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원근의 가족
어느 해 늦은 봄 서울 동촌 한 모퉁이에 다 쓰러져 가는
오막살이 초가집 건넌방에는 22~23세쯤 되어 보이는
젊은 여자가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힘없이 앉아서
삯 편물(뜨개질 또는 뜨개질로 만든 옷) 하고 앉아
있고, 아랫목에는 4~5세쯤 되어 보이는 어린 사내
애가 세상모르게 잠을 자고 있다. 대문 앞에는
전기회사 직원이 와서 단선 명령장(斷線命令狀) 을
보여주며 지금 당장 안 내시면 불을 떼어 가겠다고 했고,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전등을 떼어 갔다. 석 달 치
밀렸기 때문이다. 하원근이라는 청년은 십 년 전부터
상해 어느 제자 회사(인쇄용 활자를 만드는 회사)에
사원으로 근무하다 세파에 밀리며 회사를 그만두고
서울로 어린 처자와 혼자 계신 백모님 댁으로 올라왔다.
■하원근의 일자리 잡기 노력
백모님 댁에서 신세 지며 살 수 없어 서울 동촌에다가
조그만 사글셋방을 얻어 가지고 살림을 차리고, 매일
같이 사람을 구한다는 곳으로 취직하려고 노력했다.
아침이면 잔입(아무것도 먹지 않음)으로 써주기만
한다면 가겠다는 그러한 곳조차도 안되었다.
일자리가 잡히지 않아서 비관하는 남편을 도리어 위로하며
없는 살림에 다녀오면 식사도 차려주고 "좋은 날 오겠지!" 하면서 용기도 준다.
세상에 저리 곱고 아름다운 배우자가 있을까 하면서 하원근은 "전생의 나라를
구했구나!" 하면서 감탄도 해본다. 평생의 잉꼬부부라는 생각이 든다.
■하원근 취직하다
신문을 읽다가 '구직비서'를 구하는데, 중국어를 잘하고
처자가 있는 충실한 자. 신장은 5척 4촌, 연령은 34세까지. 월급은 백 원 이상. 사진과 이력서를 지참래문(사진과 이력서를 지참하고 와서 문의하라고 한다.).
동양빌딩 27호.
3층으로 가라고 해서 .......27호 찾아갔지만 간판도 없고 방안에는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고 오십쯤 되어 보이는 신수 잘나고 부대한 신사가 앉아 있었다.
하원근을 보더니 사진과 대조하면서 호구 조사를 시작한다. 신사는 하원근에게 내가 희망하는 조건을 완전히 구비했다면서......!! 근데 하원근에게 요구하는 점을 듣는다면 당신을 반갑게 채용하겠다고 한다. 하원근은
올커니 하면서 기꺼이 받아들인다. 신사는 속으로 생각하기를, '옳다. 이 사람은 내가 무엇이든지 요구하면 되겠다.' 하면서 검은 속내를 드러내지는 않았다.
집에를 못가지만 월급 이백에 좋은 대접을 해주니 너무나 기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