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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국산책 2 - 욕쟁이 꽃할배의 더 까칠해진 시골마을 여행기 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국산책 2
빌 브라이슨 지음, 박여진 옮김 / 21세기북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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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다. 우리나라만 특유의 색깔을 잃어가고, 우리나라만 멍청한 짓을 일삼는가 싶어 좌절스러웠는데, <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국산책2>를 읽고 나니 영국도 어느 정도 멍청한 짓을 하긴 하는 구나 싶어 안심이 됐다. 우리나라에만 멍청이들이 있는 게 아니었어, 오예! 물론 인류 전체로 봤을 때는 여기나 저기나 죄다 멍청이들뿐이라 안타깝다. 하지만 이쪽에만 멍청이들이 있는 것보다는 지구 반대편에도 비슷한 수의 멍청이들이 있어야 균형이 맞을 것이 아닌가! 세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도 다행인지 모른다. 그러나 어쨌거나 세상에 수많은 멍청이들이 있다는 사실은 같은 행성에 사는 사람으로서 슬픈 일이다. 세상에 멍청이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탄식하는 빌 브라이슨의 심정을 알 법하다.


지난 봄에 <빌 브라이슨의 대단한 호주 여행기>를 읽으며 빌 브라이슨 아저씨가 너무 너그러워졌다 싶어 슬펐다. 불평하는 모습을 도통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불평 속에는 다른 여행기들이 눈감고 못본 척하는(혹은 진짜 보지 못하는) 진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역사와 인물이, 그리고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어 있다. 다른 여행기에서는 만나기 힘든 것들이다. 그러나 그의 다른 여행기(호주 여행기라든가)를 봤을 때, 그는 미국이나 영국처럼 몇십 년 동안 익숙한 나라를 방문했을 때라야 좀 더 심도 있게 비판하고 불평을 터뜨릴 수 있는 것 같다.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는 그 역시 평범한 여행객들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것들을 더 많이 보게 되는 것 같았다. 불평도 뭔가를 제대로 알아야 터뜨리게 되는 법이다. 남의 나라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것이라곤 뉴스 기사나 해외토픽에 잠깐 올라 스치듯 보는 것들 뿐이고, 여행을 가기 전 수박 겉 핥기로 알아보는 짧은 역사뿐이니 말이다. 그래서 이번 <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국산책2>는 그가 나고 자란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잘 아는 나라인 영국이 대상이므로 그의 시니컬한 불평이 가득(!)하다. 그의 불평이 즐겁다!


우선 그린벨트에 대해 흔히들 생각하는 가장 크고 위험한 오해는 '그린벨트가 전혀 특별한 곳이 아니며 대부분 관목만 무성한 쓸모없는 땅'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할지는 여러분의 몫이다. '영국의 농촌살리기 운동'의 연구에 의하면 영국에 있는 그린벨트에는 3만 킬로미터에 달하는 오솔길과 2,200제곱킬로미터의 숲, 2,500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최고 품질의 농지, 890제곱킬로미터의 국립 자연보호지 특별과학 대상지가 있다고 한다. 내가 보기에는 충분히 보존할 가치가 있다. 그린벨트 부지 중 그 어느 곳이라도 쓸모없는 땅이라면 그것은 그 위에 무엇을 짓지 않아서가 아니라, 땅 주인이 땅을 개발했거나 누군가 개발할 사람에게 팔았기 때문이다. 땅 주인에게 형편없이 관리한 땅을 현금화하도록 허락하는 것은 그 땅을 훨씬 더 형편없는 곳으로 만드는 가장 빠른 길이다. (...) 하지만 그린벨트는 아무것도 없는 땅이 아니다. 그린벨트는 야생 동식물의 보금자리이자, 어마어마한 산소를 내뿜고, 탄소와 오염된 공기를 빨아들이고, 식량을 길러내고, 자전거를 탈 수 있는 길과 산책로를 내주고, 우아하고 평온한 풍경을 만들어주는 공간이다. (p. 163)


그래, 멍청이들이 많은 세상이다. 이 멍청이들은 멀쩡히 살아 숨쉬는 땅을 무조건 개발해야 한다고 우겨댄다. 그러면서 휴가를 보내거나 놀러 가고 싶을 때는 꼭 자연을 찾아가고 싶어한다. 아니면 자기네 집 거실에서는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이 내려다보이길 원한다. 그토록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쳐대는 개발의 끝에 이르면 도대체 어느 곳에 우리가 급하게 숨을 멈추게 될 자연이 남아있게 될 거란 말인가. 자연을 즐기기 위해 캠핑을 떠나서는 최신식 문명의 이기를 사용하길 원하는 어리석음과 다를 바가 없다. 자연을 사랑한다는 것은 인간이 자연을 혐오스럽게 망치길 원하지 않는다는 의미뿐만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앞날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빌 브라이슨은 영국 시골의 평온하고 사랑스러운 풍경이 문명의 것들로 불리우는 콘크리트 덩어리로 잠식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자연을 사랑하고 그 자연 속에서 걷기를 즐기는 그로서는 이 파괴적인 그림과 현상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주장에 가슴 깊이 공감하며, 그가 느끼는 슬픔에 대해서도 공감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의 책은 그저 한낱 여행기라고 보기에는 여행지에서 보이는 현상들에 대해 깊이 고찰한다는 점에서 평범한 여행기와는 격을 달리한다.



​그곳에서 물 한 병을 사면서 가게 주인에게 테스코가 새로 들어오고 나서 상황이 많이 달라졌는지 물어봤다. 그러자 주인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힘들어지고 있지요. 장사도 더럽게 안 되고요. 아마 몇 달 뒤에 다시 오시면 내 장담하는데 문 닫은 가게들이 수두룩할 것이오."

"거참, 씁쓸하네요."

"더럽게도 슬픈 일이지요."

"하지만 사장님, 이 가게 분위기도 너무 우울해요. 제가 이 가게에 들어왔을 때 인사도 안하셨죠? 사장님은 어떤 모습인 줄 아세요? 청승맞고 쓸모없는 퇴물 같은 분위기만 풍긴다고요."

"맞는 말이외다. 더 노력해야죠. 그래야겠죠?"

"훨씬 더 많이 노력하셔야 해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장님은 그렇게 안 하실 거잖아요. 사장님은 마치 이 가게가 망하는 것이 사장님을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의 잘못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냥 앉아서 투덜거리기만 할 거잖아요."

"참 잘 아시네요. 고맙소. 나를 더 나은 가게 주인으로 만들어주셔서. 아니 나를 더 나은 인간으로 만들어주셨구려. 언젠가 다시 우리 가게에 와주셨으면 합니다."

실제로 이런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다. 가게 주인은 고맙다는 말도 한 마디 없이 무뚝뚝하게 거스름돈을 거슬러줬고 내가 그 가게를 다시 찾을만한 최소한의 명분도 주지 않았다. 정말 우울하기 짝이 없는 멍청이였다. (p. 263)

​대기업들의 지역 상권 잠식은 영국에서도 행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물론 이에 대한 지역 상인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고, 결국엔 대기업들이 승리를 거머쥔다는 사실 또한 같았다. 마음 아픈 일이고, 양심 없는 대기업들의 행태에 분노도 느끼게 되지만 한편으로는 빌 브라이슨이 비꼬듯 가게 운영에 대해 아무 생각도 의지도 없는 주인들이 많다는 것 역시 외면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는 어떤 가게를 들어가든 꼭 인사를 하고 들어가서 인사를 하고 나온다. 가게 주인들이 나를 반기든 반기지 않든 몸에 밴 습관이라 어쩔 수 없다. 그런데 활기차고 반갑게 나를 맞이하는 가게는 나올 때 던지는 인사가 절로 밝아지고, 그 가게에 대한 좋은 인상으로 남게 되어 가까운 곳이라면 다시 찾아가거나 먼 곳이라면 어쩌다 그곳에 대해 글 한 줄 남기게 됐을 때 좋은 평가를 주게 된다. 반면 들어갈 때 인사는커녕 나갈 때 인사도 없는 곳, 가게가 제대로 운영되고 있는지 미심쩍을 정도로 우중충하고 꾀죄죄하거나 기운 없이 늘어진 주인을 마주하면 자연히 나쁜 인상을 갖게 된다. 불량품을 샀을 경우 좋은 인상의 가게에서는 어쩐지 교환이나 환불에 약간의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들지만, 나쁜 인상의 가게에서는 '나쁜 가게가 물건도 이따위'라는 생각이 든다. 지역 상권이 갖는 경쟁력은 그저 먼저 자리를 찜해서 누리는 텃세가 아니다. 그들이 자신의 가게를 아끼고, 가게를 찾는 고객들을 아끼는 마음이 경쟁력이 된다. 일반 여행객이었다면 무심히 넘겼을 일화도 보다 넓은 범위로 확장해서 바라보고, 연극처럼 오가는 대화로 재밌게 구성해낸 빌 브라이슨 아저씨의 재치가 감탄스럽다.

 

 

 

 

 

​그리고 1957년 영국은 원자력 분야에서 세계 최고가 됐다. 하지만 이후 영국은 추락하기 시작했는데, 이 시기에 셀라필드(당시에는 윈드스케일이었던 지역)에서 방사능이 유출됐다. 1957년 10월, 평소와 다름없이 유지되던 원자력 발전소에서 원자로 한 대가 과열되면서 불이 붙었지만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지 아무도 몰랐다. 셀라필드에 있던 원자로 심들은 공기로 냉각시키는 공랭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었는데 원래대로라면 이 방식은 절대 원자로가 과열될 일이 없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예기치 못하게 원자로가 과열되는 사고가 일어났고 사전에 이러한 우발적 사고에 대한 대처 방안은 미처 마련되지 못한 상황이었다. 원자로를 공기로 냉각시킬 경우 팬에 불이 붙을 수 있다. 유일하게 가능한 대안은 원자로 중심부에 물을 붓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뜨거운 원자로 중심부에 물을 부으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했다. 물을 부었을 때 거대한 폭발, 즉 사실상 핵폭발이 일어나서 방사성 물질이 성층권까지 올라가게 되면 유럽 전역과 북대서양 지역에 대혼란이 야기될지도 모른다는 것이 가장 큰 두려움이었다. (...) 하지만 막상 물을 부은 결과 효과가 있었고 우려했던 대재앙은 일어나지 않았다. 몇 년 동안 주변 목장에 있던 우유를 폐기하고 양들을 폐사시켜야 했지만 그래도 불행 중 큰 다행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원자력 홍보에는 대재앙이었다. 원자력 에너지가 절대 신뢰할 만한 것이 못 되며 영국에서 환영받지 못할 에너지라는 인식이 확산됐고 프랑스에도 그러한 인식이 퍼졌다. (p. 421)

원자력 관련 사고에 대해 아는 것이 몇 건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큰 사고이므로 셀라필드 원자력 사고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이 부분을 읽고 나니 지구상에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 자잘한(?) 원자력 방사성 물질 누출 사고가 꽤 많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뭔가를 은폐하기 좋아하는 나라에서라면 특히 더더욱 의심이 갈 수밖에 없는 일이다. 올바르지 못한 의식주가 병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많이들 지목되고는 있으나, 알고 보면 그 바탕에 이렇게 알지 못하는 사이 누출되어 공중을 떠도는, 혹은 땅에 누적되었거나 바닷물을 오염시킨 방사성 물질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특히 암이나 백혈병처럼 과거보다 꽤나 흔히 그 환자들을 마주치게 된 것을 보면 더더욱 의심스럽다. 빌 브라이슨은 영국과 프랑스가 원자력에 대해 경계심을 갖게 된 것을 이 셀라필드 원자력 누출사건으로 꼽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영국과 프랑스가 필요한 만큼의 경계를 하고 제대로 운영을 하는지는 알 수 없다. 실례로 프랑스는 원자력 발전소의 가동연한을 기존 40년에서 50년으로 늘렸다.)


아마도 우리나라가 원자력에 대해 맹목적으로 신뢰하고 있는 것은 직접 그 피해를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그러나 바로 옆나라 일본이 2011년의 동일본대지진으로 그 난리를 겪고도 원자력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그냥 인간이라는 종 자체가 과거의 잘못에서 뭔가를 깨달아 발전하는 특성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빌 브라이슨은 '원자력 에너지를 단 1퍼센트도 신뢰하지 않'는다고 적고 있다. 나는 원자력 에너지 자체를 신뢰하고 말고 할 것은 아니라고 본다. 다만 그것을 운영하는 인간의 능력이 불완전하며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자연재해에 대해 원자력 시설의 안전 역시 불완전하고, 거기서 나오는 방사성 폐기물을 처리할 능력이 인류에게 없음을 생각해보면 아직 인간이 원자력 에너지를 다룰 만한 기술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므로 무턱대고 원자력을 저렴하고 깨끗한 에너지로 착각하는 것은 오류이다. 최근 울산 쪽에 약한 지진이 일어났는데, 만일 큰 지진이라도 일어나게 되면 열에 아홉은 분명 원자력 발전소에 문제가 생기리라고 본다. 진도 7.0도 버틸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데, 툭하면 비리가 드러난 뉴스가 터지는 데다 부실공사를 빼놓을 수 없는 게 우리나라니 일이 터지면 글쎄다. 그렇게 되면 그쪽은 영구 폐쇄 지역이 될 것이고, 서울 사람들에게서도 세슘이니 뭐니 높은 수치로 검출될 것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단점이 없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무조건 조심하고 보는 게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넌다'는 조상의 지혜를 잇는 길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파보로소는 남쪽 해안 전체에서뿐 아니라 이스트서식스를 통틀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다. 이 여행길에 오르기 이틀 전, 나는 '파보로소 카페' 주소를 확인하기 위해 구글에 검색을 해봤다. 그러자 어김없이 여행 정보 사이트인 트립어드바이저(TripAdvisor)가 같이 검색됐는데 트립어드바이저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파보로소 카페에 대해 좋지 않은 평을 남긴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느 여행객은 최근 파보로소에 다녀온 소감을 '완죤 실망'이라고 썼다. 이 시점에서 한마디 하겠다. 맞춤법도 제대로 쓸 줄 모르는 멍청이라면 어떤 경우에도 공공 게시판에 글을 올리지 말길 바란다. (...) 트립어드바이저의 댓글 식으로 말하자면 '심이 걱정슬업다.' (p. 57)


<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국산책2>은 읽다보면 그야말로 웃음이 빵빵 터진다. 나 역시 쉬운 맞춤법도 제대로 못 맞추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게 되는 사람인지라 이에 대해 빌 브라이슨이 한소리 해 놓은 것을 보니 웃음이 터져 나온다. 이 아저씨 내 취향이라니까! 

요새는 맞춤법 틀리는 것이 별일 아닌 것으로 치부되곤 한다. 사람들이 워낙 책을 안 읽어서 맞춤법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없는 건가? 그런데 가끔은 책 좀 읽는다 싶은 사람들의 글에서도 엉망인 맞춤법을 보게 된다. 요즘 책들이 교정에 인색해서 그런 건가, 사람들이 맞춤법을 지키는 데 대해서 무감각해서 그런가 알 수가 없다. 개인적으로는 의도적으로 맞춤법을 틀리게 적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건 문화적 현상이라 어쩔 수 없다고 친다. 그러나 그게 아닌 경우에는 아무래도 맞춤법이 정확한 사람에게 더 호감이 간다. 그리고 더불어서 이렇게 대놓고 지적질하는 빌 브라이슨은 사랑스럽다. (그런데 이렇게 맞춤법에 엄격한 빌 브라이슨의 이 책이 수많은 오타로 가득한 것은 참 아이러니하다. 그가 알면 버럭할 듯.)


빌 브라이슨의 여행기는 정말 작은 사진 한 장 첨부되어 있지 않다. 이 책도 마찬가지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다 보면 여행을 떠나고 싶어진다. 그러나 겉핥기만 하는 여행이 아니라 그가 그랬듯이 역사와 인물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 떠나는 깊이 있는 여행이다. 그가 과거의 유산을 유심히 보듯이 관찰하면 나 또한 그 유산이 거쳐온 세월과 사람들을 느낄 수 있게 되고, 공감할 수 있게 될 것만 같다. 그의 책은 여행기로서도 합격점이지만 시간이 남을 때 낄낄대며 읽기에도 충분히 유쾌하다. <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 산책>을 보고 빌 브라이슨에게 뿅 가서 그의 책을 모으기 시작했는데, <빌 브라이슨의 재밌는 세상>은 제목처럼 재미있었으나 <나를 부르는 숲>이나 <빌 브라이슨의 대단한 호주 여행기>를 읽고는 시들해졌다. 그러나 빌 브라이슨은 빌 브라이슨이다. 이 책으로 다시, 읽지 않은 그의 책에 대한 관심도가 급 높아진다. 추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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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마더스
도리스 레싱 지음, 강수정 옮김 / 예담 / 2016년 2월
평점 :
절판


세상엔 참 많은 사람들이 있다. 이런 생각은 특히 뉴스를 볼 때 들곤 하는데, 갖가지 생각지도 못한 범죄를 저지르는 이들이 참 많다는 걸 깨닫고 그제야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거기를 꽉꽉 채운 사람들이 있다는 걸 인지하게 된다.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다'고 이야기들을 하지만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은 참 협소하기 짝이 없다. 그렇다보니 자연스레 자신의 견문을 넓히고 싶은 생각이 든다. 가장 좋은 방법은 여행이라고들 이야기하지만 누구나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로 떠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면 그 다음 방법은 소설책이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생각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여행보다는 소설책을 읽는 건데, 이 방법을 통하면 뉴스에서처럼 기분 나쁜 소식만 접할 필요도 없고, 여행에서처럼 여행지의 겉모습만 볼 위험도 피할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모습이 되어볼 수도 있다. 모든 소설들이 다 그렇지만, 《그랜드마더스》에서도 미처 생각해보지 않은 세계의 다양한 모습을 지닌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그랜드마더스》는 네 편의 중단편이 실려 있는 소설집이다. 나는 도리스 레싱을 엘리스 먼로와 혼동해 이 작품집에 실린 작품들이 지리한 일상을 살아가는 여인들의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웬걸, 표제작인 첫 번째 소설 <그랜드마더스>을 읽으면서부터 정말 깜짝 놀랐다. 등장인물들이 어느 정도 지리하기도 한 일상을 산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그 안에서 꽤나 파격적으로 삶을 살고,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었다.

로즈와 릴은 학창시절부터 친구가 된 뒤,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서도 같은 동네에서 이웃하여 사이좋게 살았다. 그들의 일상은 로즈의 남편이 떠나고 릴의 남편이 죽으면서부터 완전히 달라져버린다. 로즈는 릴의 아들과, 릴은 로즈의 아들과 한 침대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이 기묘한 관계는 두 아들들이 다른 여자들과 결혼을 한 뒤 일단락되는가 싶다. 그러나 이들의 관계를 알게 된 여자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떠나버리면서 이야기는 다시금 안개 속에서 열린 결말로 마무리된다.

 

 

한밤중에 잠이 깨어 물을 마시러 가거나 평소처럼 어두운 집 안을 거닐고 싶어도 로즈는 밖으로 나가지 않았는데, 이안이 우는 소리를 들을까 봐, 그의 방으로 들어가려는 자신을 막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그랬더니 이안이 어둠을 더듬어 그녀의 방으로 들어와 옆에 눕더니 폭풍우 속의 구명띠인 양 그녀에게 매달렸다. 그리고 로즈는 실제로 파도가 캄캄한 밤에 썩은 이빨 같은 일곱 개의 바위 위로 달려들어 쏟아지며 하얀 포말로 부서지는 모습을 떠올렸다. (p. 39)

 

 

가끔 해외 뉴스에서 딸이나 손녀 나이의 여자와, 아들 뻘인 나이의 남자와 결혼하는 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외모가 뛰어난 연예인들이라면 일단 외견상 엇비슷해 보이기도 하니 그런 조합도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그런 연애를 하는 걸 보면 놀랍기만 하다. 하지만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고 하니 나이를 뛰어넘는 사랑이 있을 수도 있겠구나 억지로 이해하는 척 넘어가곤 한다. 그런데 <그랜드마더스>의 두 커플은 친한 친구이자 이웃으로 서로의 엄마를, 서로의 아들을 나눈다. 엄마들은 젊고 아름다웠고, 사내 티가 나기 시작한 소년들도 아름다웠지만 그들의 인연을 생각해보면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은 관계였다. 내겐 꽤나 충격적인 조합이었고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한참 고민해야 했다. 그러다가 세상 어딘가에는 이런 인생을 사는 이들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다른 생각은, 이 커플들 그 사이에 이방인처럼 끼어들게 된 두 며느리 메리와 한나의 위치에 대해서였다. (세상이 변하고 있으므로 이러한 관계도 어느 정도 바뀌어 가고는 있지만 아직 모두 바뀌지는 않았다.) 세상 대부분의 여자들은 남자들의 가족에 끼어드는 이방인과도 같다. 서양 여자들은 자신의 성씨를 잃고 남자의 성씨를 따르고, 남자의 성씨를 물려받은 아이를 기른다. 우리나라의 여자들도 남자의 가족에 끼어드는 이방인 신세인 것은 마찬가지다. 아들에게 연인과 같은 느낌을 갖고 있는 시어머니들은 아들을 빼앗은 며느리들에게 거부감을 느낀다. 그리고 며느리들로선 시댁이 '가족처럼 지내자'거나 '딸처럼 생각한다'고 말해도 결코 핏줄을 나눈 가족이 될 수도 없고 딸이 될 수도 없는 사이라는 걸 안다. 비록 시간이 지나면 어느 정도 가까워지고 누그러져 서로 어울리게 될 수 있기는 해도 말이다. 그래서 메리는 남부러울 게 없는 남자와 결혼을 하고도 자신이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이다(!). 이런 여자들의 모습을 메리와 한나가 대표하고, 아들과 그 어머니의 관계를 두 커플이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빅토리아는 자기보다 한참 어린 꼬맹이가 낯선 곳에 가서 잠을 자고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이 신기했다. 자신에게 간밤은 지금껏 있는지도 몰랐던 가능성과 공간의 문을 연 것과 같았다. 빅토리아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만의 방이 있었으면. 나만의 공간이 있었으면.' 나만의 집, 나만의 아파트는 너무 거창해서 차마 꿈도 꾸지 못했고, 그저 혼자 안전하게 숨을 수 있는 자신만의 방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토머스의 방에서 눈알을 번들거리던 야생동물들이 잡으러 와서 자신을 찾아낼지도 몰랐다. 나만의 방이 있다면 매리언 이모가 피곤해질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언제든 내킬 때 잘 수 있을 텐데. 침대 옆에 전등도 하나 놓고 그걸 끌 수 있을 텐데. "나만의 공간, 나만의…." (p. 108)

 

 

두 번째 작품 <빅토리아와 스테이브니가>는 우연히 풍족한 백인 가정 스테이브니가에서 하룻밤을 자게 된 흑인 소녀 빅토리아가 자신이 사는 세계와 다른 환경을 갖고 있는 스테이브니가를 동경하고, 그 속에 섞이길 바라지만 그저 잠시 발을 들여놓았다가 다시 자신의 세상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빅토리아는 돌봐주던 이모가 몹시 아프던 날 학교 친구의 부유한 집에서 잠을 자게 된다. 아예 드러눕게 된 이모를 간호해야 하는 지긋지긋한 시절에 스테이브니가에서의 하룻밤은 빅토리아에게 마음속 위안이 되는 하나의 이미지로 자리잡는다. 아픈 이모를 혼자 돌보았지만 이모가 죽고 나자 그녀는 어리다는 이유로 혼자 있지 못하고 이모 친구의 집에서 양육된다. 빅토리아는 예쁜 아가씨로 자랐고, 스테이브니가의 토머스는 그녀에게 반한다. 그들 사이의 열정이 지속된 동안 빅토리아는 토머스의 아이 메리를 갖는다. 그러나 그에겐 알리지 않고 혼자 아이를 낳아 기른다. 그녀는 흑인 남자 샘과 결혼을 하지만 그가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어느날 우연히 길에서 토머스의 모습을 본 뒤 메리를 그에게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한다. 의외로 토머스는 아이의 존재를 쉬이 인정하고, 스테이브니가에서는 아이를 반기고 사랑해준다. 그녀는 샘에게서 낳은 '까만 요정' 딕슨과 피부색이 옅고 천사처럼 상냥한 메리가 누리게 될 다른 세상을 걱정스러워한다.

 

에이브러햄 링컨이 노예제를 폐지한 지 150년이 더 지났지만 백인 사회에서 흑인들의 사회적 위치는 여전히 그들과 같지 않다. 흑인 소녀 빅토리아는 아홉 살인데도 영양부족으로 예닐곱 살처럼 작고 가녀리다. 빅토리아가 자기만의 방을 갖지 못하고 이모네 집 거실에서 간이침대를 펴고 자는 반면 스테이브니가의 부엌은 이모의 집이 모두 들어가고도 남을 만큼 크다. 빅토리아를 스테이브니가에 데려간 토머스의 형 에드워드는 '제3세계에서 벌어지는 온갖 고통에 공감하며 괴로워하는' 아이였지만, 빅토리아를 집으로 데려가야 했을 때 흑인 소녀의 존재 자체를 인식하지 못했으며, 훗날 빅토리아가 토머스의 아이를 데리고 나타났을 때는 부유한 백인 가정에 빌붙으려는 협박범쯤으로 여기는 사람이 된다.

스테이브니가는 부유한 백인 가정치고는 흑인과 가난한 이들에 대해 비교적 개방적이고 친근한 태도를 취한다. 그러나 그런 집안조차도 빅토리아의 생활 환경(그나마 형편이 나은 흑인 가정)과 비교하면 어쩔 수 없는 괴리감이 있다. 백인의 피가 섞인 메리는 분명 빅토리아나 배다른 동생 딕슨과는 다른 더 좋은 것들을 누리게 될 것이고 더 나은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저 백인의 피가 절반 섞였다는 이유로 말이다. 그러나 메리의 옅은 피부색으로도 다른 백인들은 여전히 흑인으로 취급할 터다. 과연 세상에서 인종 차별이 사라지고 있는 건지 궁금해진다. 잊을 만하면 터져나오는 인종 관련 갈등 소식을 언제쯤 완전히 듣지 않게 될까?

 

 

우리 모두는 데로드를 조금 사랑했던 것 같다. 그에게는 싫어할 만한 점이 많지 않았다. 어쩌면 그가 상대의 호감을 사려고, 상대의 의견에 맞추고 동의하려고 안간힘을 썼던 것 같기도 하다. 그는 대단히 아름다운 소년이었으며, 이윽고 아름다운 청년이 되었다. 크고 호리호리한 체격, 생각에 잠긴 것 같은 매력적인 검은 눈동자, 그 눈동자가 발하는 어렴풋한 미광을 보면서 우리는 사막의 피가 흐르기 때문이라고 농담하곤 했다. 데스트라의 눈도 그랬다. 우리는 그의 통치자 여부를 의논하면서 우리가 항상 지켜볼 테니 잘해낼 거라고 농담처럼 말했다. (p. 200)

 

 

​<그것의 이유>의 세상은 우리가 아는 역사 속에 있지 않은 낯선 세상이다. 포악한 왕이 죽고 그의 현명한 아내 데스트라가 정권을 잡으면서 나라는 그야말로 황금기를 구가한다. 그녀는 정치 싸움을 종식시키고 훌륭한 차기 지도자 육성을 위해 자기 자식 데로드가 포함된 열두 명의 아이들을 육성한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전, 이 12인 위원회는 차기 지도자로 데로드를 뽑는다. 그러나 문화를 사랑하고 풍족하며 모든 것이 순탄하게 굴러가던 나라는 문란하고 황폐해지며 차별을 일삼고 전쟁과 싸움을 우선하는 나라로 변해간다. 위원회는 데로드에게 끊임없이 면담을 청하지만 데로드는 이들을 만나주지 않는다. 시간이 흘러 12인 위원회에서는 데로드와 12호만이 살아남는다. 지팡이를 짚고 어렵사리 데로드를 찾아간 12호는 위원회가 지도자로 뽑았던 데로드가 사실은 무지하기 그지없는 인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차기 지도자를 뽑았던 아이들은 데스트라의 현명하고 훌륭한 교육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지도자로 택할 만큼 현명해지거나 훌륭해지지는 않았다. 그들은 친구의 아름다움에 눈이 멀어 그를 지도자로 뽑는다. 아이들의 어리석은 결정에 데스트라는 절망적인 마음으로 죽음을 맞는다. 데스트라는 훌륭한 지도자였지만 외면에 대한 사람들의 집착을 간과했다. 그리고 위원회는 외면에 가려진 진실을 보지 못해 나라를 끔찍한 지도자에게 맡겨 버린다. 그토록 풍요롭고 우아한 문화를 보유한 나라가 고작 지도자의 외양 때문에 망국의 길에 들어서게 된 셈이었던 것이다. '아름다움은 늘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늙은 12호는 자신의 아름다운 며느리에게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가 한 말의 의미와 며느리가 이해한 의미는 매우 달랐다. 그리고 어쩌면 12호는 자신이 내뱉은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데로드를 찾아간 이후에야 깨달았을 것이다. 인간이란 어리석은 나머지 겉모습에 얼마나 속기 쉬운지, 나름 현명했던 그조차도 늘그막에서야 인정하게 된다.

우리나라는 정말 심각하게 외모에 집착하는 나라이다. 12호의 며느리처럼 '아름다움은 늘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말을 ​문구 그대로 받아들인다. 말로만 내면의 아름다움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할 뿐 다들 외면의 아름다움에 매달리고 그것을 추구한다. 그래서일까? 데스트라의 풍요롭던 나라가 한낱 지도자의 외양 때문에 몰락의 길을 걷게 된 것처럼 외양에 집착하게 된 우리나라의 현재 상태는 암담할 지경이다. 외면의 아름다움에 집착하는 정도가 심해진 탓인지 내면의 아름다움을 키우는 독서 인구, 독서량은 점점 더 줄어든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외양을 가꾸는 데 들이는 돈의 반의 반만이라도 내면을 가꾸는 데에 투자한다면, 우리나라 문화는 더욱 융성하고 범죄율은 낮아질 것이다. 이러한 '큰 변화'를 위해선 '단계적인 작은 변화'들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런 작은 변화들마저 경쟁의 경쟁을 위한 사회 시스템에 막혀 이뤄지기가 어렵다. 슬픈 일이다. 부디 외양에 눈이 멀어 나라를 망쳐버린 12인 위원회와 같은 멍청한 짓을 하지 않는 우리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드니 더더욱 슬프다.

 

 

 

 

 

 

 

 

 

그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두툼한 편지 꾸러미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그는 베티가 약속을 지켰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녀는 약속을 했다. 대프니는 그녀에게 쓴 편지들, 그의 가장 좋은 모습, 그의 본질, 그의 실체, '본연의 나'를 담고 있는 그 편지들을 읽었을 것이다. 읽었을 게 틀림없다. 하지만 그녀가 아들에게, 그들의 아들에게 말했다면 지금쯤 편지가 왔어야 했다. 전화가 오고 초인종이 울렸어야 했다. 아이는 스무 살이었다. 스물하고도 몇 달, 그리고 며칠. 사실을 안다면 스스로 결정을 내릴 나이가 됐다. (p. 422)

쌍방이 서로를 똑같은 정도로 사랑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어느 하나가 더 많이 사랑하거나 덜 사랑하거나 하는 조금씩의 차이는 날 수밖에 없다. <러브 차일드>는 바로 이러한 동일하지 않은 크기의 사랑에서 비롯되는 이중성​을 보여준다. 주인공 제임스는 '사랑하는' 친구 도널드를 따라 다니며 여러가지 수업과 강의를 듣고 사고의 변화를 겪는다. 밖에서는 '수다스럽게 이야기하며 웃을 수 있는 여자'인 어머니가 '대놓고 물어보지 않으면 절대로 입을 여는 법이 없고 심지어 그럴 때조차 말이 많지 않은 남자'인 아버지와 결혼하는 바람에 늘 라디오를 켠 채 조용히 바느질만 하는 사람이 된 것을 본다. 어딘가에서 자신의 여자를 만나게 되기를 꿈꾸던 제임스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케이프타운에서 영국여인 대프니와 사랑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유부녀였고, 제임스는 징집병으로서 배를 타고 인도로 향하던 중이었다. 케이프타운을 떠난 이후 그는 소문을 듣고 그녀가 자신의 아이를 낳았음을 알게 된다. 그녀를 만날 수는 없었지만 그는 평생 대프니를 자신의 사랑으로서 가슴에 담고 산다. 한편 대프니의 친구이자 이웃인 베티는 대프니의 남편 조를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던 듯하지만('조는 자기 부인 옆에 누웠는데 사람 좋은 조, 모두의 친구이며 혈색 좋고 쾌활한 그가 그렇게 거기에 누워 있었고, 베티는 그를 모른 채 인생을 살 수도 있었다.') 대프니에 대한 사랑이 더욱 큰지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제임스와 결혼한 헬렌은 제임스가 마음에 담은 여인과 두 사람의 아들을 언젠가는 만나게 되리라고 그를 위로한다.

 

병사로 징집된 수많은 청년들 가운데 제임스는 남다른 진중한 면을 가진 청년으로 묘사된다. 그는 생각이 깊고 예의바르게 보인다. 그런 그의 외양은 때로는 놀림감이 되기도 하지만 대체로 많은 이들에게 호감을 산다. 하지만 그가 진짜 사랑을 아는 인물인지는 알 수 없다. 그는 아버지가 친구들과 술집에 가버린 밤이면 홀로 전등 앞에 앉아 뜨개질을 하는 어머니에게 다정한 아들이 되어 주지 못한다. 무뚝뚝한 아버지가 참다못해 아들의 관심사에 대해 말을 꺼낼 정도로 아버지에게 살가운 아들도 되지 못한다. 그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이 안쓰러워 밖으로만 겉돌 뿐이다. 그리고 며칠간의 사랑을 나눈 것이 다였지만 그의 평생의 사랑이 된 대프니에게는 찌질이처럼 군다. 그리고 만나보지 못한 자기 아이의 태어난 날짜를 매일 챙겨 셀 정도로 집착한다. 그런 남편을 이해하며 보듬어주는 아내 헬렌에게는 고마워하면서도 이용하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꽤나 인간적이면서도 이기적인 모습이 엿보이는 인물이다.

누구나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는 데엔 분명히 차이가 있다. 아무래도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법인데, 제임스의 모습으로 그것을 확인하자니 영 껄끄러웠다. 이미 알고 있는 자신의 단점을 누군가 콕 찍어 지적하면 불편한 것 같은 느낌이랄까? 자신이 현재 살고 있는 삶은 허상이고 대프니와 함께 했던 며칠이라는 시간만이 진짜였던 것처럼 구는 것이 얄밉다. 나의 모습 중 어느 것만이 진짜이고 어느 것은 가짜일 리 없다. 나의 모습 모든 것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그가 편지 속에 털어놓은 것들이 그의 가장 좋은 모습일지는 몰라도 그의 본질이나 실체, '본연의 나'는 아닐 것이다. 다만 그가 그렇게 믿으려 하는 것뿐이다. 그가 마음 한구석을 다른 곳에 두고 어디 한 군데는 비어 있는 상태로 가족을 대하는 모습도 그의 본질과 실체, 본연을 이룬다.​ 그가 그 사실을 알았다면 부끄럽지 않았을까?

어려운 환경에서 만난 사랑이었고, 끝내 얻지 못한 것이었으므로 그는 더욱 더 격렬하게 그리워했다. 사랑의 크기와 깊이는 저마다 다르고 만난 기간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지만, 상황이 사랑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만일 그가 헬렌을 케이프타운에서 만났고, 전쟁이 끝난 뒤 영국에 돌아와서 대프니를 만났더라면 그는 헬렌을 그리워하며 살았을 것이다.

수백 명이 열에 달아오른 몸으로 갑판에 누워 한숨을 쉬고, 먹은 것도 없이 속을 게우려고 구역질을 했다. 아침이면 일어서라는 명령에 난간에 달라붙어 그걸 움켜쥐거나 서로를 부여잡았다. 속이 울렁거리지 않는 운 좋은 병사들이 재빨리 호스로 물을 뿌리며 갑판을 닦으면 그들은 따가운 바닷물 줄기를 피해 몸을 움츠렸다. 그러고는 곧바로 다시 누웠다. 아니, 맥없이 쓰러졌다. 또 물이 부족해졌다. 그걸 보면서 그들은 이렇게까지 서쪽으로 멀리 우회할 계획이 아니었을 거라고 유추했다. 그렇다면 그건 뭔가를 피해서 돌아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한 척, 또는 한 척 이상의 U보트가 그들을 따라붙은 것이었다. 그들은 목이 말랐다. 희한하게도 날은 너무 더운데 불덩이 같은 몸으로 덜덜 떠는 병사들이 있었다. 일사병이었고, 그들은 의무실로 올라갔다. (p. 309)

제임스는 징집되어 훈련을 받은 이후 총 한번 제대로 ​쏴보지 못한다. 내내 배를 타고 이동하다가 독립운동의 바람이 거센 영국의 식민지 인도에 주둔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계속해서 불평하는데, 뱃멀미가 심해서 고통이 심했던 데다 인도에 머물며 이겨내야 했던 권태가 너무도 극심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생각만 해도 힘들 것 같다. 몇 개월을 뒤틀리는 속을 부여잡고 지내야 하고, 사람을 미치게 하는 권태 속에 살아야 한다면 끔찍하기 그지없다. 그렇지만 진짜 피바람 몰아치는 전선에서 싸워야 했을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그들의 불평은 복에 겨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차라리 총을 들고 싸우기를 바라지만, 만일 그 상황에 있었다면 분명 다르게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로 전장에 있었던 이들은 간신히 살아 돌아왔다고 해도 그때의 끔찍한 기억이 머릿속에 달라붙어 평생을 괴로워한다. 아니면 장애를 갖게 되어 전쟁 이후의 생활을 영위하는 데 곤란을 겪기도 한다. 제임스가 징집될 무렵 어떤 여인이 말했듯 죽는 것보다는 사는 것이 낫고, 죽음에 대한 공포와 참혹한 전장이 주는 고통 속에 평생을 사는 것보다는 일시적으로 뱃멀미와 권태로움, 더위와 싸우는 편이 나은 법이다.

세상을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수만큼 거기에는 수많은 인생이 있다. 사람이란 모두 비슷한 것 같은데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쩌면 이다지도 다른 생각을 품고 다른 선택을 하며 다른 인생을 사는지. 그 사실을 확인하게 될 때마다 나는 놀라곤 한다. 그리고 마치 관음증처럼 타인의 삶에 대해 궁금증이 생긴다. 그것은 그저 호기심이 아니라 내가 제대로 살아나가고 있는지 그 기준을 남들의 삶을 통해 얻고 싶어서이다. 《그랜드마더스》도 여러 형태의 인생을 내게 보여주었다. 흥미롭게 책을 읽고, 서평을 쓰고 이야기를 정리하며 나는 읽을 때보다 더 많은 여러가지를 깨달았다. 짤막한 이야기들이 담고 있는 세상의 다양한 모습과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들. 이 책을 읽기 전보다 읽은 후의 나는 분명히 0.1%쯤은 더 발전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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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것을 당신이 알게 됐으면
박연미 지음, 정지현 옮김 / 21세기북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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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북한은 우리와 같은 민족이다. 60여 년 전만 해도 우리는 같은 나라였다. 물론 일본이 아니라 조선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였다. 하지만 이제는 하나로 합쳐지기에 너무 멀어진 게 아닐까 싶을 때가 많다. 과연 통일이란 걸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기도 하고 통일이 되는 과정 중에는 우리 대한민국이 경제적으로 얼마나 더 힘들어질까 겁이 나기도 한다. (어쩌면 북한 땅의 개발이 이뤄지느라 건설 붐이 일어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통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생각하기는 하는데, 이게 무슨 습관 같은 바람이다. 그냥 북한의 땅이 원래는 우리 땅이었기에 바라는 것이고, 지금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인간 이하의 삶을 살고 있기에 그들이 그나마 나은 대한민국의 일원이 되길 바라기에 바라는 것이기도 하다. 아직은 요원한 일이기에 그저 희미한 바람만 품고 있을 뿐이지만 최근 탈북하는 사람들이 많은 걸 보면 그게 또 그리 멀지만은 않은 일 같아서 우리가 준비를 잘 해야 할 것 같다.


이 책에 관심이 간 것은 역시 탈북한 아가씨의 수기이기 때문이지만, 자신의 모습을 커다랗게 박아 넣은 표지에서 강한 의지가 돋보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탈북한 사람들은 북한에서 시선 받는 것을 두려워 한다던데 이 책의 저자는 그 점을 인지하고도, 어쩌면 일부러 자신의 모습을 표지에 넣은 것 같았다. 책을 다 읽고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이 책은 먼저 영문판으로 출간되고 그것을 번역해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되었다. 2014년에 저자가 아일랜드에서 열린 '세계 젊은 지도자 회의'에 북한 대표로 참석해 북한의 실상을 알린 바가 있어 해외 출판사 측에서 책을 내자고 제안한 게 아닌가 싶다. 지금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저자가 영문으로 책을 내고, 그게 한글로 번역되어 우리나라에 출간되다니 희한한 과정을 거쳤다. 어쩌면 그래서 더 이 책이 조명을 받는 것도 같아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2월에 유엔은 처형, 성폭행, 고의적 굶주림 등을 비롯해 북한의 인권 남용을 기록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처음으로 북한 지도자들은 인권 범죄로 국제형사재판소 기소 위협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 보고서에 협조한 약 300명 중 대부분은 익명으로 남기를 원했고, 그나마 공개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는 의사소통의 문제가 있었다. 침묵과 억압의 벽에 갇힌 수백만 명의 북한 주민을 대변할, 영어를 할 줄 아는 탈북자가 필요해졌다.

첫 연설 후 다른 곳에서도 연설을 해달라는 요청이 이어졌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미국 미디어의 인터뷰 요청까지 받았다. 5월에는 케이시 라티그 주니어와 <워싱턴포스트> 사설을 공동 집필하게 되었다. 작년 봄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인권운동가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사람들이 나를 북한 인권 문제의 얼굴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북한 주민은커녕 아직 그 누구의 대변인이 될 자격을 갖추지 못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시점부터 내 삶은 마치 달리는 기차처럼 흘러갔다. 뛰어내릴 수도 없었다. 빨리 달리면 내 과거가 나를 쫓아올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p. 313)



북한 주민들의 생활상은 그동안 TV나 신문 등지에서 접한 적이 있어 무척 끔찍하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다. 지저분한 흙바닥에 떨어진 음식 쪼가리를 주워 먹는 아이의 영상이 가장 대표적이다. 그리고 아프리카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팔다리는 깡마르고 배만 둥글게 부푼 아이들의 사진도 본 적이 있다. 영상이나 사진을 보고, 참혹한 상황에 대한 기사를 읽으면 마음 아파하곤 하지만 그때뿐, 나와 관련이 없는 얘기는 곧 잊혔다. 하지만 이렇게 저자의 개인적인 경험을 책으로 읽으니 마음에 훨씬 더 가깝게 와 닿았다. 길바닥에서 곡식 낟알을 주워먹는 아이라면 당연히 머릿속에 온통 먹을것 생각뿐이겠지만, 가족과 함께 살았던 저자 같은 일반인들까지 항상 먹을것에 대한 생각만 한다는 게 놀라웠다. 이러니 왜 북한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지 못하는지 알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에 대한 충성으로 세뇌를 당한 데다 늘 굶주림을 면할 생각만 하고 있으니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는 게 아닐까?


북한은 자기네가 사회주의 낙원이라고 칭한다는데, 진정한 사회주의 낙원이면 국민들이 돈 걱정 없이 살게 해줘야 한다. 돈 걱정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나 해야 하는 것이니까. 하지만 책 속에 드러나는 모습은 자본주의 사회와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워낙 먹고 살기가 힘들다 보니 돈을 받지 말아야 할 사람들마저 뒷돈을 요구하고, 주민들은 부족한 배급으로는 모든 것이 모자라니 겉으로는 사회주의 사회를 찬양하면서도 뒤로는 이런저런 물건을 내다파는 거래를 통해 돈을 벌려 애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드러내놓고 하는 일을 들키지 않게 숨어 하려니 그건 또 얼마나 힘들는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북한은 현재 사회주의가 갈 수 있는 타락의 끝을 달리는 동시에  자본주의 사회가 가진 폐해까지도 내포하고 있어 두 개의 폭탄을 발 밑에서 굴리는 형편이다.



북한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평행한 선로를 달리는 기차 같은 두 가지 생각이 존재한다. 하나는 주입된 믿음이고 또 하나는 두 눈으로 직접 보고 떠오른 생각이다. 나는 남한으로 탈출하여 조지 오웰의 <1984>를 읽고 나서야 그런 상태를 가리키는 이중 사고라는 단어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어떤 것을 알면서도 동시에 알지 못하는 상태인 것이다. 한마디로 머릿속에 모순적인 생각이 동시에 존재하는 상태로 용케 미치지 않고 살아간다. (중략) 어쩌면 나도 마음속으로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북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조차 거짓말의 달인이 될 수 있다. 굶주린 엄마들이 버린 아기들의 시체가 골목길에 꽁꽁 얼어 있는 모습을 보지만 머릿속에 제대로 입력할 수가 없었다. 내가 주입받은 세계관과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쓰레기더미 속 시체나 강가에 떠 있는 시체를 보는 일은 흔했고 도움을 청하며 울부짖는 사람을 그냥 지나치는 것도 정상이었으니까. (p. 71)



도무지 먹고 살 길이 없으니 북한의 거의 모든 주민들이 자본주의 활동을 하고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저자의 부모님도 먹고 살기 위해 금지되어 있는 무역업(?)에 손을 댄다. 이런 무역을 통해 한동안은 북한 주민치고는 그나마 풍족하게 먹고 살았으나 그게 걸리는 바람에 집안이 풍비박산이 난다. 그리고 그때 이후 저자의 짧았던 행복한 시절은 끝이 나버린다. 불법적인 일을 하는 부모님의 안위를 걱정하며 항상 먹을것을 구해야 했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도 나쁜 성분 때문에 이어질 수 없어 마음앓이 해야 했다. 하지만 다행히 중국과의 거리가 가까운 곳에 살았던 터라 한국을 비롯해 외국 드라마나 영화, 음악 들을 접할 수 있었고, 마침내는 중국으로 탈출할 수도 있었다. 아마 국경 지역이 아니라 북한 내륙지역에 사는 사람들이었다면 어딘가로 탈출할 수도 없이 그냥 평생을 그렇게 살아야 했을 게 분명하다.



2002~2003년의 길고 어둡고 배고픈 겨울이 지나자 내 얼굴에는 통증을 동반한 홍반이 나타났다. 햇빛을 받으면 갈라지고 피가 났다. 거의 하루 종일 어지럽고 배가 아팠다. 같은 증상을 호소하는 아이가 많았다. 나중에야 니아신과 미네랄 결핍으로 생기는 펠라그라임을 알게 되었다. 고기를 먹지 못하고 주식이 옥수수인 기근 식단으로 발생할 수 있고 몇 년 동안 영양 상태가 나아지지 않으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었다. 남한에 와서 북한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봄의 꽃봉오리와 초록 새싹이 새로운 생명과 부활을 상징한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북한에서 봄은 죽음의 계절이다. 비축해둔 식량이 바닥나고 이제 막 곡식을 심은 터라 농장에서는 아무것도 생산되지 않는다. 그래서 북한의 봄은 굶어 죽는 사람이 가장 많은 계절이다. 거리에서 굶어 죽은 시체를 본 어른들이 혀를 끌끌 차면서 "여름까지만 버티지. 안됐네"라고 말하는 것을 자주 들었다. (p. 101)



중국은 기회의 땅이 아니라 북한에서 갓 넘어온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을 인신매매하며 사고 팔며 등쳐먹는 곳이었다. 고작 열세 살이었던 저자와 저자의 엄마도 매매의 대상이자 성적 도구로 전락한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도 저자는 하얀 쌀밥과 겨울에 볼 수 없는 채소인 오이로 만든 절임 반찬을 눈앞에 두고 중국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한다. 기아가 사람을 어떻게 만드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후 저자의 엄마는 시골에 사는 남자에게 팔리고 저자는 중국 인신매매 브로커의 여자가 된다. 비록 배부르게 먹고 살게 되긴 했으나 행복할 수는 없었다. 저자는 브로커의 마음을 얻어 시골에 팔려 노예처럼 취급받던 엄마를 되사오고, 북한에 남아 있던 아빠까지 데려오게 만든다. 그러나 인신매매처럼 끔찍한 일이 잘 굴러갈 리 없었다. 아빠는 암으로 사망하고 여러 일이 있은 후 모녀는 브로커를 떠나 중국 칭다오의 한국 선교단에 접촉해 한국으로 오기 위한 여정을 시작한다. 한겨울의 황량한 몽골 사막을 머나먼 곳의 불빛만을 의지해 건너야 했고, 강제 북송에 대한 위협을 견디면서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야 했다. 그러나 결국 두 사람은 한국 땅에 발을 디뎠고 이제 대한민국 여권을 가지고 세계를 여행할 수 있는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다.


저자의 이야기들이 마치 머나먼 곳의 옛날 옛적 일인 것처럼 느껴지다가 베이징 올림픽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깜짝 놀랐다. 중국 베이징에서 올림픽을 연다고 호들갑이던 게 불과 몇 년 전인데, 바로 그 시기에 저자와 가족들은 중국에서 노예 생활이나 다름없이 살고 있었다. 우리가 어제 같은 오늘처럼 살던 그 시기에 중국 땅 어딘가에서 이렇게 고통받던 사람들이 있었다니, 세상 어느 귀퉁이에는 항상 무섭고 서글픈 일들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가 당장 북한을 어떻게 하지는 못하더라도 한국에 들어오지 못하고 타국에서 고생하는 탈북자들을 안전하게 데려와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이 나라에 오기 위해 고생한 사람들을 깔아뭉개지 못해 안달인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도 무척이나 안타깝다. 우리 사회는 우리와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배타적이다. 피부색이 다르다고, 말투가 다르다고, 못사는 나라에서 왔다고 트집을 잡고 괴롭힌다. 경쟁만 부추기는 사회며 학교에서 인성을 제대로 가꾸지 못한 탓이다. 점점 더 인간성을 잃어가는 우리 사회의 미래가 두렵기 그지없다.

그렇다고 우리가 선호하는 백인들에 대한 태도가 개방적인 것도 아니다. 한국인들에게 호감을 사는, 한국에 귀화해 한국에서 오래 살아온 백인들조차도 한국인으로 취급받지는 못한다. 그들은 언제나 '한국인 다 됐네'의 언저리를 맴돌 뿐이다. 말로만 글로벌 시대니 글로벌 사회니 하지 말고 마음을 활짝 열어야 하지 않을까? 인간을 인간으로서 바라보고 대하는 자세가 너무나 필요한 시점이다.


지금 저자 박연미는 세계의 무대에서 화려하게 비상하고 있다. 그럴 만하다. 한국에 들어온 이후 그 어떤 한국사람보다도 치열하게 삶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무한대로 뻗어나가는 백지처럼 새로운 세계의 온갖 지식을 받아들이고 성장해나갔다. 북한에서, 그리고 중국에서 겪었던 고된 일들이 그녀가 더욱 멀리 아름답게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북한에서 태어나고 그곳에서 탈출한 것은 그녀가 말하듯 감사할 일이었다. 그녀가 알리는 북한의 실상은 북한 정부의 거짓말에 의해 반박당하고 있으며, 그녀는 북한 정부의 무서운 시선을 받고 있다. 세계의 시선을 받는 쪽도, 북한의 시선을 끄는 쪽도 모두 겁이 날 법 한데 저자는 당당하다. 그녀가 북한에서 태어나 탈출한 것, 북한의 모습을 세계에 알려주는 것이 고맙다. 그러면 언젠가는 그녀가 만들어낸 작은 틈으로 북한이라는 어두운 세계에도 빛이 새어들어갈는지도 모를 일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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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유시인 비들 이야기 호그와트 라이브러리
조앤 K. 롤링 지음, 최인자 옮김 / 문학수첩 리틀북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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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유시인 비들은 해리 포터가 살고 있는 마법 세계의 그림 형제나 안데르센 같은 인물로서 이 책은 비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비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여기에 실린 동화 다섯 편은 일반 동화집에 실려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어린이들이 재미나게 읽을 정도의 동화적 완성도를 갖추고 있다. 물론 어른들이 읽기엔 다소 단조로운 감이 있긴 하지만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해리 포터 시리즈의 팬의 입장에서 읽는다면 아기자기하게 읽힌다. 특히 동화의 마지막마다 알버스 덤블도어 호그와트 교장의 해설이 실려 있는 점이 더욱 팬심을 자극한다. 하지만 아이들 동화에 맞는 수준의 풀이라 그런지 덤블도어가 지니고 있을 법한 깊은 지식을 엿보기란 쉽지 않다. 물론 덤블도어 교장의 순수하고 청렴한 성격을 생각한다면 아이들 수준으로 낮춘 해설이 어울리긴 하다만.


대부분의 동화는 어느 정도 마법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백조로 변한 오빠들을 저주에서 풀어주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말하지 않고 쐐기풀로 옷을 만드는 공주, 물레의 바늘에 찔려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잠에 빠진 공주, 집 주인인 곰 형제들이 집을 비운 틈에 몰래 들어가 음식을 훔쳐먹고 물건을 망가뜨리고 막내 곰의 침대에서 잠든 소녀, 일곱 명의 난쟁이들과 함께 살다가 독사과를 먹고 죽었었으나 왕자의 키스로 되살아난 공주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동화가 아니라 모든 동화가 마법적인 요소를 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음유시인 비들은 해리 포터 세계의 인물이었으니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마법을 부릴 줄 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마법은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넘어야 하는 역경이 되기도 한다.


<마법사와 깡충깡충 냄비>에서 주인공의 아버지는 생전에 냄비와 마법을 이용해 사람들을 도왔다. 그러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아들은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을 본 체 만 체 했고, 그로 인해 사람들이 겪는 괴로움을 그대로 표현해내는 냄비 때문에 고통을 겪는다. 결국 자신의 고난을 없애기 위해 마법을 부려 사람들의 괴로움을 없애주고 나서야 냄비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엄청난 행운의 샘>에서는 행운의 샘으로 떠난 마녀 세 사람이 모험 도중에 자신들의 걱정거리를 해결하게 되면서 어쩌다 함께 가게 된 머글 기사에게 그 행운을 양보하게 된다. 그런데 샘은 아무런 행운도 주지 않고 마법도 부리지 않았다. 다만 그들이 샘까지 가는 과정에 마법으로 만들어진 고난이 있었을 뿐인데, 이들은 그들 자신의 선량함과 노력으로 행운을 만들어낸 셈이 된다.

<마술사의 털난 심장>은 사람을 사랑하기를 거부하여 자신의 심장을 몰래 빼어둔 마술사가 등장한다. 그는 호화로운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살았으나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화가 나 아름답고 능력이 있으며 부유한 아내를 얻기로 다짐한다. 그리고 운 좋게도 바로 그런 여인을 발견하여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여인의 간청에 따라 빼두었던 심장을 다시 빈 가슴에 집어넣는다. 그러나 밖에 나가 있던 심장은 이상하게 변해버려 마술사에게 사악한 생각을 불어넣었다. 마술사는 여인의 심장을 꺼내어 자신의 것과 바꾸려 했으나 털난 심장이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자 칼로 자신의 심장을 도려내어 죽는다.

<배비티 래비티와 깔깔 웃는 그루터기>는 혼자만 마법을 쓰고 싶어한 왕이 백성의 마법을 금지하고 사기꾼을 마법 선생으로 초빙하는 이야기이다. 사기꾼은 입 발린 거짓말로 왕에게서 금은보화를 뜯어내며 속임수로 왕에게 마법을 가르치는 척한다. 그 모습을 본 왕궁의 세탁부 배비티 노파가 웃자 왕은 신하들 앞에서 마법을 선보이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사기꾼은 노파에게 왕이 마법을 부리려 하면 때맞춰 마법을 부리라고 협박한다. 처음엔 잘 되어가는가 싶었으나 신하 하나가 죽은 개를 살려 달라고 하자 마법은 이뤄지지 않는다. 사기꾼은 숨어 있던 노파 때문이라고 하고, 사람들은 노파를 잡으러 달려간다. 노파가 있던 자리에는 나무가 있었는데 겁이 난 사기꾼은 나무를 베어내게 만든다. 그러나 나무 그루터기에서 노파의 목소리가 들리고, 사기꾼은 자기 죄를 털어놓는다. 노파가 왕국에 저주를 내리자 왕은 무릎을 굻고 자신의 죄를 반성한다.

다섯 번째는 <삼 형제 이야기>로 삼 형제가 죽음과 만나 죽음에게 마법의 물건을 받게 되는 이야기이다. 첫째는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마법 지팡이를, 둘째는 죽은 자를 되살릴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하여 그런 능력을 지닌 돌멩이를, 셋째는 죽음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투명 망토를 받는다. 마법 지팡이를 받은 첫째는 자신이 얻은 지팡이를 자랑하고는 술에 취해 자다가 다른 마법사에게 죽임을 당하고 지팡이를 빼앗긴다. 둘째는 좋아했으나 이미 죽어버린 아가씨를 되살리지만, 되살아난 아가씨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결국 더욱 고통스러워진 둘째는 아가씨를 따라 목숨을 끊고 만다. 셋째는 투명 망토를 이용해 죽음을 피해다니다가 훗날 나이가 무척 많이 먹었을 때 아들에게 자신의 망토를 물려주고 조용히 죽음을 맞는다.


해리 포터 세계의 이야기라고는 하지만 우리 '머글'들이 읽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재미있고 교훈적인 이야기들이다. 해리 포터 시리즈의 팬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냥 안데르센이나 그림 형제의 동화책을 읽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냥 읽어도 재미있는 이야기라 동화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좋은 선택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해리 포터의 세계가 궁금해지게 될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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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여자의 공간 - 여성 작가 35인, 그녀들을 글쓰기로 몰아붙인 창작의 무대들
타니아 슐리 지음, 남기철 옮김 / 이봄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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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서른다섯 명의 여류 작가들이 소개되는 책인데, 내가 이름이라도 '확실히' 들어본 작가까지 절반이 안 된다. (개중에는 들어봤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이름들이 몇 있다. 하지만 그런 인물들은 제외하고.) 작품을 읽어본 작가만 추리면 고작 일곱 명. 얼마나 한쪽으로 치우친 독서를 하는지, 그러면서도 얼마나 지식이 짧은지 금세 훅 드러난다. 책에서 새로운 작가를 만나게 됐다는 반가움도 있었지만, 좀 더 내밀한 안쪽까지 알고 싶었던 친근한 작가들의 경우에는 몇 되지 않아 아쉽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인물들의 경우에는 낯선 작가들보다도 각 인물마다 할당된 대여섯 장 정도의 내용이 더욱 짧게만 느껴졌다.


어떤 작가는 글을 쓴 공간이 사진으로 제시되기도 하고 어떤 작가의 경우는 사진 없이 글로 표현되기도 한다. 사생활을 중시하는 작가들은 사적인 공간을 세간에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작품이 탄생하는 공간의 사진이 없기도 한다. 그리고 글을 쓰거나 타이핑하는 사진이 있어도 그게 실제로 작품을 쓰는 모습인지 아니면 사진가의 요청에 따라 의도된 사진인지도 애매한 구석이 있긴 하다.

작가들의 사진을 보며 나는 어쩐지 자꾸만 미소를 짓게 됐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지만, 자기 집 책상 앞인데도 당장에라도 외출할 수 있을 듯한 옷차림과 매무새를 하고 있는 모습들이 작가들도 여자는 여자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어쩐지 (게을러터진) 나 역시 집에 있을 때는 꾸미고 있어야 하나 싶기까지 했다. 그리고 많은 작가들이 담배를 피우는 사진이 실려 있어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이것이 그녀들이 작가들이라 자유로운 존재들이어서 담배를 피운 건지, 아니면 그들이 살던 지역이 자유로운 곳이어서 담배를 피운 건지, 20세기의 인물들이라 대유행이던 히피적인 양식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남성 작가들이 많이 등장하던 다른 책에서보다도 더 많은 담배를 본 것 같다. 이렇게 적고 보니, 어쩌면 담배는 기존 여성이 지닌 순종적인 이미지에 대해 지적인 여성이 나는 거기에 속하지 않는다며 보여줄 수 있는 하나의 반항적인 매개체일지도 모르겠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에게도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했다. 다행히도 이 책에 실린 작가들 대부분은 크고 작은 글을 쓸 공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계관시인이었던 테드 휴즈보다 더 유명해진 실비아 플라스의 경우에는 어떨는지 잘 알 수 없는데, 그런 사진이나 기록이 없고 시로 나날이 유명해지던 남편과 달리 자식들 뒤치다꺼리에 집안일에 치여 자신의 창작욕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을 거라고 추측된다고 한다. 만일 그녀가 남자로 태어났거나 또는 남자처럼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시대에 태어났다면, 그것도 아니면 시몬 드 보부아르처럼 차라리 여자에게 주어진 모든 집안일에서 눈을 돌릴 수 있는 배짱이 있었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고 멋진 작품을 발표했을 수도 있었을 거란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테드 휴즈와 실비아 플라스에 관한 재미있는 기사)


인물들의 내용 및 사진이 적은 듯해서 아쉽긴 하지만 작가들의 공간을 훔쳐보길 좋아하는 나로선 그럭저럭 흥미롭게 읽고 볼 수 있어 괜찮았다. 뒷표지며 서문에서 조앤 K. 롤링에 대한 언급이 있어서 기대했으나 언급뿐이어서 무척 아쉬웠다. 해리 포터로 성공한 지금은 어떤 공간에서 글을 쓰고 있을지 궁금했는데. 쩝. 어쨌거나 요즘들어 공간의 필요성을 느끼는 내게 탐나는 서재가 참 많았다. 그러나 서툰 목수가 연장 탓을 한다고 재능이 있다면 어디선들 글을 쓰지 못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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