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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의 황태자와 남쪽의 물고기
이마 이치코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5년 12월
평점 :
품절
이마 이치코의 세상은 신비롭다. 우리가 사는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등장해 상상력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뿐이라면 지금만큼 유명세를 얻지는 못했을 터. 그의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존재해서 신비로운 한편, 시종일관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잃지 않고, 마치 그 모든 것들이 농담에 불과하다는 듯이 유쾌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당연히' 사건의 시작은 대개 인간의 탐욕과 어리석음에서 비롯된다. 시작 인물이 굳이 인간이 아니라 귀신이거나 동물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인간이었거나 의인화된 인간의 한 모습이다. 결국 '대개'란 그저 외형상 인간인 이들을 가리킬 뿐이고 굳이 말하자면 '오직' 인간들 때문인 것이다. 나였다면 이미 거기서부터 인간에 대한 희망따위는 갖기 어려울 법한데, 작가는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들의 결말을 훈훈하게 맺어주어 나를 안심시킨다.
그의 이름을 알린 《백귀야행》 시리즈가 이 세상과 교차하는 다른 세계의 모습을 그려내는 것과 달리 그의 단편 작품집들은 다른 세상을 그려낸다. 이 작품 <북쪽의 황태자와 남쪽의 물고기> 역시 인간이 사는 다른 세상이다. 첫 번째 작품인 <선인의 거울>은 나라에 일어날 재앙을 미리 알려주는 거울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거울이지만 절대로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면 안 된다는 제한조건이 있다. 권력자들은 나라를 부강하게 할 수 있다는 유혹에 무릎을 꿇고 거울을 탐낸다. 아마도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면 안 된다는 조건은 별 것 아니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 한낱 인간일 뿐이라 두 번째 유혹에도 빠지기 일쑤이다. 그러다가 거울을 들여다 본 한 여왕이 거울을 깊은 산 속에 숨겨 버린다. 시간이 흘러 거울은 잊히고 쇠락한 마을사람들이 험한 산중에서 살아남게 도와주는 도구가 된다. 권력자들과 마찬가지로 일반인들도 거울에 모습을 비춰보고 싶은 유혹을 이기지 못한다. 산 속으로 들어간 마을사람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한 형제만이 남게 됐을 때 마을을 찾아온 이방인이 마을의 저주를 푼다.
필요 이상으로 풍요롭기를 바라는 데 대한 욕심과 집착, 본인이 남들에게 비춰지는 만큼 선하거나 순수하지 않음을 아는 데서 오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의혹, 생김새로 서로를 재단하는 외양에 대한 집착. 이 모든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자칫하면 마을의 몰락을 가져올 뻔하게 된다. 다행히 수경과 선인의 정체가 드러나고 사건은 해결된다. 이마 이치코다운 훈훈한 끝맺음이다. 이제 마을사람들은 좀 더 성숙해질 것이다. 실제로는 요원한 일이겠지만 아마도 그것이 작가가 바라는 세상이리라.
이 책의 표제작이기도 한 <북쪽의 황태자와 남쪽의 물고기>는 좀 더 신비롭고 내용도 흥미롭다.
서기관 가문의 자손인 안젤은 선천적으로 걸을 수 없는 장애를 가지고 있다. 그런 그를 총독의 후계자 표도르는 눈엣가시처럼 여기며 미워하며 '냄새 나는 물고기'라 부른다. 사막에 둘러싸인 나라에서 태어나고 자란 안젤은 그것이 무슨 생물인지 전혀 알지 못한 채 호기심만을 갖는다. 그런데 안젤을 괴롭히던 표도르가 결투를 하다 죽음을 맞고 연이어 총독마저 오랜 병환 끝에 세상을 떠나자 안젤이 차기 총독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총독의 측실이었던 안젤의 어머니가 숨을 거둔 이후 그 언니인 큰이모가 안젤을 거둬 키워왔던 것이었다. 그런 그에게 고모할머니가 '물고기'가 들었다는 기묘한 수납장을 선물한다. 그리고 때마침 본국에서 안셀이라는 이름을 가진 황제의 차남이 유학을 명목으로 내려오게 된다.
물고기가 든 수납장을 방에 둔 이후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되는 안젤. 그가 묵는 총독의 거처에 불이 나지만 그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깨어나기도 하고, 어두운 밤길에 사촌형이 괴한들에게 공격을 받는 자리에 나타나 형을 구해주기도 한다. 난생처음 제 발로 걷는 진귀한 경험을 하며 들떠 있는 와중에 고모할머니가 잠을 자다 조용히 숨을 거둔다. 계속된 총독 가문의 죽음은 새로 총독이 된 안젤과 서기관 가문에 대한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특히 도발적인 결투소환장이 표도르와 그 상대방을 죽인 셈이라는 모함이 강하게 제기된다. 하지만 다행히 그가 썼던 글은 표도르가 써 달라고 한 결투소환장이 아닌 화해를 청하는 글이었으며, 실은 아예 이용되지 않았기에 위기를 모면한다.
연일 진귀한 경험을 하던 안젤은 안셀이 낙마하며 절벽으로 떨어질 찰나 나타나 그를 구한다. 안셀이 보기와 달리 착한 성미임을 알고 두 사람은 친밀해진다. 하지만 이 우정은 안젤이 연 만찬에서 안셀의 측근이 독이 든 음료를 마시고 죽임을 당하자 흔들린다.
한편 표도르가 죽은 결투에 안젤이 쓰지도 않은 결투소환장이 사용된 것에 대해 조사하던 안젤의 동생 테사는 민간의 대필가를 찾아내고, 대필가와 결탁한 음모세력을 밝혀낸다.
《백귀야행》 시리즈와는 다른 작품이지만 작가의 분위기가 물씬 드러난다. 높은 사람들은 스스로 읽기와 쓰기를 하지 않는다는 흥미로운 설정이 먼저 시선을 잡아끈다. 글과 문자에 대해 다루는 다른 여러 작품들을 보면 권력자들이 권력 유지를 위해 백성들의 배움을 막는다는 내용이 많다. 나 역시 생각하기로는 문맹 천지에서는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게 무엇보다 강력한 무기가 아닌가 싶으나, 세계관에 따라 이럴 수도 있겠구나 싶다. 앎이 힘인 것은 사실이나 현실 세계에서 실제적인 힘이 문자 그 자체를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외에 물고기라는 익숙한 대상을 작품 속 세계관에 알맞은 신비한 대상으로 탈바꿈시킨 것은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보게 만들어 주기도 하였다. 보통 '자유'라고 하면 새를 떠올리기 마련인데, 사막이라는 폐쇄적인(?) 공간에서는 물고기가 자유를 의미할 수도 있다는 것 또한 나의 상상력을 되돌아보게 해줬다. 역시 책이 얇다고 아쉬워할 일도 아니다.
전반적인 내용은 무척 재미있었으나 음모술수가 난무하는 정치 이야기를 너무 두루뭉술하게 마무리한 것 같기도 하다. 글자를 제대로 알지 못하며 음모론에 귀 기울인 자들이 '사실은 이것이 안젤이 쓴 화해의 편지이고 이 결투소환장은 그가 쓴 것이 아니오'라는 설명에 너무나 쉽게 수긍한다. 실제였다면 어떻게든 결투소환장은 안젤이 쓴 것이라고 우기거나, 아니면 대필가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글의 내용을 바꿔 쓴다는 데에 강한 비난과 성토가 이뤄졌을 것이다. 결국 문자와 글이 유일한 무기인 서기관 가문은 살아남지 못하는 것이 수순이다. 물론 시간을 거슬러 남게 된 기록이 그들의 결백을 밝혀주어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말로 마무리되겠지만.
또 대필가를 찾아간 테사가 우연히 음모를 꾸민 자를 만나게 된다는 것도 조금 허술한 맺음이었다. 소설(만화) 속에 우연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런 세계라면 모든 경찰이 우연히 범인을 찾아내 체포하고, 모든 영웅은 우연히 범죄 현장에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솔직히 이 물고기로 인해 안젤이 어떤 식으로 돌아다닐 수 있게 되는지는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영혼이 돌아다니는 것인지, 몸이 돌아다니는 것인지, 물고기가 안젤의 몸을 취해 돌아다니고 그의 영혼을 수납장에 넣어두는 것인지, 아니면 그를 보필하던 반인반귀 피테르가 매개체가 된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일단 돌아다닌 안젤의 발바닥이 까맣게 된 것을 보면 몸이 돌아다닌 것은 확실하고, 자신이 돌아다니면서 한 일을 기억하는 것도 보면 영혼이 깨어 있었다는 것도 확실한데, 나중에 피테르가 다친 연유는 또 무엇인지 오리무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