캣칭 파이어 헝거 게임 시리즈 2
수잔 콜린스 지음, 이원열 옮김 / 북폴리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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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1권 <헝거 게임>에서 살아남은 캣니스는 이제 우승자로서의 부유하면서 괴로운 삶을 살아가기만 하면 된다고 여긴다. 그러나 끝났다고 생각한 게임은 끝나지 않았고, 그녀는 여전히 캐피톨이 움직이는 조종 말에 불과했다. 게다가 캐피톨의 지배자인 스노우 대통령으로서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병졸이었다. 그는 게임의 룰을 새로 만들게 한 캣니스를 주시한다. 캣니스와 피타는 우승자로서 각 구역으로 축하행사를 다니던 중 11구역에서 캐피톨에 대한 반항의 냄새를 맡는다. 그들이 캐피톨에서 좋아하지 않을 반란의 바람을 몰고 온 것이엇다. 12구역의 군대 책임자가 바뀌고 공포정치가 실행된다. 탄광이 폐쇄되고 굶주리는 주민들이 늘어나며 광장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사람들이 형벌을 받는다.

캣니스와 피타가 참가했던 헝거 게임이 개최된 다음 해, 헝거 게임은 75주년을 맞이한다. 75주년 기념 헝거 게임은 그동안의 우승자들이 참가하는 게임으로, 캣니스와 피타 역시 게임으로 초대된다. 캣니스와 피타는 일부러 다른 우승자들과 거리를 둔다. 그러나 게임이 열리고, 몇몇 우승자들이 캣니스와 피타를 살려내기 위해 자신의 몸을 위험 속에 던진다. 그리고 게임이 절정에 이른 밤, 그녀는 게임이 벌어지는 영역을 분리하는 역장에 화살을 날려 게임을 끝내 버린다.

 

이런 책에서는 대개 주인공이 모든 일을 해결하는 영웅이 된다. 캣니스 역시 영웅처럼 받들어지긴 하나 커다란 게임판의 장기말로 움직인다. 처음엔 캐피톨에 의해, 다음엔 반란군에 의해. 먼치킨 주인공들의 활약을 보는 일도 재미있지만 실제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게임의 장기말에 불과할 뿐이므로 그렇게 쓰인 데 대한 캣니스의 분노와는 달리 나는 그런 주인공의 위치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다만 스스로 해낸 일이 별로 없는 데도 떠받들어지는 게 '이런 책'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말이다.

 

캐피톨 스노우 대통령의 캣니스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조금 억지스럽지 않나 하는 생각이 내내 들었다. 글쎄, 스노우 대통령이라는 인물의 특징인지도 모르겠는데, 회유보다는 무조건 파괴가 앞서는 것이 답답했다. 인물의 성격이 그렇다고 볼 수도 있지만 아무리 봐도 전혀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 면에서의 설명이 있는 것도 아니고. 캣니스를 처치하고 싶었다면 기차를 폭파시키던지 탈선시키던지 해서 처리하는 게 또 다른 헝거 게임을 벌여 사랑 받고 있는 인물에 대한 동정표를 얻게 하는 것보다 나은 수단이 아니었을까? 어차피 캣니스와 피타가 진짜 연인 사이라고 믿었던 이들이라면 사고조차 안타까운 동화로 받아들였을 텐데 말이다. 아니면 사람을 사서 살해하고 강도를 당해 죽었다고 공표한다던가 하는 방법이 많을 텐데 뭐하러 스스로 패널티를 먹고 돈이 더 드는 방법을 썼을까?

반란을 일으킨 지역에 쓸데없는 과잉진압을 벌인 것도 이상한데, 반란을 일으키지도 않은 12구역까지 초토화시키는 행위 역시 비합리적이다. 다른 구역에서 바치는 것들로 생활을 꾸리는 중심부가 과연 그런 짓을 할 까닭이 있는지 의아할 따름이다. 결국 반란에 의해서이긴 하지만 캐피톨은 반란을 일으킨 구역들에게서 저 혼자만 고립되는 결과를 맞는다. 사건을 벌이는 것은 좋지만 일을 조금 더 합리적으로 끌어나가는 게 필요해 보인다.

2권에서부터 주인공 캣니스에 대한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다. 구역에서는 게일에게 붙어 지내고 게임 내에서는 피타에게 붙어 지내는 게 영 눈꼴시다. 먹고 사는 게 바빠 자신의 감정을 돌아보는 일에 미숙할 수도 있고, 헝거 게임이라는 끔찍한 일을 치러야 했으니 PTSD를 앓을 수도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의 감정에 충실하다. 그러나 두 사람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저울질 해보지 않고 상황에 따라 이놈 저놈에 붙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누군가의 서평을 보니 영화에서는 두 사람에게 왔다 갔다 하는 캣니스의 심경이 드러나지 않은 탓에 캣니스가 욕을 많이 먹었다는데, 책을 읽어도 욕할 만 한 것 같다. 사람들에게 자꾸 짜증을 내는 것 또한 탐탁지가 않다. 아무튼 하는 짓을 봐서는 도무지 사랑스러운 인물이 아닌 것만은 틀림이 없다.

아무튼 재밌게 쉬이 읽기는 했으나, 이런저런 면에서 마음에 걸리는 게 많은 책이었다.

참, 118페이지 밑에서 두 번째 줄에 오타. "내게(->내가) 게임에서 우승한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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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거 게임 헝거 게임 시리즈 1
수잔 콜린스 지음, 이원열 옮김 / 북폴리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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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다른 글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TV프로그램인 '비밀독서단'에서 이 책을 추천하며 내용을 안내해 주었던 덕이다. 프로그램 내에서 짤막하게 보여준 책 속 문장들과 그 내용의 해석이 호기심에 불을 붙였다. 특히 이 책이 현 세태들 조명하고 있다는 설명이 나를 더 부채질했다. 거의 목숨을 건 경쟁을 벌이는 지금 시대와 경쟁에서 밀려난 아이들이 어떻게 괴물로 변해가는지에 대한 이야기나 다름없다는 것이었다.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사는 종말 이후의 세계 같은 세상의 모습 등은 내가 흥미로워하는 주제이다. 결국 프로그램을 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책장에 꽂혀 있기만 하던 <헝거 게임>을 단숨에 읽어버렸다.


많은 육지가 물에 잠기고 황폐화된 지구의 북미대륙에 건설된 판엠이라는 나라가 이야기의 배경이다. 주인공 캣니스는 파괴된 13구역을 제외하면 가장 밑바닥 구역인 12구역에 살고 있다. 판엠의 열두 구역을 지배하는 캐피톨에서는 과거 자신들에게 반란을 일으킨 열두 구역을 벌하기 위해 매년 <헝거 게임>을 벌인다. 구역마다 추첨으로 뽑힌 두 명씩의 아이들을 한 지역에 몰아넣고 서로 죽이는 '게임'이자 서바이벌 TV프로그램이다. 캣니스는 추첨으로 뽑힌 동생을 대신해 게임에 참가한다. 12구역은 가장 못사는 사람들이 살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뒤쳐져 게임에 투입될 경우 죽는 것은 거의 따놓은 당상이다. 그러나 캣니스는 숲에서의 사냥으로 다져진 기술과 재치로 같은 구역 참가인인 피타와 함께 게임을 유리하게 풀어나간다.


나는 읽는 동안 캐피톨이 주민들의 아이들을 서로 죽이는 게임에 몰아넣는 방식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비록 반란에 대한 처벌이긴 하지만 자기들의 핏줄을 그런 식으로 대우하는데 좋아할 이가 어디있겠는가. 이런 방식의 공포정치와 압제는 처음에는 통할 수 있어도 끝내는 폭발을 일으킬 것이 분명한데 말이다. 내가 캐피톨의 지배자였다면 조공인을 받되 그들을 캐피톨의 사상에 젖어들게 하고 캐피톨의 꼭두각시로 만들어 열두 구역을 관할하게 하는 방법을 취하겠다. 아이들을 데려가 인질로 삼으면서도 좋은 음식과 좋은 옷을 대접해 구역에서 불만이 없게 하고 꼭두각시 삼아 다스릴 수 있으니 그게 더 좋은 방법이 아니겠는가.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며 아끼는 세상이다만. 죽고 죽이는 게임을 통한 공포 정치는 당장의 효력만 있을 뿐이다. 훗날을 생각하지 못하는 무지한 방법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실제 세상의 위정자들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었다. 앞을 내다보는 미래의 정치를 하기보다는 지금 당장의 이득을 위한 정치를 위한 정치만을 하기에 급급한 것이 현실이다. 실제로도 이런 마당에 가상의 세계 위정자들이 불화의 싹을 스스로 키워내는 것 또한 있을 법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배가 아파서 침대에 누워 시간을 보낼 셈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매우 좋은 선택이었다. 빠르게 진행되는 이야기는 무척 흥미로웠고 재미있어 주의를 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주인공의 입장에 나를 대입해보는 일은 실패했는데, 아마도 내가 조공인으로 뽑혀 게임에 참가하게 됐다면 가장 먼저 죽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세상이 올지도 모르니 지금부터라도 체력을 길러야 하나?


참, 읽으면서 의문이었던 부분이 몇 가지 있었다. 잘사는 지역의 아이들은 게임에 참가해 최후의 1인이 되는 것이 목표이다. 최후의 1인이 되면 평생동안 놀고 먹을 만한 부를 보장받기 때문에 게임을 위해 계속 준비하며 산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준비하며 사는 애들이 전투 실력만 키우고 목숨부지에 필요한 기술을 익히지 않는다는 건 억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준비를 위한 넘쳐나는 시간에 전투 기술을 배우고 생존 기술까지 배우는 게 당연한 노릇일 텐데 말이다. 아무리 전투 기술이 좋아도 배급된 물건을 계속 지켜낼 수 없을 수도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연습이 없을 것 같지가 않다. 또한 이 소설이 진짜 현실을 반영해 경쟁 자체와 경쟁에서 밀려난 이들의 괴물화를 그려내고 있다면 캣니스 또한 12구역이 아니라 잘사는 구역에서 나왔어야 하는 게 옳은 것 같다. 판엠의 세계는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보다 개천에서 용으로 거듭나기 쉽지 않은 세상일 테니.


이야기 중 추적 말벌이라는 유전자조작생물이 등장하는데, 캣니스는 이 추적 말벌이 사는 말벌집을 떨어뜨려 나무 밑에 있던 경쟁자들을 공격한다. 일반적인 말벌도 쏘이면 위험한데 이 추적 말벌은 환각을 일으켜 더욱 위험하다고 한다. 캣니스는 벌의 독이 더 많이 퍼지는 걸 막기 위해 벌침을 상처에서 빼낸다. 그런데 이상한 건 이 벌침이다. 사실 말벌은 벌침을 남기지 않는다. 그들의 벌침은 일직선이라 어디 걸릴 일이 없어 쏘고 나서 궁둥이의 침을 뺐다가 또 쏠 수 있다. 벌침이 빠지는 것은 말벌이 아니라 꿀벌이다. 꿀벌의 벌침은 갈고리 형이라 쏘게 되면 갈고리 부분이 대상의 살갗에 걸리고 꿀벌은 자기 몸이 찢어지며 죽는다. 그런데 소설 속 추적 말벌의 벌침은 갈고리 형이다. 유전자 조작을 통해 인위적으로 만들어내어 이런 구성이 되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이 추적 말벌은 전쟁에 쓰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이 작은 병졸들을 계속해서 써먹기 위해 벌침을 갈고리 형이 아니라 직선 형으로 만들었어야 하지 않을까? 이야기를 위해 변명해 보자면 환각물질의 투입을 위해 특별히 갈고리 형의 벌침이 필요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직선 형 벌침으로도 순식간에 독을 쏠 수 있는데 환각물질만 특별히 다른 형태가 필요한 이유도 없을 것 같다.


최근엔 이런 디스토피아적 이야기들이 넘쳐난다. 소설가들이 인류의 미래를 어둡게 내다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껏 작가들이 작품을 통해 세계의 미래를 예견해왔고 많은 부분이 이뤄졌듯이 그들이 바라보는 어두운 미래 역시 머잖아 다가올 가능성이 크다. 20세기에 일어난 온갖 전쟁으로 인류는 많은 고통을 겪어야 했다. 많은 반성이 이뤄졌고 대화가 오갔으며 많은 부분에서 변화가 있었다.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은 지금의 세상은 과거의 잘못에서 교훈을 깨닫고 더 좋은 세상으로 바뀌었을 것만 같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다. 여전히 많은 나라들은 다른 나라와의 경쟁에서 자기 나라의 이익을 우선하는 데 바쁘다. 그 경쟁으로 다른 나라의 상황이 어떻게 되든 그리 고려하지 않는다. 또 다시 세계대전이 일어난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다. 작가들이 작품을 통해 미리 보내는 경고를 인지하고 미리 대비하는 안목이 세계의 위정자들에게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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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박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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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돌아볼 수 있는 의미가 담기는 책이야말로 진정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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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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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정유정. 그녀의 이름을 들어본 게 언제더라. 아마도 이 작품, <7년의 밤>이 출간되었을 무렵일 듯하다. 아니, 그 전에도 이름은 들어본 바가 있으리라. 하지만 그 전에는 별로 신경 쓸 만한 작가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테고, 얼핏 들었던 작품 제목도 그다지 끌리지 않았을 것이다.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나 <내 심장을 쏴라>는 지금 봐도 그다지 끌리는 제목이 아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나'라는 인칭명사가 들어가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나'가 아닌 다른 인물이었다면 호기심이 좀 생겼을 법도 하건만. 그러나 이 <7년의 밤>은 제목부터 단번에 눈길을 잡아끌며 호기심을 자극했다. '7년의 밤 동안 어쨌다는 거지?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거야?' 궁금했다. 대충 찾아 읽은 간략 소개에는 7년간의 밤 동안 아버지와 아들에게 일어난 이야기 어쩌고 되어 있었고 그 한 줄로 다시 관심이 식었다. 게다가 내가 선호하지 않는 우리나라의 작가라서 손이 가지 않았다. 그보다 더 읽고 싶은 책들이 많아서 자꾸만 뒤로 밀려났다. 그러다가 얼마 전 중고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하곤 '가볍게' 집어들었다. 어쩐지 중고서점에서는 평소에 장바구니 우선순위에서 밀리던 책도 보존 상태가 좋으면 집어들게 되는 마력이 있다. 그때, 이 책을 사길 얼마나 잘했던가. 비로소 작가 정유정을 알게 되었으니.


소설을 읽는 동안 나는 두 아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신체적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아니지만, 삶이라는 전체 틀을 놓고 봤을 때 사건의 가장 큰 피해자들은 두 어린이이다. 부모와 사랑과 관심을 먹고 자랄 열두 살의 나이. 아직 초등학생 딱지도 떼지 못한 나이다. 그런 아이들이 못난 부모들로 인해 사건에 휘말리고, 그 사건의 피해자가 되어 고통을 받는 것은 정말이지 가슴 아픈 일이었다.


사건의 직접적인 피해자인 열두 살 어린 여자아이 세령은 주변 어른들의 도움이 있었다면 행복한 환경에서 자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동네 사람들 모두가 심각한 수준의 가정 폭력이 이뤄지고 있었음을 알면서도 보복이 두려워 두 모녀, 세령과 그 엄마가 받는 학대를 모른 척했다. 아이 엄마라도 조금 더 빨리 정신을 차렸더라면 세령은 악몽 같은 생활에서 벗어나 웃으며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엄마는 너무나 뒤늦게 삶을 찾아나섰고 너무나 뒤늦게 아이를 찾으려 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진짜 늦은 것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제 아빠를 악마처럼 무서워하며 하루하루 얇은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으로 지냈을 아이, 진심으로 밝게 웃어본 기억이 없었을 아이. 마치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가 죄인 것처럼 벌을 받던 아이. 현실에서도 없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가정 폭력이 얼마나 무섭고 위험하며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문제인지 알 수 있다.



"내 딸, 여기 있었구나." 예상대로 기척이 없었다. "겁나서 거기 숨은 거라면 이제 나와도 좋아. 반성하면, 더 혼내지 않을 테니까." 그는 죽을힘을 다해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오늘 아빠한테 복잡하고 골치 아픈 일이 있었거든."

축축한 바람이 호수 쪽에서 올라왔다. 가시박덩굴이 잎을 들썩이며 쏴, 소리를 냈다. 그는 다리를 벌리고 철망담장에 붙어 섰다. 랜턴을 서치라이트처럼 움직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보니 아무것도 제자리에 있지 않았어. 아빠는 쉬고 싶었는데……"

영제는 입을 다물었다. 말하다 보니 울컥, 감정이 북받쳤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 쥐방울만 한 계집애 때문에 피곤한 몸을 끌고 안개 속을 헤매다가, 이제는 빗속에 선 채 우는소리를 늘어놓고 있다니. 다시 입을 열자, 하고 싶은 말이 튀어나왔다.

"네가 빡 돌게 했잖아. 이 개 같은 년아!" (p. 110)



또 살인범의 아들로 낙인이 찍혀 삶이 망가져 버린 서원은 또 어떠한가. 또랑또랑하고 명민하던 아이는 제 아빠가 저지른 범죄로 인해 인간의 삶을 누릴 권리를 박탈당하고 만다. 살인자. 분명히 벌을 받아야 하고, 마음 깊은 곳에서는 법적인 벌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저지른 짓에 상응하는 신체·물리적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목소리도 들려온다. 그러나 살인자의 자식이 단지 죄 지은 자의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은 아무 죄도 없는데 피해를 입고 고통을 당해야 하느냐에 대해서는 단연코 'NO'를 외쳐야 한다. 물론 아이를 보는 것이 그리 즐거운 일은 아닐 것이다. 아이의 부모가 저지른 짓이 떠오를 테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보호되어야 하고, 특히나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일로 피해를 입는 것에 대해서는 더더욱 지켜져야 한다. 분명히 대한민국 헌법에서는 연좌제를 엄격하게 금하고 있건만 사람들 사이에서는 연좌제가 시행된다. 잊힐 만하면 언론─오영제의 짓일 거라고 생각하지만─에서는 서원의 괴로운 과거를 끄집어내어 도마 위에 올린다. 친척들에게서조차 버려진 서원은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어 사람들의 눈을 피해 궁벽한 어촌에서 하루하루를 사는 처지가 된다. 사회는 아이로 하여금 자신이 받는 대우들로 나쁜 길로 들어설 환경을 애써 조성해준 것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그러면서 사회의 비난과 압박에 못이겨 죄를 저지르면 핏줄이 어쩌고 떠드는 논리다.



"괜찮아. 이제 다 끝났어."

끝나지 않았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내 출소에 맞춰 선데이매거진이 집주인에게 배달됐다. 이번에는 내가 주인공 노릇을 한 4주 전 기사까지 추가됐다. 주인은 방을 빼라고 요구해왔다. 학교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저씨는 전학과 자퇴 중에서 선택을 해야 했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지 못했다. 열두 번의 전학 끝에 자퇴해 검정고시로 고등학교에 갔다. 고등학교 네 학기 동안엔 아홉 번 전학을 했다. 신분이 알려지는 방식은 늘 같았다. 선데이매거진과 나에 관한 기사의 복사본이 학교와 학부모회와 반 아이들, 집주인과 이웃집으로 동시 배포됐다. (p. 27)



서원이 맞이한 고통스런 삶에 대해선 그의 아빠인 최현수가 가장 책임이 크다. 범죄를 저지른 데다 그 이전엔 날마다 술을 퍼먹고 음주운전을 해댄 것이다. 본인이 꿈꾸던 세계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렇다 해도 삶은 계속되어야 하고, 그 삶이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면, 그리고 지켜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렇게 막 살아가는 짓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래서 세령의 아빠 오영제가 끔찍했다면 서원의 아빠 최현수는 꼴불견이었다. 그가 자신의 아들을 구하기 위해 망가진 몸을 이끌고 온 천하를 돌아다녔다고 해도 말이다. 사실 이 소설에서 어른들은 누구 하나 믿음직스럽지가 않다. 그나마 갈 곳 없는 서원을 보살펴주는 승환이 가장 낫지만, 그 역시 세령이 제 아빠에게 당하는 일을 알면서도 적절히 대응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그의 7년간의 인생 또한 엉킬 대로 엉켜 버리게 된 셈이다.


이 멋진 소설에도 약간의 의문은 있다. 나는 우리 사회의 도덕 의식이 뛰어나지는 못하다고 해도 모든 진실을 감출 수 있을 만큼 메말라 있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70~80년대도 아닌 2000년대를 사는 사람들이 지방 유지의 권력이 두려워 진실을 은폐한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게다가 그 진실은 숫자나 문서에 관련된 것도 아닌 한 인간의, 게다가 어린 여자아이의 목숨이다. 많이 부패해 있고 날마다 비상식적인 일이 벌어지는 사회이긴 하지만 여전히 올바른 사람들이 존재한다. 글쎄, 등장인물들은 그 사실을 너무 까맣게 잊고 있는 것이 아닐까?


<7년의 밤>은 아주 잘 짜여진 스토리의 스릴러 소설이다. 읽는 내내 눈을 뗄 수가 없었는데, 밥 먹는 동안 잠깐만 읽어야지 하면서 읽기 시작하다가 끝내버리고 말았더랬다. 읽는 동안에는 계속해서 감탄사를 내뱉었다. 일단 재미있고 흥미로우며, 지루하거나 막히는 부분이 없다. 누군가 최근 읽은 한국 소설을 추천해 달라고 하면 망설이지 않고 이 책을 추천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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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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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사이코패스 테스트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그 중에 기억나는 질문이 하나 있다. '아파트 베란다를 통해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해코지 하는 모습을 봤는데, 가해자가 나를 쳐다보며 어떤 손짓을 했다. 어떤 의미의 동작이었을까?' 나는 "너, 죽었어" 하며 주먹을 쥐는 행동이었을 거라고 답했다. 혹시라도 사이코패스에 해당되는 답을 할까봐 걱정하며 말했던 기억이 난다. 사이코패스에 해당되는 답은 가해자가 내가 있는 곳이 몇 층인지 층수를 세고 있다, 라고 한다. 진짜로 이용되는 테스트는 아니지만, 나처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사이코패스 지수를 걱정하며 답했을 걸로 생각한다. 사이코패스는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사고를 한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에 무척 흥미로운 대상이다. 절대로 얽히고 싶지 않지만 그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사고 방식은 호기심이 생기는데, 조이스 캐롤 오츠의 <좀비>는 조금이나마 그 독특한 대상들의 생각과 행동 양상을 경험해볼 수 있게 해준다.


주인공 쿠엔틴(Q_ P_)은 유능한 교수 아버지를 둔 유복한 가정의 아들로 대학생이자 친할머니의 하숙 주택을 관리하고 있다. 그는 이미 일곱 살에 선망했지만 아무 관계도 없던 급우를 다치게 했으나 거짓말로 빠져나간 적이 있고, 열여덟 살에는 열두 살짜리 흑인 남자아이를 대상으로 성범죄를 저지른 전과가 있었다. 그 일로 2년의 집행유예를 받았으며, 지금도 정기적으로 심리 상담과 치료를 하고 있고 보호관찰관에게 정기 보고를 한다. 어느 날, 그에게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밑도 끝도 없이 그를 따르는 그만의 '좀비'를 만들자는 계획이었다. (공포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20세기 중반 시행되곤 했던 전두엽 절제술이 그가 생각한 좀비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이었다. (소설의 시간 배경은 1980년대) 그는 자신이 관리하는 주택의 지하실에 '수술실'을 갖추고 노숙자나 여행객 같은 떠돌이들을 대상으로 이 수술을 시행한다. 그들은 그의 좀비가 되기도 전에 죽어 버린다. 영악하게도 시선을 끌지 않기 위해 무연고자들을 대상으로 범죄를 저질렀으나 할머니 댁 옆집에 놀러온 금발머리의 훤칠한 소년을 보고 그만 반하고 만다. 몇날 며칠을 훔쳐보기만 하던 그는 마침내 완벽한 좀비를 만들기 위한 계획을 짠다.



진정한 좀비는 영원히 내 것이 될 것이다. 그는 모든 명령과 변덕에 복종할 것이다. "네, 주인님" "알겠습니다, 주인님"하면서. 내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나를 올려다보며 말할 것이다. "사랑합니다, 주인님. 오직 주인님뿐입니다." 그렇게 될 것이고 그런 존재일 것이다. 진정한 좀비는 '아니다'라는 말은 한마디도 할 수 없고 오직 '그렇다'라는 말만 할 수 있으니까. 그는 두 눈을 맑게 뜨고 있지만, 그 안에서 내다보는 것은 없고 그 뒤에서는 아무 생각도 없을 것이다. 어떠한 심판도 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들과 다르다. 당신들은 나를 지켜보면서 (Q_ P_를 지켜보는 것을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지? 보고서를 쓰는 것을 모른다고 생각하지? 당신들이 서로 Q_ P_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모른다고 생각하지?) 은밀한 생각을 하지? 언제나 그리고 영원히 심판을 내리지. (p. 75)



주인공의 이름은 쿠엔틴이지만 그의 이름은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만 불린다. '나'는 나를 지칭할 때 '쿠엔틴'이라고 하지 않고 'Q_ P_'라고 지칭한다. 주인공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인물이 이름자 첫자만 쓰여 'R_ P_' 'T 씨' '닥터 E'로 불리며, 피해자들은 '이름없는 사람' '토끼 장갑' '덩치' '건포도 눈' '다람쥐' 등으로 지칭된다. 일단 자기 자신을 제삼자화하는 것은 정신분열의 증상으로 보인다. Q_ P_는 사회적인 일들을 처리하는 껍데기에 불과하고 '나'는 Q_ P_가 하는 일을 관찰자처럼 동떨어진 입장에서 지켜본다. 다른 인물들의 이름을 간략히 부르는 것 또한 그들을 하나의 인간으로 보기보다 그저 하나의 대상으로만 보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 아닐까 싶다. 그는 다른 사람이 그에게 말을 건네고 있을 때면 종종 전혀 상관도 없는 엉뚱한 생각에 빠지곤 한다. 다른 인물들과의 소통에 관심이 없고 감정이입이 어렵기 때문이다. 가족들을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 등으로 정상적으로 호칭하고 그들에게 예의를 갖춰 대하면서도 속으로는 그들이 귀찮거나 방해가 되면 죽여 버릴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리고 자신이 죽인 이들의 물건을 하나씩 전리품삼아 지니고 다니며 그들에 가한 실험이 실패한 것을 아쉬워 한다.



난 교과서를 갖고 있고, 체포된 이후로는 머리를 어깨까지 풀어헤치거나 하나로 묶지 않고 잘랐다. 건포도 눈의 테두리가 휘어지는 펑키한 가죽 모자를 쓰고 있다. 300달러짜리 양가죽 재킷의 주머니에는 안에 보드라운 토끼털이 든 토끼 장갑의 가죽 장갑이 들어 있다. 그리고 처방을 받아서 만든 비행사 스타일의 황갈색 안경알을 덩치의 안경테에 끼워서 쓰고 있기 때문에 제법 쿨해 보일 것이다. 서른 살 안쪽의 턱이 갸름하고 머리가 벗어지기 시작한 수줍음 많은 백인으로 보일 것이다. 공대생들이 얼마나 친근하게 구는지, 얼마나 사람을 믿어주는지 이상할 정도다. 대학에 등록해서 그 학교 학생이면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는다. (p. 114)



마이클 스톤의 저서 <범죄의 해부학>을 보면 저자는 선천적으로 악마적 기질을 지닌 인간이 존재함에 대해 부정하고 싶어하면서도 '악의 씨앗'이 없지는 않다고 적고 있다. 이 악마성의 발현이 선천적이지 않으면 후천적이라는 소리인데, '악의 씨앗'에 해당되는 범죄자의 개인사를 살펴보면 악한 길로 들어설 만한 환경적 영향이 도통 없기 때문이다. 이런 악마성은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일고여덟 살 때부터 이미 발현된다고 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 쿠엔틴 또는 Q_ P_는 무척 유능하고 다소 억제하는 경향이 있는 아버지가 있기는 하지만 그 정도는 평범한 편이라 선천적인 '악의 씨앗'에 해당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아니면 책에 소개되지는 않았지만 어린 시절 머리를 다친 일이 있어 옳고 그름을 제대로 따질 수 없게 되었을지도.


책을 읽는 내내 가슴이 묵직하게 두근거렸는데, 이게 그가 범인인 것을 들킬까봐 그랬는지 아니면 피해자가 그에게 붙들릴 것이 걱정되어 그랬는지 모르겠다. Q_ P_는 피해자들이 피를 흘리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며 성적으로 흥분하는 '미친놈'이다. 그런데 이 책은 Q_ P_가 '나'로서 자신에 대해, 사건에 대해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1인칭이어서 그가 느끼는 흥분과 설레임이 그의 것인지 내 것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래서 나 스스로가 사이코패스의 감성을 이해하는 또 다른 사이코패스가 아닌가 두렵기까지 했다. (사이코패스라면 지금껏 잘 버텼군!) 책을 덮고 며칠의 시간이 흐르자 괜찮아졌는데, 서평을 쓰려고 훑어보다 보니 다시 가슴이 묵직하게 두근거린다.


조이스 캐롤 오츠의 책은 이게 처음이었는데, 스스로를 사이코패스가 아닐까 의심하게 만드는 기분 나쁜 책이지만, 그렇기에 더욱 잘쓰인 소설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저자의 의도에 딱 들어맞는 소설이다. 사이코패스의 정신세계가 궁금하다면 이 책을 통해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남의 일에 울고 웃는 보통 사람이라면 그게 그다지 유쾌한 기분은 아니긴 하다. 하지만 분명 읽고 나면 조이스 캐롤 오츠의 다른 작품도 궁금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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