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22. 네이비(2)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책상에 남겨진 빨간 펜, 스톱워치가 켜진 휴대폰, 그 속에 저장되어 있는 무수한 일본어 원고 녹음파일들. 나를 중심으로 한 반경1M짜리 원 안에 있는 모든 물체들이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찰싹, 찰싹. 뺨을 때렸다. 정신 차려, 그건 꿈일 뿐이야. 스스로에게 채찍을 들이밀고는 썩소를 지어보았다. 안 일어나나? 오늘은 니가 기다리던 날이잖아. ?

 .... 곧바로 화장실로 직행. 깨끗이 샤워를 하고 스킨과 로션을 몸 구석구석에 발랐다. 쉴 틈도 없이 교복을 입고 머리에 보라색 핀들을 꼽았다. 오늘 하루 기분을 업 시켜줄 슬비의 팔찌(애지중지하던)도 챙겼다. 슬비가 골라준 팔찌는 교복과도 잘 어울렸다.

 드디어 왔다. 일본어 말하기 대회의 본선이 온 것이다. 내가 쓴 일본어 대회 원고가 예선을 통과하고 일주일이 지나 결전의 날이 왔다.

 대머리 담임은 예선에 낼 내 일본어 원고를 보시고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는 내가 쓴 원고에서 진심이 느껴진다고 나를 칭찬해주셨다. 조금만 손보면 더 훌륭한 원고가 될 수 있을 거라 했다. 당연했다. 오빠와 나의 꿈 이야기였으니 안 통할 리가 없었다. 슬비에게도 보여주니 슬비는 간밤에 그거 읽고 울었다고 했다.

 담임에게 원고를 내고, 삼일 지나서 예선 통과 얘기를 듣고 슬비와 방방 뛰었던 날을 기억한다. 기숙동 604호 내 방에서 둘이 돈을 모아 치킨을 시켜 먹고, 곧바로 연습에 들어갔었다. 그 날에 처음으로 들었던 괴물 같았던 내 목소리와 작은 의자 두 개. 이 날을 위해서 나와 슬비는 그 의자에 앉아 열심히 읽고 들으며 후회했었다. 그걸 안고 이제 단상에 오를 시간이다.

 ㅡ 힘이 넘쳐 보이네? 아참, 오늘이 대회 날이라서 그런가?

 보이더다.

 - . 오늘이 대회 날이야. 내가 이때를 얼마나 기다렸는데! 대회에서도 떨지 않고 잘 해서 꼭 상 받아와야지!

 ㅡ 그래, 잘해봐! 연습한 만큼 분명 잘할 수 있을 거야.

 그래. 그렇게나 연습했는데 떠, 떨지만 않으면 잘할 수 있을 거야, 나는 나를 믿는다. 아이 캔 두 잇, 아이 캔 두 잇!

 기숙동 오른쪽 맨 끝에서 슬비를 만나 함께 걸어갔다. 슬비는 마치 자기가 그 대회에 나가는 것처럼 설렌다고 했고 내가 어떤 식으로 예쁘게 실수할지 기대된다고 했다. 나는 얼굴이 화악 달아올라서는 슬비에게 무슨 말이라면 여러 번 묻기도 하고 때려도 봤지만 슬비는 앞에서 걸어가기만 했다. 나는 뒤따라 걸어갔다.

 “그럼, 참가번호 14, 박선우 학생의 스피치가 이어지겠습니다. 스피치 제목은 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슬비가 나를 보며 손가락을 튕겼다. 외워보라는 것이다. “? 지금? ....” 당황했다. “... 미나상, 하지메마시테, 니넨 에이쿠미노 바쿠소누토모우시마아스...”

 “!”

 “! 이 정도면 꽤 했지 않아?”

 “후훗, 아니야~ 원고에는.. .. 가 없었다구!”

 “.. 치사하잖아! 그 정도는 봐줄 수 있지 않냐?”

 내가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슬비는 그 표정이 웃겼는지 계속 웃었다. 슬비가 나를 따라 해서 보여주자 그제야 나도 웃었다. 아 정말 웃기구나. 내 표정이..

 밥을 다 먹고 슬비가 매점에서 초코 우유를 사주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우리 이 대회 끝나고 나면 오늘 카페 갈래?” 솔깃했다. “, 가고는 싶지만 가지를 못하잖아.” 아쉬운 듯이 대답했다.

 “내 말은 땡땡이를 치잔 말이야. 바보, 언제부터 우리가 선생님 말을 잘 들었냐?”

 “, 나는 그래도 야자 착실히 하는 사람이야. 알잖아. 너처럼 많이 땡땡이치진 않아!” 나는 웃었다.

 “에이, 그래도 오늘 한번만 땡땡이 같이 쳐주랑. 더군다나 이거 연습한다고 밤늦게까지 연습했잖아.”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슬비에게 말했다.

 “, 할 수 없지. 오늘만이야. 딱 오늘만! 더 이상은 없어.”

 ‘딩동댕동~ 딩동댕동~’

 조례시간 5분 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 종이 쳤네.” 나는 슬비에게 빨리 가자며 재촉했다. 슬비는 그전에 할 것이 있다면서 손을 들어보였다. “선우 수상 기원 하이파이브~!”

 “아 늦는데 정말!”

 “그래도 일단 하고 나면 너에게 힘이 될 것 같아서.”

 슬비는 나에게 손을 든 채로 씽긋 웃어보았다. 눈동자가 흔들리다가 다시 반달이 되며 풀어졌다. ‘오빠, 정말 나는 잘 지내고 있어. 걱정 말아.’ 나도 손을 들었다. “자 그럼 우리 모두 파이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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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 박선우 아트웍 비스무리   

 

 

 

 

 

 

 

미방용

 

 

 

 

 

 

 

 

 

 

 

 

 

 

넵! 조잡한 그림입니다! (그냥 펜으로 그리고, 카툰 카메라로 찍고, 포토샵으로 보정)

 

선우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여주는 그림인데요.

 

왜 당신만의 그녀들을 삭제하고 이 그림을 보여주냐고 하신다면..

 

이쪽이 더 소설의 장면들을 더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네... 그래서 그려봤습니다.

 

다음에는 보이더 디르 픽 메카트니의 그림으로 찾아 올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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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드십시오.
주방장 비스무리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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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메뉴 : 얼음을 넣은 물과 소금 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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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운 날
선풍기와 에어컨의 합작 콜라보 바람
정말 션하지, 그치?                                  
                                                 

 

 

              
우리가
세상에 선풍기와 에어컨이 될 수 있으면  
그래서 더위먹은 사람들의 땀을 함께 힘을 합쳐 날려보낼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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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21. 네이비(1)

 

 

 

 

 꿈을 꿨다.

 꿈에서 나는 온통 회색빛깔로 뒤덮인 공간에 서있었다. 좌우로 뚫려있는 공간인데도 이상하게 답답하고 꽉 막혀있다는 느낌을 주는 이상한 공간이었다. 색깔 때문인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이 공간에는 지금 아무도 없다. 나만이 지금 이 회색 공간에 서있다. 오빠도 슬비도 곁에 없다. 그저 왼쪽으로부터 바람만이 솔솔 불어오는 중이었다.

 여기 이 공간에 혼자 우뚝 서있는 것이 떨렸고 무서웠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 행동을 취해보기로 했다. 두 다리를 움직여 왼쪽으로 걸어보았다. 처음 걷는 아기처럼 걸음이 어정쩡했다.

 걸음을 내딛는 순간순간에 나를 둘러싸고 있는 색깔이 점점 어두워졌다. 그것이 신기해서 계속 걸었다. 가다가 가시떨기가 가득 차 있는 밭도 지나고 이름 모를 묘지도 보았다. 흙이 없어도 공간에 찰싹 붙어 자라는 꽃들을 지날 땐 시간이 지나 벽과 바닥이 진한 회색이 되었고, 내가 입은 하얀 원피스는 검은 먼지들을 머금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걷는 걸 멈추지 않았다.

 쉴 새 없이 걷다보니 어느새 아무것도 없는 장소에 되돌아 온 듯 했다. 벽과 바닥은 어느새 새까맣게 타버렸고 원피스도 원래 하얀 걸 모를 정도로 타버렸다. 내 몸도 먼지가 끼어 더러웠고 어떤 부위에는 상처에서 피까지 흘러나왔다. 그래도 앞으로 걸어보려고 애를 썼지만 앞으로 가지를 못하고 제자리걸음만 반복했다.

 그래서 그냥 어쩔 수 없이 앉아서 쉬기로 했다. 더 나가고 싶은데 더 갈 수 없다니 좀 분했다. 그렇게 씩씩대는 마음을 추스르며 쉬고 있는데 바로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일어나서 뒤를 돌아보니 오빠가 교통사고의 날에 입은 옷을 입고 뒤돌아 서있었다.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어둡고 추운 곳에 왔느냐, 그리고 여동생을 봤으면 뭔가 반응을 보여야지 왜 멍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냐. 정말 바보가 되어버렸느냐, 수없이 떠오르는 질문을 억지로 집어 삼키고 그저 오빠에게 다가가 말했다. “잘 지냈엉?” 오빠는 뒤돌아 선 모습 그대로였다.

 있잖아, 오빠. 나 착각하고 있었던 것 같아. 이제까지 오빠가 보여주던 모습들을 닮으려고 죽도록 발버둥 쳤는데, 어느 샌가 그게 일그러져 버려서 내 본모습은 저기 저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네. 분명 오빠도 그래서 나에게 알려주려고 말을 걸어 온 거겠지.

 걱정 마. 이제 엇나갈 일은 아마 없을 거야. 나에겐 이미 힘을 주는 친구들이 있어. 그 친구들이 있는 한 넘어져도 쓰러지지는 않을 거야. 오빠가 말한 대로 다시 시작할 수 있어. 그러니까 오빠도 나를 지켜봐줄 수 있지?

 미소를 띤 채 오빠에게 얘기했다. 그제야 오빠는 뒤를 돌아서 나를 똑바로 보기 시작했다. 그 생기 있는 눈동자는 변함이 없었다. 나는 그 눈동자를 보고 환하게 웃어주었다. 오빠는 나를 끝까지 무표정으로 나를 주시했다.

 오빠가 나를 슬프게 바라봤다. 그리고는 자기의 손을 쳐다보았다. 놀랍게도 오빠의 손은 어느새 네이비 색깔에 물들고 있었다. 당신의 손에서 눈을 뗀 오빠는 다시 나를 슬프게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에, 오빠 어떻게 된 거야? 나에게 말을 걸 수가 없는 거야? 왜 그런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건데. 네이비는 오빠의 손과 발을 거의 물들이고 있었다. 몸통의 거의 반은 네이비로 물들었는데도 눈만은 나를 계속 주시했다. 그 눈은 엄청 슬퍼보여서 내가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오빠 무슨 말 좀 해봐!

 이윽고 네이비가 오빠를 완전히 덮고 그 오빠를 덮은 그 물체는 바닥에 엎드려져 바닥을 물들였다. 나는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오빠라고도 불릴 수 없게 된 진한 군청색 바닥은 금세 부서지기 시작했다.

 군청색 바닥이 산산조각이 나고, 나는 알 수도 없는 더 높은 차원에 던져지고 있었다. 오빠는 왜 그런 표정을 지었을까, 혹시 나에 대해 실망한 것은 아닐까, 아냐, 오빠는 나에 대해서 실망한 적은 없어. 오빠는 항상 날 친절하게 대해줬는걸.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마음속에 많은 생각들을 간직한 채 아래로 아래로 떨어져갔다. 오빠가 그럴 리 없어. 맞아! 확신했다.

 아래에 거의 내려오기 직전 꿈을 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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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드십시오.​
JUBANJAN BISUMURI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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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메뉴 : 한겹 한겹 다른 반죽으로 만든 마트료시카 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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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요,

덥지 않나요?

부탁이니 그 마음에 입은 겨울 옷들을 빨리 벗어버리세요.

저는 당신 마음의 맨 몸하고 이야기하고 싶단 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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