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화가들이 시민들의 환영을 받은 것과 달리 고야는 시민들의환영을 받을 수 없었다. 프랑스에서는 화가들이 혁명의 기억을 그림에담고 그 성과를 변호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화가들에게 요구된 새로운시민계급적 기능이었다. 그러나 스페인에서는 독립전쟁에서 싸워 살아남은 민중계층이 전쟁 후 부르봉왕조의 노예로 전락했기에 고야를 비롯한 화가들은 프랑스에서처럼 새로운 사회적 기능을 담당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야는 민중으로부터 단결이라는 새로운 연대의 삶을 발견하여 그림을 그렸다는 점에서 위대하다. 고야는 프랑스 혁명에 의해서도 해방되지 못한 민중의 저항과 고통을 그렸다. 이는 다비드를 비롯한 프랑스 혁명의 공식화가들, 특히 다비드가 혁명화를 완전히 보수적인 역사화의 기법으로 그린 점과 지극히 대조적이다. - P291
내용 면에서도 <5월2일>은 혁명이다. 시민에 의한 항의 행동을 그린 최초의 그림으로, 고야 이후로 이 주제는 프랑스에서 필수 불가결하고 일반적인 것이 된다. 이로 인해 19세기 프랑스의 불안한 정치사와 동시대 역사를 기록하고자 하는 새로운 연대기로서 ‘항의적 회화‘를 정착시켰다. 우리나라에서 서양화 역사는 매우 짧다. 우리의 서양화 역사에서도 그러한 근대적 경험이 있었더라면 20세기 초엽부터 파리의 유행을정신없이 모방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1830년, 들라크루아가 고야를 본받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1867년에는 마네가 〈황제 맥시밀리안의 처형을 그린다. 또한 도미에(Honore Daumier, 1808~1879)와 쿠르베(Gustave Courbet,1819~1877)가 민중의 봉기를 그린 것도 고야로부터 출발했다.
- P293
나는 고야가 왕과 왕비를 비롯한 왕족뿐만 아니라 자신이 그린 사람들 모두를 샅샅이 알고 그린 것만 같다. 여기서 ‘리얼리즘에 대해서 설명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고야의 그림을 볼 때면 바로 이게 리얼리즘이다‘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고야에게서 느껴지는 살 냄새나 땀 내음을 그 어떤 화가에게서도 맡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술사에서 ‘리얼리즘의 선구‘라고 평가되는 벨라스케스나 ‘리얼리즘의 완성자‘라고 하는 쿠르베에게서조차도 말이다. 나는 벨라스케스에게서 그저 신비로운 창백함만이 보이고 쿠르베에게서는 굳어진 살덩이만이 보일 뿐이다 - P3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