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아르테미시아 - 최초의 여성주의 화가
메리 D. 개러드 지음, 박찬원 옮김 / 아트북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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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가 잘못되었다고, 그러니 바꿔야 한다고 누군가 혼자 떠든다고 해도 세상은 꿈쩍도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지속적인 외침에 또 다른 누군가들이 함께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여기, 아르테미시아』는 먼저 여성 혐오를 좌시하지 않았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뒤에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가 어떤 상황에서 작품 활동을 했으며 누구에게 영향을 받았는지까지 자세하게 설명한다. 그러므로 이 책은 아르테미시아에 관한 연구서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바로크 시기 유럽 페미니즘 역사서라고도 할 수 있다.


아르테미시아가 활동했던 바로크 시기 이탈리아와 유럽에서는 여성 혐오와 이에 대한 여성들의 반론이 맞섰었다. 여성들의 권리 의식은 점점 높아져 갔고, 남성을 뛰어넘는 여성들도 출현했다. 남성들은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들이 누려왔던 권력을 잃게 될까 봐 두려워했다. 그래서 더 극단적인 여성 혐오적 발언을 쏟아내거나, 여성을 추켜세우는 척하면서 교묘하게 여성의 역할을 제한하고자 했다. 하지만 아르테미시아를 포함한 여성들은 계속해서, 어떻게 해서든 이에 굴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아르테미시아는 대표적인 페미니즘 화가이다. 알려진 대로 성폭행 피해자이기도 했다. 자기 뜻이 아닌 아버지의 의도로 성폭행 사건이 재판에 회부됨으로써 자신의 피해 사실이 사회적으로 공개되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것도 아르테미시아의 작품 활동을 막을 수 없었다. 오히려 그는 그림을 통해 세상을 조롱했다.


아르테미시아는 카라바조의 뒤를 잇는 것을 넘어서고자 했다는 측면에서 미술사적으로도 중요한 화가이다. 또한 작품을 통해 반페미니즘적 메시지를 담아냈기에 페미니즘사에서도 비중 있다고 할 수 있다. , 그는 작품의 형식과 내용 측면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냈다. 그것도 그냥 잡은 것이 아니라 매우 뛰어나게 말이다. 그렇기에 미술에 관심이 있지 않더라도 페미니즘을 더 공부하고 싶다면 읽어볼 만한, 읽어봐야 할 책이다.


400여 년 전 유럽 남성들이 펼쳤던 말도 안 되는 여성 혐오적 논리를 지금 대한민국에서 다시 듣는다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듯하다. 하지만 그 시절 그곳에 아르테미시아와 여성들이 있었고, 지금 이곳에 또 다른 여성들이 아르테미시아의 뒤를 잇고 있다. 여기, 여전히 존재하는 아르테미시아의 정신은 차별과 혐오를 넘어서 또 하나의 이야기를 써 내려 갈 것이다.




*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페미니스트들의 글이 초기 근대 유럽의 역사 형성을 도왔다면, 시각예술 역시 그러하다. 그림은 여성을 깎아내리는 관념과 믿음 형성에 일조했다. 판화와 회화는 유럽 전역에 여성에 대한 위험스러운 여성 혐오 생각을 전파했고—악마적인 본성에 죽음을 부르는 유혹적 매력—악명 높은 마녀사냥에 기름을 끼얹기도 했다. 시각적 이미지는 물론 여성에 대한 온순하고 긍정적인 개념도 제시했지만, 아르테미시아 등장 이전에는 뚜렷한 여성 관점에서 젠더 관계에 대한 그림을 보여준 일이 드물었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이 점에서 홀로 우뚝 서 있으며, 그 어떤 근대 이전 예술가들보다도 끊임없이 가부장적 가치에 이의를 제기하며 도전했다. - P10

그는 남성에게 그들이 원하는 것을 줄 수 있었는데, 아르테미시아의 여주인공이 아무리 전복적인 행동을 보여도 남성은 여성의 아름다움을 칭송할 따름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르테미시아는 마음껏 공개적으로 남성 모델을 패러디하면서도 여성에게는 암호로 이야기하며 다른 측면의 매력을 보여줄 수 있었다. 그러한 암호 소통은 남성이 페미니스트 목소리에 귀를 막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 P59

도덕적으로 교훈을 주는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수산나와 장로들의 이야기는 이즈음에 와서는 남성 미술 후원자와 관람자들이 관음증 취향을 발산할 기회로 변질되어 있었다. 죄 없는 수산나가 죽음의 고통 앞에서 자신의 정숙함을 증명한다는 이야기의 논점은 모두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 P77

유디트가 홀로페르네스를 처단한 것은 자신의 민족 공동체를 대신한 정치 행위이지만, 아르테미시아 그림에서의 공동체는 여성이다. 행위의 주체가 남성을 제압하는 강인한 육체의 여성들이었기 때문에 이 그림은 남성 권력에 맞선 여성 저항을 상징하는 은유 단계로 올라선다. - P146

디트로이트 「유디트」에서도 승리의 순간은 아주 짧아 보이지만 그럼에도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 업적을 이룬 여성의 모습은 시간 속에 영구히 남겨졌기 때문이다. 아르테미시아의 유디트는 이렇게 전투를 또다른 개념의 차원으로 가져간다. 탁월하게 강인한 여성이 탁월하게 강인한 남성을 전복시키며 남성적인 세계에 끊임없이 보여준다. 아르테미시아의 말을 빌리자면, "여성이 무엇을 해낼 수 있는지를". - 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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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의 가능성 - 나에게로 돌아오는 그림 독서 여정
조민진 지음 / 아트북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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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쓴 작가는 20여 년 동안 기자로 일하다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하기 위해 퇴사라는 선택지를 집어들었다. 작가는 어떤 문제를 옳고 그름이라는 이분법적 기준에 따라 나누고 판단하는 글 말고 답을 정해놓지 않음으로써 다양한 생각이 피어날 수 있게 하는 글을 쓰는 데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쏟기로 한 것이다.


『내일의 가능성』은 그가 이런 선택을 한 뒤 낸 첫 책이다. 작가는 성장과, 성장 과정 중의 추억과, 성장 과정 중의 아픔과, 그럼에도 결국 성장해내고야 마는 인간에 관해 이야기한다. 누구나 적어도 한 번쯤 고민하게 되는 지점이기 때문에 어찌 보면 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중심에 놓여 있는 책과 미술이 작가 고유의 이야기와 조화롭게 뒤섞이면서 보편적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성장 서사가 탄생했다.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중심에는 그가 좋아하는 책과 미술이 있다. 그리고 그가 선택한 책과 미술 작품은 자신만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이야기가 중첩된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나의 이야기도 슬며시 중첩시켜 보았다. 텍스트에 새로운 층위가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추가되어 갔다.


가령 이런 식으로 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을 때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하루키가 천재 같이 느껴져 감탄했었고, 절망스럽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문학도의 길을 걷기로 했다. 작가는 그보다는 기자로서 하루키가 ‘기자와 작가의 차이’에 관해 쓴 부분에 주목했다. 그리고 자신의 새로운 글쓰기와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을 연결했다. 작가가 주목한 대목은 내 기억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고등학생이었던 내가 하루키의 에세이에 새로운 층위를 부여했었고, 작가는 자신의 시각에서 또 다른 층위를 부여했으며, 하루키의 책에 관해 이야기한 작가의 글에 나는 또 새로운 층위를 부여했다.


인간에 관해 이야기하는 예술은 사람들 사이를 돌고 돌며, 원작자가 부여한 의미에 국한되어 존재하지 않고 새로운 이야기를 계속해서 덧입는다. 물론 그 이야기들은 비록 널리 알려지지 않고 부여한 사람 즉, 그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만 존재한다. 하지만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이야기는 그에게 내일을 이야기해준다. 책과 미술은 작가에게도 그러했듯이 나에게도 추억을 줬고, 내 아픔을 건드리기도 했지만 종내에는 상처를 딛고 나아갈 힘을 준 것처럼 말이다.




*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몽테뉴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나답게 되는 법을 아는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우리는 거듭 자신을 알아가며, 늙어가고, 결국 죽음을 맞는다. 나답게 사는 일이 중요하고 위대한 까닭은 내가 없다면 결국 모든 것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 P28

때로는 세상 속에 있어도 홀로 떨어져 있는 것 같다. 인간이 고독한 존재라 그런가보다. 여행은 고독을 덜어보려거나 더욱 고독해지려는 시도다. 내가 영화 「바그다드 카페」를 좋아하고, 호퍼의 그림을 찾아보고, 비 내리던 런던의 카페를 기억하는 것도 고독하기 때문이다. 미루어 짐작건대, 돌아보면 인생은 결국 혼자 한 여행일 것이다. - P36

아오이와 준셰이는 주저 없이 약속했지만, 서로가 약속을 지킬 거라고 확신하진 않았다. 약속은 그저 각자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약속이 꼭 지켜져야 의미를 갖는 건 아니다. 약속하는 순간의 믿음, 사는 동안 잊히지 않는 말, 떠올릴 때 느끼는 아련함 따위가 약속을 약속답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아오이와 쥰세이는 약속대로 만났지만 만나지 못했어도 그 나름의 의미가 있었으리라. 잊지 않고 서로를 오랫동안 기억했으니까. 혹시 아는가. 당신도 누군가의 가슴속에 ‘오래된 약속’으로 머물고 있을지. - P72

이제는 방향을 바꿀 때라는 마음의 소리가 들렸다. 왜 늘 멈추지 않고 계속하는 것만이 좋은 답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만두는 게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거라고, 그만두는 건 자아 발견의 과정의 일부이며 방향을 바꿀 힘이 필요한 일이라고 설파하는 대목을 읽는데 눈물을 쏟을 뻔했다. 이미 그린 그림을 버리기 아까워하기보다 새롭게 또다른 그림을 그릴 용기도 필요하다. 기왕 레이트 블루머가 되기로 했다면 말이다. -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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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방 - 나를 기다리는 미술
이은화 지음 / 아트북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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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를 보고 나면 몸은 힘들지만 마음은 은은한 행복으로 가득 찬다.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와 심리적 피로가 잠시나마 저 멀리 물러나 나를 괴롭히지 못한다. 미술은 나에게 정신적 쉼터인 셈이다. 하지만 시국도 시국인데다가 복학까지 해서 어딘가를 가기 힘들어졌다. 전시에 대한 갈증이 커지던 차에 출판사에서 이 책을 보내주셨다.


추상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바실리 칸딘스키보다 먼저 추상화를 그리기 시작했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미술사에서 이름이 지워진 힐마 아프 클린트, 그녀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리고 마치 애니메이션 스틸컷처럼 느껴지기도 할 만큼 독창적인 화풍을 구사한 앙리 루소와 고흐, 마네 등 유명한 이름들도 거쳐서, 조지 프레더릭 와츠의 희망을 주는 그림으로 끝이 난다.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유명한 미술가, 미술사에서 비중 있게 다뤄지지는 못하지만 좋은 작품을 남긴 미술가, 현재 활동하고 있는 미술가까지. 저자는 특정 시대나 사조에 국한하지 않고 다양한 작품을 독자에게 소개한다.


알지 못했던 새로운 취향을 찾을 수도 있고, 무심코 지나쳤던 명화의 뒷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었다.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의 〈회색과 검은색의 배열 제1〉은 꽤 오랜 시간 내 카톡 프로필 이미지로 사용했던 작품이라 마주쳤을 때 많이 반갑기도 했지만, 동시에 작품의 의미도 모르고 프로필에 걸어놓았던 게 조금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유디트 그림은 워낙 유명해서 여기저기서 자주 봤었다. 하지만 성폭행에 대한 복수인 줄은 몰랐다. 악과 부조리에 굴하지 않고 가해자를 평생 가해자로 기억되게 만든 화가로서의 아이디어와 용기가 멋있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여성으로서 그런 선택을 한 젠틸레스키에게 감사하다.


*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역사에서 ‘최초’는 중요하다. 최초로 이룬 자들만이 기록되기 때문이다. 아프 클린트가 칸딘스키보다 5년 앞서 추상화를 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서양미술사는 새로 쓰여야할 것 같다. 최초의 추상화가는 칸딘스키가 아닌 아프 클린트였으며, 그림을 이젤이 아닌 바닥에 놓고 그린 혁신적 시도 역시 잭슨 폴록보다 최소 40년은 앞섰다고. (「힐마 아프 클린트」) - P17

감상자를 혼란에 빠뜨리는 이 마법 같은 그림은 우리 눈의 한계뿐 아니라 인식의 한계를 재고하게 만든다. 눈에 보이는 게 진짜가 아닐 수 있다고 경고하는 것이다. 어쩌면 화가는 그림의 뒷면을 통해 진실은 언제나 현상의 이면에 감춰져 있으니 통찰의 눈을 길러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진실을 알려고 하기보다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 하는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많으니까. (「코르넬리스 N. 헤이스브레흐츠」) - P20

이 그림 속 유디트의 얼굴은 누가 봐도 젠틸레스키의 자화상이다. 그렇다면 살해당하는 적장은 강간범 타시일 것이다. 유디트는 적장인 홀로페르네스에게 몸을 바치는 척 유혹한 후 그의 목을 베어 민족을 구한 이스라엘의 영웅이다. 젠틸레스키는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에 이 주제를 처음 그리기 시작했고, 몇 년 후에도 여러 버전으로 반복해 그렸다. 시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끔찍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자신의 상처와 타시의 범죄 사실을 그렇게 해서라도 지속적으로 세상에 알린 것은 아니었을까.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 P124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라고 한다면 전 세계 미술관에서 퇴출당할 명화들이 얼마나 많겠느냐고 반문하는 이도 있을 테다. 그러나 설령 논쟁이 되더라도 과거의 작품을 현재의 관점으로 다시 바라보고 재평가하려던 미술관의 시도는 분명히 유의미하다. 역사 속 사건이나 인물이 현재에 재평가되듯, 미술가나 작품도 사회적 변화에 따라 재조명되거나 재평가받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 P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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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일가 - 교토 로쿠요샤, 3대를 이어 사랑받는 카페
가바야마 사토루 지음, 임윤정 옮김 / 앨리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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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나 차 등의 음료를 마시고, 간단한 음식도 먹으면서, 친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거나, 홀로 사색의 시간을 갖거나, 그 외 목적으로도 있을 수 있는 곳. 사람들이 카페를 찾는 이유는 이토록 다양하고, 그만큼 수요도 많다.


나는 주로 친구와 전시를 보고 나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카페에 간다. 다른 경우에는 코로나 때문에 웬만하면 테이크아웃을 하는 편이다. 커피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음료는 늘 핫초코나 아이스초코 혹은 초코 라테를 선택한다. 같은 이름으로 판매되는 메뉴이지만 가게마다 맛이 전부 다르다. 끝맛이 달거나, 물이 많이 들어가 초콜릿 맛이 약하거나, 일반적으로는 나지 않는 맛이 느껴지는 등 맛이 없는 가게도 꽤 있다. 단순해 보이는 핫초코도 맛을 제대로 내는 게 쉬운 일은 아닌 듯하다. 그렇다면 커피는 더더욱 어려울 것이다.


오쿠노가 사람들은 커피와 카페를 향한 열정으로 로쿠요샤를 운영해왔다. 그리고 로쿠요샤의 창업자 미노루는 아들 오사무가 로쿠요샤만의 커피 맛을 만들어내기까지 묵묵히 기다려줬다. 처음에는 매상이 낮았음에도 그를 책망하거나 닦달하지 않았다. 어쩌면 미노루 자신도 장인 정신을 지니고 있어서 커피를 향한 오사무의 진심을 이해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지 않았나 싶다.


로쿠요샤가 7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영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가업을 잇는 일본의 전통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로쿠요샤를 지키고자 하는 오쿠노가 삼대의 마음과 그 분위기 속에서 서로가 서로의 일을 지지해준 것도 꽤나 큰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워낙 다사다난하면서 감동도 있어서 영화로 만들어져도 재밌을 것 같다.




*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고베항에 도착하자마자, 노포 찻집 고베 니시무라 커피점 나카야마테 본점으로 뛰어들어갔다. 오랜만에 커피다운 커피를 마시고 오사무는 겨우 한숨 돌린 기분이 들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맛있는 커피를 찾아 헤매는 것은 찻집 아들로 태어난 성정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 P98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세상에서, 가능한 한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상품을 만들어 제공한다. 자기 실력 이상의 일을 하려고 애쓰지 않고, 가족이 먹고살 수 있는 정도만큼의 벌이면 된다. 찻집의 마스터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그런 삶을 살고 싶다. -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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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었는가? - 50주년 기념 에디션
린다 노클린 지음, 이주은 옮김 / 아트북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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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계의 제인 오스틴, 버지니아 울프와 같은 예술가가 왜 미술계에는 없었을까. 서양미술사를 공부하면서 스스로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그럴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질문을 저자는 50년 전에 던져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파문은 계속 퍼져나가 지금의 나에게까지 도달했다.

 

시대마다 예술가에게 요구하는 것이 조금씩 달랐다. 그것에 부응하거나 반발하기 위해서는 일단 그 제도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과거에는 여성이 제대로 된 미술 교육을 받는 것이 불가능했다. 혹은 가능한 것처럼 꾸며놓았지만 실제로 정말 중요한 부분은 도덕성을 운운하며 가르치지 않았다. 그 도덕성은 여성에게만 적용되었으며 남성은 그로부터 자유로웠다.

 

가스라이팅은 개인이 개인에게뿐만 아니라 사회가 개인에게 행할 수도 있는 듯하다. 권력을 가진 집단은 손에 쥐고 있는 것을 잃지 않기 위해 모두가 당연히 누려 마땅한 것을 자신들만의 특권으로 바꿨다. 그리고 특권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을 제한하기 위해 일종의 사회적 규칙을 만들어냈다. 규칙에는 도덕성, 예절 등의 이유가 붙어 있기 때문에 그 규칙을 지켜야 하는 사람이 어길 경우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 기득권층이 가하는 가스라이팅은 피해자들이 이중 잣대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게 만든다. 이 일이 과거 미술계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전하영 작가님의 「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도 떠올랐다. 남성 예술가들은 여성이 자신들의 뮤즈로 남길 원했지만, 여성은 스스로 예술가가 되기를 꿈꿨고 마침내 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여성을 구속하던 여성성과 남성성이 예술계 곳곳에 남아 있다. 부당한 특권은 완전한 보편적 권리로 바뀌어야 한다. 그 누구도 사회 구조로 인해 예술적 재능을 펼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촘촘한 논리 속에 명문장들이 제자리에 쏙쏙 박혀 있다. 정말 잘 쓰인 글이라는 생각이 들어 읽는 내내 감탄했다. 모두가 일독했으면 좋겠다.

 

 

 

*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의사소통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우리 시대에는, 사실 ‘문제’란 권력자의 비양심적인 생각을 합리화하기 위해 순식간에 만들어진다. 가령 베트남과 캄보디아에 대해 제기되는 문제를 미국인들은 ‘동아시아 문제’라고 부르겠지만, 동아시아인들에게는 ‘미국 문제’라고 해야 더 현실적으로 들릴 것이다. ‘빈곤 문제’라고 불리는 것은 소위 도시 빈민가나 시골 황무지의 거주자라면 ‘부자 문제’라고 해야 더 직접적으로 와닿을지도 모른다. 백인의 문제는 반대 방향으로 틀어져 흑인의 문제가 되고, 이와 같은 역 논리로 인해 우리의 현재 상태는 ‘여성 문제’로 둔갑하고 만다. - P32

여성의 경우는 다른 억압된 집단이나 계급집단과 달리 평등의 문제가 좀더 복잡하다. 왜냐하면 밀이 예리하게 지적했듯 남성은 그럴 자격도 없으면서 여성에게 복종을 원할 뿐 아니라 애정까지 요구하기 때문이다. 결국 여성은 남성중심사회가 내면적으로 요구하는 것들로 인해, 그리고 그 사회가 제공하는 과다한 물질적 재화와 안락 때문에 종종 취약해진다. 중산층 여성이라면 단순히 속박당하는 정도에 그치는 게 아니라 잃을 게 훨씬 더 많다. - P35

작은 황금 고깃덩어리—천재성—는 여성의 영혼에는 빠져 있듯, 귀족 옷을 입은 사람에게도 결핍되었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천재와 재능의 문제라기보다는 귀족과 여성에게 주어진 요구와 기대—이를테면 자신의 사회적 기능을 위해 필수적인 시간을 바쳐야 하거나 또는 반드시 요구되는 활동들—가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로 인해 상류층 남성과 일반 여성이 전문가로서 미술 제작에만 전적으로 전념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을뿐더러 정말로 생각조차 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 P43

19세기처럼 지금도 여성이 평생 아마추어주의를 고수하며 어떤 것에도 자신의 삶을 바치지 않으면서 예술을 속물근성과 우아함을 강조할 수 있는 취미로만 여기는 태도는 ‘진짜’ 일에 종사하는 성공적이고 전문적인 남자의 경멸을 사는 이유가 되고 있다. 남편은 확실하게 공정한 태도로 자기 아내의 예술활동이 진지하지 않다고 지적할 수 있다. 이러한 남성의 경우, 여성의 ‘진정한’ 일은 직간접적으로 가족에게 하는 봉사뿐이다. 여성이 다른 일에 관심을 쏟으면 기분전환용이거나 이기적인 것, 병적인 자아도취, 또는 극단적으로 여성성이 거세된 상태라고 여긴다. 속물근성과 경솔한 생각이 상호 간에 힘을 실으며 만드는 악순환의 고리다. - P61

심지어 이 두 뛰어난 예술가들(중략)의 경우에도, 내면에서 들리는 여성의 신비스러운 목소리로 인해 예술가로서 완전히 자아도취 하지 못하고 여성으로서 죄책감을 느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런 여성성의 신화라는 목소리는 내적 확신을 흐리고 뒤엎어버리기도 한다. 내적 확신이란 예술 분야에서 가장 고상하거나 혁신적인 작품을 만들 때 요구되는 도덕적이고 미학적인 절대 기준과 자기결정력을 말한다. - P83

‘위대한’이라는 단어는 높은 중요성을 가진 예술을 칭하는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식이겠지만, 내가 보기엔 애매함과 신비화의 위험을 무릅써야 할 비전문적 단어이기도 하다. ‘위대한’ 혹은 ‘천재’라는 용어를 미켈란젤로에게도 쓰고 뒤샹에게도 쓴다면 어떻게 그 두 미술가의 특별한 자질이나 장점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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