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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부학자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부학 책 《그레이 아나토미》의 비밀
빌 헤이스 지음, 양병찬 옮김 / 알마 / 2020년 3월
평점 :
장기 기증 신청서를 앞에 두고 두려움이 밀려왔다. 뇌사자는 신장, 간장, 심장, 폐장, 췌장, 췌도, 소장, 안구, 손, 팔, 발, 다리 등을, 사후기증자는 안구, 뼈, 연골, 피부, 인대, 심장판막, 혈관 등 인체 조직 기능을 줄 수 있다. 몸의 일부를 “떼어 낸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죽음이 가까이 다가왔다. 몸의 일부를 선택할 수도 있다는데 어느 부분을 희망해야 할까. 해부학자의 눈을 빌려 인체에 대해 알고 나면 죽음의 “무작위성과 근접성”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작가 빌 헤이스는 의학과 과학 관련 칼럼과 기사를 꾸준히 써왔다. 어릴 적부터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마티스의 그림을 보며 “예술로서의 관능적인 몸”에 빠져들었다. 이후 여러 의학책을 읽으면서 인체에 관한 관심을 키워나갔다. 이 책은 해부학의 교과서라 불리는 <그레이 아나토미>의 저자 헨리 그레이와 삽화가 헨리 카터의 전기, 그리고 작가 자신의 해부실에서의 수련기를 담고 있다.
그레이의 전기를 쓰기 위해 헤이스는 1년 동안 세 번에 걸쳐 해부학 강좌에 참여한다. 참관인이 아닌 실습생들과 같이 메스를 들고 직접 해부도 한다. 약대생, 물리치료학과생, 의대생들과 해부학 수업을 함께한 저자의 기록은 생생하고도 섬세하다. 직접 장기를 만지며 묘사하고, <그레이 아나토미>에서 나오는 해부방식을 따라 절제한다. “폐가 텅 비고 가벼울 거라고 생각했지만 조직이 치밀하고 젖은 수세미 정도의 굳기를 갖고 있어요.” 그레이의 충고를 따라 많은 지방에 둘러 싸여 있는 콩팥은 시신을 뒤집어 마지막 갈비뼈에서 약 2센티미터 더 내겨간 곳에 메스를 긋는다.
한편, 저자는 삽화가인 카터가 쓴 일기를 따라 <그레이 아나토미>를 집필한 헨리 그레이의 삶을 추적한다. 1855년 그레이와 카터는 학생들을 위한 해부학 책을 편찬에 돌입한다. 그들은 학생들에게 적당한 가격에 내용이 정확한 강의 교재를 만들고자 했다. 기존에 3부작으로 나왔던 퀘인의 <해부학 요강>보다 단행본으로 만들어 학생들이 가볍고 휴대하기 쉬운 크기로 작업을 했다. 카터는 시간 절약을 위해 일부 삽화를 다른 해부학에서 복제했다.
인체의 기록을 남기기 위한 헨리 그레이, 카터 그리고 빌 에이스의 노력은 눈부시다. 그레이의 명성에 가려져 줄곧 고독감과 외로움 속에서 그림 작업을 했던 카터가 이 책의 주인공이 아닐까 싶다. 카터는 <그레이 아나토미> 집필을 마치고 인도에서 해부학교수로 후배들을 양성한다. 한센인들의 치료를 위한 연구와 인도 노동자들의 발이나 손에 생기는 균종에 관한 연구를 꾸준히 이어갔다.
빌 헤이스가 직접 메스를 들고 인체를 해부하며 느낀 경이로움은 고스란히 독자들에게 전해진다. 실습강사와 동료들과의 다채로운 일화는 우리를 해부실 현장으로 데려간다. 저자는 우리의 인체가 체계적인 구조 속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우리 몸은, 우리 삶은 꾸준히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해부실에서 그 생명의 박동 소리를 재생해 본다.
“무릎, 어깨, 팔꿈치, 관절을 해부하며 인간의 운동 메카니즘을 빠삭히 알게 되었다. 눈을 깜빡이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든, 팔,다리를 빠르게 움직이며 폐를 들썩이든 운동이란 뭔가를 향해 질주하는 것이다. 목표점을 향해, 결승선을 향해, 최선을 다해 맨끝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