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작곡가 페린씨에게

 

스트릭랜드처럼 고립된 타히티 산속으로 도망치지 못하고 런던에 남겨진 페린씨. 포레스트 힐 도로가에 움막을 치고 오선보로 벽지를 두를 수밖에. 어둠이 내린 방에는 바닥에 눌어붙은 침대와 피아노 한 대만이 놓여 있다. 피아노 한 대면 충분한 세상.

    

 

여자 친구는 일주일에 3번만 방문이 가능했다. 곡을 쓰고 피아노를 치는 시간외의 것들은 모두 소음이었다. 노을이 커튼 사이로 젖어들면 출근 세수를 할 시간. 그는 지난 밤 아니, 세달 전부터 썼다 지워지기를 반복하는 악보 위 음표들을  내려놓지 못한다. 사라질까 두려워 붙들고 늘어져야 하지만, 밥벌이에 서둘러야 할 시간. 가슴 주머니와 바지 주머니에 선율들을 주섬주섬 담고 넥타이를 두른다. 살그락거리는 아내도, 달그락거리는 아이도 없기에, 현관문은 그냥 닫으면 된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템즈강 남쪽을 향해 쏟아져 내려오는 양복 물결 사이로 한 사나이가 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선율을 놓쳐서는 안 된다.” 가슴을 매만지고 또 매만진다. 그의 이름이 새겨진 공연 소식이 런던 시가지에 펄럭인다. 이제 그 이름 가지고 곡 쓰고 , 학생들을 가르치면 하루벌이 그만해도 되지 않나. 하지만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매일 피아노 연주하는 것을 숙명이라 여기는 당신. 오늘도 호텔 바, 레스토랑, 클럽 뒤편에 놓인 피아노 앞에 앉아, 출석부에 작대기 하나 긋는다.

    

 

두려운 고요와 고독에서 탄생한 음악은 한 개인을 넘어 다른 음악가들과 손을 잡는다. 악보는 첼리스트, 하프 , 트럼본, 타악기 연주자를 한데 모아 하나의 하모니를 만들어 낸다. 함께 피아노를 치며 지휘하는 그는 완벽한 웃음을 짓는다. 한밤중에 흘렸을 그의 눈물은 그 누구도 보지 못했다.

    

 

아마존 밀림지역 보호를 위한 음악을 만들고, 프리모 레비의 글을 바탕으로 곡을 쓰고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이들을 위한 영화음악을 만들면서, 그의 음악은 한 개인에서 인류애로 걸어 나간다. 그는 악보 안에서 유토피아를 노래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받아든 사진 한 장.

결혼을 믿지 않는다는 그가, 한 손에는 어린 아이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오선보에 곡을 쓰고 있다니! 서머싯 몸이 현실과 예술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요구에 그는 절충안을 택했다.

 

페린씨,

오늘 밤엔 어떤 곡을

쓰고 계시나요?

    

 

 

 

 

    

결국 내가 받은 인상이란 정신의 어떤 상태를 표현하고자 하는 거대한 안간힘이 거기에 있었다는 점이었다. 나를 그처럼 당황하게 만든 원인도 바로 그러한 면에 있는 것 같았다. 스트릭랜드에게는 색채와 형태들이 어떤 특유한 의미가 있음이 분명했다. 그는 자기가 느낀 어떤 것을 전달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었고, 오직 그것을 전달해야겠다는 생각만을 가지고 그림을 그려냈던 것이다. - P212

우주의 혼을 발견하고 그것을 표현해 내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그 그림들에 혼란과 당혹감을 느꼈지만 한편으로 너무나 뚜렷이 드러나 있는 정서에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왠지 모르게 나는 스트릭랜드에게 꿈에도 기대하지 않았던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억누를 수 없는 어떤 공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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