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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게 범죄 - 트레버 노아의 블랙 코미디 인생
트레버 노아 지음, 김준수 옮김 / 부키 / 2020년 10월
평점 :
품절
슬픈 걸 슬프다고 하고 화나는 걸 화난다고 하는 건 얼마나 쉬운가. 세상을 비꼬고 사람을 무시하고, 시니컬리즘에 빠져 남탓을 하는 건 또 얼마나 쉬운가. 앞에 보이는 문제를 무시하고 눈 가리고 아웅, 그냥 도망치는 건 또 얼마나 편한가.
그런데 트레버 노아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세상을 탓하지도 않고 도망치지도 않고, 자신과 주변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동시에 이 모든 걸 공격성 없는 유머로 승화시킨다. 인생의 혼란조차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그에게 애초 분노와 억울함을 마그마로 품어 본인의 삶도, 타인의 삶도 망치는 기질은 처음부터 없는 듯 하다. ...그의 훌륭한 어머니 덕분일까?
트레버 노아.
남아공 출신의 미국 유명 코미디언이 쓴 이 책은 무거운 주제를 무겁지 않게, 그러나 깊게 사람의 마음을 울린다.
강력 추천.
배덕법. Immorality Act. 1927년.
"유럽인과 원주민 간의 불법적 성관계 및 그에 부수되는 행위를 금지한다".
미국 흑인 역사에만 익숙했던 나는 아프리카 남아공에서도 넬슨 만델라가 1994년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이전에는 그 못지 않은 잔인한 인종 차별 역사가 있었다는 걸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사실 나는 예전에 몇몇 백인 친구들이 어느 나라에서 왔냐는 질문에 남아공에서 왔다고 하면 응? 거기 아프리카 아냐?라는 무식한 질문을 해서 눈총을 받았던 적이 여러 번 있다;;). 흑인들끼리 싸우고, 흑인과 백인들끼리 싸우고, 흑인과 백인 사이에서 태어난 유색인들끼리도 싸우고.
아파르트헤이트. Apartheid. 1994년 만델라 대통령 당선 후 폐지.
17세기 부터 시작해 1948년 확릭된 남아공의 인종 분리, 격리 정책 및 제도.
1994년 아파르트헤이트가 폐지되었어도 문제는 사라지지 않았다. 백인들은 여전히 많은 혜택들을 누렸으며, 이제는 흑인들끼리의 싸움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 안에서 트레버 노아는 사는 지역도, 학교도, 먹는 음식과 가질 수 있는 직업 모두 여전히 피부 색깔 하나도 결정되는 그 시기에 백인 아버지와 흑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유색인이라는 이유로 백인이 가지는 혜택을 누리는 동시에 백인, 유색인, 흑인이라는 3가지 정체성 사이의 혼란 속에서 평생을 아웃사이더로 살아가게 된다(책에서 트레버는 백인 아버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는 했지만 자신과 늘 함께 있는 가족은 모두 흑인이기 때문에 자신을 흑인이라고 정의내리지만, 주변에서는 그렇게 생각하도록 놔두지 않는다).
이 책은 1부, 2부, 3부로 나누어져 있는데
1부에는 어린 시절의 이야기들이,
2부에서는 사춘기 시절,
3부에는 20대 성인이 되어 바라보는 남아공 시절의 이야기들이 있다.
그러니까 이 책에는 트레버 노아가 나중에 미국으로 넘어가 코미디언이 되는 과정과 지금처럼 유명인이 되는 과정은 없다. 그리고 만약 그런 내용들을 넣었다면 이 책의 사족이 되었을 것이다.
"난 저 앨 때릴 수 없다."
"왜요?"
"피부가 흰 애를 어떻게 때려야 할지 모르겠거든. 흑인 아이를 때리는 법은 알아. 흑인 아이는 때려도 그대로 검은 색이야. 그런데 트레버를 네가 때리면 파래졌다가 녹색이었다가 노래졌다가 빨개지더구나. 그런 색은 난생처음 봤어. 내가 자칫 애를 때리다가 어디 부러뜨리지 않을까 걱정된다. 나는 백인을 죽이고 싶지 않아. 난 너무 두렵다. 그래서 쟤를 건드리지 않는거야." 그리고 실제로도 할머니는 그러지 않았다.
(...)
흑인 가족들 사이에서 '백인'으로 사는 것에는 일일이 열거할 수 조차 없는 많은 혜택이 존재했다. 나는 그 시간을 즐겼다. (...) 나는 흑인 아이들에 비해 훨씬 관대한 처분을 받았다. 사촌들이라면 충분히 벌을 받고도 남을 짓을 해도 나는 경고만 받고 풀려났다. 심지어 나는 내 사촌들 누구보다도 더 못된 아이였다. 걔들은 감히 날 따라올 수 없었다. 뭔가가 깨지거나 할머니의 쿠키가 없어졌다면, 그 범인은 나였다. 나는 사고뭉치였다.
(...)
그리고 늘 나만은 넘어가 주었다. 이렇게 자라다 보니 나는 이런 모든 혜택을 안겨 주는 시스템에 백인들이 얼마나 손쉽게 익숙해지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한 짓 때문에 사촌들이 대신 매 맞는 걸 알았지만, 나는 할머니의 생각을 바꿀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건 곧 나도 매를 맞게 된다는 건데, 대체 왜 그래야 하겠는가?
(...)
그 당시에 나는 특별 대우가 내 피부색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트레버'여서 그런 줄 알았다. '트레버가 백인이라고 매를 안 맞는거야'가 아니었다. '트레버는 트레버니까 매를 안 맞는거야'였다. (...) 주변에 나 말고 다른 혼혈아가 없으니 '아, 우리에게는 이런 일이 생기곤 하지'라고 생각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넬슨 만델라가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1994년 당선되어 남아공에서 일어나는 아파르트헤이트 폐지 전과 후의 교육 정책의 차이점이나 한 국가의 공식 언어로 11개로 채택되었다는 점, 여전히 흑인들이 주로 사는 지역과 백인들이 사는 지역, 그리고 유색인들이 사는 지역이 나누어져 있다는 점, 중국인은 흑인 취급을 받는데 일본인은 백인 취급을 받았던 당시 상황들에 대해서는 알면 알수록 놀라움 뿐이었지만, 나에게는 이 모든 것보다 가장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준 사람은 바로 트레버 노아의 어머니였다.
엄마는 문제아였고, 말괄량이에 고집 센 반항아였다. 할머니는 엄마를 어떻게 키워야 할 지 몰랐다. 모녀간의 사랑은 계속된 싸움 속에 지워져 갔다.
재밌는(?) 사실은 그래서 트레버 노아의 엄마는 자신의 엄마를 버리고 이혼한 아빠와 살겠다고 9살에 선언(!)을 하고 아빠를 따라가는데, 아빠도 딸과 살기 싫었기 때문에 아무 말 없이 그냥 차에 태워 자신의 누이 집에 떨궈버렸고, 그 곳에서 12살까지 다른 고아들과 섞여 새벽 4시반부터 하루종일 농장 노동 일을 하며 버텼다는 사실이다.
"과거로부터 배우고 과거보다 더 나아져야 해."
엄마는 말했다.
"하지만 과거를 슬퍼하지는 마라. 인생은 고통으로 가득해. 고통이 너를 단련하게 만들되, 마음에 담아 두지 마. 비통해하지 마라."
그리고 엄마는 그러지 않았다.
어린 시절의 박탈감, 부모로부터의 배신감, 그 무엇에 대해서도 절대 불평하는 법이 없었다.
트레버 노아의 엄마는 부모로부터 생명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받은 적이 없지만 돈을 받으면 부양을 했고, 도망을 쳐서 스스로를 교육 시켜 "화이트 칼라 밑바닥인" 비서 일을 시작하고, 남아공에서 "상류층 언어"인 영어를 스스로 공부하고 그 뿐만 아니라 남아공에서의 다양한 부족들의 언어를 '혼열아를 낳은 창녀 취급 받는 나라에서 살기 위해' 공부했으며, 트레버에게도 영어와 수많은 남아공 언어들을 가르쳐 그 혼란 속에서 비록 평생 아웃사이더로 느끼며 살더라도 적응하고 살 수 있게 도와준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트레버를 낳았던 것도 강간이나 버림받아서 미혼모가 된 것이 아니라, 본인이 사랑하는 백인 남자와 진심으로 사랑하고 본인이 원해서 애를 낳았고 (아들 트레버에게 '나는 아무 조건없이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원했고, 그게 너다'라고 한다), 트레버를 낳고 나서도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는 남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며 백인 아버지와도 계속 연락을 하고 지내 트레버에게 부모의 부재와 공백을 느끼게 하지 않았다. 트레버 본인도 어머니의 사랑과, (같이 산 건 아니고 중간에 연락이 끊기기도 했지만) 백인 아버지의 사랑을 늘 느꼈다고 말한다.
...이러한 강인한 여자가 후에 (비록 처음에 알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결혼한 남자가 결국 자신의 머리에 총을 쏘는 폭력적인 남자였다는 사실은, 그리고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동시에 남편이 전혀 법적인 처벌을 받지 않고 살아 남아 지금도 남아공에서 멀쩡하게 잘 살고 있다는 사실은 - 아파르테이트뿐만 아니라 남녀 인권에 대한 인식의 차이, 가정 폭력에 대한 사회의 인식 - 그건 집안 일이다 - 에 대해 많은 것을 고민하게 만든다.
나는 다행히 엄마에게서 또 하나의 능력을 물려받았다.
인생의 고통을 잊는 능력 말이다.
과거의 기억들은 트라우마로 이어지기에 충분한 것들이었지만 나는 어떤 정신적 외상도 안고 있지 않다.
나는 뭔가 고통스러운 기억이 새로운 도전을 막아서도록 놔두지 않았다.
(...)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잠시 운 다음, 다음 날 개운하게 일어나서 계속 전진하는 편이 낫다.
몸 곳곳에 든 멍 때문에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더라도 괜찮다. 얼마 지나고 나면 멍은 사라진다.
그리고 거기엔 다 이유가 있다. 이제 다시 사고를 칠 때가 왔기 때문인 거다.
트레버 노아의 다양한 이야기들 중 여기에 쓰고 싶은 이야기는 사실 더 많다.
남아공의 아파르헤이트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상황들, 유대인과 히틀러의 이야기들이라든지, 남아공 내 처음 선교사들의 흑인들에 대한 교육과 남아공 '상류층' 백인들의 흑인들에 대한 교육과 그 정책 차이, 흑인, 백인, 유색인들간의 간격과 정체성의 문제 등등. 백인인 친아버지, 계부인 흑인 아버지, 나중에 태어난 두 동생들에 대한 이야기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건너띄고 싶은 이야기가 하나도 없을 정도로 나누고 싶은 이야기도 생각거리도 많은 책이다.
트레버 노아도 멋있지만,
그보다 더 멋진 건 그의 어머니다.
특히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그리고 사회적으로도 그렇게 불안하고 억압 가득한 세상에서 그렇게 보무당당하게 살 수 있다니- 본받고 싶은 사람이다. 나는 늘 훌륭한 사람에게는 (한쪽만이라도) 늘 훌륭한 부모가 있기 마련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트레버 노아의 어머니는 그런 나의 가치관이 편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우쳐 줬다.
여러 면에서 좋은 책이다. 강력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