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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 경성 소년 ㅣ 우주나무 이야기숲 2
설흔 지음, 최아영 그림 / 우주나무 / 2025년 9월
평점 :
어린 시절, 나는 짧고 굵게 사는 삶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고흐처럼 평생을 인정받지 못해도 후대에 이름을 남기는 화가로서의 삶이나 안중근, 윤봉길, 유관순처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야말로 가치있는 삶이라고.
내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엄마는 고개를 흔들며 나는 그림 한 점 팔지 못하는 사람의 아내나, 안중근의사의 어머니나 부인, 딸로는 절대 살고 싶지 않다고 하셨다. 네가 커보면 알겠지만 차라리 이완용이나 윤덕영같은 자의 자손까지는 아니더라도 평범한 사람으로 가늘고 길게 사는게 얼마나 좋은지 알거라고 하셨고 나는 그런 아무것도 아닌, 아무것도 될 수 없는 삶은 속으로 싫다고 생각했다.
세월이 흐르고, 만 40세가 된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었다.
아무것도 아니고, 앞으로도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고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길 바란다. 어린시절 꿈꾸웠던 나라나 대의를 위한, 혹은 작가가 되거나 적어도 내가 일하고 있는 업계에서는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생각했던 10대의 나는 증발했다.
아마도 내가 일제강점기를 살았다면 나는 조용히 살았을 것이다. 창씨개명을 하라고 한다면 마을에서 1등으로는 못갔을지언정(눈치를 보느라) 누군가가 1등으로 했다고 하면 적어도 4등으로는 뛰어가서 했을 것이고, 애국지사들을 밀고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적극적으로 애국활동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용히, 그저 우리같은 사람들은 조선이건 일본이건 그냥 주어진 대로 순응하며 사는것이라고 했겠지.
사실 요즘 나는 참 재미가 없다. 그냥 공허하다. 10년을 함께 하는 불면증도 심하고, 사춘기가 된 딸에게 늘 새롭게 상처받는다. 직장에서도 큰 꿈이 없고 먼거리를 다니니 피곤하다. 나에게 주어진 책임만 막중한것 같고, 소소해도 즐거운 일이 없는것 같다.
그래서 드라마, 영화, 책 등 그 어떤 스토리를 봐도 큰 흥미가 없었다. 그런데 <1919 경성 소년>을 카페에 앉아 나도 모르게 1시간도 안되어 주욱 다 읽게 되었다. 독립운동가 강우규 선생님이 경성에 온 몇 일을 상상하여 그린 이 이야기는 65세(그 당시의 65세라면 정말 노인)의 꼬장꼬장한 할아버지가 조선총독부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둔 소년 이지호를 만나 당시의 경성을 잘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최훈(실제로는 시인 심훈)이라는 학생을 만나기도 하며 지호는 자신이 누려온 삶에 대해 물음표를 갖게 된다. 또한 굉장히 친한 친구인 일본인 산시로와의 유도 대결에 관한 고민을 강우규 선생님께 이야기하기도 하고.
그리고 이야기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 그대로, 변함 없이 강우규 선생님의 사형 선고가 이루어진다. 강우규 의사는 큰 뜻을 품고 목숨을 걸었지만 사실 그에 비해 일본에 입힌 피해는 미미했다. 그 부분에 대해 지호의 아버지는 이게 바로 조선의 문제라고도 이야기하신다.
그렇지만 지호는 강우규 선생님과의 만남을 통해 더욱 성장하게 되고, 나라와 민족이라는 거창한 생각이라고까지 말하기는 그렇지만 배재학당에 진학을 하며 분명 그는 이전의 지호와는 다른 모습이 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예전에 책을 좋아하던 10대 초중반의 나로 잠시 돌아갔던 것 같다. 온갖 걱정과 삶의 구질구질한 면들로 지쳐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와 생각에 귀를 기울이고 싶지 않았는데 이 작가의 이야기는 흡입력 있게, 그러면서도 편안하게 다가왔다.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역사공부를 막 시작한 초등학교 고학년 학생들부터 읽으면 좋을 책이다. 1919년하면 3.1운동만 떠올리기 마련인데 3월 1일이 흐른 그 날 이후에도 조선인들의 투쟁과 삶은 이어졌으니 말이다.
나는 정의를 위해 가슴이 뜨거웠던 적이 언제였을까.... 과연 다시 뜨거워지기나 할까.
잘못된 걸 보고도 이 악물고 참는 비겁한 중년의 내가 참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