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그녀는 아이스크림을 몹시 좋아해서 나는 종종 제과점에 그녀를 데리고 갔다. 그녀에게 아이스크림은 모든 아름다운것들의 척도였다. 나를 칭찬하고 싶으면 이렇게 말했다. "아빠는바닐라 맛이야." 그녀의 손가락에는 이름이 붙어 있었는데 하나는 피스타치오, 다른 하나는 바닐라, 세번째는 산딸기, 이런 식이었다.

 아침에 인사를 하러 들어오면 나는 그녀를 무릎에 앉히고 손가락 하나하나에 입을 맞추며 말하곤 했다. "바닐라 … 피스타치오…… 레몬 …지금도 나는 옛 생각을 해서 리자의 손가락에 입을 맞추며 중얼거린다. "피스타치오…… 바닐라.
레몬그러나 영 생각만큼 안된다. 나는 아이스크림처럼 냉랭하고, 그래서 창피하다. 딸아이가 내방에 들어와 관자놀이에 입술을 대면 나는 벌에 쏘인 사람처럼 흠칫 놀라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얼굴을 획 돌려버린다. - P17

 가끔 내가 자질구레한 빛 걱정에 연구를 중단하고 몇시간씩이나 방 안을 서성이며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도 본다. 그런데 어째서 그녀는 단 한번도 어미 몰래 나한테 와서 ‘아빠, 여기 제 시계랑팔지랑 귀고리랑 드레스가 있어요……… 다 전당포에 맡기세요. 아빼는 현금이 필요하잖아요..…‘라고 속삭이지 않는 것일까? 어째서 나와 아내가 허세에 굴복하여 다른 사람들한테 우리의 빈곤을숨기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을 뻔히 알면서 음악 공부라고 하는 저값비싼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는 것일까? 내가 시계나 팔찌 아니면그 어떤 희생이 탐나서 그러는 건 절대 아니다. 나는 그런 것 필요없다.
- P18

 "악한 것 없이는 선한 것도 없고 악은 언제나 선을 앞선다." 요컨대 모든 게 쓰레기에 불과하고 인생의 의미 따위는 없이며 내가 살아온 62년의 세월은 그냥 낭비일 뿐이라는 얘기다. 나는이런 생각에 빠진 내 자신을 추스르고는 그것은 우연하고 일시적인 생각이며 그다지 깊게 내 안에 뿌리내린 것도 아니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려 애쓰지만 동시에 이렇게 자문한다.
"만일 진짜로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매일 밤 저 두마리 두꺼비한테로 이끌리는 것이냐?"
그리하여 이제 다시는 까짜한테 가지 않겠노라 맹세하지만 나는 안다. 내일이면 다시 그녀를 방문하리라는 것을,
- P76

배우니 여배우니 작가에 관해서는 얼마든지 말해도 좋지만 예술만큼은 건드리지 말기로 해요. 아저씨는 훌륭하고 비범한 분이지만진심으로 신성한 예술 어쩌고 하시기에는 이해력이 모자라세요.
아저씨는 예술에 대해 감도 없고 귀도 없으세요. 평생 일을 해오셨지만 이 감을 획득할 시간은 없으셨겠지요. 일반적으로…… 아니,
예술에 관한 이 대화는 불쾌하군요!"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지껄였다. 불쾌하다고요! 예술은 이미 충분히 속악해졌으니 더이상은사절합니다!"

"누가 속악하게 만들었냐?"
"누군가는 고주망태가 되어 예술을 속악하게 만들었고, 신문은대중한테 아부하느라 속악하게 만들었어요. 똑똑한 인간들은 철학으로 속악하게 했죠."
"철학이랑은 아무 상관도 없어."
"상관있어요. 누군가가 무언가를 철학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한다면 그건 즉 그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의미해요."
- P89

침묵이 찾아온다. 까짜는 머리를 매만지고 모자를 쓰고 편지들을 구겨서 가방 속에 집어넣는다. 이 모든 것을 조용히 서두르는기색 없이 한다. 그녀의 얼굴도 가슴도 장갑도 눈물에 젖었지만 표정만큼은 벌써 건조하고 엄격하다…… 그녀를 바라보는 동안 내가 그녀보다 행복하다는 사실 때문에 부끄러워진다. 동료 철학자들이 공통이념이라 부르는 것이 내 안에 없다는 걸 나는 인생의 황혼에, 죽음을 목전에 둔 최근에 와서야 알아차렸다. 그런데 이 가엾은 녀석의 영혼은 이제까지도 안식이란 걸 몰랐지만 앞으로도 평생, 한평생 모를 것이다!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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