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의 장례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5
천희란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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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스스로 말미암기. , 스스로 자기 존재에 관한 원인과 이유가 되기.

표준국어대사전은 이를 조금 더 멋들어지게 풀어 썼다.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라고 말이다. 나와 같은 한국어 화자들은 이러한 상태를 자유(自由)’라는 두 어절짜리 한자어로 너무나 쉽게 축약해 말한다. 그러고는 쉽게 입 밖으로 내뱉지만, 말소리라는 게 볼 수 있는 형태로 존재하지 못하듯이 자유도 눈에 보이지 않아서 과연 실제로 존재하는 게 맞는지 의문스럽기도 하다.


어쨌든 자유는 그 자체만으로도 매력적이라는 건 틀림 없는 것 같다. 여기저기서 자유라는 단어가 흔히 들려오니 말이다. K의 장례』에 등장하는 세 주인공도 자유를 갈망한다. 서로 다른 형태의 자유 세 가지가 뒤얽혀 충돌한다. 그 중심에는 K의 죽음이 자리한다.


K는 두 번이나 죽었다. 첫 번째 죽음은 사회적으로 너무나 잘 알려져서 두 번째 죽음에 관해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의 비밀을 지켜준 사람은 그와 인생을 맞바꾼 유령 작가 희정이다. 단조로운 삶을 살던 희정은 극적인 사건을 자기 삶에 받아들이기로 한다. K는 자신을 없애고 희정의 뒤에 숨음으로써 자유를 찾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의 자유는 자기가 책임져야 하는 것들을 외면했기 때문에 실현될 수 있었던 듯하다.


인물들은 자유를 여러 번 언급한다. 무엇과 맞바꾸고 무언가를 담보로 한 자유가 맨 먼저 등장한다. K가 자유를 찾은 대가로 희정과 승미는 자유를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싶었다. 희정은 자신의 선택으로 유령 작가가 되었지만 자유롭지 못하고, 승미는 부친인 K를 문학적 아버지로 여기지 않지만 희정의 소설과 같이 언급됨으로써 결국 K와 문학적으로 한데 얽히고 말았으니 말이다.


K는 사전적 정의에 부합하는 자유를 얻은 듯 보인다. 하지만 K의 자유와 같은 게 정말 자유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을까. 소설에서 K의 목소리는 독자에게 직접적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첫 번째 장과 두 번째 장은 각각 희정과 승미가 일인칭 주인공으로서 자기와 K의 이야기를 한다. 마지막 세 번째 장은 삼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서술돼 있다. , K는 타인이라는 한 겹의 막을 통과해 전해진다.


희정과 승미는 이야기한다. K의 꼭두각시가 되길 자처한 한 명과, K의 딸이라는 이름표를 떼기 위해 몸부림친 한 명이. 그들은 부자유 속에서 자유를 고찰했다. 그들이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K라는 사람은 그들의 존재 원인이 되었었다. 어찌 됐든 K는 죽었고, 그들은 남았다. 그들을 기묘하게 묶었던 끈은 사라졌다. 이제 그들만 남았다.


망자를 떠나보내는 것은 산 자의, 절대적으로 산 자의 몫이고, 그리움과 슬픔의 자리에 세상에 없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을 가져다 놓는 것 역시 산 자의 마음이다. - P19

말해서는 안 된다는 금기가 말해질 수 있다는 자유 속에 방목되어 있는 것, 그것이 사람들을 비밀의 함정에 연루시킨다. 나는 가망 없는 비밀의 본색을, 비밀의 유일한 공모자가 사라지고 난 뒤에야 깨닫게 된 것이다. - P36

이상하다. 능동적인 삶을 살아갈 의지가 없었음에도 그가 준 선택의 권한이 내게 자유를 준다고 믿었다는 사실이. - P41

그런 순간에 나는 내게 현실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를 떠올리고는 했다. 동시에 나의 고장나버린 어떤 부위가 내게 글을 쓰도록 만들었다는 사실을 되뇌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속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속지 않는다면 영원히 설득할 수 없는 미로였다. - P72

죽음은, 이별은, 소멸은 간단히 추억으로 교환된다. 갈등과 분노는 안타까움과 위무의 기도에 침윤된다. 소멸한 자의 슬픔과 번뇌에 목소리가 주어진다. 죽은 자가 죽기 전에 쌓은 악덕에 가장 설득력 있는 서사가 부여되고, 그의 죄는 그와 함께 소멸한다. 남은 자들의 고통은 재갈을 물고 신음한다. 책임을 묻거나 싸울 수 없고, 소멸을 되돌릴 수도 없어서, 영원히 해소될 수 없는 통증 같은 것을 귀중한 보물처럼 안고 살아가야 한다. 산 자들의 세계는, 그렇게 산 자들의 평화를 지속한다. - P73

무엇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결심하면 그것에 대한 생각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내가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어떤 사건을 자연스레 잊는다면, 사건이 나를 지배할 만한 힘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 불쑥 떠오르는 기억이라 해도 때때로 그것을 기억하는 지신을 용서할 수 있다면, 나는 그 기억과 내 인생 안에서 동거하는 중이다. 내가 끊임없이 생각을 멈추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면, 그것은 분명 나를 포획하고 있는 법이다. K, 그는 나의 아버지이며, 나를 지배하고 내가 벗어날 수 없는 이름이다. - P109

아무리 머릿속에서 생각을 굴려보아도 문장이 완성이 되고 나서야 자신이 생각하는 대상의 정체가 밝혀진다는 걸, 그게 자신이 작가라는 직업을 선택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라는 것을 승미는 다시 한 번 경험했다. 어떤 혼란은 문장이라는 새로운 주거지 안에서 무너지기도 한다는 것을. -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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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에디터스 컬렉션 15
메리 셸리 / 문예출판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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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골이 좌측 상단에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생명을 창조해내는 데 성공한 프랑켄슈타인과 이제 막 눈을 뜬 그의 피조물을. (95페이지 삽화. 위 이미지.) 죽음의 이미지를 환기하여 삶의 덧없음을 나타나고자 했던 과거의 화가들이 떠올랐다. 욕망의 결과에 대한 경고장처럼 보이기도 했다.


프랑켄슈타인은 고향에서 가족들과 행복한 삶을 사는 것 그 이상을 욕망했다. 그는 생명의 기원을 밝히고 싶어 했고 그의 지독한 욕망이 괴물을 만들어냈다. 정확하게는 사람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사람보다 훨씬 신체적 능력이 월등하고 똑똑하나 흉측하게 생긴 생명체를.


눈을 뜨자마자 창조주에게 버려지고 이름 없이 그저 괴물이라고 명명되어버린 괴물은 자신조차 놀랄 정도로 겉모습이 흉측하지만 마음만큼은 순수했다고 할 수 있다. ‘괴물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데서 행복을 느끼는 존재였다. 하지만 눈앞에 나타난 괴물을 반기는 인간은 아무도 없었다. 누구도 괴물의 겉모습만 보고 마음을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모두가 그렇듯이 괴물도 타인에게 사랑받고 싶어 했지만 아무도, 심지어 창조주마저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괴물은 아무리 노력해도 사랑받고 싶다는 보편적인 욕망을 충족할 수 없었다. 창조주 프랑켄슈타인에게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곁에 있는 것과 괴물의 처지가 대조되어 더욱 처량하게 느껴졌다.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을 자신과 동등한 존재로 여기지 않으면서도 괴물의 비범한 능력은 두려워했다. 마치 백인이 흑인의 뛰어난 신체 능력을 두려워하면서 그들을 노예로 삼았던 것처럼 말이다.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을 비인간으로, 사라져야 할 대상으로 여겼다. 그는 자신이 괴물을 창조한 것을 후회했지만 책임질 생각은 하지 않았다. 끝까지 자기 잘못을 자각하지 못했다. 오히려 괴물은 자기 잘못을 인정했으니 그는 자신이 괴물이라고 여기는 존재보다도 못한 인간이 된 셈이다. 심지어 뒤로 갈수록 괴물보다 비이성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괴물은 타인에 의해 비인간이 되었다. 그러니 괴물은 괴물이라고 불려서 정말로 괴물이 된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선만 사용한 그림체가 작품의 기괴한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소설에는 언급되지 않은 요소가 간혹 그림에는 있기도 했는데, 일러스트레이터의 이러한 상상력 덕분에 소설을 더 생생하게 읽을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게다가, 표지가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생명의 원인을 밝히려면 우선 죽음을 수단으로 이용해야만 한다. - P82

삶은, 비록 고뇌 덩어리라고 해도 내겐 소중한 것이오. 그러니 난 삶을 지킬 것이오. - P184

그런데 내가 내 적들에게 호의를 가져야겠소? 아니오. 그 순간부터 나는 인류, 아니 누구보다 나를 만들어 이토록 참을 수 없는 비참한 상황으로 내몬 자와의 영원한 전쟁을 선포했소. - P262

내 심장은 사랑과 동정에 민감하게 만들어졌소. 그러니 불행 때문에 악과 증오로 내 마음이 뒤틀릴 때면, 나는 당신이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고통을 느끼며 그 변화가 가하는 폭력을 참아내야 했소. - P436

하지만 그게 사실이오. 타락한 천사는 사악한 악마가 되는 법이오. 하지만 신과 인간의 적인 바로 그 악마조차 외로움 속에서도 친구와 동료 들이 있소. 그런데 나는 혼자요. - P439

나는 여전히 사랑과 우정을 갈구하고 여전히 버림받았소. 그건 정말 불공평하지 않소? 인간들은 모두 내게 죄를 저지르는데 왜 나만 죄인 취급을 당해야 하는 거요? - P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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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 자이언트 픽
이유리 외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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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픽하이는 진부하다고 했고, 브로콜리너마저는 보편적이라고 했다. 십센치는 우습다고 했고, 악뮤는 바다처럼 깊은 사랑이 다 마를 때까지 기다리는 거라고 했다.


헤어진 연인들의 이야기는 지구상에 존재했던 사람의 수보다도 훨씬 많이 존재한다.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채 역사의 한 켠에 묻힌 사람들처럼 그 하나하나의 이야기들 역시 전승되지 못했다. 하지만 주변에 여전히 사랑 이야기는 차고 넘치고 이별 이야기 또한 넘쳐흐른다. 그래서 너무나도 흔해 보이지만 모두 다른 존재들의 결합이 만들어낸 고유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끊임없이 사랑 이야기를 한다.


늘 그래왔듯이, 아마 세상의 모습이 지금과는 조금 달라져도 사랑 이야기는 계속될 것이다. 다섯 명의 작가는 미래에 존재할지도 모를 어떤 사랑 이야기를 각자의 방식대로 독자에게 들려준다.


표제작인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이유리)에는 사랑을 잊고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수진은 성재와 헤어진 뒤 남은 사랑의 감정을 친구 영인에게 준다. 이를 소설에서는 감정 전이라고 부른다. 감정 전이는 이별 후 남은 사랑을 손쉽게 정리할 방법 같아 보인다. 하지만 작가는 소설이 끝나기 직전 이를 비튼다. 이 소설과 동명의 노래 후렴 마지막 가사가 내 곁에 머물러줘요이듯이 잊어야 하지만 잊히기 싫은 모순적인 마음은 찝찝함을 남긴다. 영인의 남편 민후가 염치없이 그게 진짜 해결일까요?”라고 물은 것처럼 말이다.


이 앤솔러지는 사랑을 단순히 연애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폴터가이스트」(김서해)와 「미림 한 스푼」(설재인)의 세인과 주경은 각각 대한민국의 고3과 고1이다. 「폴터가이스트」는 제목 그대로 남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는 고3 세인이 주인공이고, 「미림 한 스푼」은 지구 종말이 프로듀스101과 같은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우승자인 특정 작가에 의해 좌지우지될 수 있다는 이야기와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주경의 이야기가 나란히(하지만 서로 얽히며) 전개되는 작품이다.


미림맛이 단 일본 술이자, 국내에서는 맛술의 한 종류라고 한다. 서로 다른 작품이기는 하지만 「폴터가이스트」의 세인과 현수는 서로에게, 「미림 한 스푼」의 미림은 주경에게, 작가 J는 지구인들에게 미림 한 스푼이 되어준 게 아닐까 싶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자신을 진정으로 믿어주고 죄책감에서 벗어나게 해줄, 대가 없는 사랑 그 한 스푼이면 충분할지도 모른다.


「수브다니의 여름휴가」(김초엽)의 피부 시술자들은 펭귄이나 곰의 피부를 본뜬 인공피부를 이식받은 사람들인데, 수브다니는 그보다 더 독특한 요구를 해서 솜솜 피부 관리숍 사장과 주인공 현을 심히 곤란한 상황에 부닥치게 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들을 비난하는 건 소수자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결여되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이해받지 못한 욕망을 품은 존재들은 너무나 쉽게 혐오의 대상이 되곤 하는 것 같다.


마지막 작품 「뼈의 기록」(천선란)은 마지막답게 죽음을 논하며 사랑을 이야기한다. 로비스는 장의사 안드로이드이다. 로비스는 죽음과 아주 가까운 곳에서 죽음을 바라본다. 인간과는 다른 마음으로, 안드로이드만의 방식으로 유가족을 위로하고 죽음을 애도한다. 그러니 로비스의 일터는 망자를 향한 다양한 마음이 뒤섞여 있는 곳이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 안드로이드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는 마음을 유가족과 망자와 동료 모미를 통해 로비스가 얻어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다 보면 타인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보다 로비스가 낫다는 생각도 든다.


존재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다른 존재와 다양한 사랑을 나눈다. 모두가 어떤 식으로든 사랑하고 이별하기 때문에 노래에서도 소설에서도 사랑 이야기는 끊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살아갈 힘을 얻는 것 같기도 하다. “이토록 고통스러운데도 이토록 아름다운, 자신에게 남아 있는 사랑을 서로 주고받으며, 우리는 살아간다.




*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밥을 먹으면 설거지를 해야 하고 옷을 입었으면 빨래를 해야 하듯 사랑을 했다면 끝난 자리에 남은 것은 남은 사람이 깨끗이 치워야 하는 것, 그렇다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 슬픔을 꼭꼭 씹어서 소화시켜야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 P31

엄마들은 어느 시점이 되면 스스로 시간을 멈추는 것 같았다. 현재를 거부하고 오직 기억만으로 자녀를 이해하는 법을 터득하는 것 같았다. 그래야만 사랑이 닳지 않으리라 믿는 것처럼. - P68

어른들은 부고와 장례를 하도 많이 접해서 익명의 죽음 정도는 들으면서 동시에 잊는 것 같았다. 조금 억울하거나 안타까운 죽음은 가까스로 기억해낸 뒤 쉽게 평가하고 또 잊어버리는 것 같았다. 다들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 P71

욕망의 형태 역시 처음에는 추상적이고, 마치 조각을 빚듯 구체화하기 전에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거라고 했죠. - P134

언젠가는 다시 그 거리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싫지 않았거든요. 무언가가 되고 싶다는 마음에 자기 온몸을 바치는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요. - P167

당신다운 일을 당신이 해서 좋다고 말해줄걸. - P201

너를 위해 누군가가 시간과 힘을 쓰는 날이 생길 때도 있단다. 그것이 금세 무용해진다 하더라도 그 누군가는 별로 상관하지 않고, 그저 네가 원했으니까, 너라는 사람이 이 결과를 필요로 했으니까 노력을 기울였을 거야. 살다보면 아주 가끔 그런 순간을 마주하는 때가 있어서, 그게 나머지 오천이백만 겁의 허름하고 꾀죄죄한 결들을 잊게 만들지. - P212

새긴 문신이 죽어서도 남는다는 걸 알면 멋이라는 대답 대신 더 그럴듯한 대답을 해줄까? - P237

모미의 키보다 큰 그림자가 로비스의 발등을 덮었다. 로비스는 혹여나 그림자가 불편할까, 발을 뒤로 물렀다. - P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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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원고 두 번째 원고
함윤이 외 지음 / 사계절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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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도 처음이었고, 오늘도 처음이고, 내일도 처음일 것이다. 매 순간 아직 살아보지 못한 시간을 관통한다. ‘알 수 없음의 복판에서 매일매일 헤맨다.


「규칙의 세계」(함윤이)에는 미신이라고 불리는 규칙과 법이라고 불리는 규칙들이 혼재한 세계에 사는 이방인들이 등장한다. 한국에서 외국인으로 살아가는 인물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던 규칙뿐만 아니라 낯선 규칙까지 지키며 살아가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한국인 인물인 1인칭 화자 성준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 역시 너무 많은 규칙 속에서 잘 알지 못하는 규칙을 지키기 위해, 살기 위해 애쓴다.


살기 위해 규칙을 지키면서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생각하고 소망한다. 그럼에도 미래는 어느 순간에 삶을 어김없이 배반한다. 「긴 하루」(박민경)의 병철은 가까운 사람들의 미래가 한순간에 뒤집히는 걸 목격했고, 자신도 그 선 위에 서 있음을 느낀다. 그가 그렸던 미래와는 다른 낯선 날들을 맞이하겠지만, 그래도 팔찌의 노란 스마일 참처럼 무해한 웃음을 짓는 순간을 맞이했으면 좋겠다.


비일상이 일상이 되고, 다시 새로운 비일상을 맞이한 인물은 「태엽은 121/2바퀴」(김기태)에도 등장한다. 12바퀴만 돌리면 충분히 감겼던 태엽이 모르는 사이 반 바퀴를 더 감아야 톱니에 걸리게 되었듯이 주인공과 그가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도 흘러가는 시간에 조금씩 늘어진다. 세월이 꽤 많이 지났다는 사실을 깨닫는 비일상적인 일도 일어나지만, 그는 새로움을 꿈꿀 시간이 남아 있다고 느낀다. 마치 높다란 파도들이 정연한 주름을 이루고 있을지라도 계속해서 밀려오는 것처럼 말이다.


알 수 없음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다는 것을 모르거나 알면서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우도 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이들이 공연히 호들갑을”(「알리바이 성립에 도움이 되는 현대문학 강의」) 떤다고, 자기 생각만 옳다고 여기며 이를 기준으로 알지 못하는 타인을 재단하는 건 폭력이 되기도 한다. 「알리바이 성립에 도움이 되는 현대문학 강의」(임현석)의 주인공은 자신의 문학적 사상을 잣대로 진영을 교화하려 했다고 말하면서 조금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자 하는 욕망을 뒤로 숨기려고 한다. 어쩌면 각자가 지닌 고유의 세계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태도가 결여된 그의 모습에서 진영은 그 욕망을 목격하고 만 것인지도 모르겠다.


「꿈과 광기의 왕국」(유주현)의 윤 여사 역시 구시대적인 사고방식으로 마을에 새로 온 사람들에게 훈계를 늘어놓는다. 그는 자기가 가부장제의 피해자임을 인식하지 못한 채 올바른 여성으로 살았다는 우월감에 빠져 있다. 윤 여사는 교장이었던 남편이 은퇴한 후에는 남편의 명함 대신 변호사 딸의 명함을 사람들에게 주고 다니는데, ‘언덕 집에 새로 이사 온 혼자 사는 여성이 딸의 명함을 함부로 대하는 장면을 통해 가족에게서 비롯된 우월감이 더는 유효하지 않은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하지만 윤 여사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해서 다음 세대에게도 자신과 같이 살아야 한다고 압박하고 그들을 비극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이 살았던 언덕 집이 문제라고 숙덕임으로써 자신들이 가한 폭력을 모르는 척 외면한다.


알 수 없음으로 점철된 삶을 살면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 이 앤솔러지에 참여한 작가들 역시 2022년 신춘문예로 등단한 작가들의 작품을 모은 책이 기획될 것이며 스무 명이 넘는 작가 중 자기 작품이 거기에 실리게 될 미래를 몰랐을 것이다. 책의 말미에는 추천사 대신 손보미 작가님의 짧은 에세이가 실려 있다. 갓 등단한 신인 작가나 등단한 지 10년도 넘은 작가나 미래를 알 수 없다는 건 마찬가지라고, 그러니 계속 쓰라고 위로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그냥 우리한테 와. 네가 우리를 보호할 테니까, 우리도 너를 책임질 거야.
(함윤이 「규칙의 세계」 中) - P39

아주 낯선 나라에서 온 사물이 어느 순간 타지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셈이지. 자기만을 부르는 글자까지 생긴 거잖아. 그 점이 좋아서 이 이름을 쓰고 싶었어. 어디서나 이름은 아주 큰 힘을 발휘하니까. 사실상 가장 강한 부적이지.
(함윤이 「규칙의 세계」 中) - P41

결국 글쓰기란 내 안에 어떤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일. 나를 쉼 없이 들여다보려는 태도이자 그해 혹은 그 순간 내가 몸담고 있는 세계를 확장하며 돌이켜보는 일.
(임현석 에세이 「내 안의 세계를 존중하는 방식」 中) - P92

무지개 너머 아름다운 어딘가란 결국 허상이야. 그걸 깨닫지 못하면 비극뿐이고.
(유주현 「꿈과 광기의 왕국」 中) - P108

언제부턴가 그저 연결음이 이어진다는 것에 위안을 느끼게 되었다. 그럼 적어도 살아는 있다는 거니까. 살아만 있으면 언젠가 또 볼 수 있다는 거니까. 세상엔 그런 식으로 확인되는 안부도 생사도 있는 것이다.
(박민경 「긴 하루」 中) - P140

병철은 다시는 자신이 알고 있던 우란을 만날 수 없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건 슬픔이라기보다는 열패감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박민경 「긴 하루」 中) - P156

돌아보면 우스운 일이 있었고 울적한 일이 있었다. 정말 있었을까 싶은 일들과 정말 없었을까 싶은 일들, 이제는 물어볼 사람이 없는 일들이 있었다.
(김기태 「태엽은 12와 1/2바퀴」 中) - P198

소설은 내 삶의 일부였다. 그건 소설이, 소설을 쓰는 행위가 언제나 나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것에 실망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그리고 아무리 실망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소설 쓰는 행위를, 내 삶에서 그저 떨구어낼 수 없을 것이다.
(손보미 에세이 「내 삶의 일부」 中) - P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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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폴리스맨
베선 로버츠 지음, 민은영 옮김 / 엘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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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의 시선으로 나를 본다. 내가 가진 것들을 그는 자신의 기준으로 재단한다. 나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들에 의해 평가당한다. 그 매서운 시선들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그래도 문득문득 놀라고 움츠러들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동시에 나 역시 누군가에겐 가당찮은 재단사 행세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도 그를 내 시선만을 기준으로 보니까 말이다. 이 소설의 세 주인공 경찰 톰과 교사 매리언, 학예사 패트릭, 그들 역시 시대의 시선과 법으로부터의 속박에서 자신과 자신의 사랑을 지키려다가 결국 서로 상처를 주고받고 말았다.


톰에게는 결혼 전부터 만나는 남자가 있었다. 패트릭에게 톰은 사랑하는 나의 순경님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살았던 1950년대 영국 브라이턴에서는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동성끼리 사랑을 나누기만 해도 범법자가 되었었다. 심지어 문학 하는 남자, 미술 하는 남자도 혐오의 대상이었다. 자기 자신으로 온전히 살아갈 수 없었던 시대에 그들은 타인의 눈에 띄지 말아야 했다. 그러니까, 톰은 정상처럼 살기 위해 결혼했다. 그러나 하필 그가 고른 결혼 상대는 매리언이었다.


매리언은 친구 실비의 오빠인 톰을 짝사랑하다가 끝내 결혼에 성공했다. 매리언과 톰 둘 다 결혼을 원해서 한 것이었지만 그들이 바라보는 방향은 일치하지 않았다. 매리언이 꿈꾸는 톰과 함께하는 미래 속에 아이는 없었다. 매리언은 아이에게 얽매이지 않고 교사로서 계속 일하고 싶어 했다. 이는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사회적 여성상과 부합하지 않는 것이었다. 정상성을 띠기 위해 결혼을 선택한 톰은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매리언이 일을 그만두길 바랐지만, 매리언은 굴하지 않았다.


톰이 결혼을 택한 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지 않는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만, 매리언 입장에서 보면 뒤통수 맞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관계가 틀어진 데 대한 책임이 톰에게만 있다고 볼 수도 없을 듯하다. 매리언은 결혼 전 실비에게 이미 톰은 다르다는 이야기를 듣고 톰의 성 정체성을 눈치챘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여성에게 요구되는 시대의 부조리에 맞서면서 톰에게는 자신의 욕구를 포기하길 바랐다.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려 애쓰기보다는 자신의 입장에 서서 서로에게 자신의 욕구를 관철하려고만 했던 것이다.


사랑하는 마음과 살아남고자 하는 마음이 충돌해서 그들은 상처를 입고, 오랜 시간을 남과 같은 사이로 흘려보내 버렸다. 그렇지만 매리언이 자신의 잘못을 시인한 데서 더 나아가 고백함으로써 늦게나마 상처를 봉합할 가능성이 제시되었다. 사랑하는 마음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그 마음이 상처로 완전히 얼룩져서 손을 댈 엄두가 나지 않았을 뿐이지 않았을까.


*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톰은 집으로 돌아오면 곧장 셔츠를 벗고 몸을 구석구석 씻었다. 난 늘 톰의 그런 점이 좋았다. 그런데 패트릭 당신과 있을 때는 셔츠를 그대로 입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지금 막 떠오른다. - P49

그러면, 그 모든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정상성이라는 개념을 떠올리면 진저리가 나도록 싫다는 사실을? - P266

우리 사이에 고통만이 아니라 다정함도 있었다는 걸 당신이 알도록. 우리 둘 다 실패했지만 우리 둘 다 노력했다는 걸 알도록. - P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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