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카미유 클로델 - 생의 고독을 새긴 조각가
이운진 지음 / 아트북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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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인이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카메라는 무덤덤하게 그녀를 무채색으로 담아냈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에 뒤섞여 있는 듯한 슬픔과 절망과 욕망은 카메라 렌즈의 무정함을 뚫고 나와 사진을 보는 나에게 전달되었다.


이 책의 표지에 자리한 초상의 주인공, 카미유 클로델이다. 카미유는 오귀스트 로댕의 연인으로 더 잘 알려졌지만, 단지 그의 뮤즈만으로 남지는 않으려 했었다. 저자는 온전히 자신으로 남고자 했던 여성 조각가의 들리지 않는 마음에 귀 기울여 그녀의 삶을 포착해냈다. 나는 시인인 저자의 아름답고 함축적인 문장들의 안내를 받으며 그녀의 이야기를 찬찬히 아리게 읽어나갔다.


홀로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일들이 책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아니, 홀로 있었기에 너무나 어려운 일을 감당해야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카미유의 천재성은 벼랑 끝에 간신히 버티고 서 있는 그녀의 손을 잡고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주기는커녕 그녀를 벼랑 아래로 밀어 떨어뜨렸다. 딸이라는 이유로 엄마에게, 여성이라는 이유로 사회에게. 그녀는 내쳐졌다.


카미유는 그 속에서 인정받고자 했다. 한 명의 떳떳한 예술가로 살아내기 위해 애쓰다가 상처받았고, 그 상처를 다시 예술로 승화해냈다. 하지만 그런다고 깊이 팬 상처가 사라지지는 않았던 듯하다. 피해망상은 점점 더 심해졌고, 그녀의 엄마는 그녀를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시켰다. 예술가로서 카미유 클로델의 삶은 자신이 아닌 타인에 의해 막이 내려졌다.


카메라 렌즈까지 꿰뚫어버린 카미유의 슬픔과 절망과 욕망의 삶. 어쩌면 절망이라는 건 욕망이 충족되지 못해서 발현하는 감정이 아닐까, 욕망할 대상조차 없다면 절망할 일도 없지 않을까, 조각을 향한 욕망이 너무나 커서 카미유는 극도의 절망 속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닐까. 정신병원 간호사의 권유도에도 조각을 하지 않았던 건 다시는 파멸에 이르고 싶지 않다는 간절함 때문일지도 모르겠다고 내 마음대로 그녀의 마음을 추측해본다.


알지 못했었던 카미유의 삶을 끝까지 읽고 다시 표지의 카미유와 마주했을 때 그 눈동자에서 그리움과 외로움까지도 보이는 것 같았다. 자신을 보호해주지 않고 내친 가족들을 향한 그리움을 그녀는 죽을 때까지 고이 간직했다. 그녀는 욕망 때문에 절망했고, 욕망 때문에 외로워하고 그리워해야 했다.




*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최초의 숨결과 최후의 한숨 사이에 있는 삶의 모습은 모두 다르고 결국 같다. - P13

채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자신의 욕망을 정확하게 깨닫는 일은 어쩌면 불운이며 어쩌면 행운이고 혹은 둘 다인지도 모른다. 빌뇌브에서 그녀는 미켈란젤로가 되기를 꿈꾸었지만 파리에서 그녀는 그녀 자신이 되고 싶었다. 그저 훌륭한 조각가가 아니라 스스로가 인정하는 위대한 조각가로 남고 싶었다. - P22

어떤 것이든 진실하게 창조된 것은 그것을 만든 사람뿐 아니라 그것을 감상하는 사람의 마음에도 공통된 감정 상태를 만들어낸다. 마치 첫번째 슬픔 같은 것을 나눈 사이처럼. - P71

영혼이 자유롭게 숨 쉬어도 어떤 해악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두려워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믿었다. 그녀는 이미 알았는지 모른다. 자신을 다 소진해서 예술가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진정한 예술을 하는 일과 진정한 인생을 사는 일이 하나이고 같은 것이라는 걸. 그녀의 작품이 그녀 삶의 이야기가 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 P93

자신의 독창성과 천재성을 로댕이라는 이름 아래에서만 이해하려는 사람들의 눈을 씻어주고 싶었다. 여자라는, 제자라는 부당한 차별 없이 당대 남성 예술가들과 동등하게 평가받기를 원했다. 이름난 남자 스승을 두었다는 게 남자 예술가보다는 여자 예술가에게 왜 더 큰 제한이 따르는지 억울할 뿐이었다. - P97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가장 잘 이해해주길 바라는 일이 얼마나 순진한 생각인지. 무심한 사람들을 상대로 싸워야 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지긋지긋한지. 희망을 조금씩 뒤로 미루며 붙잡으려 할 때 얼마나 스산한 기분이 드는지. - P152

1943년10월19일, 카미유 클로델의 사망증명서가 작성되었다. -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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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도시
임우진 지음 / 을유문화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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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학교 부근 상가 옆에는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적어도 한 명은 늘 있다. 흡연자들끼리 정한 동네의 비공식적인 흡연 구역인 셈이다. 구청에서 흡연으로 인해 민원이 많이 발생하니 흡연을 하지 말아 달라는 안내 스티커도 붙였지만 소용없었다. 다들 무시하고 담배를 피운다.


벌금과 같은 강제적 조치를 취하지 않는 이상 그들은 같은 곳에서 계속 담배를 피울 것이며, 민원도 계속 발생하고, 담당 공무원은 반복되는 일에 시달릴 것이다. 만약 조례를 제정해서 꽤 큰 액수의 벌금을 매긴다면 어떨까. 그건 너무 가혹하고 정 없는 거 아니냐고 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유럽에서는 이와 같은 도시 전략이 흔히 사용된다. 일찌감치 다양한 문화의 사람들이 도시에 모여 대중을 이루어서 대중이 양심적으로 행동할 것이라는 기대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유럽이 아닌 한국에서는 도시 시스템이 아니라 개인의 양심에 호소하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아직 인간(대중)을 믿고, 공동체를 중요시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는 것도 집단과 소속감을 강조하는 문화적 맥락에서 보자면 자연스러운 것일 수도 있다. 저자는우리 학교’, ‘우리 가족우리‘we’가 아니라 울타리의 의미를 지닌다는 학자의 주장을 소개한다. 나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우리라는 단어가 우연한 동음이의어가 아니라, 1인칭 복수 대명사로 시작해 울타리라는 의미까지 갖게 된 것은 아닐까. ‘라는 1인칭 단수 대명사의 주체가 우리라고 인식하는 대상들을 자신의 울타리에 들어올 수 있는 범위로 정한 데서 우리(fence)’라는 단어가 유래했다고 하면 말이 꽤 되는 것 같지 않은가. (물론 이건 일개 학부생의 근거 없는 발언이다.)


어쨌든, ‘우리(we)’우리(fence)’ 안에 넣는 행위가 현대 도시에서는 으로 연결되었다. 집단과 소속감이라는 한국인의 심리에서 노래방, 찜질방, PC방과 같은 방이 기인했으며, 이러한 프라이빗한 공간에 나와 같은 공동체의 사람만 들인다는 것이다. 일반론적인 내용이지만, 나라는 개인에 적용했을 때는 맞는 부분도 있고 맞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나는 집단도 소속감도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일반적인 한국인들처럼 남들의 시선을 좋아하지 않고 프라이빗한 공간을 선호한다. , 나는 그 프라이빗한 공간에 혼자 있어야 한다. 한국의 별종인 셈이다.


나는 인간도 잘 안 믿는 진짜 별종이다. 그럼에도 도시 시스템이 문제라는 생각은 못 했었다. 공동체를 그토록 싫어하면서 동시에 공동체 의식을 내면화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나도 결국 한국의 도시에서 나고 자라 도시가 아닌 지역에서 사는 건 꿈도 못 꾸는 거의 완전한 도시 인간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내가 사는 도시가 왜 이런 모습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해한 적이 없으니 말이다.


저자는 오랫동안 외국에서 활동한 건축가로서 한국 도시를 바라보았다. 내가 의문을 품지 않았던 것들에 관해 책이라는 매개를 통해 대신 질문해주고 생활 공간인 도시에 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우리라 불리는 한국의 도시인들이 놓치고 있었던 것은 무엇인지, 도시 시스템에 의해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지 말이다.



서구의 도시 문화는 기본적으로 인간을 신뢰하지 않으며, 항상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대상으로 여긴다는 점을 내가 깨닫게 된 것은 신호등 위치의 차이를 발견한 후 한참이 지난 뒤였다. 양심이나 시민의식 같은 형이상학적 정신문화에는 일말의 기대도 없이, 어차피 대중이란 질서 따위 지키지 않을 것이 분명하니 질서를 ‘지킬 수밖에 없도록’ 유도하기 위해 선제적이고 적극적인 방식으로 도시 전략을 수립해 온 것이다. 그래서 캠페인이나 선도 같은 도덕적이고 인간적인 과정은 낭비로 여겨진다. - P26

건설 방식과 건축 재료가 변하면서 쐐기돌의 존재 이유는 사라졌지만, 사람들의 인식에 일단 각인된 무의식과 기억은 ‘취향’이란 이름으로 아무런 이유 없이 지속됐다. 지금도 고풍스럽게 보이고 싶은 건물의 창문에는 이런 ‘쐐기돌 장식’이 흔하게 쓰이지만, 그런 장식이 왜 남게 되었는지에 대한 속사연에 관심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 P83

사는 문제에서 개인의 버릇과 선호는 ‘옳다, 그르다’로 따져지는 논리의 영역이 아니라, 유아 시절 가족생활에서 체화한 감각적 경험에서 자신도 모르게 만들어진다. 자신과 맞지 않는 공간은 머리가 아닌 몸이 먼저 반응하지만, 아무도 왜 그런지는 자문하지 않는다. 익숙함에 기인한 좋다, 싫다만 있을 뿐이다. - P108

도시는 아무도 ‘도대체 왜, 그리고 누구를 위해’라는 자문을 하지 않는 전대미문의 집단 최면 상태에 빠져 맹목적인 높이 경쟁에 몰두했고, 맨해튼은 서로 너무 밀집해 햇빛도 들지 않는 수천 개의 유리 상자를 보유하게 되었다. 그리고 저층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시민은 자신의 집은 점점 어둡고 황량해진다는 사실은 잊은 채, 길 건너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다른 건물의 꼭대기만 바라보게 되었다. - P171

소위 트렌드에 따라 시시각각 바뀌는 도시 상징들은 도시 공동체의 시간과 기억을 ‘휘발성’으로 변질시켜, 세대가 달라도 서로 같은 장소를 공유하는 것 같은 도시적 경험의 축적을 말살시킨다. 그 많은 서울의 식당 중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맛을 공유하는 곳이 도대체 몇 군데나 될까. 거리를 점령한 회려한 간판은 강렬한 자극을 주며 시민을 집단적 기억상실증으로 이끄는 머릿속 지우개다. - P184

남을 못 들어오게 자기 단지를 막으면, 자신도 남의 단지에 못 들어가는 처지가 된다. 그렇게 도시가 진화하면 결국 자신이 도시에서 지낼 수 있는 곳은 (아마도 잘 가꾸어진) 자기 단지밖에 남지 않는다. 결국 모두가 자신의 단지 속에 ‘갇혀 버리는’ 것이다.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이런 도시의 암울한 미래 시나리오는 지금 당장 내가 얻게 될 분양 이익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멀고 비현실적인 가치일 뿐이다. 공공의 이익은 멀고 모호하지만, 개인의 이득은 쉽고 직관적이다. - P227

자신의 집을 나서면 철저하게 수동적인 ‘객’의 입장으로 하루 종일 누구의 공간도 아닌 공공 공간과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타인의 공간에서만 지내게 된다. 현대인은 갈 곳이 없다. 그나마 내가 마음 편히 시간을 보낼 수 있다고 생각되는 곳은 스마트폰 화면 속뿐이다. 겨우 10여년 만에 대부분의 현대인이 스마트폰 화면 속에 매몰돼 버린 현상이 과연 그만큼 그곳의 세상이 가치 있어서인지, 아니면 이 도시 어디에도 마음 편히 있을 곳이 없어서 그곳으로 ‘떠밀려’ 간 건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다. - P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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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눈 키우는 법 - 우세한 눈이 알려주는 지각, 창조, 학습의 비밀
베티 에드워즈 지음, 안진이 옮김 / 아트북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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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손 엄지와 검지로 약 2cm 정도 되는 삼각형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구멍으로 방문에 걸려 있는 펭귄 그림을 봤다. 왼쪽 눈을 감았을 때는 펭귄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지만, 오른쪽 눈을 감았을 때는 펭귄이 삼각형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 책에 나와 있는 우세한 눈 테스트 방식을 따라 해본 것이다. 테스트 결과 나는 오른눈이 우세했다. 왼손잡이와 오른손잡이처럼 눈 또한 왼눈잡이와 오른눈잡이도 있다는 우세한 눈은 낯선 개념이었다.


신체의 오른쪽은 좌뇌, 왼쪽은 우뇌와 연결된다는 과학 지식은 그래도 꽤 알려진 편이다. 어느 쪽 깍지나 팔짱을 껴서 우세한 뇌를 찾는 법 역시 들어본 적 있다. 눈 역시 마찬가지다. 오른눈이 우세하면 좌뇌가, 왼눈이 우세하면 우뇌가 우세하다. 그런데 나는 깍지를 꼈을 땐 우뇌 우세라는 결과가 나오는데, 팔짱을 끼면 좌뇌 우세라는 결과가 나온다. 눈도 오른눈이 우세하니 깍지만 예외적인 것이다. 그래도 전반적으로 고려해봤을 때 나는 좌뇌가 조금 더 우세한 듯하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눈 중 우세한 눈이 어느 쪽인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화가들은 오래전부터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두 눈의 차이를 포착하여 초상화를 그렸다. 그뿐만 아니라 눈은 고대부터 다양한 문화권에서 다양한 의미의 상징으로 사용됐다. 인간은 눈의 중요성을 알게 모르게 느끼고 그것을 표현해왔던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눈을 중요시하지만, 우세한 눈에 관해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간다. 그러나 저자는 자신의 우세한 눈을 알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양쪽 뇌는 각각 언어적 신호와 비언어적 신호를 받아들이는 역할을 수행한다. 우세한 눈은 그와 연결된 뇌를 발달시킨다. , 한쪽 뇌만 발달하는 것이다. 특히 언어적 역할을 하는 좌뇌가 우뇌보다 더 발달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그리기가 배제된 교육과도 관련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어릴 적에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림을 그린다. 어른들이 말리고 혼내도 그린다. 하지만 대부분 성장 과정에서 그리는 방법을 잃고 만다. 우리네 교육이 그리기와 같이 비언어적인 것보다는 언어 능력을 향상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는 잘 그리고 싶은 욕구를 품고 있는 사람도 많이 있다.


저자는 눈과 뇌와 그리기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그리는 방법 또한 설명한다. 저자가 제시하는 방법을 따라 하면서 읽고 싶었지만, 일단 조금 뒤로 미뤄두기로 했다. 종강하고 반드시 해봐야겠다.




*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미술사 속의 초상화들을 살펴보면 남성 화가들은 인물을 4분의 3 각도로 놓고, 젊은 여성 모델의 덜 우세한 왼쪽 눈(부드럽고, 꿈꾸는 듯하고, 비언어적이고, 도전적이지 않은 눈)이 앞쪽에 위치하도록 하고, 초롱초롱하고 약간 도전적이며 언어와 연관되는 ‘우세한 눈’은 뒤쪽의 4분의 1 영역에 놓아 일부만 보이도록 했다. 이것은 우연일까, 아니면 화가의 바람이 개입된 결과일까? - P62

우리는 보고 이름을 말할 수 있고, 보고 사용할 수 있고, 보고 분류할 수 있고, 보고 탐색할 수 있고, 보고 읽고 쓰고 기록하는 등 현대생활에 요구되는 모든 방법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는 방법들은 주로 언어와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보고 그릴 줄은 모른다. 보고 그리는 것은 다른 종류의 보기이기 때문이다.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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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아르테미시아 - 최초의 여성주의 화가
메리 D. 개러드 지음, 박찬원 옮김 / 아트북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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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가 잘못되었다고, 그러니 바꿔야 한다고 누군가 혼자 떠든다고 해도 세상은 꿈쩍도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지속적인 외침에 또 다른 누군가들이 함께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여기, 아르테미시아』는 먼저 여성 혐오를 좌시하지 않았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뒤에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가 어떤 상황에서 작품 활동을 했으며 누구에게 영향을 받았는지까지 자세하게 설명한다. 그러므로 이 책은 아르테미시아에 관한 연구서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바로크 시기 유럽 페미니즘 역사서라고도 할 수 있다.


아르테미시아가 활동했던 바로크 시기 이탈리아와 유럽에서는 여성 혐오와 이에 대한 여성들의 반론이 맞섰었다. 여성들의 권리 의식은 점점 높아져 갔고, 남성을 뛰어넘는 여성들도 출현했다. 남성들은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들이 누려왔던 권력을 잃게 될까 봐 두려워했다. 그래서 더 극단적인 여성 혐오적 발언을 쏟아내거나, 여성을 추켜세우는 척하면서 교묘하게 여성의 역할을 제한하고자 했다. 하지만 아르테미시아를 포함한 여성들은 계속해서, 어떻게 해서든 이에 굴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아르테미시아는 대표적인 페미니즘 화가이다. 알려진 대로 성폭행 피해자이기도 했다. 자기 뜻이 아닌 아버지의 의도로 성폭행 사건이 재판에 회부됨으로써 자신의 피해 사실이 사회적으로 공개되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것도 아르테미시아의 작품 활동을 막을 수 없었다. 오히려 그는 그림을 통해 세상을 조롱했다.


아르테미시아는 카라바조의 뒤를 잇는 것을 넘어서고자 했다는 측면에서 미술사적으로도 중요한 화가이다. 또한 작품을 통해 반페미니즘적 메시지를 담아냈기에 페미니즘사에서도 비중 있다고 할 수 있다. , 그는 작품의 형식과 내용 측면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냈다. 그것도 그냥 잡은 것이 아니라 매우 뛰어나게 말이다. 그렇기에 미술에 관심이 있지 않더라도 페미니즘을 더 공부하고 싶다면 읽어볼 만한, 읽어봐야 할 책이다.


400여 년 전 유럽 남성들이 펼쳤던 말도 안 되는 여성 혐오적 논리를 지금 대한민국에서 다시 듣는다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듯하다. 하지만 그 시절 그곳에 아르테미시아와 여성들이 있었고, 지금 이곳에 또 다른 여성들이 아르테미시아의 뒤를 잇고 있다. 여기, 여전히 존재하는 아르테미시아의 정신은 차별과 혐오를 넘어서 또 하나의 이야기를 써 내려 갈 것이다.




*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페미니스트들의 글이 초기 근대 유럽의 역사 형성을 도왔다면, 시각예술 역시 그러하다. 그림은 여성을 깎아내리는 관념과 믿음 형성에 일조했다. 판화와 회화는 유럽 전역에 여성에 대한 위험스러운 여성 혐오 생각을 전파했고—악마적인 본성에 죽음을 부르는 유혹적 매력—악명 높은 마녀사냥에 기름을 끼얹기도 했다. 시각적 이미지는 물론 여성에 대한 온순하고 긍정적인 개념도 제시했지만, 아르테미시아 등장 이전에는 뚜렷한 여성 관점에서 젠더 관계에 대한 그림을 보여준 일이 드물었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이 점에서 홀로 우뚝 서 있으며, 그 어떤 근대 이전 예술가들보다도 끊임없이 가부장적 가치에 이의를 제기하며 도전했다. - P10

그는 남성에게 그들이 원하는 것을 줄 수 있었는데, 아르테미시아의 여주인공이 아무리 전복적인 행동을 보여도 남성은 여성의 아름다움을 칭송할 따름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르테미시아는 마음껏 공개적으로 남성 모델을 패러디하면서도 여성에게는 암호로 이야기하며 다른 측면의 매력을 보여줄 수 있었다. 그러한 암호 소통은 남성이 페미니스트 목소리에 귀를 막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 P59

도덕적으로 교훈을 주는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수산나와 장로들의 이야기는 이즈음에 와서는 남성 미술 후원자와 관람자들이 관음증 취향을 발산할 기회로 변질되어 있었다. 죄 없는 수산나가 죽음의 고통 앞에서 자신의 정숙함을 증명한다는 이야기의 논점은 모두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 P77

유디트가 홀로페르네스를 처단한 것은 자신의 민족 공동체를 대신한 정치 행위이지만, 아르테미시아 그림에서의 공동체는 여성이다. 행위의 주체가 남성을 제압하는 강인한 육체의 여성들이었기 때문에 이 그림은 남성 권력에 맞선 여성 저항을 상징하는 은유 단계로 올라선다. - P146

디트로이트 「유디트」에서도 승리의 순간은 아주 짧아 보이지만 그럼에도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 업적을 이룬 여성의 모습은 시간 속에 영구히 남겨졌기 때문이다. 아르테미시아의 유디트는 이렇게 전투를 또다른 개념의 차원으로 가져간다. 탁월하게 강인한 여성이 탁월하게 강인한 남성을 전복시키며 남성적인 세계에 끊임없이 보여준다. 아르테미시아의 말을 빌리자면, "여성이 무엇을 해낼 수 있는지를". - 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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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의 가능성 - 나에게로 돌아오는 그림 독서 여정
조민진 지음 / 아트북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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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쓴 작가는 20여 년 동안 기자로 일하다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하기 위해 퇴사라는 선택지를 집어들었다. 작가는 어떤 문제를 옳고 그름이라는 이분법적 기준에 따라 나누고 판단하는 글 말고 답을 정해놓지 않음으로써 다양한 생각이 피어날 수 있게 하는 글을 쓰는 데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쏟기로 한 것이다.


『내일의 가능성』은 그가 이런 선택을 한 뒤 낸 첫 책이다. 작가는 성장과, 성장 과정 중의 추억과, 성장 과정 중의 아픔과, 그럼에도 결국 성장해내고야 마는 인간에 관해 이야기한다. 누구나 적어도 한 번쯤 고민하게 되는 지점이기 때문에 어찌 보면 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중심에 놓여 있는 책과 미술이 작가 고유의 이야기와 조화롭게 뒤섞이면서 보편적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성장 서사가 탄생했다.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중심에는 그가 좋아하는 책과 미술이 있다. 그리고 그가 선택한 책과 미술 작품은 자신만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이야기가 중첩된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나의 이야기도 슬며시 중첩시켜 보았다. 텍스트에 새로운 층위가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추가되어 갔다.


가령 이런 식으로 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을 때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하루키가 천재 같이 느껴져 감탄했었고, 절망스럽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문학도의 길을 걷기로 했다. 작가는 그보다는 기자로서 하루키가 ‘기자와 작가의 차이’에 관해 쓴 부분에 주목했다. 그리고 자신의 새로운 글쓰기와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을 연결했다. 작가가 주목한 대목은 내 기억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고등학생이었던 내가 하루키의 에세이에 새로운 층위를 부여했었고, 작가는 자신의 시각에서 또 다른 층위를 부여했으며, 하루키의 책에 관해 이야기한 작가의 글에 나는 또 새로운 층위를 부여했다.


인간에 관해 이야기하는 예술은 사람들 사이를 돌고 돌며, 원작자가 부여한 의미에 국한되어 존재하지 않고 새로운 이야기를 계속해서 덧입는다. 물론 그 이야기들은 비록 널리 알려지지 않고 부여한 사람 즉, 그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만 존재한다. 하지만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이야기는 그에게 내일을 이야기해준다. 책과 미술은 작가에게도 그러했듯이 나에게도 추억을 줬고, 내 아픔을 건드리기도 했지만 종내에는 상처를 딛고 나아갈 힘을 준 것처럼 말이다.




*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몽테뉴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나답게 되는 법을 아는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우리는 거듭 자신을 알아가며, 늙어가고, 결국 죽음을 맞는다. 나답게 사는 일이 중요하고 위대한 까닭은 내가 없다면 결국 모든 것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 P28

때로는 세상 속에 있어도 홀로 떨어져 있는 것 같다. 인간이 고독한 존재라 그런가보다. 여행은 고독을 덜어보려거나 더욱 고독해지려는 시도다. 내가 영화 「바그다드 카페」를 좋아하고, 호퍼의 그림을 찾아보고, 비 내리던 런던의 카페를 기억하는 것도 고독하기 때문이다. 미루어 짐작건대, 돌아보면 인생은 결국 혼자 한 여행일 것이다. - P36

아오이와 준셰이는 주저 없이 약속했지만, 서로가 약속을 지킬 거라고 확신하진 않았다. 약속은 그저 각자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약속이 꼭 지켜져야 의미를 갖는 건 아니다. 약속하는 순간의 믿음, 사는 동안 잊히지 않는 말, 떠올릴 때 느끼는 아련함 따위가 약속을 약속답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아오이와 쥰세이는 약속대로 만났지만 만나지 못했어도 그 나름의 의미가 있었으리라. 잊지 않고 서로를 오랫동안 기억했으니까. 혹시 아는가. 당신도 누군가의 가슴속에 ‘오래된 약속’으로 머물고 있을지. - P72

이제는 방향을 바꿀 때라는 마음의 소리가 들렸다. 왜 늘 멈추지 않고 계속하는 것만이 좋은 답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만두는 게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거라고, 그만두는 건 자아 발견의 과정의 일부이며 방향을 바꿀 힘이 필요한 일이라고 설파하는 대목을 읽는데 눈물을 쏟을 뻔했다. 이미 그린 그림을 버리기 아까워하기보다 새롭게 또다른 그림을 그릴 용기도 필요하다. 기왕 레이트 블루머가 되기로 했다면 말이다. -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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