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나약함과 결핍감을 발견하면서 과거에 그가 부재하거나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아빠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 ㅡ강인한 해결사ㅡ을 할 수 없을 때, (사라지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사라져야만 했다. (침묵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침묵해야만 했다. 가부장제는 약함을 여성성으로, 강함을남성성으로 환원하므로 아빠는 자신이 강하지 못할 때 보이지도, 말하지도 말아야 했다. 아빠 또한 남성의 감정을 억압하는가부장제의 피해자가 아니었을까?

스스로가 위태롭게 느껴질 때마다 아빠의 편지들을 읽었다. 이토록 나를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되새겼다. 나는 착한 딸이었다. 내가 아무리 못되게 굴고 모진 말을 해도 아빠에게 그것은 변하지 않는 진실이었다. - P166

공간의 분배에서 할머니와 가장 대비되는 사람은 엄마였다. 집안 상황이 좋았을 때 할머니에게는 할머니 방이, 나와 동생에게는 각자의 방이, 아빠에게는 취미생활을 위한 방이 있었다. 그러나 명문 빌라처럼 방이 넉넉했던 집에서도 엄마는 자기만의 방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 불공평을 인식한 뒤 내가 엄마만 방이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자 엄마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괜찮아, 집 전체가 다 내 방이지." 엄마의 뜻과 달리,그 말은 엄마의 처지를 정확하게 보여주고있었다. 며느리, 아내, 엄마인 여자는 집 안의 어느 곳에나 있어야 하므로 집 안의어느 곳도 소유해서는 안 되었다. 엄마는 장소 그 자체였다. - P141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는 없어도 원하는 하나쯤은 성취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혁명가, 모험가, 몽상가, 방랑자, 무정부주의자는 될 수 없어도 문학을 하는 사람은 될 수 있을 거라고생각했다. 하지만 문학을 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것은 혁명가,모험가, 몽상가, 방랑자, 무정부주의자를 모두 합친 사람이 되겠다는것이나 마찬가지다. - P92

서남부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인 정남규가 검거되었다. 열세 명이 사망하고 스무 명이 중상을 입은뒤였다.
왜 서남부지역이었나는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강남구 등 부유층이 사는 동네엔 CCTV가 너무 많아 범행을 저지를 수 없었습니다. 살인을 쉽게 하기 위해 방범시설이 갖춰져 있지않은 곳, 서민이나 저소득층이 거주하는 지역을 범행 장소로 삼았습니다."  -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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