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꿈꿨던 ‘진짜 부모님은 동화 속에 흔히 등장하는 돈 많은 부자나 귀족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일본인이었다. 겨우 일고여덟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가 어떻게 그런 몽상을 했던 것일까? 누군가 "어린아이의 세계에 민족 차별이란 없다" 고 했다. 그 말은 진정 사실일까?

실제로 당시 어린 나의 머릿속에 민족이나 국가 같은 거창한 관념은 싹트지않았었다. 하지만 나 자신이 주위의 아이들과 다른 소수파라는 사실은 잘 알고있었기에 그 점을 막연하게나마 불행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쉽게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이른 시기부터, 아니 세상에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소위 오염된 공기를 호흡하는 것처럼 이른 세계에 가득찬 고뇌와 비애를 그 작은 몸에 받아들이는 듯하다.
- P46

1970년대말, 당시 한국에서 영어의 몸으로 고생하고  있던 셋째형이 나에게 "독서란 도락이 아닌 사명이다" 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 일이 있다. 서재나 연구실에서 씌어진 말이 아니었다. 고문이 가해지고, 때로는 ‘징벌‘
이라 부르던, 수개월 간이나 계속된 독서 금지처분을 당하던 상황에서 써 보낸편지였다.

나는 곧바로 형의 이 말을 나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으로 받아들였다. 항변의 여지가 없었다.한 순간 한 순간 삶의 소중함을 인식하면서, 엄숙한 자세로 반드시 읽어야할 책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독서, 타협 없는 자기연찬으로서의 독서.
인류사에 공헌할 수 있는 정신적 투쟁으로서의 독서,
그 같은 절실함이 내게는 결여돼 있었다. 꼭 읽어야 할 책을 읽지 않은 채, 귀중한 인생의 시간을 시시각각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 P146

자신이 재일조선인이라는 사실, 바로 그 소외의 상황을 의식하는 일이야말로 전진을 가능하게 한다. 그 전진이란 다름 아닌 답답하고 옹색하게 굴절된 일상에서 광활한 보편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전인적 인간의 승리." 일본사회 한 구석에서 끙끙 가슴앓이를 하고 있던 재일조선인인 나 역시도 그 승리의한 자락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 P22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