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다 버티다 힘들면 놓아도 된다 - 윤지비 이야기
윤지비 지음 / 강한별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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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비슷하다.

그러나 다르다.

 

당신은 그 전에는 늘 잘 웃고 잘 먹고 잘 자고 운동도 잘하고 친구도 애인도 가족 관계도 좋은 사람이었다가,

회사에 들어가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맞았다.

 

나는 그렇지 않았다.

 

당신이 이 책에서 무슨 말을 하려는건지, 조금의 보탬도 덜어냄도 없이 나는 여기서 당신이 어떤 마음을 전하고 싶은건지 온전히 느낄 수 있다.  당신이 느꼈던 슬픔. 괴로움. 분노. 끝이 보일 것 같지 않은 공포와 억울함. 무기력. 그 모든 것이 어떤 식으로 당신의 주변에 머물렀는지도 잘 알 수 있다. 엘레베이터도 탈 수 없을만큼 몸와 마음과 정신이 떨리는 불안과 식은땀에 짓눌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매우 다르다. 

 

 

강한별 서포터즈 2기로 받은 두 번째 책이다.

 

저자가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기에 기대를 많이 했지만, 아쉽게도 그 기대감에 충족하는 책은 아니었다. 

 

회사에 들어가 일을 하다가 몸와 마음과 정신이 무너진 것은 일치하나, 친구와 애인도 있고 가족관계도 좋았던 저자와는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았다. 게다가 저자는 입사하기 전까지는 밝고 건강한 사람이었다. 우울증을 겪으며 친구와 가족 관계가 소홀해지었을지언정 애인은 그대로 남아 현재 남편이 되었다. 나와는 다르다. 게다가 저자는 용감하고 씩씩하게도 스스로 힘을 내어 정신과 치료를 받으려 다녔다. 나는 그럴 기력조차 없었다. 

 

 

그렇다고 이 책이 별로냐, 하면 그건 아니다. 

 

내가 빨간 옷을 입었다고 해서 저자의 주홍 옷이 나와 결이 다르니 별로야, 라고 말하는 건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고. 그리고 분명, 세상에는 저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보다 더 깊이 공감하고 도움을 받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단지 뭐랄까, 책을 읽으면서 내 머릿속에는 내내 이런 질문들이 떠올랐다. 

퇴사한 것도 이해해. 친구들이 사라진 것도 잘 알겠어. 그래도 당신 곁에는 가족이 있었잖아. 애인도 그대로 있었고, 그리고 지금은 남편이 되었잖아? 당신은 정신과 치료를 받을 수 있을만큼 힘이 남아 있었잖아?

 

 

 

 

 

 

...미안. 

미안해요. 질투가 나서. 

 

 

책에서 저자는 "이상한 사람이고 싶지 않아요"라고 말했지만, 

나는 내가 이상한 사람이어도 상관없으니 나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기를 원했다. 

 

...어쩌면 우리의 차이는 여기서 오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내 기대에 못 미치는 걸지도. 

 

 

그러나 나와는 달리 분명 많은 사람들에게는, 저자가 쓴 개인적인 생각들과 감정들, 그리고 정신과 방문 경험을 비롯한 우울증 자기 진단 방법은 분명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당신 혼자만 아픈 거 아니에요, 라고 손을 내미는 책이니까.  나도 아팠어요, 라고 말하는 책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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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어쩔 수 없는 힘듦이 내게 찾아왔다면
글배우 지음 / 강한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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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

분노.

좌절.

무기력.

예민.



그리고 결핍. 

이 모든 감정들을 불러들이는 근본, 결핍.



슬프고 분노 가득한 좌절과 무기력만이 존재하는 매일의 예민한 나와 결별하고 싶다면,

우리는 모두 각자의 '좋음'을 선택하여 그 결핍을 채우는 매일매일을 보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깊이 공감했다. 



저자가 언젠가 진행했던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의 불빛 프로젝트는,

37일동안 공원에서 천막을 치고 

고민있는 사람들이 찾아오면 고민을 들어주는 프로젝트였다고 한다.


이때 찾아온 사람들은 무려 2,000명.


프로젝트가 끝난 후 저자는 8킬로가 빠졌고,

수중에 있는 돈 2만 원 중 만 원짜리 국밥을 먹으며

"우리의 힘듦은 어쩌면 힘든 일 그 자체보다 

내 마음에 오롯이 공감해 주는 사람이 없기에 

더 힘든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이후 저자는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가능하다면 유명한 작가가 돼서 더 많은 사람이 고민을 나누러 찾아오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책을 읽으면서 나에게 각인된 단어는 '결핍'이었다.



...늘 궁금하던 것이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시험에 떨어지고 취직이 안되고 친구랑 싸우고 가족과도 싸우고 사랑하던 애인과 헤어져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다시 힘차게 씩씩하게 잘만 사는데,

왜 어떤 사람들은 똑같은 상황에 똑같은 일을 겪었는데도

몇 달이 지나고 몇 년이 지나도 끊임없이 자책하고 방황하며 좌절하고, 그래서 결국 삶을 포기하고 무기력해지는지.




이 책은 그 이유와 해결 방법을 친구처럼 알려준다. 

이 모든 것은 바로 '결핍'때문이라는 것과, 

그리고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해 매일매일을 '좋음'으로 선택하는 일상을 보내야 한다는 것을.


결핍이 생기는 이유를 저자는 스치듯이 아주 짧게 언급하는데,

5줄로 요약한 그 글도 공감이 되었고


무엇보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누구에게 의지해서, 그러니까 사람한테 의지해서 행복해지려고 하는 결핍의 악순환에 빠지지 말고, 더더욱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여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할 때 기쁜지를 알아내어 (소크라테스는 정말 지혜로운 철학자가 아닌가?) 그 "좋음"이 따르는 건강하고 건전한 선택을 매일매일 포기하지 말고 - 조금 힘들고 귀찮고 하기 싫은 마음이 들더라도 매일매일, 실천에 옮겨 그 결핍을 채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저자의 말이 어찌나 현실적인지. 


나에게 그 "좋음"이 가득한 선택들은 늘 책과 영화들이었고,

현재는 한 달전부터 시작한 책방송이다.



나는 늘 '이동진의 빨간 책방'같은 책방송을 언젠가 하고 싶다는 꿈이 있었는데

실제로 지난 한 달동안 이러저러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나는 방송을 한번도 안해봤다)

지금은 마이크나 음향,

책방송 테마와 대본 준비가 너무나도 즐겁고

또 무엇보다,

방송을 통해서

예상치 못한 기쁨과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나만의 '결핍'이 '좋음'으로 채워지는 경험을 하고 있다. 



처음에는 책방송이 마이너 장르라(나를 포함해 책소개분석등으로 책방송을 하는 사람은 600명 중 4명뿐) 들어오는 사람도 거의 없고

방송도 한번도 안해봐서 잘하는 사람들을 보며 기가 죽고 그랬는데

이제는 조금씩 들어오는 사람들도 생기고 또 소수지만 나처럼 책을 좋아하는 나만의 팬들도 생기고,

물론 아직도 갈 길이 멀지만 현재 무엇보다 가장 행복한 건 

이 책방송을 통해서 개인적으로 너무나도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과거 많은 글들에서 나 역시 수없이 언급했던 부분이지만,

주변에 누가 있는지는 정말 중요하다. 



현재 나는 '임시 거주지'에 있다고 몇 차례 언급했던 적이 있다.


처음에는 2주만 있다가 돌아가려고 했는데

결국 그 2주동안 역시 나 혼자 이 낯선 도시에 있는 것이 여러가지면에서 이롭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 떨어짐 속에서 우리는 모두 각자 자신만의 방법으로 성장하고 스스로를 돌이키며 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여기 오니, 내가 나의 '좋음'을 선택하여 매일을 보낼 수 있었다.  

그래서 당분간 더 있기로 결정했다. 



...그러니까, 저자가 언급했던 '힘들었던 환경에서 벗어나기' 프로젝트라고도 할 수 있다.


앞으로 최소 3개월, 길게는 1년간 이 도시에 더 머물기로 결정하고 나서 나는

바로 일을 알아보고 시작했는데 - 

그러다가 그만(?) 일일 알바만 하려던 나에게 갑자기 덜컥 취직 제안을 받았다. 

내 사정을 설명한 뒤에도 (최소 3개월~길게는 1년만 있을 것이다) 그쪽이 좋다고 해서 당분간은 다닐 생각이다. 박봉이고, 태어나서 처음 하는 일이긴 하지만 동시에 많은 것을 배우고 있어 좋다. 무엇보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면서 나만의 '힘들었던 환경에서 벗어나기'를 실행에 옮기고 있다는 점에서 예전보다 조금 더 나 자신이 좋아졌다.



어떤 사람을 만나면 좋을까, 라고 저자가 말하는데

"말을 부드럽고 예쁘게 하는 사람을 만나면 좋습니다"라는 점은 나 역시 1번으로 생각하는 부분.


그 사람의 마음은 결국 그 사람의 행동.

그리고 말이라는 것도 역시 그 사람의 행동이기 때문이다. 



조용히 읽기 좋은 책이고,

스스로를 돌아보기에도 예쁜 책이다.


분명 많은 이들에게 힘과 용기와, 그리고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해결책을 제시해주는 책이다.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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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여행으로 만난 일본 문화 이야기 - 책과 드라마, 일본 여행으로 만나보는 서른네 개의 일본 문화 에세이 책과 여행으로 만난 일본 문화 이야기 1
최수진 지음 / 세나북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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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독성도 높고 생각거리도 많은 즐거운 일본 문화 에세이입니다. 개인적으로 책이 더 두꺼웠으면 좋겠어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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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여행으로 만난 일본 문화 이야기 - 책과 드라마, 일본 여행으로 만나보는 서른네 개의 일본 문화 에세이 책과 여행으로 만난 일본 문화 이야기 1
최수진 지음 / 세나북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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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문화에 대한 글들이 가득한 책. 

가독성도 높고, 재밌습니다. 생각거리도 있고요.


개인적으로는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일본의 전문성에 대한 글들이었습니다.


'편집 매장' 중심의 전문적 큐레이션이 돋보이는 일본 서점,

아무나 손님으로 받지 않고 또 그렇게 '선별'해서 받은 손님들에게 최고의 서비스 - 이부자리를 준비하는 모습을 포함해서 - 에서 느껴지는 일본 료칸의 품격,  

미용실에서 머리 샴푸조차 몇 만 원(!!!)을 받고 16만 원(!!!!!)짜리 테이프 커터조차 '100년이 가는 문구를 판다'는 정신으로 무장한 일본의 전문성,

그리고 유독 동사를 중요하게 쓰는 일본어 문법의 쓰임새를 통해 보는 일본의 문화. 



개인적으로 일본 여행을 몇 번 한 적은 있지만 모두 일주일 이상은 없었던 터라 

저자의 어학연수 기간과 이후 직장 생활을 통해 거주했던 일본 생활, 

그리고 후에 가족과 함께 여행한 일본의 다양한 모습을 통해서 

일본의 문화라면 무라카미 하루키를 비롯한 몇몇 소설가들과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을 비롯해 너무나도 유명한 드래곤볼, 슬램덩크, 블리치 등의 만화가 전부인 저에게 무척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가장 부러웠던 건 뭐니 뭐니 해도 일본의 서점이었습니다.


일어를 할 줄 모르니 일본 여행 당시 서점에 들어가도 그냥 책들이 있구나, 라는 것만 알았지 저자가 언급했던 것처럼 대부분이 '편집 매장'이라는 건 몰랐어요. '편집 매장'이라는 단어도 덕분에 처음 알았구요. 




언젠가 교보문고에 들어가서 통나무를 반으로 자른 듯한 넓직한 책상과 편안한 의자를 보고 흥분한 적이 있었는데, 그런 디자인도 일본 서점을 벤치마킹한 거였더군요. 호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도 일본의 '편집 매장'같은 서점이 있을까 책을 다 읽고 생각+고민해 봤는데,

동네 독립 서점을 돌아다녀본 경험을 생각해보면 아직까지 저자가 책에 언급했던 개성 강한 독립 서점은 국내에는 (적어도 제가 찾아가본 곳은)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습니다. 제가 찾아가봤던 독립 서점들은 소규모의 독서 모임과 영화 모임 중심이었어요. 그렇다고 책꽂이에 학습지가 나열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일본의 편집 매장처럼 개성과 특징이 두드러진 서점은 발견하지 못했어요. 그리고 이런 말을 하면 독립 서점 운영하시는 분들이 싫어하시겠지만, 그다지 맛있지도 않고 양도 적으면서 한 잔에 5,000원이 넘는 음료를 파는 건... 그냥 인터넷으로 책 주문하고 스타벅스가서 책 읽고 싶다는 마음만 부추겼어요. (만약 개성 넘치고 좋은 독립 서점을 알고 계시다면 알려주세요. 좋은 정보는 공유해요 :)


한편으로는 만약 국내에도 일본의 편집 매장같은 서점이 생긴다면 과연 일본처럼 단골 손님이 생기는 '선순환'이 가능할까 - 싶기도 했어요. 흐음. 어렵네요. 



중간중간 저자가 알려주는 일본관련 책들도 언젠가 꼭 읽어보고 싶었습니다. 

그 중 가장 읽고 싶은 책들은 다음 5권이에요. 


<축소 지향의 일본인>, 이어령.

<축소 지향의 일본인 그 이후>, 이어령.

<일본 뒷골목 엿보기>, 홍하상.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일본편>, 유홍준.

<일본 문화(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마에다 히로미. 




일본 문화에 대한 에세이를 읽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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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게 범죄 - 트레버 노아의 블랙 코미디 인생
트레버 노아 지음, 김준수 옮김 / 부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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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걸 슬프다고 하고 화나는 걸 화난다고 하는 건 얼마나 쉬운가. 세상을 비꼬고 사람을 무시하고, 시니컬리즘에 빠져 남탓을 하는 건 또 얼마나 쉬운가. 앞에 보이는 문제를 무시하고 눈 가리고 아웅, 그냥 도망치는 건 또 얼마나 편한가. 


그런데 트레버 노아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세상을 탓하지도 않고 도망치지도 않고, 자신과 주변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동시에 이 모든 걸 공격성 없는 유머로 승화시킨다. 인생의 혼란조차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그에게 애초 분노와 억울함을 마그마로 품어 본인의 삶도, 타인의 삶도 망치는 기질은 처음부터 없는 듯 하다. ...그의 훌륭한 어머니 덕분일까?


트레버 노아. 

남아공 출신의 미국 유명 코미디언이 쓴 이 책은 무거운 주제를 무겁지 않게, 그러나 깊게 사람의 마음을 울린다.

강력 추천.



배덕법. Immorality Act. 1927년.

"유럽인과 원주민 간의 불법적 성관계 및 그에 부수되는 행위를 금지한다".


미국 흑인 역사에만 익숙했던 나는 아프리카 남아공에서도 넬슨 만델라가 1994년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이전에는 그 못지 않은 잔인한 인종 차별 역사가 있었다는 걸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사실 나는 예전에 몇몇 백인 친구들이 어느 나라에서 왔냐는 질문에 남아공에서 왔다고 하면 응? 거기 아프리카 아냐?라는 무식한 질문을 해서 눈총을 받았던 적이 여러 번 있다;;). 흑인들끼리 싸우고, 흑인과 백인들끼리 싸우고, 흑인과 백인 사이에서 태어난 유색인들끼리도 싸우고. 


아파르트헤이트. Apartheid.  1994년 만델라 대통령 당선 후 폐지.

17세기 부터 시작해 1948년 확릭된 남아공의 인종 분리, 격리 정책 및 제도.


1994년 아파르트헤이트가 폐지되었어도 문제는 사라지지 않았다. 백인들은 여전히 많은 혜택들을 누렸으며, 이제는 흑인들끼리의 싸움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 안에서 트레버 노아는 사는 지역도, 학교도, 먹는 음식과 가질 수 있는 직업 모두 여전히 피부 색깔 하나도 결정되는 그 시기에 백인 아버지와 흑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유색인이라는 이유로 백인이 가지는 혜택을 누리는 동시에 백인, 유색인, 흑인이라는 3가지 정체성 사이의 혼란 속에서 평생을 아웃사이더로 살아가게 된다(책에서 트레버는 백인 아버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는 했지만 자신과 늘 함께 있는 가족은 모두 흑인이기 때문에 자신을 흑인이라고 정의내리지만, 주변에서는 그렇게 생각하도록 놔두지 않는다). 


이 책은 1부, 2부, 3부로 나누어져 있는데


1부에는 어린 시절의 이야기들이,

2부에서는 사춘기 시절,

3부에는 20대 성인이 되어 바라보는 남아공 시절의 이야기들이 있다.


그러니까 이 책에는 트레버 노아가 나중에 미국으로 넘어가 코미디언이 되는 과정과 지금처럼 유명인이 되는 과정은 없다. 그리고 만약 그런 내용들을 넣었다면 이 책의 사족이 되었을 것이다. 


"난 저 앨 때릴 수 없다."

"왜요?"

"피부가 흰 애를 어떻게 때려야 할지 모르겠거든. 흑인 아이를 때리는 법은 알아. 흑인 아이는 때려도 그대로 검은 색이야. 그런데 트레버를 네가 때리면 파래졌다가 녹색이었다가 노래졌다가 빨개지더구나. 그런 색은 난생처음 봤어. 내가 자칫 애를 때리다가 어디 부러뜨리지 않을까 걱정된다. 나는 백인을 죽이고 싶지 않아. 난 너무 두렵다. 그래서 쟤를 건드리지 않는거야." 그리고 실제로도 할머니는 그러지 않았다.  

(...)

흑인 가족들 사이에서 '백인'으로 사는 것에는 일일이 열거할 수 조차 없는 많은 혜택이 존재했다. 나는 그 시간을 즐겼다. (...) 나는 흑인 아이들에 비해 훨씬 관대한 처분을 받았다. 사촌들이라면 충분히 벌을 받고도 남을 짓을 해도 나는 경고만 받고 풀려났다. 심지어 나는 내 사촌들 누구보다도 더 못된 아이였다. 걔들은 감히 날 따라올 수 없었다. 뭔가가 깨지거나 할머니의 쿠키가 없어졌다면, 그 범인은 나였다. 나는 사고뭉치였다. 

(...)

그리고 늘 나만은 넘어가 주었다. 이렇게 자라다 보니 나는 이런 모든 혜택을 안겨 주는 시스템에 백인들이 얼마나 손쉽게 익숙해지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한 짓 때문에 사촌들이 대신 매 맞는 걸 알았지만, 나는 할머니의 생각을 바꿀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건 곧 나도 매를 맞게 된다는 건데, 대체 왜 그래야 하겠는가?

(...)

그 당시에 나는 특별 대우가 내 피부색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트레버'여서 그런 줄 알았다. '트레버가 백인이라고 매를 안 맞는거야'가 아니었다. '트레버는 트레버니까 매를 안 맞는거야'였다. (...) 주변에 나 말고 다른 혼혈아가 없으니 '아, 우리에게는 이런 일이 생기곤 하지'라고 생각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넬슨 만델라가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1994년 당선되어 남아공에서 일어나는 아파르트헤이트 폐지 전과 후의 교육 정책의 차이점이나 한 국가의 공식 언어로 11개로 채택되었다는 점, 여전히 흑인들이 주로 사는 지역과 백인들이 사는 지역, 그리고 유색인들이 사는 지역이 나누어져 있다는 점, 중국인은 흑인 취급을 받는데 일본인은 백인 취급을 받았던 당시 상황들에 대해서는 알면 알수록 놀라움 뿐이었지만, 나에게는 이 모든 것보다 가장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준 사람은 바로 트레버 노아의 어머니였다.  


엄마는 문제아였고, 말괄량이에 고집 센 반항아였다. 할머니는 엄마를 어떻게 키워야 할 지 몰랐다. 모녀간의 사랑은 계속된 싸움 속에 지워져 갔다. 


재밌는(?) 사실은 그래서 트레버 노아의 엄마는 자신의 엄마를 버리고 이혼한 아빠와 살겠다고 9살에 선언(!)을 하고 아빠를 따라가는데, 아빠도 딸과 살기 싫었기 때문에 아무 말 없이 그냥 차에 태워 자신의 누이 집에 떨궈버렸고, 그 곳에서 12살까지 다른 고아들과 섞여 새벽 4시반부터 하루종일 농장 노동 일을 하며 버텼다는 사실이다.  


"과거로부터 배우고 과거보다 더 나아져야 해." 


엄마는 말했다.


"하지만 과거를 슬퍼하지는 마라. 인생은 고통으로 가득해. 고통이 너를 단련하게 만들되, 마음에 담아 두지 마. 비통해하지 마라."


그리고 엄마는 그러지 않았다. 

어린 시절의 박탈감, 부모로부터의 배신감, 그 무엇에 대해서도 절대 불평하는 법이 없었다.



트레버 노아의 엄마는 부모로부터 생명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받은 적이 없지만 돈을 받으면 부양을 했고, 도망을 쳐서 스스로를 교육 시켜 "화이트 칼라 밑바닥인" 비서 일을 시작하고, 남아공에서 "상류층 언어"인 영어를 스스로 공부하고 그 뿐만 아니라 남아공에서의 다양한 부족들의 언어를 '혼열아를 낳은 창녀 취급 받는 나라에서 살기 위해' 공부했으며, 트레버에게도 영어와 수많은 남아공 언어들을 가르쳐 그 혼란 속에서 비록 평생 아웃사이더로 느끼며 살더라도 적응하고 살 수 있게 도와준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트레버를 낳았던 것도 강간이나 버림받아서 미혼모가 된 것이 아니라, 본인이 사랑하는 백인 남자와 진심으로 사랑하고 본인이 원해서 애를 낳았고 (아들 트레버에게 '나는 아무 조건없이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원했고, 그게 너다'라고 한다), 트레버를 낳고 나서도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는 남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며 백인 아버지와도 계속 연락을 하고 지내 트레버에게 부모의 부재와 공백을 느끼게 하지 않았다. 트레버 본인도 어머니의 사랑과, (같이 산 건 아니고 중간에 연락이 끊기기도 했지만) 백인 아버지의 사랑을 늘 느꼈다고 말한다. 


...이러한 강인한 여자가 후에 (비록 처음에 알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결혼한 남자가 결국 자신의 머리에 총을 쏘는 폭력적인 남자였다는 사실은, 그리고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동시에 남편이 전혀 법적인 처벌을 받지 않고 살아 남아 지금도 남아공에서 멀쩡하게 잘 살고 있다는 사실은 - 아파르테이트뿐만 아니라 남녀 인권에 대한 인식의 차이, 가정 폭력에 대한 사회의 인식 - 그건 집안 일이다 - 에 대해 많은 것을 고민하게 만든다. 



나는 다행히 엄마에게서 또 하나의 능력을 물려받았다. 

인생의 고통을 잊는 능력 말이다. 

과거의 기억들은 트라우마로 이어지기에 충분한 것들이었지만 나는 어떤 정신적 외상도 안고 있지 않다. 

나는 뭔가 고통스러운 기억이 새로운 도전을 막아서도록 놔두지 않았다. 

(...)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잠시 운 다음, 다음 날 개운하게 일어나서 계속 전진하는 편이 낫다. 

몸 곳곳에 든 멍 때문에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더라도 괜찮다. 얼마 지나고 나면 멍은 사라진다. 

그리고 거기엔 다 이유가 있다. 이제 다시 사고를 칠 때가 왔기 때문인 거다. 


트레버 노아의 다양한 이야기들 중 여기에 쓰고 싶은 이야기는 사실 더 많다. 


남아공의 아파르헤이트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상황들, 유대인과 히틀러의 이야기들이라든지, 남아공 내 처음 선교사들의 흑인들에 대한 교육과 남아공 '상류층' 백인들의 흑인들에 대한 교육과 그 정책 차이, 흑인, 백인, 유색인들간의 간격과 정체성의 문제 등등. 백인인 친아버지, 계부인 흑인 아버지, 나중에 태어난 두 동생들에 대한 이야기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건너띄고 싶은 이야기가 하나도 없을 정도로 나누고 싶은 이야기도 생각거리도 많은 책이다. 


트레버 노아도 멋있지만,

그보다 더 멋진 건 그의 어머니다.


특히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그리고 사회적으로도 그렇게 불안하고 억압 가득한 세상에서 그렇게 보무당당하게 살 수 있다니- 본받고 싶은 사람이다. 나는 늘 훌륭한 사람에게는 (한쪽만이라도) 늘 훌륭한 부모가 있기 마련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트레버 노아의 어머니는 그런 나의 가치관이 편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우쳐 줬다. 


여러 면에서 좋은 책이다. 강력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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