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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2년 4월
평점 :
한동안 사이코패스 테스트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그 중에 기억나는 질문이 하나 있다. '아파트 베란다를 통해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해코지 하는 모습을 봤는데, 가해자가 나를 쳐다보며 어떤 손짓을 했다. 어떤 의미의 동작이었을까?' 나는 "너, 죽었어" 하며 주먹을 쥐는 행동이었을 거라고 답했다. 혹시라도 사이코패스에 해당되는 답을 할까봐 걱정하며 말했던 기억이 난다. 사이코패스에 해당되는 답은 가해자가 내가 있는 곳이 몇 층인지 층수를 세고 있다, 라고 한다. 진짜로 이용되는 테스트는 아니지만, 나처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사이코패스 지수를 걱정하며 답했을 걸로 생각한다. 사이코패스는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사고를 한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에 무척 흥미로운 대상이다. 절대로 얽히고 싶지 않지만 그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사고 방식은 호기심이 생기는데, 조이스 캐롤 오츠의 <좀비>는 조금이나마 그 독특한 대상들의 생각과 행동 양상을 경험해볼 수 있게 해준다.
주인공 쿠엔틴(Q_ P_)은 유능한 교수 아버지를 둔 유복한 가정의 아들로 대학생이자 친할머니의 하숙 주택을 관리하고 있다. 그는 이미 일곱 살에 선망했지만 아무 관계도 없던 급우를 다치게 했으나 거짓말로 빠져나간 적이 있고, 열여덟 살에는 열두 살짜리 흑인 남자아이를 대상으로 성범죄를 저지른 전과가 있었다. 그 일로 2년의 집행유예를 받았으며, 지금도 정기적으로 심리 상담과 치료를 하고 있고 보호관찰관에게 정기 보고를 한다. 어느 날, 그에게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밑도 끝도 없이 그를 따르는 그만의 '좀비'를 만들자는 계획이었다. (공포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20세기 중반 시행되곤 했던 전두엽 절제술이 그가 생각한 좀비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이었다. (소설의 시간 배경은 1980년대) 그는 자신이 관리하는 주택의 지하실에 '수술실'을 갖추고 노숙자나 여행객 같은 떠돌이들을 대상으로 이 수술을 시행한다. 그들은 그의 좀비가 되기도 전에 죽어 버린다. 영악하게도 시선을 끌지 않기 위해 무연고자들을 대상으로 범죄를 저질렀으나 할머니 댁 옆집에 놀러온 금발머리의 훤칠한 소년을 보고 그만 반하고 만다. 몇날 며칠을 훔쳐보기만 하던 그는 마침내 완벽한 좀비를 만들기 위한 계획을 짠다.
진정한 좀비는 영원히 내 것이 될 것이다. 그는 모든 명령과 변덕에 복종할 것이다. "네, 주인님" "알겠습니다, 주인님"하면서. 내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나를 올려다보며 말할 것이다. "사랑합니다, 주인님. 오직 주인님뿐입니다." 그렇게 될 것이고 그런 존재일 것이다. 진정한 좀비는 '아니다'라는 말은 한마디도 할 수 없고 오직 '그렇다'라는 말만 할 수 있으니까. 그는 두 눈을 맑게 뜨고 있지만, 그 안에서 내다보는 것은 없고 그 뒤에서는 아무 생각도 없을 것이다. 어떠한 심판도 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들과 다르다. 당신들은 나를 지켜보면서 (Q_ P_를 지켜보는 것을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지? 보고서를 쓰는 것을 모른다고 생각하지? 당신들이 서로 Q_ P_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모른다고 생각하지?) 은밀한 생각을 하지? 언제나 그리고 영원히 심판을 내리지. (p. 75)
주인공의 이름은 쿠엔틴이지만 그의 이름은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만 불린다. '나'는 나를 지칭할 때 '쿠엔틴'이라고 하지 않고 'Q_ P_'라고 지칭한다. 주인공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인물이 이름자 첫자만 쓰여 'R_ P_' 'T 씨' '닥터 E'로 불리며, 피해자들은 '이름없는 사람' '토끼 장갑' '덩치' '건포도 눈' '다람쥐' 등으로 지칭된다. 일단 자기 자신을 제삼자화하는 것은 정신분열의 증상으로 보인다. Q_ P_는 사회적인 일들을 처리하는 껍데기에 불과하고 '나'는 Q_ P_가 하는 일을 관찰자처럼 동떨어진 입장에서 지켜본다. 다른 인물들의 이름을 간략히 부르는 것 또한 그들을 하나의 인간으로 보기보다 그저 하나의 대상으로만 보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 아닐까 싶다. 그는 다른 사람이 그에게 말을 건네고 있을 때면 종종 전혀 상관도 없는 엉뚱한 생각에 빠지곤 한다. 다른 인물들과의 소통에 관심이 없고 감정이입이 어렵기 때문이다. 가족들을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 등으로 정상적으로 호칭하고 그들에게 예의를 갖춰 대하면서도 속으로는 그들이 귀찮거나 방해가 되면 죽여 버릴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리고 자신이 죽인 이들의 물건을 하나씩 전리품삼아 지니고 다니며 그들에 가한 실험이 실패한 것을 아쉬워 한다.
난 교과서를 갖고 있고, 체포된 이후로는 머리를 어깨까지 풀어헤치거나 하나로 묶지 않고 잘랐다. 건포도 눈의 테두리가 휘어지는 펑키한 가죽 모자를 쓰고 있다. 300달러짜리 양가죽 재킷의 주머니에는 안에 보드라운 토끼털이 든 토끼 장갑의 가죽 장갑이 들어 있다. 그리고 처방을 받아서 만든 비행사 스타일의 황갈색 안경알을 덩치의 안경테에 끼워서 쓰고 있기 때문에 제법 쿨해 보일 것이다. 서른 살 안쪽의 턱이 갸름하고 머리가 벗어지기 시작한 수줍음 많은 백인으로 보일 것이다. 공대생들이 얼마나 친근하게 구는지, 얼마나 사람을 믿어주는지 이상할 정도다. 대학에 등록해서 그 학교 학생이면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는다. (p. 114)
마이클 스톤의 저서 <범죄의 해부학>을 보면 저자는 선천적으로 악마적 기질을 지닌 인간이 존재함에 대해 부정하고 싶어하면서도 '악의 씨앗'이 없지는 않다고 적고 있다. 이 악마성의 발현이 선천적이지 않으면 후천적이라는 소리인데, '악의 씨앗'에 해당되는 범죄자의 개인사를 살펴보면 악한 길로 들어설 만한 환경적 영향이 도통 없기 때문이다. 이런 악마성은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일고여덟 살 때부터 이미 발현된다고 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 쿠엔틴 또는 Q_ P_는 무척 유능하고 다소 억제하는 경향이 있는 아버지가 있기는 하지만 그 정도는 평범한 편이라 선천적인 '악의 씨앗'에 해당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아니면 책에 소개되지는 않았지만 어린 시절 머리를 다친 일이 있어 옳고 그름을 제대로 따질 수 없게 되었을지도.
책을 읽는 내내 가슴이 묵직하게 두근거렸는데, 이게 그가 범인인 것을 들킬까봐 그랬는지 아니면 피해자가 그에게 붙들릴 것이 걱정되어 그랬는지 모르겠다. Q_ P_는 피해자들이 피를 흘리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며 성적으로 흥분하는 '미친놈'이다. 그런데 이 책은 Q_ P_가 '나'로서 자신에 대해, 사건에 대해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1인칭이어서 그가 느끼는 흥분과 설레임이 그의 것인지 내 것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래서 나 스스로가 사이코패스의 감성을 이해하는 또 다른 사이코패스가 아닌가 두렵기까지 했다. (사이코패스라면 지금껏 잘 버텼군!) 책을 덮고 며칠의 시간이 흐르자 괜찮아졌는데, 서평을 쓰려고 훑어보다 보니 다시 가슴이 묵직하게 두근거린다.
조이스 캐롤 오츠의 책은 이게 처음이었는데, 스스로를 사이코패스가 아닐까 의심하게 만드는 기분 나쁜 책이지만, 그렇기에 더욱 잘쓰인 소설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저자의 의도에 딱 들어맞는 소설이다. 사이코패스의 정신세계가 궁금하다면 이 책을 통해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남의 일에 울고 웃는 보통 사람이라면 그게 그다지 유쾌한 기분은 아니긴 하다. 하지만 분명 읽고 나면 조이스 캐롤 오츠의 다른 작품도 궁금해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