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홍라희 컬렉션 - 강력하고도 내밀한 취향
손영옥 지음 / 자음과모음 / 202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말로 좋아하는 대상과 마주했을 때 인간은 평소와는 다른 모습을 보이곤 한다.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쓰는 데 다른 기준을 적용하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표정이 달라진다. 그런 걸 진심이라고 부른다.

재작년, 삼성가 사람들의 미술을 향한 진심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들은 거기에 “이건희 컬렉션”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어느 연구자는 거기에 이름 하나를 덧붙였다. 그는 삼성가의 미술 작품 컬렉션을 이야기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지만, 이병철과 이건희라는 가부장들에게 가려져 있던 이름을 끄집어내어 호명했다. “이건희·홍라희 컬렉션”이라고.

『이건희. 홍라희. 컬렉션』은 삼성가의 세 컬렉터 이야기로 시작한다. 삼성이라는 기업의 오너가 아닌 미술 애호가, 컬렉터로서의 면모만을 다룸으로써 그들의 컬렉션 그 자체에 집중한다. 세 사람의 서로 다른 취향이 모인 컬렉션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그들이 작품을 구하기 위해 노력을 얼마나 기울였는지, 그들을 도운 화상은 누구인지 짚어가며 다양한 작품으로 이루어진 컬렉션의 거시적 의의를 살핀다.

그러고 나서 작품을 작가별로 소개한다. 먼저 국민화가들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독자에게 익숙한 작가와 작품을 보여줌으로써 독자의 흥미를 북돋는다. 그다음에는 ‘추상’, ‘희귀’, ‘시대’라는 키워드로 작가와 작품을 세 장으로 분류하여 설명한 뒤, 서양 근대미술 작가들을 소개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낯익은 작품이 많았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맨 처음 했던 ‘이건희컬렉션’ 전시는 두 번이나 본 데다가, 과천관에서 했던 서양 미술 특별전도 관람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저 각각의 작품을 감상했을 뿐 그 작품들이 어떤 맥락에서 수집되었으며 미술사에서 어떤 의의를 지니는지까지는 알지 못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봤던 그 작품들이 어떻게 탄생했으며 미술사의 어느 위치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이건희 컬렉션이 곧 한국 미술사”라는 말도 있다고 한다. 즉, ‘이건희·홍라희 컬렉션’에는 미술사와 컬렉터의 진심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그렇기에 이 책은 컬렉션을 파헤침으로써 삼성가 컬렉터들의 미술에 대한 애정을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한국 근현대 미술사까지 정리해 냈다.

특정 인물들의 컬렉션이 미술사를 개괄할 수 있었던 건 그들이 “문화적 허영”이 아닌 “학술적 가치”를 따져서 작품을 구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p.29) 물론 허영 따위 필요하지 않을 만큼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들이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미술 작품을 허영심이 아닌 진심으로 대하고 수집했기 때문에 그만큼 많은 사람이 ‘이건희컬렉션’ 전시에 열광한 게 아닐까 싶다.



*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이건희 신화’를 쓸 생각은 없다. 정치적 해석에 휘둘려 기증의 의미를 희석하며 어깃장을 놓을 생각도 없다.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이런 규모의 사회적 환원이 어디 있었던가. 특히 이건희 컬렉션 기증은 정치 중심, 경제 중심 한국 사회에서 부차적이었던 예술 문화를 일으켜 세운 기증이다. 그것도 영화, 팝 같은 대중문화가 아닌 순수 미술을 일으켜 세운 기증이다. 이건희 컬렉션 유치 경쟁에 오랜만에 전국 미술관이 들썩였고, 《이건희 컬렉션》 전시 열기는 매우 뜨거웠다. 나는 이것이 문화의 힘을 우리 사회가 인정한 하나의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 P11

나는 기증 이슈에 들떠 우리가 잊고 있는 삼성가 컬렉터 홍라희의 이름을 이 책에서 불러내고자 한다. 홍라희는 삼성가의 미술 경영인이었으며 신혼 초부터 남편 이건희와 함께 미술품을 수집해온 컬렉터고, 더군다나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기에 남편에게 현대미술 가이드 역할을 했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관습에 젖어, 의식하지 못하고 부르는 ‘이건희 컬렉션’ 대신 ‘이건희·홍라희 컬렉션’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 P15

지역에 보내진 물량은 미미했다. 하지만 전시를 통해 작품이 공개됐을 때의 효과는 엄청났다. 사람들은 ‘이건희 컬렉션’이 전시된다는 것만으로도 대구, 광주 그리고 양구, 광양까지 작품을 보러 갔다. 컬렉션 기증 과정에서 홀대받는 지방을 배려한 것은 이건희 컬렉션 기증에서 ‘신의 한 수’라고 생각한다. 그 결정의 주체가 홍라희였다. - P43

컬렉터로서의 이병철에게는 이 점이 크게 아쉽다. 그가 애국적 견지에서 국보급 고미술품을 모으고, 당대 미술품으로까지 시선을 확대해 미술품을 사주며 가난한 예술가들의 생계를 지원한 것은 참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이왕이면 작가가 자신의 예술 세계를 추구하며 그린 그림을 사줬다면 어땠을까. 작가가 ‘돈 버는 그림’과 ‘그리고 싶은 그림’을 나누어 작품 활동을 하게 만든 것은 컬렉터 1세대가 가진 시대적 한계가 아니었을까. - P54

김환기의 특별함은 이런 점에 있다. 대부분 미술가는 한번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면 평생 그것을 되풀이한다. 그러나 김환기는 안주하지 않는 유목민적 열정으로 과거의 양식과 결별하고, 추상표현주의의 세례를 받아 순수 추상인 전면 점화 시대를 열었다. 그렇게 세계 미술사에 ‘도킹’했다. - P82

현실적 제약을 뛰어넘어 용감하게 사랑을 쟁취한 부부 화가 김기창과 박래현. 둘은 그림 인생에서는 동지였다. 한국화의 현대화라는 같은 방향을 보고 함께 걸었다. 하지만 경쟁자이기도 했다. 박래현이 남편과의 관계를 두고 ‘한 고장에 색다른 두 마을을 꾸미는 노력’이라고 하면서도 ‘대결’이라는 단어를 쓸 정도였다. 둘은 작품 세계가 서로 닮을까 봐 같이 쓰는 작업실 중간에 커튼을 치고 작업을 했다고 며느리 김스와니 씨는 말했다. - P216

"남순아, 우린 조선 미술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인물들이야. 나랑 같이 파리에 살면서 그림을 그리자." - P247

삼성은 대한민국 재벌의 간판 같은 그룹이며 기업 경영에서 반노조주의를 관철해 노동계로부터 지탄을 받는다. 미국의 코카콜라건, 일본의 야마하건 자본에 대한 적대적인 입장이 분명한 신학철의 이 반자본주의 시위 현장 구호처럼 선명한 그림을 재벌 회장 이건희가 구입했다. 이건희는 작품이 좋다면 이데올로기는 신경 쓰지 않는 컬렉터, 요새 말하는 진영 논리에 휩쓸리지 않는 컬렉터라는 생각이 들었다. - P33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