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생 -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자서전, 어느 비평가의 유례없는 삶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지음, 이기숙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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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문학을 읽을 때 시대적 배경이 생소할 때가 많아 줄거리만 겨우 파악하는 경우가 많다. 옮긴이가 쓴 작가의 생애, 인물, 시대 상황에 관한 해설은 소설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나아가 전문가가 쓴 평론이나 서평을 접하면 그 소설만의 의의를 구체적으로 알게 되어 작품에 애착이 생긴다. 독일의 비평가,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는 1960년부터 40년간 8만권이 넘는 책에 대해 글을 썼다. 바르샤바 게토에서 “장편소설은커녕 단편도 읽을 처지가 아니었”던 그가 어떻게 문학과 함께 버텼는지, 대중들이 문학을 가까이 하도록 어떠한 노력했는지 그의 증언이 여기 있다.

 

라이히라니츠키는 9살이 되던 해, 폴란드에서 베를린으로 이주한다. 김나지움에 다니며 시간이 날때마다 실러와 셰익스피어의 희곡,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스탕달, 오스카 와일드 소설 등 유럽 문학을 두루 읽었다. 특히 어린이들을 위해 글을 썼던 에리히 케스트너의 ‘현실감 있는 일상어’에 매료된다. 1938년 유대인 강제추방령에 의해 그는 폴란드로 떠나게 된다. 독일인들에 의해 추방당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독일 문학이 그와 함께 했다. “나를 내쫓은 나라를 떠날 때 가지고 나온 것은 바로 언어였다. 그리고 문학이었다. 그건 독일어였고 독일 문학이었다.”

 

바르샤바에서도 라이히라니츠키는 독일문학을 찾아 다녔다. 1933년 이후 토마스만, 하이린히 만, 슈테반 츠바이크, 브레히트 등, 그들이 망명지에서 무슨 글을 썼는지 알고 싶어 했다. 라이히라니츠키는 폴란드의 현대 시문학에도 빠져들어 독일과 폴란드 문학세계에 친숙하게 된다. 바르샤바 게토 안 유대회에서 폴란드어, 독일어 번역일을 하며 평론을 쓰기 시작한다. 유대인 말살 정책이 심화되어 가던 중, 라이히라니츠키 부부는 수용소행 행렬에서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한다.

 

이후 라이히라니츠키는 폴란드에서 방송국 일을 하면서 독일 문학에 관한 글을 썼다. 특히 헤르만 헤세에 관한 글을 많이 발표했는데, 그는 폴란드에서 헤세와 그의 인생 여정, 작품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어 하는 독자가 거의 없다는 걸 의식했다. 그는 늘 독일 독자를 염두에 두고 글을 썼다. 독일 어디서 무슨 일을 하며 먹고 살지 모르나, 일단 체류기간 91일짜리 여권을 가지고 그는 서독으로 향한다.

 

서독에 도착한 후 바로 그는 ‘디 차이트’와 ‘디 벨트’등 주간지에 서평을 쓰기 시작한다. 1960년대에 무명에 가깝거나 전혀 알려지지 않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 좌파 사상가와 공산주의 사상 작가들의 작품에 대해 주로 썼다. 47그룹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독일 작가들과 비평가들과 활발히 교류해 나가며 텔레비전 방송에도 기획한다. <문학 4중주> 프로그램을 맡은 그는 문학을 쉽게 설명하며 대중들이 문학에 관심을 갖게끔 노력한다.

 

훌륭한 평론가는 “언제나 명료함을 위해 글을 단순하게 쓰는 사람”이라고 말하며 라이히라니츠키는 항상 일반 독자를 향해 글을 썼다. 그의 평론을 읽은 독자들은 어떤 책을 그가 좋아하는지 아닌지를 쉽게 알 수 있다며 고마워했다. “문학을 공적인 자산으로 만들려는 장대하고 이상적인 시도”를 그는 업이라 여겼다. 라이히라니츠키의 자서전은 그의 평론처럼 단순명료한 문장으로 쓰였다. 그의 솔직한 비평만큼이나 그가 만난 수많은 작가, 음악가, 주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때론 신랄하고 때론 정겹다.

 

한 유대인 비평가의 생애는 갈등과 불안의 연속이었다. “독일인 선생이 들었던 회초리에 대한 두려움, 독일의 집단수용소에 대한 두려움, 독일의 가스실에 대한 두려움, 독일의 야만성에 대한 두려움.” 문학을 향한 사랑을 대중과 나누고자 하는 의지가 그의 삶을 끝까지 지탱해 주었다. 이제 독일 문학을 읽고나면 라이히라니츠키는 그 작품을 어떻게 평했을지 궁금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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