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이를 낳지 않기로 했다
애럴린 휴즈 엮음, 최주언 옮김 / 처음북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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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960년대, 세계는 엄청난 호황으로 눈부신 성장을 이룩하고 있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으리라 믿었다. 전 세계가 휘말렸던 두 차례의 고통스런 전쟁이 끝났으므로 거기서 교훈을 얻어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리라 생각했고, 달에 우주선을 발사했으며 먹고 사는 문제는 이제 어떤 것을 먹고 어떤 더 좋은 것을 사용하느냐의 질적인 문제로 발전되었다. 의학 발전은 눈부셨고 기계공학이니 로봇이니 하는 것들로 새로운 미래가 눈에 보였다. 흑인들은 진정한 자유를 쟁취했고 여성들 또한 피임약의 개발과 인식의 전환으로 자유를 얻어나가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새로운 세상이 도래하던 시기였던 것이다. 그러나 과도기는 과도기일 뿐 사람들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이 책에 실린 글의 저자들은 그 시대의 생식 가능한 일원으로서 이전 세대와 같이 계속해서 출산과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서 핍박 아닌 핍박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의 우리나라는 너무나 못 살았던데다 독재 정권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세계 경제 호황에 맞는 문화 발전을 달성할 수 없었다. 선진화한 다른 나라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문명을 발전시키고 거기에 숙달된 반면 우리는 너무나 갑작스레 낯선 문화를 접해야 했으므로 그저 남의 나라 일을 보듯 신기하게 여길 뿐이었다. 그리고 1990년대에 들어서서야 1960년대의 미국과 비슷한 수준의 생활 향상을 달성하게 되었다. 뒤늦게나마 사람들의 문화 인식도 재빨리 앞서나가는 경제발전을 뒤좇아 천천히 진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간극이 너무나 컸던 탓에 생활상은 미국과 크게 다르지 않은 요즘에도 사람들의 인식 수준은 현저히 낮다.


이 책의 편집자 애럴린 휴즈는 자신이 아이를 낳지 않기로 결정했음을 안 사람들이 자주 보인 반응을 몇 가지 꼽아 놓았다.

1. "틀림없이 어린 시절에 좋은 기억이 없나 보구나."

2. "넌 좋은 어머니가 될 수 있었을 거야."

3. "출산이 그렇게 힘든 건 아니야."

4. "아기 소식은 언제 들려줄 거야?"

5. "아이가 있으면 결혼생활이 단단해져."

6. "노후에 누가 너를 돌봐주겠어?"

7. "참 이기적이구나."

8. "아이를 낳지 않은 걸 후회할 거야."

9. "네 씨를, 네 유물을 남기고 싶지 않아?"


이미 60대에 접어든 그녀가 지금 이런 말을 듣고 있지는 않겠고, 그 시절에 많이 들은 말이라고 적어둔 건데 1960년대로부터 50여 년의 세월이 지난 대한민국에서 사는 나도 몇 가지 듣는 말이 있다. (놀랍다. 저 사람들이 무려 50년 전에 듣던 말을 듣고 있다니!)

내가 애를 잘 키울 자신이 없다고 하면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다들 자신없이 시작하지만 잘하게 된다고.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을까? 분명 위로를 한답시고 하는 말이겠지만 만일 내가 정말 좋은 엄마가 될 자질이 없다면 어쩌겠는가. 내가 뉴스에 등장하는 사악한 엄마들 같지는 않겠지만, 정말 그런 사람이라서 아이에게 헌신할 능력도 의지도 없다면 안 낳는 것만 못한 일이다. 원하지도 않는 아이를 "낳지 않으면 언젠가 후회할 거야"라는 다른 사람들의 말에서 비롯된 불안감 때문에 억지로 낳고, 내 시간(거의 반평생을!!!)을 들여 누군가의 뒤치다꺼리를 하면서 살고 싶지는 않다.



"네가 아이를 낳아 기르면 다를 거란다." 어머니께서는 나를 위로하려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전통적인 인물 외에 다른 롤모델은 없는 서투른 10대인 나는 (오 제발) 노처녀가 되지 않으려면 어머니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 조카 세 명의 이모로서, 그리고 중학교 교사로서의 경험과 친구들의 아이가 딱히 달갑지 않은 행동들을 저지르는 걸 보면서 나는 내 자유에 감사하게 됐다. 그들과 달리, 나는 폭풍과도 같은 한 생명체에게 18년 동안 헌신해야 한다는 생각에 썩 끌리지 않았다. (p. 21)



요새는 난임 부부가 많아서 조금 조심스러워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묻는다. "애는 언제 낳을 거니?"

매번 설명하기도 귀찮다, 하지만 답하지 않을 수는 없어서 나는 낳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안 생겨서 못 낳는 건데 말만 이렇게 한다고 생각할까봐 신경 쓰이고, 한편으로는 만일 내가 진짜 난임이라 애를 갖고 싶은데도 못 갖고 있는 상황이라면 어쩌려고 묻는 건가 싶다. 남의 애는 남이 알아서 낳든 말든 내버려 두시길.


'언제'라고 쓰고 나니 책속 사람들은 듣지 않았으나 나는 듣는 말이 생각난다. "지금 당장 낳아도 노산이야. 더 늦기 전에 낳아."

노산인 거 누가 모르나? 그렇게 굳이 나이를 확인시켜 줄 때마다 짜증이 솟구친다.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고, 되돌린다고 해도 낳고 싶은 생각도 없다. 결혼이라는 숙제는 간신히 해치웠으나, 출산이라는 숙제는 그냥 추가 선택쯤으로 여기고 패스하겠다.


친구가 말했다. "그래도 애가 있으면 이혼할 것도 안 하고 넘어가."

결혼 초반에 험난한 굴곡을 겪었던 친구였던 터라 난 오히려 끔찍한 생각이 들었다. "그게 좋은 거야?" 되물었더니 친구는 아이가 부부 사이의 연결고리라고 덧붙였고, 나는 족쇄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가 없었다면 친구는 전혀 행복하지 않은 결혼 생활을 진작에 끝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좀 더 행복한 생활을 추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친구는 더 이상 아이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저 행복해 보이는 우리 부부가 부럽다고만 할 뿐.



어떤 여자들은 내게 아이를 낳지 않은 게 현명한 처사라고 말한다. 내 결정은 내가 이기적이고 철없다는 증거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개중에 한두 명은 뻔뻔하게도 이렇게 말한다. "여자가 참 딱하게도 무익한 삶을 사네요." 그들에게 나는 말한다. 나는 내게 맞는 선택을 했고, 내 삶은 무익과는 거리가 멀다고. 나는 일을 하면서 수백 명의 아이들을 사랑하고 또 아이들에게 사랑받았으며, 내 동물들을 소중히 아낀다. 분명히 말하지만, 자식이 없는 사람이 자식이 있는 사람과 비교했을 때 덜 행복하지 않음을 여러 연구가 보여준다. (p. 125)



사람들이 하는 말 중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둘만 있으면 나중에 심심해"이다.

우리 부부는 전혀 심심하지 않다. 8년 동안의 연애 시절 그랬듯이 지금도 그냥 둘이 잘 논다. 그리고 서로 간의 이 관계가 지속되리라는 확신도 있다. 하지만 나이를 더 먹고 많은 것들에 무감각한 상태가 되기라도 한다면 어쩔까 싶은 고민은 조금 있다. 그럴 때야 말로 아이는 연결고리가 될 듯하다. 심심하지 않도록 무언가 꾸준히 찾아나서야겠다는 생각은 든다. 부부의 심심함을 해결할 도구로 아이를 낳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나이가 든 뒤 정말 아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면 기꺼이 입양을 할 의향도 있다. 나 혼자만이 아니라 남편 역시 입양에 긍정적인 것을 보아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은 적지 않다.


아, 20대 중반 이후 면접관들은 늘 물었다. "결혼은 언제 할 생각입니까?", "출산은 언제쯤 할 생각입니까?"

질문을 들을 때마다 짜증이 났다. 남이사 결혼을 하던 말던 애를 낳던 말던 뭔 상관이냐. 자기 회사에 들어온 직원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면 축하하고 환영할 일이지, 그게 처음부터 뽑을 사람을 가려낼 그물망은 아니잖은가? 공백이 생기면 그걸 메울 생각은 하지 않고 공백을 만든 사람을 탓하는 게 분명히 정상은 아니다. 미래에 나라의 존립이 위태로울 만큼 출산율이 낮다고 난리지만 지금도 면접관들은 여자들에게만 결혼계획에 대해, 출산계획에 대해 묻는다. 사람이 귀해져서 자기들 취향대로 입맛대로 고를 수 없을 때가 되면 후회하겠지.



번은 친구가 중국인들은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한 사람은 사실 다른 생애에 이미 그것을 이뤘기 때문에 굳이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라고 믿는다는 말을 해줬다. 내가 내 결정을 후회하거나, 한탄스러워하거나, 결정에 죄책감을 가지지 않는 이유는 이 이야기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p. 44)



이 책속의 여인들은 모두 자신의 확고한 결정에 따라, 혹은 어쩌다 보니 낳지 않게 된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들은 엄마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을 뿐이다. 혼자 또는 남편과 함께 아주 활동적이고 재미난 삶을 살고 있으며, 몇몇은 아이들 교육 분야에서 헌신하고 있다. 넓게 보면 그들이 자신의 재능을 엉뚱한 곳이 아니라 올바른 곳에 사용하여 세상이 좀 더 좋아졌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한두 명의 아이에게 열중하는 것보다 더 많은 아이들에게 지식과 지혜의 샘물을 나눠주는 게 나으니까.


책을 읽으며 나도 활동적인 운동 등에 관심을 가져야 하나 생각했다. 소개된 대부분의 여자들이 분주히 세계 여행을 다니고 등산을 즐기고 요가를 했으며, 자기 일에 몰두했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이 창조적인 일이라면 그들은 그들만의 창조활동을 지속했던 것이다. 창조활동. 나도 잠시 내 현재 상태를 곰곰이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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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츠바랑! 13
아즈마 키요히코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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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은 이 작가의 전편 <아즈망가대왕> 시리즈를 즐겨 보았다. 난 좋아하지 않았는데, 별 시덥잖은 소리만 늘어놓는 허무개그가 내게는 영 맞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 작품이 막을 내리고 작가가 새로운 작품 <요츠바랑>을 들고 나타났다. 동생은 잽싸게 신작을 사들고 왔으나, 너무 잔잔한 내용 탓인지 곧 흥미를 잃었다. 반대로 나는 너무나 행복해하며 보았고 <요츠바랑 1>은 내 소유가 되었다. 이후 나는 이 시리즈를 모으기 시작했고 13권에 이르렀다.


우울할 때 읽으면 행복해지는 책이 있다. <빨강머리 앤> 시리즈가 그렇고, <요츠바랑>이 그렇다. 둘 다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들이 주축이 되는 작품들이다. 설거지를 해야 하고 장을 봐야 하고 요리도 해야 하고 시험따위 때문에 고민하기도 한다. 우리가 늘 겪는 일들이다. 두 작품 속 주인공들은 그 일상 속에서 사소한 즐거움을 찾아 누리며 거기서 행복을 만들어낸다. 요츠바는 다섯 살이라 세상 많은 것들이 즐거울 나이이긴 하지만, 우리 모두 그 나이였던 적이 있었고, 그 나이에도 나름의 고민과 사정이 있으니 꼬마에게도 배울 것이 있다. 두 작품은 행복이 엄청난 성공이나 커다란 물질적 보상,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모험에서 비롯되지 않음을 보여 준다. 그러면서도 객관적으로 그리 심각한 문제를 맞닥뜨리지 않는 주인공들의 모습과 그들이 사는 환경은 때때로 우리가 얻지 못해 갈구하는 여유와 평온함, 사랑 등을 대리만족시켜 줌으로써 치유의 기적을 발휘한다.

 

 

 

 

 

 

 

 

 

이번 13권에서는 요츠바의 할머니가 등장한다. 내게도 어린 조카가 생겨서 그런지 할머니와 손녀의 관계가 남다르게 보인다. 하지만 손녀가 귀여워서 어쩔 줄 몰라하며 물고 빨고 얼러대는 우리 엄마와 달리 요츠바의 할머니는 직설적이고, 음 뭐랄까, 다리 하나 건너 가까운 사이인 느낌이긴 하다. 물론 내 조카는 아직 두 돌도 안 된 아기고 요츠바는 또랑또랑한 다섯 살 꼬마지만. 할머니가 요츠바를 아끼는 마음이 엿보이긴 하는데, 그게 할머니 성격 탓인 것도 같고 한편으론 요츠바가 친손녀가 아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자신의 아이도 아닌 애를 기르는 (아마도) 노총각 아들. 할머니는 어떤 마음으로 아들과 이 별난 여자아이를 바라보는 것일지 무척 궁금하다. 그리고 그런 묘한 관계의 아들과 손녀를 자기 나름대로의 사랑으로 포용해 주는 것이 굉장히 보기 좋다. 그저 자기 핏줄에 대한 이기적인 사랑이 아닌 더 넓은 대상으로 한 대승적인 사랑 같달까?

 

 

 

 

 

 

 

 

보면 볼수록 웃음 짓게 하고 사랑스러운 요츠바이지만, 내가 요츠바의 옆집에 사는 입장이라면 정말 피곤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요츠바는 세 자매가 엄마와 함께 살고 있는 옆집을 자기네 집처럼 아침저녁으로 드나든다. 세 자매 중 둘째 후카와 막내 에나는 요츠바의 놀이에 거의 매일같이 참여해 놀아준다. 보통 인내심과 보통 체력으로는 안 되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후카네 식구들은 존경스럽다. 아마 실제로는 결코 존재하지 않을 사람들이겠지? 특히, 남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교육 받는 일본 아이들에게 요츠바처럼 옆집에 쉴 새 없이 드나드는 넉살 좋은 일은 더더욱 없을 듯하다.

만화책만으로도 애를 본다는 게 얼마나 힘들지 덜덜 떨려 역시 애는 없는 게 낫겠단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굳이 애가 있어야 한다면 요츠바 같은 아이였으면 좋겠다. 우리 조카가 또랑또랑 문장을 만들어 말을 하게 될 네다섯 살쯤이 되면 요츠바 같은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아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크윽~~~ 청소가 하기 싫다는 요츠바 말에 100% 공감. 청소는 정말 귀찮다 -_-;; 설거지보다 다섯 배쯤 더 귀찮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집안일은 빨랫감을 추려서 세탁기에 넣고 돌린 다음 빨래를 너는 일이다. 빨래 개는 건 귀찮아도 할 만하다. 수건 빨래가 많다면 귀찮기보다 즐겁다. 개는 것도 쉽고 차곡차곡 열을 갖춰 진열되는 모습에서 어떤 희열이 느껴져 ㅋㅋ 설거지는 마음먹고 해치우면 금방 할 수 있고 늘어져 있던 그릇들을 깨끗이 씻어 쌓아놓으니 말끔해진 싱크대 만큼이나 기분이 환해진다. 그러나 설거지가 너무 많으면 일단 하기가 싫고, 설거지 끝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설거지가 나오면 더더욱 하기 싫다. 그러나 역시 가장 싫은 건 청소. 특히 바닥을 닦는 일이다. 청소는 해도 티가 안 난다. 깨끗해진 바닥이나 사물은 원래 그러려니 하게 되어 인식이 더디거나 아예 인식되지 않는다. 근데 희한하게도 지저분해진 뒤엔 눈에 확 띈다. 게다가 손으로 걸레 빨기도 싫고 -.-;;; (아, 냉장고 청소해야 하는데 언제 하지? 차일피일 미루고만 있다...... 제일 싫다 -_-;;)

청소가 좋다는 할머니 말에 '어른들이 요츠바한테 청소 시키려고 그런 얘길'한다고 답하는 요츠바. 그만 빵 터지고 말았다. 예리하다! 거짓말이 아니라면서 땀을 흘리는 할머니의 옆모습. ㅎㅎㅎ

 

 

근 2년만에 사랑스러운 요츠바를 만났다. 행복한 순간도 잠시, 만난 지 기껏 하루가 지났는데 벌써 앞으로 또 2년을 기다려야 하나 하는 걱정이 앞선다. 그러면서도 <요츠바랑 14>가 나올 날을 설레는 맘으로 기쁘게 고대하게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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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골동품 상점 (무선)
찰스 디킨스 지음, 김미란 옮김 / B612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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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디킨스의 작품을 원작 그대로 읽는 건 처음인 것 같다. 그간 접해본 찰스 디킨스의 작품은 애니메이션이거나 아동용 축약본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마저도 <올리버 트위스트>나 <크리스마스 캐럴>뿐이었고, 완역으로 접한 일이 있던 <데이비드 코퍼필드>는 아주 잠깐 두세 챕터를 읽었더랬다. 결국 제대로 읽은 건 오늘 책장을 덮은 <오래된 골동품 상점>이 유일한 셈이다.

학창시절 책과 거리가 멀었던 친구가 자신이 접해보지 않은 고전을 읽고 싶어했고, 마침 출간된 이 책이 내 눈길을 끌었기에 우리는 우리의 독서토론모임 첫 책으로 이 작품을 골랐다. 하지만 다른 작품에 비해 찰스 디킨스의 작품으로는 인지도가 낮은 편이라 친구의 바람을 채워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나도 어디 가서 찰스 디킨스의 이 작품은 읽었다고 소근거릴 수는 있겠다. 그러나 그 전부터 책장 속에서 <위대한 유산>과 <두 도시 이야기>가 대기 중이었다는 건 비밀~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것 같은 오래된 골동품 상점에 노쇠한 노인과 아름다운 손녀 넬이 함께 살았다. 둘은 서로를 끔찍이 아꼈지만 그 사랑이 무너져가는 가세를 일으켜 세워주지는 않았다. 노인은 어린 손녀를 상점에 딸린 낡은 집에 놓아두고 밤마다 외출을 했고 그럴수록 그들이 가진 보잘 것 없는 재산은 더욱 줄었다. 결국 상점은 사채업자 퀼프에게 넘어가 버린다. 손녀에게 물려줄 것 없는 자신을 원망하고 우울해하는 노인에게 넬은 집 없는 떠돌이가 되어도 좋으니 행복하게 살자며 떠날 것을 종용한다. 넬의 친구 키트는 자신의 집에 와서 지내라고 하지만 이른 새벽, 넬은 노인과 함께 마을을 떠난다. 한편 키트는 정직하고 선량한 성격 덕분에 명망 있는 가문을 위해 일하게 된다.

양쪽 모두 잠시 행복해질 찰나 노인의 노름병이 다시 도지고, 키트는 점차 난쟁이 악당 퀼프의 패거리가 세운 음모에 휘말린다. 노인이 넬에게 물려줄 많은 유산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 넬의 오빠 프레드는 친구 스위블러를 자기 동생과 결혼시킬 계획을 세운다. 허영심 많고 경솔한 스위블러는 좋아하는 숙녀가 있었음에도 넬과 결혼하면 부자가 되리라 기대한다. 자신 외의 모든 사람들을 싫어하는 퀼프는 스위블러를 음모에 쓰일 말로 이용하려 한다. 그래서 스위블러를 자신의 법에 관련된 일을 도맡는 남매 변호사 브래스와 샐리의 사무실에 취직시킨다. 하지만 두 남매의 악한 면을 보고 키트가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을 때 도움을 주게 된다.

 

 

노파는 남편이 죽었을 때 어떻게 자신도 함께 데려가 달라고 애통하게 울며 기도를 드렸는지, 또 사랑한 만큼 슬픔도 컸기에 무덤을 처음 찾던 날 어떻게 자신의 심장도 그대로 멈췄으면 하고 바랐는지 넬에게 말해 주었다. 하지만 많은 시간이 지나면서 슬픔도 조금씩 사라져 이제는 그저 엄숙한 기쁨과 싫지 않은 의무감만이 느껴진다고 했다.그리고 노파는 늙어 가는 자신과 맞지 않는 남편의 젊음에 유감을 표하고, 55년이란 세월이 흐른 지금은 죽은 남편을 그저 아들이나 손자 대하듯 한다며, 그의 힘과 남성미를 칭찬하며 자신의 쇠락과 나약함을 비교했다. 그래도 여전히 그를 자신의 남편이라고 말한 노파는 그가 지금의 그녀가 아닌 과거의 그녀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에서, 남편이 바로 어제 죽기라도 한 것처럼 다음 세상에서의 만남을 얘기했다. 그리고 예전의 자신과 이별한 그녀는, 남편과 함께 죽었을지도 모를 어여쁜 소녀와 그의 행복을 떠올렸다. (p. 177)

 

아무도 지켜보는 이 없는 죽을 운명의 소녀는 미끄러지듯 자리에서 일어나 열린 창문에 몸을 기대고 생각에 잠겨 별을 쳐다보았다. 교회 종소리가 마치 죽은 자와는 많은 교감을 나누지만 산 자에게는 그렇지 못해 애석하다는 듯 구슬프게 시간을 알렸고, 낙엽이 바스락거리거나 무덤 위에 자라난 풀들이 흔들릴 뿐 모든 것은 고요했다. 꿈 없이 잠든 자 중 일부는 자신의 안전과 안위를 위해 그것을 꽉 붙잡고 있는 것처럼 교회의 그림자 안에 누워 있었다. 누군가는 시시각각 변하는 나무 그림자 아래에, 다른 누군가는 어린아이들의 무덤 사이에 눕기를 원했다. 일부는 매일 걸어 다니던 교회 마당 아래에 쉬기를 갈망했고, 일부의 무덤에는 석양이 일부의 무덤에는 동틀 무렵의 아침 햇살이 내렸다. 아마도 자유로운 영혼들은 살아 있을 때 친숙했던 벗과 떨어지기 싫었던 모양이다. 떨어져 지내더라도 오랫동안 감옥에 갇혀 지냈던 포로들처럼(심지어 그들은 풀려나서도 그 좁은 속박의 굴을 그리워한다) 그 친숙한 벗을 여전히 사랑했다. (p. 516)

 

 

할아버지와 함께 행복을 위한 길을 떠난 넬은 내내 죽음의 이미지에 이끌린다. 23세로 죽은 청년의 묘비 앞에서 부인인 78세 노파에게 죽음 이후에도 계속된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아직 청춘의 꽃을 피우기도 전인 어린 아이들이 꽃잎이 몇 장 남지 않은 이들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모습을 목격하기도 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타인의 늙음과 죽음에 대해 대화하면서도 자기 자신들은 영원히 살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에 의문을 품기도 한다. 그리고 거기서 자신은 여전히 이 세상에서 살고 있음에 감사하면서도 '젊은 나이에 죽은 영혼이 얼마나 밝고 행복한 존재인지, 그들이 긴 세월 동안 주변 사람들의 죽음을 지켜보며 강한 애정으로 무덤을 돌봐야 하는 고통을 어떻게 죽음으로 덜 수 있는지(p. 260)'도 생각한다.

밀랍인형을 전시하는 잘리 부인의 일행이 된 것 역시 삶과 죽음에 대해 떠오르게 한다. 밀랍인형은 실존했으나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인물들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둔 것이다. 살아생전 어떤 삶을 살았건 간에 마지막에는 모두가 죽음을 맞게 됨을 이렇게 또렷하게 드러내는 상징물이 어디 있을까? 살아 있는 사람들은 이미 죽은 자들을 이용해 돈을 벌어 남아 있는 삶을 부지런히 살아 나간다. 이를 통해 저자는 모두가 결국은 죽게 될 것이므로 더 열심히 살아나가야 한다고 강변한다. 그러면서도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일은 슬픈 일이지만 영원한 고통이 되지도 않으며 우리의 삶엔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다니는 일상적인 것이고 결코 동떨어져 있지 않음을 일깨워주고 있다.

 

 

"불은 내게 책과 같단다." 그가 말했다. "읽는 법을 배운 유일한 책. 불은 내게 많은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지. 또 그것은 음악이기도 하단다. 나는 어떤 소음 속에서도 불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어. 타오르는 불은 자신의 함성 속에 또 다른 목소리를 지녔지. 불은 자신의 초상화도 지녔단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석탄에 얼마나 많은 낯선 얼굴과 다양한 모습들이 존재하는지 너는 모를 거다. 불은 나의 추억이기도 하단다. 불은 내 인생 전체를 보여 주거든." (p. 442)

"내 아들도 갓난아기 때는 귀머거리에다 벙어리에 장님이었다가 나중에야 좋아진 거죠. 저 여자의 아들은 배울 수가 없었겠죠. 그렇다면 내 아들은 배웠나요? 말씀해 보세요. 어디에 내 아들을 가르칠 선생이나 학교가 있었나요?"

"진정하시오, 부인."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말했다. "부인 아들은 사지가 멀쩡하잖소."

"그래요." 부인이 외쳤다. "내 아들은 사지가 멀쩡해서 더 쉽게 나쁜 길로 빠졌겠죠. 옳고 그름을 몰라서 저 여자의 아들을 봐준 거라면, 어째서 옳고 그름을 배우지 못한 내 아들은 봐주지 않는 거죠? 당신이 무지해서 내 아들을 처벌하듯이, 신도 말하고 듣는 것에 무지하므로 그녀의 아들도 똑같이 처벌해야 합니다. 당신 같은 신사들이 배움의 유무를 따지는 동안 얼마나 많은 소년과 소녀들(남자와 여자들 역시)이 마음에 상처를 입고 처벌을 받는지 아세요? 부디 공정한 사람이 되세요. 그러니 내 아들도 돌려보내 주세요." (p. 452)​

 

 

일정한 목적지가 없던 두 사람은 어쩌다 시골을 벗어나 도시로 흘러 들어간다. 산업화된 도시의 모습은 넬에게, 그리고 찰스 디킨스에게 지옥도나 다름없었다. 강물은 탁하고 거리는 불결하여 악취를 풍겼으며, 너무나 시끄럽고 너무나 복잡했다. 아무도 불쌍한 두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그들은 '마치 수천 년 전의 사람이 기적같이 환생해 그곳에 보내진 것처럼 혼란스러(p. 434)'웠다. 비까지 내려 더욱 우울한 그곳에서 그들을 도운 것은 도시의 가장 밑바닥 인생을 사는 야윈 남자였다. 남자는 두 사람을 자신이 기거하는 한 공장의 용광로 옆에 재워주고, 그들이 떠날 때는 소중하게 아껴왔을 돈을 건넨다. 남자가 그토록 아끼며 사랑한 불은 인간이 어떤 변형을 가하건 그 모습이 변하지 않는 자연의 일부이다. 아마도 그는 도시에 살고 있으나 불로 상징되는 자연을 사랑하는 인물이며, 그래서 이 지옥 같은 도시에서 두 사람이 만난 가장 자애로운 사람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도시에서 두 사람의 모험은 저자가 산업화에 대해 경멸하며 분노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지긋지긋한 도시'보다 더 황폐화된 주변 지역은 초목들이 매연을 뒤집어쓴 채 생기 없이 늘어져 있고, '봄의 희망을 알리는 새싹조차 보이지 않'는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형편없는 집들이 늘어서 있고, 거기엔 창백한 안색에 누더기를 걸친 사람들이 산다. 분노한 실업자들이 무기를 들고 항거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스러지고, 밤이면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들의 시체가 수레에 실려 여기저기로 사라진다. '그곳의 밤은 하늘이 지상에 준 밤과 달리 어떤 평화도 깃들어 있지 않았고, 고요하고 평화로운 잠을 허락하지도 않았다. 아, 누가 길거리를 헤매는 저 어린아이에게 이런 밤의 공포를 설명한단 말인가!(p. 449)' 시골 아이들이 학교에서 진리를 배우고 친구들과 뛰노는 동안 도시의 아이들은 옳고 그름조차 배우지 못하고 가족을 먹여 살리느라 삶의 하루하루를 소진한다.

찰스 디킨스는 이미 그 시대에 미래를 내다보고 있는 셈이었다. 고도로 산업화된 도시는 자연을 죽이고, 죽어 있는 자연 안에서 인간은 평화로운 잠을 잘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또한 인간에게 배움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았으며, 자본가들의 책략으로 배움의 기회를 박탈당했으면서도 배우지 못해 얻은 죄는 탕감받지 못하는 현실도 알았다. 저자가 살았던 시대로 부터 15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우리는 자연의 많은 부분을 잃고 이제야 그 중요성을 깨달았다. 그리고 불완전한 사회 시스템으로 인해 동등한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아진 현실이 초래한 문제를 해결하려 애쓰고 있다. 문제가 생겨나기 시작한 그 시절에 저자의 주장에 귀를 기울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쉬울 따름이다.

 

 

"참으로 귀엽단 말이오, 영감." 노인에게 윙크를 한 퀼프가 짧은 다리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통통한 것이 상냥하고 생기가 넘쳐."

노인이 화를 억누르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퀼프는 노인의 불편한 기색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저렇게 작고, 아담하고, 아름답고, 어여쁜 데다 파란 정맥이 비칠 정도로 투명한 피부, 앙증맞은 발, 또 어찌나 애교가 넘치는지. 저런, 영감 긴장했구려! 무슨 문제라도 있소?" (p. 103)

 

"그럼. 물론이지. 내게 프레드를 데려오게. 그에게 내가 자네들의 친구라고 말하고. 안 될 이유가 없잖아?"

"안 될 이유야 없죠. 분명히. 아니 어쩌면 당신과 내가 친구가 되어야 할 이유는 상당히 많을 거요. 적어도 당신이 미래를 알려 주는 정령이라면 나와 친구가 되는 게 당연하겠죠. 그런데 당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잖소."

"그럼 뭔가!" 퀼프가 소리쳤다.

"악마 쪽에 가깝지. 당신 같은 외모를 가진 사람은 그렇지 않을 이유가 없소. 당신이 정령이라면 그건 아마도 악마의 정령이겠지. 미래를 알려주는 정령은 외모부터 확연히 다르다오." 스위블러가 자신의 가슴을 치며 덧붙였다. "맹세컨대, 당신은 그런 외모가 아니오." (p. 230)

 

 

찰스 디킨스 소설 속 인물들은 종이 인형처럼 평면적이다. 그들의 외모는 내면의 상태와 정확히 일치한다. 악당은 악당 같은 외모를 지니고, 착한 사람은 말끔하거나 뛰어난 외모를 지니고 있다. 또한 악한 사람은 끊임없이 악한 면을 내보이고 선한 사람은 그저 선한 면만을 내보인다. 그들의 그런 면면들 사이에는 자신들의 생각이나 판단, 행동에 대한 후회나 반성, 의혹과 고뇌의 빛이 전혀 없다. 아예 머리 구조가 그렇게 빚어진 듯 악한 내면과 선한 내면을 가질 뿐이다. 악인이든 선인이든 모든 인물이 다양한 얼굴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요즘에 보기엔 너무나 단조로워 현실성이 떨어진다. 그나마 이 소설에서 인간적으로 보이는 인물은 허영심 많고 경솔하지만 본성이 악하지 않은 스위블러와, 재산가인 퀼프와 딸의 결혼을 주선했으나 지금은 퀼프를 죽도록 미워하는 지니윈 부인이다. 이 두 인물을 제외한 다른 인물들은 기괴할 정도로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있어 지루할 정도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요소에 영향을 받지 않고 쉽게 판단할 수 있어 독자들에게 교훈을 주고 싶어하는 저자의 의도에는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다소 슬프게 끝나긴 하지만 권선징악의 결말 역시 그 의도에 상응한다(노인은 노름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고 손녀를 괴롭게 한다. 그는 그렇게도 사랑하는 손녀를 잃음으로써 그의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른다). 그토록 단순화되었기 때문에 현대에는 성인들보다 어린이들에게 더 설득력을 지녀 동화에 어울린다.

 

사실 내용이 너무 뻔하고 그리 공감가지 않는 인물들 때문에 살짝 지루해서 처음엔 별 세 개 정도를 주려 했지만, 서평을 쓰며 내용을 되짚어 가다 보니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인다. 역시 책을 읽고 난 뒤 서평을 쓰는 건 꼭 해야 할 일이다. 빤해 보이는 내용도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그 안에 내포된 것들이 드러나 그 가치가 달라진다. 이 책이 바로 그런 책이었다.

 

원작이 원래 그런 건지, 아니면 원작의 묘사가 길어서인지 매끄럽게 풀이되지 않은 듯한 부분이 많았다.

260페이지의 2번째 줄. '한 노인의 손자인 죽은 소년 역시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 할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이유로 넬은 슬픔에 겨워 눈물을 흘리면서도 할아버지에게 자세한 얘기는 하지 않았다.' 문장의 의미는 이해가 가지만 단어의 쓰임과 연결이 어색하다. '한 노인'과 '할머니'는 동일한 대상이 아닌가? '역시'는 왜 쓰였는가?

326페이지 10번째 줄. '불투명한 유리를 쓱쓱 문지르자 거기에 걸렸던 뒤틀리고 늘어진, 그리고 햇볕에 변색이 되어 해진, 녹색 커튼을 통해 (오래 사용한 탓에 너무 낡은 나머지) 어두침침한 작은 방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의미 파악은 가능하지만 역시나 매끄럽지 않다. '걸렸던'은 지금은 걸려 있지 않고 과거에 걸려 있던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녹색 커튼을 통해 방이 보이는 걸 보면 여전히 그 자리에 걸려 있다. 괄호 안의 구절의 위치가 '뒤틀리고 늘어진' 다음에 오면 더 좋을 것 같지만, 아무래도 원작의 위치가 저기인 듯하다.

448페이지 10번째 줄. '무너진 조각들로 겨우 버티며 땅 위에 위태롭게 여기저기 선 철거된 집들은, 벗겨진 지붕에다 창문도 없이 검게 그을렸지만 아직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었다.' 철거되었는데 집이 존재할 수가 있나? 철거되었다는 것은 아예 없어졌다는 뜻이 아닌가? 벗겨진 지붕은 지붕이 일부 남아 있다는 의미인가 아예 사라졌다는 의미인가? 아무래도 철거는 허물어졌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듯한데......

 

179페이지 밑에서 8번째 줄. '코드린'은 '코틀린'으로.

633페이지 11번째 줄. '"정말 기뻐요.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요."' 마르셔네스가 자기 생각을 말하면서 '그녀는'이란 표현을 썼을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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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의 황태자와 남쪽의 물고기
이마 이치코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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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마 이치코의 세상은 신비롭다. 우리가 사는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등장해 상상력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뿐이라면 지금만큼 유명세를 얻지는 못했을 터. 그의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존재해서 신비로운 한편, 시종일관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잃지 않고, 마치 그 모든 것들이 농담에 불과하다는 듯이 유쾌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당연히' 사건의 시작은 대개 인간의 탐욕과 어리석음에서 비롯된다. 시작 인물이 굳이 인간이 아니라 귀신이거나 동물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인간이었거나 의인화된 인간의 한 모습이다. 결국 '대개'란 그저 외형상 인간인 이들을 가리킬 뿐이고 굳이 말하자면 '오직' 인간들 때문인 것이다. 나였다면 이미 거기서부터 인간에 대한 희망따위는 갖기 어려울 법한데, 작가는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들의 결말을 훈훈하게 맺어주어 나를 안심시킨다.


그의 이름을 알린 《백귀야행》 시리즈가 이 세상과 교차하는 다른 세계의 모습을 그려내는 것과 달리 그의 단편 작품집들은 다른 세상을 그려낸다. 이 작품 <북쪽의 황태자와 남쪽의 물고기> 역시 인간이 사는 다른 세상이다. 첫 번째 작품인 <선인의 거울>은 나라에 일어날 재앙을 미리 알려주는 거울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거울이지만 절대로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면 안 된다는 제한조건이 있다. 권력자들은 나라를 부강하게 할 수 있다는 유혹에 무릎을 꿇고 거울을 탐낸다. 아마도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면 안 된다는 조건은 별 것 아니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 한낱 인간일 뿐이라 두 번째 유혹에도 빠지기 일쑤이다. 그러다가 거울을 들여다 본 한 여왕이 거울을 깊은 산 속에 숨겨 버린다. 시간이 흘러 거울은 잊히고 쇠락한 마을사람들이 험한 산중에서 살아남게 도와주는 도구가 된다. 권력자들과 마찬가지로 일반인들도 거울에 모습을 비춰보고 싶은 유혹을 이기지 못한다. 산 속으로 들어간 마을사람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한 형제만이 남게 됐을 때 마을을 찾아온 이방인이 마을의 저주를 푼다.


필요 이상으로 풍요롭기를 바라는 데 대한 욕심과 집착, 본인이 남들에게 비춰지는 만큼 선하거나 순수하지 않음을 아는 데서 오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의혹, 생김새로 서로를 재단하는 외양에 대한 집착. 이 모든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자칫하면 마을의 몰락을 가져올 뻔하게 된다. 다행히 수경과 선인의 정체가 드러나고 사건은 해결된다. 이마 이치코다운 훈훈한 끝맺음이다. 이제 마을사람들은 좀 더 성숙해질 것이다. 실제로는 요원한 일이겠지만 아마도 그것이 작가가 바라는 세상이리라.

 

 

 

 

 

이 책의 표제작이기도 한 <북쪽의 황태자와 남쪽의 물고기>는 좀 더 신비롭고 내용도 흥미롭다.

서기관 가문의 자손인 안젤은 선천적으로 걸을 수 없는 장애를 가지고 있다. 그런 그를 총독의 후계자 표도르는 눈엣가시처럼 여기며 미워하며 '냄새 나는 물고기'라 부른다. 사막에 둘러싸인 나라에서 태어나고 자란 안젤은 그것이 무슨 생물인지 전혀 알지 못한 채 호기심만을 갖는다. 그런데 안젤을 괴롭히던 표도르가 결투를 하다 죽음을 맞고 연이어 총독마저 오랜 병환 끝에 세상을 떠나자 안젤이 차기 총독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총독의 측실이었던 안젤의 어머니가 숨을 거둔 이후 그 언니인 큰이모가 안젤을 거둬 키워왔던 것이었다. 그런 그에게 고모할머니가 '물고기'가 들었다는 기묘한 수납장을 선물한다. 그리고 때마침 본국에서 안셀이라는 이름을 가진 황제의 차남이 유학을 명목으로 내려오게 된다.

물고기가 든 수납장을 방에 둔 이후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되는 안젤. 그가 묵는 총독의 거처에 불이 나지만 그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깨어나기도 하고, 어두운 밤길에 사촌형이 괴한들에게 공격을 받는 자리에 나타나 형을 구해주기도 한다. 난생처음 제 발로 걷는 진귀한 경험을 하며 들떠 있는 와중에 고모할머니가 잠을 자다 조용히 숨을 거둔다. 계속된 총독 가문의 죽음은 새로 총독이 된 안젤과 서기관 가문에 대한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특히 도발적인 결투소환장이 표도르와 그 상대방을 죽인 셈이라는 모함이 강하게 제기된다. 하지만 다행히 그가 썼던 글은 표도르가 써 달라고 한 결투소환장이 아닌 화해를 청하는 글이었으며, 실은 아예 이용되지 않았기에 위기를 모면한다.

연일 진귀한 경험을 하던 안젤은 안셀이 낙마하며 절벽으로 떨어질 찰나 나타나 그를 구한다. 안셀이 보기와 달리 착한 성미임을 알고 두 사람은 친밀해진다. 하지만 이 우정은 안젤이 연 만찬에서 안셀의 측근이 독이 든 음료를 마시고 죽임을 당하자 흔들린다.

한편 표도르가 죽은 결투에 안젤이 쓰지도 않은 결투소환장이 사용된 것에 대해 조사하던 안젤의 동생 테사는 민간의 대필가를 찾아내고, 대필가와 결탁한 음모세력을 밝혀낸다.


《백귀야행》 시리즈와는 다른 작품이지만 작가의 분위기가 물씬 드러난다. 높은 사람들은 스스로 읽기와 쓰기를 하지 않는다는 흥미로운 설정이 먼저 시선을 잡아끈다. 글과 문자에 대해 다루는 다른 여러 작품들을 보면 권력자들이 권력 유지를 위해 백성들의 배움을 막는다는 내용이 많다. 나 역시 생각하기로는 문맹 천지에서는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게 무엇보다 강력한 무기가 아닌가 싶으나, 세계관에 따라 이럴 수도 있겠구나 싶다. 앎이 힘인 것은 사실이나 현실 세계에서 실제적인 힘이 문자 그 자체를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외에 물고기라는 익숙한 대상을 작품 속 세계관에 알맞은 신비한 대상으로 탈바꿈시킨 것은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보게 만들어 주기도 하였다. 보통 '자유'라고 하면 새를 떠올리기 마련인데, 사막이라는 폐쇄적인(?) 공간에서는 물고기가 자유를 의미할 수도 있다는 것 또한 나의 상상력을 되돌아보게 해줬다. 역시 책이 얇다고 아쉬워할 일도 아니다.


전반적인 내용은 무척 재미있었으나 음모술수가 난무하는 정치 이야기를 너무 두루뭉술하게 마무리한 것 같기도 하다. 글자를 제대로 알지 못하며 음모론에 귀 기울인 자들이 '사실은 이것이 안젤이 쓴 화해의 편지이고 이 결투소환장은 그가 쓴 것이 아니오'라는 설명에 너무나 쉽게 수긍한다. 실제였다면 어떻게든 결투소환장은 안젤이 쓴 것이라고 우기거나, 아니면 대필가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글의 내용을 바꿔 쓴다는 데에 강한 비난과 성토가 이뤄졌을 것이다. 결국 문자와 글이 유일한 무기인 서기관 가문은 살아남지 못하는 것이 수순이다. 물론 시간을 거슬러 남게 된 기록이 그들의 결백을 밝혀주어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말로 마무리되겠지만.

또 대필가를 찾아간 테사가 우연히 음모를 꾸민 자를 만나게 된다는 것도 조금 허술한 맺음이었다. 소설(만화) 속에 우연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런 세계라면 모든 경찰이 우연히 범인을 찾아내 체포하고, 모든 영웅은 우연히 범죄 현장에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솔직히 이 물고기로 인해 안젤이 어떤 식으로 돌아다닐 수 있게 되는지는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영혼이 돌아다니는 것인지, 몸이 돌아다니는 것인지, 물고기가 안젤의 몸을 취해 돌아다니고 그의 영혼을 수납장에 넣어두는 것인지, 아니면 그를 보필하던 반인반귀 피테르가 매개체가 된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일단 돌아다닌 안젤의 발바닥이 까맣게 된 것을 보면 몸이 돌아다닌 것은 확실하고, 자신이 돌아다니면서 한 일을 기억하는 것도 보면 영혼이 깨어 있었다는 것도 확실한데, 나중에 피테르가 다친 연유는 또 무엇인지 오리무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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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섭의 식탁 - 최재천 교수가 초대하는 풍성한 지식의 만찬
최재천 지음 / 명진출판사 / 2011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모든 학문은 인간 본위이다. 동물을 연구하는 학문도 우주를 연구하는 학문도 결국은 인간의 시선에서 그 논점이 시작되어 인간을 위한 것이 된다. 경제학도 인간을 연구하는 인간을 위한 학문이며 물리학도 인간이 누비는 환경과 인간이 사는 삼라만상을 연구하고 결국 인간을 위해 더 나은 결과를 내놓기 위한 학문이다. 그래서 굳이 통섭이라는 명칭까지 필요할 것 같지는 않다. 애초 학자들이 자기들의 연구가 모두 인간을 위한 것임을 안다면 문제 될 것이 없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저만의 틀에 갇혀 살듯이 학자들도 별다를 게 없어 그렇게 경계를 넘어갈 수도 있다고 일러줘야 하는 모양이다.

나는 통섭이라고 해서 모든 지식이 어우러지는 것인 줄 알았는데,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아마도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어우러짐이라는 의미인 모양인데, 과연 인문학과의 어우러짐이 이뤄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인간'과의 접점은 모든 장에 걸쳐 이뤄지고 있다. 저자는 자연과학사에 일어나는 이런저런 일들을 인간사에 비추어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 설명의 바탕에는 인간과 생명에 대한 따스한 시선이 배어 있다. 그런 저자야 말로 통섭적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다른 분야의 지식을 머릿속에 함께 담아두었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분야에서든 그 안에서 인간과의 연계성을 파악해내기 때문일 것이다. 만사가 인간과 관련되어 있음을 깨닫는 사람은 타인을 비롯한 그 어떤 생명에게도 함부로 대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보다 연약한 것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런 작가의 글에 나까지 마음이 포근해진다.


 

방방곡곡 많은 신하를 풀어 불로초를 찾게 했던 진시황제도 결국 한 줌 흙으로 돌아갔다. 그의 몸을 구성하고 있던 10조 개의 세포 속에 들어 있던 DNA들도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정자 속에 담겨 자식들의 몸으로 전달된 DNA의 일부는 아마 지금까지도 누군가의 몸속에 살아 숨 쉬고 있을 것이다. 이처럼 유전자의 관점에서 바라본 생명은 영속가능성을 지닌다. 태초에는 보잘것없는 한낱 화학 물질에 지나지 않았던 DNA는 단세포 생물을 거쳐 오늘날에는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의 몸속에 살아남아 면면히 그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생명의 역사는 한 마디로 DNA의 일대기 내지는 성공담에 지나지 않는다. (p. 162)


 

자연의 도살 현장에는 언제나 경제주의자 즉 인간중심주의자와 환경주의자 즉 생물중심주의자 간의 각축이 벌어진다. 조금 살만하다 싶을 때에는 환경주의자들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는 듯 싶다가 경제 지표가 조금만 나빠지기 시작하면 황급히 인간중심주의의 논리로 복귀하고 만다. 급기야 우리는 열대우림 15곳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종이 절멸 위험에 처해 있는 '중요 지점hotspots' 25곳을 지정하여 마지막 안간힘을 쓰고 있다.

보전생물학자들은 생명의 미래를 위태롭게 하는 요인들을 '하마'라는 뜻의 머리글자 'HIPPO'로 요약한다. 서식처 파괴Habitat destruction, 침입종Invasive species, 오염Pollution, 인구Population, 과수확Overharvesting이 그것이다. 오염과 인구 문제는 구태여 설명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고 과수확의 문제점은 어민들이 이미 겪고 있다. 토종 개구리는 물론 심지어 뱀까지 황소개구리의 침입에 속수무책이었던 걸 기억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가장 심각한 것은 서식처 파괴이다. 국토균형발전이라는 때아닌 이념 아래 전 국토가 굴착기의 발톱에 유린당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이웃 나라가 토해내는 황사에 기침 잘 날 없는 판에 우리 스스로 우리의 허파를 도려내고 있다. 나는 이 책을 우선 2005년 12월 21일에 1심의 판결을 뒤엎고 또다시 새만금 개발을 허락한 서울고법 특별4부 판사님들에게 권하고 싶다. 환경 윤리가 왜 단기적인 가치관을 넘어서야 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혜안을 얻게 될 것이다. 윌슨은 "우리의 미래 세대는 우리의 만행을 끝없니 반추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p. 214)


 

저자는 인간이 갖지 못한 현명함을 가진 동물들을 소개하면서 인간의 반성을 촉구한다. 인간과 다를 뿐 인간보다 부족하거나 모자란 것이 아닌 수많은 생명들이 발전이라는 이름 앞에 스러져 가는 현실이 그로서는 안타깝다. 제 몸의 몇 배나 되는 물건을 들어올리는 개미의 힘이나 집단을 위한 희생을 통해 진정한 영속성을 누리는 꿀벌의 힘,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지구의 생명사를 쓰기 시작하고 지금까지도 많은 영향을 끼치는 미생물, 인간의 활동 영역이 넓어질수록 멸종되어 자취를 감춰가는 세계의 동식물들. 세상의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나 역시 저자의 이야기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의 발 밑에 우리가 가지 못하는 드넓은 세계가 펼쳐져 있고, 머리 위로도 갈 수 없는 광대한 세계가 뻗어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그래서 우리는 한낱 미물에 지나지 않으므로 이 작은 세계에서 내가 높네 네가 높네 하는 것이 모두 부질 없음을 깨닫는다면 그 누가 얄팍한 지식의 틀에 갇힌 이기적인 개구리가 되겠는가. 그래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우리 주변의 세계를 보여주고 싶은 것이 아닐까 싶다.


 

인간이 진화의 결과로 탄생한 것은 분명하지만 진화가 우리 인류를 탄생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과정은 아니다. 자연선택은 어떤 목표를 향해 합목적적으로 진행되는 미래지향적 과정도 아니며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모든 합리적인 해결 방법을 총동원할 수 있는 공학적인 과정도 아니다. 그래서 적자생존의 과정을 수없이 반복하고 난 결과는 어쩔 수 없이 완벽한 인간의 등장일 수밖에 없다는 식의 생각은 지나친 인본주의 또는 인간중심주의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생명은 이처럼 지극히 낭비적이고 기계적이며 미래지향적이지도 못하고 다분히 비인간적인 과정에 의해 창조되었다. 하지만 그처럼 부실해 보이는 과정이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단계를 거듭하며 선택의 결과들을 누적시킨 끝에 오늘날 이처럼 정교하고 훌륭한 적응 현상들, 심지어는 남을 위해 목숨을 던지는 일까지 만들어낸 것이다. (p. 173)


 

인류 역사 내내 자연이 우리를 먹여 살렸고, 이제 또다시 우리는 자연의 품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다. 나는 21세기를 맞으며 우리 인간이 스스로 '현명한 인간'이라 부르는 자만을 반성하고 자연과 더불어 살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며 '공생인'으로 거듭날 것을 제안한 바 있다. 우리 인간이 자연계에서 가장 우수한 두뇌를 지녔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나는 우리가 현명하다는 점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진정으로 현명하다면 우리의 삶의 터전까지 망가뜨리며 살지는 말았어야 했다. 우리는 제 꾀에 넘어가는 헛똑똑한 동물일 뿐이다. 하나뿐인 이 지구에서 자연과 더불어 공생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생명의 보고 칼라하리를 어떻게 보전하는가는 우리의 의지를 가늠해볼 수 있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지금도 칼라하리는 절규하고 있다. 그 절규가 우리의 절규가 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p. 285)


 

그러나 그는 미래가 어둡지만 그렇다고 해서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고 설득한다. 아마도 어긋난 길을 나아가고 있는 인류의 미래가 우리 자신의 의지로 바뀔 수 있다고 믿는 모양이다. 비록 나는 그의 의견이 옳다고 생각지 않고 우리의 미래에 대해 긍정적이지 않지만, 밝은 내일을 바라보는 저자의 자세 만큼은 마음에 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름다운 미래가 오리라고 믿는 사람이 많다면 정말 아름다운 미래가 올 것 같기도 하니까.

각 장마다 한 권의 책이 메인으로 소개되고, 거기에 도움이 될 만한 책이 두어 권 더 추천된다. 우리가 알지 못한 아름다운 세계와 그 안에 사는 안타까운 생명체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들이다. 마인드맵처럼 이어지는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무척 훌륭한 안내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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