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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내 목소리를 닮았어 ㅣ 자이언트 스텝 2
김서해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3년 7월
평점 :
당신에게 내 이야기를 들려주는 상상을 한다. 당신은 내가 아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아주 가까운 사람. 갈등을 유발해서 괜한 데 에너지를 쏟지 않기 위해, 내 삶을 어그러뜨리지
않기 위해 하지 못했던 말들을 들려주고 싶다. 당신이 오해하는 게 있다고.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나도 당신을 견디고
있다고. 당신과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싶다고.
어느 날에는, 당신이 내가 아는 사람이지만 아주 가까운 사람은
아니기를 바란다.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사는지 어느 정도는 알아서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지만, 너무 친밀한 사이도 아니어서 서로에게 무언가를 바라지 않아도 되는 부담 없는 사이이기를.
또 한편으로는 당신이 처음 보는 아주 낯선 사람이었으면 한다. 나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 우리 사이에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 관계.
다시는 볼 일 없는 그런 사람이면 안 될까. 하지만 안다.
당신이 완벽한 타인이라면 나는 당신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할 거란 걸.
이 마음들은 전부 같은 마음이었다. 자기의 주관과 가치관으로 나에게
하등 쓸모없는 말을 늘어놓는 대신 묵묵히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을 원했을 뿐이었다. 그런 사람이 나한테는
없다. 내가 갖지 못해서 그런 걸까. 곁에 그런 사람이 있다는
건 아주 특별한 행운처럼 느껴진다.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희귀한 행운.
해인의 앞에 등장한 영원도 어쩌면 행운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영원은
끈질기게 해인에게 질문해 주는 사람, 해인이라는 사람에 관해 궁금해하고 어떤 이야기든 기꺼이 들어 주는
사람이니 말이다. 대화를 나누며 해인은 인정하기 싫은 자기의 못난 모습과 상처를 꺼내 보고, 영원과 닮고 싶어 한다. 슬픔의 종류를 구분하고, 슬픔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구별하면서. 그 모습 때문에 그를 좋아하면서
똑같은 이유로 질투하기도 한다.
모순되는 감정들이 머리와 마음에서 부유하다가 서로 얽힌다. 대화는
얽혀 버린 감정의 타래에 조명을 비추는 일 같다. 어디에서 왜 어떤 모양으로 얽혔는지 파악하는 일. 질문이라는 형식을 통해 상대방뿐만 아니라 자기까지 들여다보는 일. 상대방의
말이 내 감정의 타래를 비추는 빛이 되었을 때, 당신이 내 목소리를 닮았다고 고백하는 일.
그 빛이 사라지게 되더라도 얽힌 마음을 떠올리고, 나를 닮은 당신의
목소리를 기억하는 일.
*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나의 이름과 모난 얼굴, 서른을 넘긴 나이와 텅 빈 커리어, 코트와 운동화, 학창 시절 췄던 춤, 대학 시절 그렸던 그림, 몰래 쓴 글. 엎질렀는데 흐르지 않은 꿈들, 어엿하지 못한 삶. - P25
"우리는 지금 연습하는 중이니까 조금은 부딪혀도 돼." - P53
내가 사랑에 빠지는 방식은 모사구나. 그러니까, 난 너를 좋아하다못해 네가 되고 싶다고 내내 도서관에서 혼잣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 P93
"힘을 내면 바뀌나요?" "시간을 너무 낭비하진 말자." - P113
슬픔에도 급이 있는 것 같았다. 앞으로도 계속 슬퍼야 한다면 영원처럼 잘나가는 집단에서, 젊은 채로, 똑똑하고 똑부러진 채로 슬프고 싶었다. 그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커리어뿐만 아니라 불행까지, 그리고 그것을 소화시키는 방식까지 가로채고 싶었다. - P136
나와 춤. 나와 음악. 나와 주희. 몸으로 수많은 곡선을 그리고 팔이나 다리로 동그란 공간을 만들어 음악이 내 몸을 관통하게 하는 것. 음악에 맞춰 계속 바뀌는 동작들이 내 몸을 지배하도록 두는 것. 더는 무능한 기분이 들지 않게 스스로 고꾸라지는 것. - P141
사람들은 일기에조차 거짓말을 쓰기 때문에, 차라리 이야기를 지어낼 때 더 진실해진다. 다 가짜라고 생각하면 밑바닥까지 솔직해질 수 있었다. - P149
그제야 그리움은 호기심과 닮아 있음을 깨달았다. 보고 싶다는 건, 뭘 하는지 보고 싶고 무슨 말을 하는지 듣고 싶고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지 알고 싶은 마음의 총칭이었다. 나는 나에 대해 더 알고 싶었다. 내가 나의 못된 성격과 못난 특징을 차근차근 알아가고 이 세상을 어떤 식으로든 직접 겪고 싶어서 달리기를 멈추거나 미룰 수 없었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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