거래행위에 대해서는 법률로 엄격하게 처벌하는 것도 도서정가제에 반영되어야 할 것이다.
기존의 합의 사항조차 어느 일방에 의해 순식간에 뒤엎어 버리고, 독자에게는 전혀 선택의 폭을 주지 않으면서 대형 출판사와 대형 서점들에게만 무한 선택의 자유를 허락하는 지금의 도서정가제 개정안은 확실히 문제가 있다.
내가 꿈꾸는 출판 유통의 모습
이상과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내가 꿈꾸는(꿈만 꾸는) 출판 유통의 모습은 이러하다.
가장 좋은 것은 시장의 자율적인 기능에 맡기는 것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시장의 흐름을 벗어나 법률로 규제하는 것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물론, 나의 이런 주장에 대해 ‘그렇다면 옛날처럼 무한 할인 경쟁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냐?’고 반문하실 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옛날처럼 무한 할인 경쟁으로 돌아가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인터넷서점들이 예전처럼 시장 점유율 1,2위에 목숨 걸며 수익은 뒷전이고 오로지 덩치만(동시에 엄청난 적자도 함께) 키우는 어리석은 짓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럴 여력도 없을 것이거니와, 이제 겨우 제대로 된 이익을 내면서 겨우 내실을 키웠는데 다시 스스로 부실의 무덤을 파는 어리석은 짓을 다시 반복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런 어리석은 짓을 다시 시작한다고 하더라도 이익을 제대로 내지 못하는 구조로 얼마나 오래 버티겠는가?
그리고 오프라인서점들은 왜 온라인서점처럼 변신하지 못하는가? 왜 소형서점들은 24시간 편의점처럼 시장에 적응하지 못하는가? 왜 동네서점들은 ‘영화마을’과 같은 변신을 하지 못하는가?
예를 들어보자. ‘영화마을’이라는 비디오대여 체인점은 당시로선 획기적인 온라인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어서, A라는 대여점에 없는 비디오테이프도 며칠 안에 B라는 대여점을 통해 구해서 고객에게 제공하는 시스템을 갖고 있었다. 서점이라고 그렇게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또 하나 예를 들어보자. 인터넷서점 모닝365는 ‘해피샵’이라는 지하철 내 도서수령 체인점을 만들어 한때 돌풍을 일으키기도 했었다. 그리고 지금은 다른 인터넷서점들도 이런저런 24시간 편의점과 제휴하여 24시간 편의점을 통해 책을 수령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동네서점은 왜 이런 시스템이 불가능한가? 지금도 ‘북새통’이라는 중소형 서점 공동 인터넷네트워크가 있는데, 이런 오프라인 전용 온라인서점을 왜 운영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온라인상으로 책을 주문하고(물론 할인은 가능하다) 하교하고 퇴근하는 길에 동네 길목에 있는 동네서점에 들러 책을 받아가는 일이 왜 불가능하다는 말인가?
발상만 바꾼다면 못할 일이 무엇인가? 온라인서점과 오프라인서점의 연합은 왜 불가능하다는 말인가? 굳이 지하철 역사 안에 따로 도서 수령처를 만들기도 하고, 별로 책과 긴밀하게 연관도 없는 24시간 편의점까지 온라인서점과 제휴하는데, 동네 곳곳에 박혀 있는 오프라인 서점과 온라인 서점이 연결된다면 얼마나 큰 시너지 효과가 날 것인가?
도서 검색과 주문은 온라인 서점에서 하고 책을 찾아가는 일은 동네서점에서 할 수 있다면, 오프라인 서점과 온라인 서점의 공존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 아닌가? 온라인 서점과 오프라인 서점이 적절하게 이익을 배분하는 시스템만 갖춘다면 못할 일이 무엇인가?
정부가 정말 출판과 서점들을 살릴 생각이 있다면, 돈들 일 없고 인력 투입될 일 없이 제일 하기 편한 법률제정 말고, 제대로 예산과 인력을 편성하여 이런 일에 더욱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공연히 도서정가제 문제를 가지고 온라인서점과 오프라인서점 사이에 분쟁만 일으킬 것이 아니라 전국에 도서관을 확충하고 그 도서관에 사서를 지원하며, 도서관에 소장할 도서들을 지원하는 실질적인 시스템을 갖추는 데 더욱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전국의 도서관이 양서들을 고를 수 있는 안목과 시스템을 갖추고 그 양서를 2,000~3,000권만 출판사->서점->도서관으로 이어지는 정상적인 유통망을 통해 구입해준다면 지금과 같은 극심한 출판 불황은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꿈꾸는 출판 유통은 ‘위탁’과 ‘어음’이 사라진 유통이다(이건 그야말로 정말 야무진 ‘꿈’이다). 현재의 출판 유통은 ‘위탁’이냐 ‘매절’이냐, 도매상이냐 소매상이냐 등에 따라 대금 결재 방식이 다르다. 위탁이면 70%인 것이 매절이면 60%, 도매상이면 60%인 것이 소매상이면 70%, 이런 식이다. 그런데 나는 이것을 도서대금을 결재하는 시기에 따라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꿈꾸는 도서유통 방식의 핵심은 도서 대금을 결재하는 시기에 따라 대금 결재율이 달라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도서를 구입한 지 1개월 이내에 현금 결재를 한다면 정가의 55%, 2개월 이내에는 60%, 3개월 이내는 65%, 4개월 이내는 70%, 이런 방식으로 결재를 하는 것이다. 4개월을 넘어간다면? 그런 경우는 거래를 정지하는 것이다. 여기에 베스트셀러 같은 경우를 곧바로 현금 지불하고 대량으로 구입하는 경우라면 50%에 결재하는 것도 고려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많이 팔리는 책은 낮은 가격에 많이 들여올 수 있고, 잘 안 팔리겠다 싶은 책은 높은 가격을 주더라도 대금을 좀 늦게 줄 수 있다.
이 경우의 장점은 출판사에서는 1~4개월 사이에 책값이 현금으로 회수되어 들어온다는 것이고, 서점으로서는 어차피 지불해야 할 책값을 빨리 지불하면 할수록 책 공급률을 낮출 수 있으니 좋다. 그리고 이렇게 한 번 구입한 책은 서점의 자산이므로 어떻게 해서든지 책을 팔기 위한 판매 전략을 서점에서 세우게 될 것이고, 만약 장기간 판매되지 않고 남아 있는 재고 도서에 대해서는 정가의 50%나 30%에 할인 판매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오프라인서점 중에서도 신간도서나 베스트셀러를 중심으로 온라인서점만큼 할인 판매하는 경쟁력 있는 서점이 출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현재의 위탁 방식이나 도서정가제 하에서는 책을 정가에 팔거나 안 팔리는 책들은 출판사로 반품시키는 것 외에는 서점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렇다보니 서점에는 아직 안 팔린채 깔려 있는 재고들이 잔뜩 있는데도 불구하고 출판사에서는 다시 책을 찍어 서점에 내보내야 하는 불합리한 일들이 종종 발생하게 된다.
미국, 독일 등의 선진국에서는 이렇게 서점에서 그 책을 현금으로 매입해서 서점의 자산으로 여기고, 이렇게 미리 현금 주고 책을 사와야 하기 때문에 어떤 책이 얼마나 팔릴지에 대한 체계적인 예측 시스템과, 재고로 남은 도서들을 합리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판매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다고 알고 있다. 심지어 독일 같은 경우는 서점에서 출판사로 책을 반품시킬 때는 일정 액수의 반품료를 출판사에 지불해야 한다고 한다.
이렇게 현금이 오고가는 시장 원리가 작동을 해야 책에 대한 애정과 함께 그 책을 팔기 위한 전략들이 세워질 수 있다. 지금처럼 ‘위탁’이란 이름 아래 외상 거래가 보편화되고, 그나마 4개월짜리 어음(심지어는 문방구어음)이 보편화된 현재의 출판 유통 시스템이 내가 보기엔 온라인서점의 할인 판매보다 더욱 출판사와 오프라인서점에게 독이 되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서점 숫자보다 10배쯤은 더 많은 출판사의 숫자나 그 출판사 중에서 92%가 1년에 책 한 권 출판하지 않는 지금의 비상식적인 구조는 뭔가 현재의 출판사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을까? 누구나 동네서점 차리기는 문방구만큼이나 쉬워도 그 동네서점들 중에서 문방구보다 제대로 이익을 내는 서점들이 드문 현실은 현재의 출판 유통 시스템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웅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 이 모든 문제가 오로지 도서정가제를 더욱 강력하게 시행하지 못한 까닭이라고 여기고 도서정가제만을 전가의 보도마냥 휘두르고 방패막이 삼는다면, 더욱 강력해진 도서정가제 시행 이후에도 줄지어 일어날 것이 분명한 동네서점들의 폐업과 중소형 출판사들의 도산에 대해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지 나는 그것이 궁금하다.
문제는 유통이다. 출판 유통이 변해야 출판이 산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출판 유통이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는 도서정가제도 임시방편에 불과할 뿐이다. 이제 책 읽지 않는다고 독자에게 돌린 칼끝과, 할인 판매로 동네서점 문 닫게 만들었다는 오명을 쓰고 있는 온라인서점에게로 돌린 창끝을 스스로에게로 돌리자. 출판사나 오프라인 서점은 아무런 책임도 잘못도 없는 것인지 다시 한번 물어보자.
권리가 클수록 책임도 큰 것이 세상의 이치가 아닌가. 더 큰 출판사, 더 큰 서점일수록 더더욱 큰 책임을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