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동물의 탄생 - 동물 통제와 낙인의 정치학
베서니 브룩셔 지음, 김명남 옮김 / 북트리거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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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비둘기한테 뒤통수 맞은 느낌이다.


기분이 상당히 더러울 일을 당했을 때 나는 그런 표현을 사용한다. 내가 대학교 1학년 때 학교에서 비둘기한테 뒤통수를 맞은 적이 있다는 일화를 아는 친구들은 그 말이 뭘 의미하는지 바로 알아듣는다. 정말로 그때 기분이 더러웠다. 이후 나는 비둘기를 혐오하게 됐다.


아무 잘못 없이 뒤통수를 맞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더러운 비둘기가 날개로 내 뒤통수를 때림으로써 내 뒤통수에 더러운 게 묻었을 것이라는 직감이 들어서였다. 더러운 것을 내 몸에 묻힌 존재에게 혐오감을 느낀 것이었다. 그전에도 비둘기를 좋아하지 않긴 했지만 혐오하지는 않았었다.


한국의 도시에는 비둘기가 깔려 있다. 여전히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는 인간도 있고 나처럼 비둘기를 극도로 싫어하는 인간도 있다. 비둘기는 인간이 만들어 놓았다고 여기는 세계에 침입했다. 비둘기는 인간과 너무나 가까이 있다. 아마 오늘도 나는 비둘기를 수십 마리 봤을 것 같다. 인간 다음으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척추동물이니까.


『나쁜 동물의 탄생』의 저자 곁에도 그에게 해를 끼치는 동물이 있다. 저자에게 망할 케빈이라고 불리는 청설모다. 망할 케빈은 저자의 정원을 무제한 뷔페로 이용한다. 저자는 케빈에게 매년 속수무책으로 당했다고 토로(내지는 고백)한다. 미국의 청설모는 그렇게 유해동물이 되어 저자에게 망할 케빈이라는 멸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비둘기와 청설모가 처음부터 유해동물이었던 것은 아니다. 인간에게 해를 끼쳤기 때문에,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이 소유의 감각을 느끼고 보호하고 싶어 하는 대상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비둘기는 나뒤통수를 가격했고, 청설모는 저자토마토에 이빨 자국을 남겼다. 감각할 수 있는 위해이지만 막을 도리는 없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비둘기와 청설모뿐만이 아니다. 저자는 쥐, 비둘기, 코끼리, 고양이, 참새, 곰 등 다양한 동물 종이 어느 사회에서 유해동물이 된 계기와, 그 사회 집단이 유해동물을 대하는 태도를 취재하여 책에 담았다. 유해동물이라 일컬어지는 동물들을 지구상의 모든 인간이 유해동물로 여기지는 않았다. 유해동물은 사회적 맥락과 인간과의 관계에 의해 정해졌다.


고양이는 아주 단적인 예시다. 한국에서는 길고양이를 공격하면 (형량이 너무 낮긴 하지만) 동물 학대로 처벌한다. 한국 사회 구성원 대다수는 고양이가 인간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귀여움을 능가할 만큼은 아니라고 느껴서다.


반면 고양이를 유해동물로 지정하고 제거하는 사회도 있다. 고양이가 토착 동물을 사냥해서 멸절 위기로 내몰았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호주에서는 보호 구역 내에 있는 야생 고양이는 그냥 죽여도 된다고 한다. 그들토착 생물 보호가 고양이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사회인 것이다. 한국에서는 고양이가 참새와 쥐를 사냥해도 참새와 쥐의 개체수가 급감하여 생태계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그러한 지점에서 고양이를 보는 관점이 달라진 것이다.


저자는 무지에서 비롯한 무력감이 특정 동물을 유해하게 여기도록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고양이로부터 호주의 토착 생물을 완벽하게 보호하는 방법을 몰라서, 고양이의 토착 생물 학살 앞에서 무력감을 느껴서, 무력감에서 수치심이 비롯되어서라고 설명한다.


, 내가 저 동물보다 약하다고 느낄 때 인간은 그 동물을 혐오하고 유해동물이라고 낙인찍는다. 그래서 저자는 유해동물이라는 말을 없애자고 제안한다. ‘유해동물이라는 단어로 인해 해당 동물이 유해하다는 틀에 갇힌다고 말한다. 어차피 인간은 자연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동물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공존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이다.


그 동물들은 그저 존재하고 생존하려 애썼을 뿐이다. 인간이 소유한다고 여기는 것들을 동물도 탐냈을 뿐이다. 동물은 그저 거기에 있었을 뿐이다.


우리는 유해동물 관리에 온갖 방식으로 실패한다. 하지만 때로는 우리가 서로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이 실패의 이유다. 인간 거주지에 유해동물이 들끓는 것은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깨끗하고 잘 지어지고 해충 없는 집에서 살 존엄성을 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유해동물에게 맞서도록 도울 수 있는 시스템을 정비하는 데 돈을 쓰고 싶어 하지 않는다. 우리의 사회계약이 실패하는 곳에서 다른 종이 성공한다. - P38

유해동물은 자연이 우리를 못살게 군다는 증거가 아니라 자연이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다는 증거다. 자연은 우리 벽에서 살고, 우리 위에서 똥 싸고, 우리의 토마토를 먹어 버린다. 유해동물은 우리가 자연을 속속들이 이해한다고 자신할 때 자연이 우리에게 들어 올리는 가운뎃손가락이다. 이건 인간을 짜증나게 하는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동물이 승리하는 이야기다. - P42

생계를 지키고자 코끼리를 죽이는 사람들로부터 코끼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쌓이는 기부금은 코끼리와의 갈등에 시달리는 케냐인이 코끼리보다 덜 귀하다고 여기는 식민 체제의 잔재다. 한편 외부에서 케냐를 비난하는 일부 비정부기구와 비영리단체는 또 다른 메시지를 전하는데, 그것은 케냐인이 자기네 야생동물의 가치를 모른다는 것, 케냐인이 후진적 관점에서 벗어나도록 교육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 케냐인은 자기네 야생동물을 알아서 잘 다룰 줄 모른다는 메시지다. - P233

우리가 지금의 방식대로 계속 사는 한, 그러니까 계속 새 공간과 새 쓰레기를 만들고, 새롭고 이국적인 반려동물을 들이고, 야생의 공간으로 이주하고, 우리가 귀하게 여기지 않는 공간은 싹 밀어 버리는 한, 동물들은 계속 우리를 이용하려고 찾아와서 우리 앞을 막아설 것이다. 계속 우리를 성가시게 만들 것이다. 유해동물은 늘 존재할 것이다. - P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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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나의 글쓰기 - 읽히는 이야기와 쓰는 삶에 대하여
이영관 외 지음 / 사회평론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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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내가 다녔던 중학교에서는 매년 여름방학 숙제로 시화(詩畵)를 내 줬다. 첫 여름방학이 끝나갈 무렵 엄마는 시화 숙제를 했냐고 물어보셨고 나는 너무나 솔직하게도 아직 안 했다고 답했다. 엄마는 빨리 하라고 재촉하셨다. 골똘히 생각하다가 시 한 편을 썼다. 그림도 어떻게 그려야겠다고 구상했다. 하지만 엄마는 내 시가 너무 어둡다며 다시 쓰라고 하셨다. 끝내 엄마의 개입이 잔뜩 들어간 시가 완성됐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의 감성과 동떨어진 그 시는 나의 시라고 할 수 없었다. 점수도 A, B, C 중 B를 받았다. 분했다.

엄마한테는 쓰라는 대로 쓴 시를 보여 드리고 실제로는 내가 쓴 시를 제출하면 됐을 텐데. 당시에는 그런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대신 다시는 엄마가 관여하지 못하도록 시화 숙제를 미리 해야겠다고, 시상이 떠오를 때마다 시를 써 놓겠다고 다짐했다. 그로부터 반년도 지나지 않아 구 보건소가 연 작은 시 공모전에서 상을 받았다. 이후로 엄마는 시화 숙제에 관여하지 않으셨다. 두 해 여름방학에 낸 시화 두 편은 모두 A를 받았다.

중학교 3학년 여름이 지난 후에도 계속 시를 쓰다가 대학교 2학년 가을에 시 쓰기를 그만뒀다. 사실 나는 시를 거의 읽지 않았다. 그저 시를 쓰는 행위 자체가 재밌어서 계속 썼을 뿐이었다. 어느 순간 시보다는 다른 글을 쓰는 데 에너지를 사용하고 싶어졌다.

지금 제일 많이 쓰는 글은 서평이다. 시기가 어느 정도 맞아떨어지긴 하지만, 시를 포기하고 서평을 택한 건 아니었다. 시와 다르게 서평 쓰기는 생존 전략이었다. 서평단 활동을 하면 책값도 아낄 수 있었고, 취업할 때 도움이 될 수도 있었다. 한 푼이 아쉬운 국문학과 학생에게 서평 쓰기는 최선의 선택지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이제 취업도 했지만 여전히 서평을 쓴다. 서평을 쓰는 게 재밌기만 한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계속 쓴다. 나를 위해서. 책을 읽고 바로 덮어 버리면 내용이 금방 휘발되고 내 것으로 흡수되지 않는다. 글을 쓰려면 생각이라는 것을 해야 하므로 글을 쓰지 않았더라면 하지 못했을 생각도 할 수 있게 된다. 결국 글을 쓰는 이유와 글의 장르가 어떻든지 간에 글을 쓰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글쓰기를 이어 올 수 있었다.

『친애하는 나의 글쓰기』는 작가 열여덟 명의 글 쓰는 마음을 크게 “다가가고 싶은 ‘진심’, 들려주고 싶은 ‘결심’, 꾸준한 ‘의지’, 버틸 수 있다는 ‘믿음’” 네 가지로 분류한다. 카테고리마다 네다섯 명의 인터뷰가 실려 있다. 소설가와 시인, 에세이스트뿐만 아니라 만화가, 수학자, 수녀 등 서로 다른 일을 하며 서로 다른 글을 쓰는 열여덟 명이 각자의 고유한 글쓰기 이야기를 들려준다.

진심과 결심과 의지와 믿음. 어느 하나도 글쓰기에 필요치 않은 건 없는 듯하다. 글을 쓰고 발표하는 일은 사회적 행위로 나와 타인을 고려할 수밖에 없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용기도 필요하다. 또한 계속 쓰겠다는 의지와 쓸 수 있다는 믿음이 없다면 글쓰기를 지속할 수 없다.

그렇기에 이 열여덟 가지의 이야기 중 어느 하나 허투루 흘려보낼 수 없었다. 김금숙 작가님처럼 나도 역사와 개인의 이야기를, 김초엽 작가님처럼 인간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난 글을 잘 쓰고 싶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작가님처럼 아주 성실하게 규칙적으로 쓰고 싶다. 임경선 작가님처럼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유롭게 펼쳐 나가고 싶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와 장르는 몇 차례 변했다. 그렇지만 쓰고자 하는 이유와 실행력만 있다면 언제까지든지 쓸 것이다. 평생 글을 쓰고 싶다. 아주 끈질기게 쓰고 싶다.

굉장히 흔한 유혹 중 하나가 자기 마음에 드는 통계는 금방 받아들이고 마음에 안 드는 통계는 비판적으로 보는 겁니다. 하지만 통계의 질도 여러 가지라 부정확할 수 있어요. 찾아보면 반대의 통계도 많고요. 그러나 대부분 자기 마음과 잘 맞는 것은 스스로 추궁하지 않죠. 그건 ‘고장 난 기계’가 되는 길입니다. - P31

오늘은 ‘주차장’에 대해 생각해볼까? 하는 식으로 오늘 하루를 설명하는 단어를 고민하면서 생활 속에서 하나를 건지는 편이에요. 어린이와 관련해 글을 정리하고 세분화하다 보니 ‘오늘의 낱말’과 어린이를 연결하는 식으로 글의 소재를 찾기도 합니다. 원고를 쓸 때 ‘어린이와 커피’, ‘어린이와 얼음’ 같은 식으로 고민하다 보면 평소 생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되더라고요. 어린이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제게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들려주는데 그런 대화도 글감을 얻는 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 P44

제 작품을 비롯해 SF는 미래를 불확정적이고 표류하는 것처럼 그리는 경우가 많아요. 그럼에도 거기엔 낙관이 필요합니다. 무조건적 낙관이 아닌, 사회를 좀 더 낫게 만들어가기 위한 것이죠. - P51

논문을 보면 행복하지 않은 문화권이나 사회에 몇 가지 특성이 있어요. 안타깝게도 한국은 그런 점에서 거의 상위권에 자리해요. 과도하게 강한 집단주의적 생각과 수직적인 문화가 그렇죠. 사람의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어서 나와 내 가족만 생각하고 에너지를 투여하면 타인을 배려할 에너지가 남지 않아요. 수많은 사회 구성원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회에서는 일상에서 예의 없고 불쾌한 일이 수시로 벌어집니다. 이런 경험을 계속해서 참아내야 하는 사회는 행복감이 높을 수 없어요. - P65

정호승 시인의 『슬픔이 기쁨에게』처럼 시는 타인에게 무관심한 이들에게 슬픔과 같은 감정을 선물한다. 고통을 모르는 이에게 고통을 느끼게 해주고, 슬픔을 모르는 이에게 슬픔을 느끼게 해준다. 남이 울면 따라 울 수 있는 것, 슬퍼할 줄 아는 사회에는 희망이 있다. - P101

저는 늘 글로 웃기는 것에 관심이 많았어요. 제 글을 읽고 사람들이 킥킥대는 순간을 기다리며 썼던 것 같아요. 글로 웃기는 건 어렵지만…… 좋잖아요, 웃으면. 재미있는 건 소중하니까요. 기쁨과 슬픔이란 어우러져 있어요. 저만 해도 살아갈수록 슬픔 속의 유머, 유머 속의 슬픔이 늘어나는 것 같아요. - P134

제가 쓴 소설에 문법이 맞지 않는 게 많았나 봐요. 디테일 부분까지 댓글로 잡아주셨어요. 그때 경험을 통해 ‘피드백을 쉽게 해도 부담 없는 작가가 돼야 한다’고 배웠어요. 글 쓸 때 고집은 필요하지만, 피드백이 안 들어오면 잘못된 길에 들어서도 모르잖아요. 혼자 쓸 때 원석이라면, 남들이 깎아줄 때 보석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 P171

‘힐링 도서’의 원조 저자로서 책임감을 갖고 말하는 건데, 저는 그 ‘힐링, 힐링’하는 말 좀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사소한 일까지 ‘상처’라고 말하면 삶이 문제 덩어리가 돼버려요. 일상이라는 게 갈등도 있고, 기분 나쁜 일도 있고, 내 뜻대로 안 되는 것도 있는 거죠. 모든 걸 정신병리로 만들면 안 됩니다. 모든 일에 ‘증후군’을 갖다 붙이면 일상이 치료받아야 할 일이 돼버려요. 스스로 극복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 도와줘야 하는 일이 되는 거죠. - P177

처음에는 업계도 의식하고 독자도 의식했지만, 이제는 ‘내가 쓰고 싶은 것이 남아 있는가’, ‘어떻게 하면 더 잘 쓸 수 있나’ 그것만 바라보게 됐어요. 그 외의 것은 소음이에요. -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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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들 - 숭배와 혐오, 우리 모두의 딜레마
클레어 데더러 지음, 노지양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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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쩡한 CD를 버려 본 적이 있다. 두세 번 정도밖에 재생한 적 없는 거의 새것이나 다름없는 CD였다. 지구에게는 너무나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의 음반을 내 방에 두고 싶지 않았다. 꼴도 보기 싫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의 음악을 듣고 싶었다. 그의 음악을 내 돈 주고 소비하고 싶지는 않지만 듣고 싶었다. 반대되는 두 마음이 상충하다가 결국 좋아하는 마음보다 화가 더 커져서 그의 CD를 버렸다. 울고 싶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종의 이유로 또 다른 뮤지션의 음악을 플레이리스트에서 전부 지웠다. 타격이 꽤 컸다. 정말로 울고 싶었다. 당시에 정말 많이 들었던 뮤지션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이후로 그들의 음악을 단 한 번도 내 손으로 찾아 듣지 않았다. 너무나 듣고 싶었지만 참았다. 가끔 그들의 노래를 흥얼거리면서도, 참았다.


한편으로는 감사했다. 그들이 본진이 아니라서. 내 밴드는 이십 년 넘게 활동하면서 사고 한 번 친 적이 없어서. 종종 이런 생각도 한다. 본진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면 깨끗하게 탈덕할 수 있을까. 십 년 동안 좋아한 사람들을. 그들의 음악을. 그 안에 내가 있는데.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결론을 내리고 싶지 않았다. 지금껏 잘해 왔으니까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믿음과 확신 없이는 덕질을 하지 못한다. 내가 좋아하는 그 사람이 괜찮은 사람이라는 믿음 말이다.


저자는 이 모든 것이 사랑이라는 감정적 논리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철학이 아니라. , 나의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어쩌면 나는 내 밴드가 무슨 일을 저지르더도 계속 사랑할지도 모른다. 플레이리스트에서 삭제한 여러 뮤지션들과는 비교도 못 할 만큼 훨씬 많이 좋아하니까.


쓰고 보니 내 본진이 쭉 한 밴드였던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한 아이돌 그룹을 덕질하다가 탈덕한 적이 있다. 그때 한 가지 깨달은 점이 있다. 좋은 사람 곁에 꼭 좋은 사람이 있는 건 아니라는 점. 끼리끼리 논다는 말이 어느 정도는 맞지만 어느 정도는 틀렸다는 것. 아무리 괴물 같은 인간일지라도 누군가에겐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러면 저자는 내게 이렇게 물을 것만 같다. 누가 괴물이고 누가 좋은 사람이냐고. 너는 괴물이 아니냐고.


저자는 고백한다. 자신도 괴물이라고. 누구나 다 어떤 면에서는 괴물이라고. 그러니까 저자도 괴물이고, 나도 괴물이고, 이 책과 관련된 모든 사람도 괴물이고, 이 책과 관련이 없는 모든 사람도 괴물이다. 이 책을 읽든 읽지 않든 모두 괴물이다. 괴물성이 어떻게 발현되는지에 따라 괴물로 불릴지 말지가 결정될 뿐이다. 그러니 저자는 괴물 예술가들의 작품을 소비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보다는 누가 왜 괴물로 불리게 되는지에 집중하자고 말한다. 그게 누군지 우리는 이미 안다.




*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우리 중 누가 더 명확하게 보고 있었던 걸까? 감독의 여성에 대한 태도와 감독의 과거 여자 문제에 영향받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일까. 누군가는 그것을 특권이라고 부르지 않나? 자서전적 오류를 저지르지 않고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혹은 프로젝트를 생기 있게 만드는 충동을 알아볼 수밖에—혹은 느낄 수밖에—없는 사람은 누구인가?
난 정말 궁금해서 묻는다. - P57

나 또한 그들과 같거나 비슷한 입장인 적이 있었다. 그 괴물이 나에게 한 짓을 기억하고 있다. 이 문제에 거리를 유지하며 냉담한 태도로 접근할 수 없다. 나는 그 고소인들에게 공감한다. 나도 고발자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여전히 예술을 소비하고 싶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에 앞서 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무엇도 놓치고 싶지 않다. 왜 꼭 그래야 할까? 왜 〈차이나타운〉이나 〈슬리퍼Sleeper〉를 빼앗겨야 할까? 내가 여성으로서 겪어 온 아픈 일들과, 위대한 예술이 주는 자유와 미학과 장엄함과 기이함을 못내 경험하고 싶은 마음 사이에 긴장이 도사린다.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이 질문은 철학적 질문이 아니라 감정적 질문이다. - P102

상식적이고 자제할 줄 아는 예술가들은 이들과 같은 방식으로 추앙받지 않는다. 필립 라킨은 앨런 긴즈버그처럼 회자되지 않고 뒤샹은 피카소만큼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거나 피카소 작품을 전시한 대형 박물관만큼 티켓을 매진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 P119

우리는 개자식들이 선을 넘고 법칙을 깨 주기를 바란다. 법칙을 위반한 그들에게 상을 주고 한 발 더 나아가서 이는 예술 창작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라 보기도 한다. 나쁜 행동에 상을 주고 또 상을 주어 결국 이것이 위대함과 동의어가 되게 만든다. 전통적으로 문지기와 출판사와 스튜디오 사장이 다들 남자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도 이야기와 행동을 갈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건, 사고를 미치게 원한다!
그러다가 이 사고뭉치들이 범죄를 저지르면 그제야 분노를 터뜨린다. - P143

이런 감정을 가진 인물에 발을 깊이 들여놓는 사람만이 『롤리타』를 쓸 수 있었다. 모든 훌륭한 예술가는 명작이 이렇게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자아의 일부를 강탈당해야 한다. 먼저 자신 안에 들어가 둘러보다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 무언가를 가지고 나와 글로 쓴다. 때로 흉악하더라도,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지 않을지라도, 때로 본인을 괴물처럼 보이게 만들지라도 쓴다.
위대한 작가는 가장 흉악한 감정이 가장 특이한 감정이 아님을 믿고 있어서다.
위대한 작가는 가장 사악한 생각조차 평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 P189

예술을 창작한다는 것과 부모가 된다는 것은 서로에게 매우 효율적인 방해 요인으로 작용하며,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를 속이고 있거나 자녀가 없거나, 남자다. - P206

남성 예술가의 폭력은 그들의 위대함과 연결되어 있다. 그 폭력은 충동이다. 자유다. 여성 예술가의 폭력이나 자해는 감수성의 표시이거나 광기의 증거일 수 있지만, 그 이면에 있는 창의적이고 도덕적인 힘의 증거로 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 - P275

우리가 괴물 남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지나치게 집중하면 #미투가 실제로 해야 하는 일에서 관심이 멀어지게 된다. 사건이 터지면 비평가들은 곧바로 "그래서 그 X의 작품은 다 버릴 겁니까?"라고 물으면서 자본주의의 시녀가 되어 문제의 초점을 가해자와 가해자를 지지하는 시스템에서 개인 소비자로 옮긴다. - P295

사랑은 판단에 의존하지 않고 판단을 옆으로 유보하는 결정에 달려 있다. 사랑은 무정부 상태다. 혼돈이다. 우리는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성이라는 차가운 기후와는 완전히 다른 기후 시스템인 감정적 논리에서 결점투성이의 불완전한 인간을 사랑한다. - P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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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험지옥에 빠지다 - 팔도 최고의 족집게 선생부터 기상천외한 커닝 수법까지, 처음 읽는 조선의 입시 전쟁
이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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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삼 학년이 되기 직전의 겨울 방학이었다. 학교 자습실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갖다 놓았다가 선생님께 한 소리를 들었다. 이런 책 말고 전공 도서를 읽으라고 말이다. ‘이런 책’은 다름 아닌 학교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공부도 안 하고 맨날 ‘이런 책’이나 읽었던 것도 아니다. 국어국문학과에 지원하는 학생 치고는 독서 기록이 적다는 얘기를 들었으니 말이다. 문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책을 많이 읽어야 하는데 정작 문학을 공부할 대학에 가기 위해서는 독서 대신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 했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되는 세계에서 태어났다면 나는 매일 책이나 읽고 글이나 쓰면서 십 대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나는 공부해야 한다는 압박에 책이나 읽고 글이나 쓰는 일의 즐거움과 행복을 빼앗겼다.

외부에서 주입된 욕망은 개개인의 고유성이 발현되지 못하게 한다. 그런 걸 사회적 폭력이라고 부른다. 누군가는 폭력을 적극적으로 정당화하고 답습하는 데 일조한다. 그런 상황을 방조하다 보면 폭력을 폭력이라고 여기지 않는 사회가 된다.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과도한 교육열에 시달려 왔다. 따뜻한 정도를 한참 넘어서 과열되어 터질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저자는 조선시대 과거 시험을 통해 그 열기의 역사가 생각보다 오래된 것임을 보여준다.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고고하게 유교 경전을 공부하는 선비 대신 요약본을 손에 쥔 양반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과외와 부모의 자식 체벌(가정 폭력)도 만연했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입시 비리를 저지르는 일도 허다했다고 한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유명한 학자들도 자식(딸이 아닌 아들)의 출세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신념과 반대되는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지금과 너무 닮았다. 청소년 대부분이 대입에 자신을 갈아 넣는다. 그 과정에서 하는 공부는 오로지 시험을 보기 위한 공부로, 실속이 없다. 마음의 양식이 되지도 못할뿐더러 실용적이지도 않다. 교육과정에서 추구하는 바는 있지만 입시라는 목적하에 현장에서는 무시되기 일쑤다. 모두가 그렇게 쓸모도 없는 공부를 열심히 하지만, 대입 결과는 부모의 경제력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나 고위층 자녀들은 특혜를 안 받은 사람이 과연 있을지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저자는 과거 제도가 무너짐에 따라 조선 사회도 무너졌다고 주장한다. 과거야말로 조선이라는 사회를 지탱하는 제도였으니 말이다. 개인이 타고난 재능을 발휘할 수 없는 세계는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그러니 더 늦기 전에 역사를 교훈 삼아 지금의 한국 사회를 들여다봐야 하지 않을까.

*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조선 시대라고 해서 모두 출중한 문해력을 갖춘 것은 아니었다. 물론 텔레비전도 없었고, 컴퓨터도 없었고, 스마트폰은 더더군다나 없었지만, 그래도 놀려고 마음먹으면 할 게 참으로 많았다. 조선 사람들은 사냥을 가거나 술을 마시거나 노름을 하며 놀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성실한 독자가 되기란 어려운 일이다. - P54

아무래도 정조는 누워서 책을 읽는 신하를 적발했던 것 같다. 훗날 그의 사돈이 되는 김조순金祖淳은 숙직하며 동료 관리들과 연애 소설을 읽다가 걸린 적이 있었는데, 이런 책을 점잖게 앉아서 읽었을 리는 없으니, 그렇다면 누워서 책을 읽는 사람도 하나쯤은 있지 않았을까. 뭐, 책만 읽으면 되지 자세까지 따지나 싶지만, 그만큼 정조는 ‘꼰대’였던 것이다. - P59

윤기는 조급한 부모들을 일컬어 ‘알묘揠苗’라고 했는데, 싹을 뽑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가 예로 든 알묘들의 모습은 어쩐지 매우 익숙하다. 그들은 어제 가르쳐준 하나를 왜 기억하지 못하냐고 화내고, 오늘 왜 열을 깨우치지 못하냐고 화낸다. 평범한 아이에게 천재 수준의 총명함을 기대하며 또 화낸다. 그러다가 화를 못 참고 결국 매를 든다. 이래서야 무슨 성취를 바랄 수 있겠는가. 그런 부모 밑의 아이는 오히려 공부를 멀리하게 된다. - P136

만약 사도세자와 정조의 태어나는 순서가 바뀌었다면, 역사가 좀 달라졌을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설사 정조가 아들로 태어났다고 한들, 영조는 만족하지 못했을 것이다. 더 열심히 공부하라고 채근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것이 영조의 됨됨이었다. 무언가에 쫓기듯 자식을 괴롭히는 사람. - P147

인간의 삶이란 수백 년이 지나도 크게 변하지 않는 것일까. 과거(입시)가 나라를 망친다! 젊은이들의 전부 과거(입시)에 목매느라 제대로 기를 못 펴고 있다! 수백 년 전의 말이라기에는 우리의 마음을 너무나 아프게 찌른다. - P152

그때나 지금이나 자식 잘되기를 마다하는 부모는 없다. 그리고 조선에서 잘되는 길이란 결국 과거에 급제하는 것이었다. 하여 당시 사람들은 과거제도의 폐단을 지적하면서도, 거기에 무수한 시간과 돈, 노력을 쏟는 이중적이고도 모순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사회적인 자아와 개인적인 자아가 다르고, 이상과 현실이 끊임없이 괴리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 P159

빈부가 교육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오늘날만의 일이 아니다. 500년 전에도 돈이 없으면 오직 혼자만의 노력으로 승부를 봐야 했다. 아니, 선생이 있든 없든 온전히 공부만 할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정말 가난한 사람들은 공부할 시간조차 없었으니까. - P205

숙종 때는 꼭 과옥이 아니더라도 당쟁이 너무나 치열했다. 자고 일어나면 특정 세력이 통째로 몰락하거나, 나는 새도 떨어뜨리던 실력자가 사약을 마셨다. 이처럼 혼란하고 불안한 시기였기에 생존해야 한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했고, 따라서 입시 비리를 거침없이 저질렀던 듯싶다. 하지만 그 결과 과거의 공정성이 파괴되었으니, 이는 국가의 기틀을 무너뜨린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 선을 넘는 순간, 그 이후의 세상은 그 이전의 세상으로 절대 돌아갈 수 없다. - P236

이 적나라한 고발의 행간에는 특혜를 주면 줄수록 명성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하는 대신 오히려 더 방만해졌던 명문가들의 한심한 작태가 담겨 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말이다. 집안의 이름값만으로 급제할 수 있고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면, 노력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이런 상황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조차 안 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습속’이 한 번 생겨나면 다음 세대로 계속 이어지며 뿌리내린다. 뜻이 바른 사람이라면 어찌 이를 내버려둘 수 있겠는가. -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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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의 유학
설수빈 지음 / 디자인하우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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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등학생일 적에 예대에 다니고 싶다는 로망이 있었다. 문예창작과에 입학해서 미대나 음대를 기웃거려 보고 싶었다. 어떻게 기웃거릴 수 있는지도 모르면서 막연히 꿈꿨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노래하는 걸 좋아하는 아이에게 예대라는 공간은 그 모든 것과 가까이 있을 수 있는 유토피아와 같은 곳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문예창작이 아닌 국어국문학을 전공으로 삼았지만, 운이 좋게도 예체능 계열 학과가 많은 학교에 다녔다. 하지만 그 운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것 같다. 나름 듣고 싶은 과목을 열심히 들었다고는 하지만 비전공생으로서 수강할 수 있는 과목에 한계가 있었다. 사 학년 때 그 점이 참 아쉬웠다. 이십몇 년을 살면서 가장 후회하는 일이 바로 복수전공을 신청도 해 보지 않은 것이었다. 도전이라도 해 봤으면 미련은 남지 않았을 텐데.

미련을 한 아름 안고 미술과 디자인 영역에 홀로 기웃거리다가 디자인 툴을 다루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렇다 보니 미련이 더 짙어졌다. 그때 좀 더 배웠더라면 지금 내 머릿속에 있는 이미지를 더 잘 구현할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그럴까. 모든 직업이 다 어렵고 가치 있는 일이지만, 유독 디자이너를 향한 동경과 존경심이 좀 더 크다. 극단적으로 내성적이어서 타인과 친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이 잘 들지 않지만, 마음이 맞는 디자이너와는 친하게 지내고 싶다. 때로는 그 세계를 엿보고 싶기도 하다.

『디자이너의 유학』은 제목 그대로 디자이너의 유학에 관한 책이다. 내가 궁금해하는 세계 속에서도 가장 먼 곳의 이야기다. 유학이라는 것 자체에 로망은 없다. 하지만 유학하는 주체가 디자이너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아직 유학을 다녀온 디자이너를 직접 만난 적이 없어서 그런 걸까. 내가 밟아 보지 못한 땅에서 공부한 디자이너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저자는 먼저 유학 가기 전 학부에서는 무엇을 공부했으며, 사회에 나와서는 어떤 분야의 디자인을 했고, 유학의 필요성은 언제, 왜 느꼈는지 말한다. 유학을 선택하는 것은 단지 해외 대학의 학위를 따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국에서는 할 수 없는 경험을 통해 시야를 확장하고 새로운 기회도 얻기 위해서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뒤이어 유학하기 전 고려해야 할 사항과 준비 과정, 유학생으로 사는 삶과 배움까지 저자 자신이 유학하며 몸소 체험하고 느낀 점들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또한 저자의 해외 대학원 지원서도 수록해서 유학 실용서로써의 면모를 갖췄다. 거기에 저자가 유학한 학교인 RCA뿐만 아니라 다양한 해외 학교에서 공부한 한국인 디자이너들을 인터뷰하여 나라별, 학교별, 개인별로 다종다양한 유학 생활을 실었다. 교수들도 인터뷰하여 학생과 교수의 목소리를 한 권의 책에 담아냈다.

새로운 것을 배우기에 익숙한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만큼 좋은 방법은 없는 것 같다. 낯선 세상에 몸을 던지는 일은 설레면서 두렵다. 아무리 준비해도 예상을 벗어나는 일을 맞닥뜨리게 된다.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럼에도 저자는 디자이너로서 유학의 가치를 역설한다. 후회와 미련 대신 현실적인 로망을 실현하는 일로써의 유학을.

*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나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을 때 하나만 선택하기보다는 어떻게 해야 둘 다 가질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어쩌면 하나를 선택해서 그 길만 좇는 것이 더 쉬운 여정이었을지 모른다. 욕심도 많고, 그만큼 미련도 많기 때문에 무엇을 포기하는 게 항상 쉽지 않았다. 그렇게 여러 가지를 이고, 지고, 끌고 가는 바람에 항상 숨을 헐떡였고 모든 여정이 벅찼다. 혼자 번갈아 가며 시소를 타는 것 같았다. 그래도 욕심 가득하게 손에 다 쥔 채로 살다 보니, 그때 그때 쓸 수 있는 무기와 도구들이 많아져서 좋았다. 그때도, 지금도, 그리고 높은 확률로 앞으로도, 나는 다 하고 싶다. 다 잘하고 싶다.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 P22

"다 거기서 거기니, 도시를 보고 가라."
유학을 준비하며 내가 들었던 가장 인상적인 조언 중의 하나는 석사 과정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비슷하니 살며 경험하고 싶은 도시를 고르라는 조언이었다. 학교 이름보다 도시. 처음에는 의아했지만, 지금은 아마 그것이 가장 현명한 조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결국 유학도 삶이다. - P30

특히나 나는 한국에서 학사 과정을 마치고 석사 유학을 가는 경우였으므로, 수능 점수에 맞춰 전공을 선택하던 한국의 입시 지원과 달리 갑자기 주어진 선택의 무게에 적잖이 당황했다. 성에 차지 않는 학교는 애초에 지원하지 않았고, 만약 지원한 학교 중 아무 데도 합격하지 못한다 해도 굳이 마음에 들지 않는 다른 곳으로 목표를 낮추지 않을 요량이었다. 배움에 대해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선택은 꽤나 무거운 자유였다. 바로 이 자유가 한국 디자인 교육과 유럽 디자인 교육의 차이를 느끼게 되었던 첫 경험이었다. ‘어쩔 수 없이’가 아니라 ‘어째야만 하는’ 선택의 무게를 견디는 것. - P50

한국 사회에서는 미완성작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는 것은 프로페셔널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한국인의 완벽주의는 확실히 외국에서 높이 평가되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유럽의 디자인 교육은 한국식 완벽주의가 작업을 일단 완성함으로써 얻는 경험과 성장을 놓치게 한다고 지적한다. 완벽보다 완성이 나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높은 확률로 대부분 그렇다. - P88

도움을 요청하기 전에 내가 누군가를 도와줄 때의 기분을 되새긴다. 내 시간과 에너지를 희생하며 누군가를 도울 때, 내가 그 사람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깨달을 때의 기분을. 이와 같은 감정을 그들도 분명히 느낄 것이라고 생각하니,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마구마구 도움을 요청하고 싶어졌다.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도움을 청하는 것이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당신이 필요하다고. 당신은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라고 소리 내 말하는 것이다. "도와줘." - P99

한국에서 자란 나는 겸손이 미덕이라고 배웠다. 이는 고맥락 문화의 특징으로 비언어적 신호와 상황이 중요하며, 간접적인 표현이 우선시된다. 그래서 나는 칭찬받을 때면 "아니에요, 아직 멀었어요"와 같은 반응들이 반사적으로 흘러나왔다. 반면 스테파니가 자란 저맥락 문화에서는 직접적인 언어 사용과 명확한 메시지 전달을 중요시한다. 이런 문화 차이는 칭찬을 받아들이는 방식에서 뚜렷이 드러났다. 스테파니의 태도를 보면서 칭찬을 솔직하게 수용함으로써 자신의 성취를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이를 통해 더 큰 자신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 나아가, 그렇게 자신의 가치를 인정함으로써 그 작업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했던 메시지에 더 힘을 실을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 P101

내 작업이 ‘기억’과 ‘추억’, 그리고 ‘보존’에 관한 것이라 나이가 지긋하신 관람객들이 관심을 많이 보였다. 여럿이 내 손을 꼭 잡고 "이런 걸 해 줘서 고마워요"라는 말을 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우리 집 근처에는 등대가 하나 있었는데"라는 말을 시작으로 사라진 건물에 대한 추억을 재잘재잘 이야기하는 할아버지도 있었고, "어렸을 때 우리 집은 아버지가 직접 지으셨지"라면서 어릴 적 살던 집을 구석구석 설명하는 할머니도 있었다. 내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그들을 관통했고, 그것이 꼬리를 물어 다른 이야기를 끌어내고 있었다. 그들의 기억은 어떻게 보존될 것인지 궁금해졌다. - P132

(팽민욱) 스토리텔링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다. 디자인을 통해 나의 이야기를 하는 방법 말이다. 디자인은 단순히 시각적인 표현 방법을 넘어서, 우리의 생각과 메시지를 전달하는 하나의 언어로서 기능한다. 나는 언어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P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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