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을 완성한 것은 어리석음과 아집과 독선이었다. 극악한 식민지 상태에서 갓 벗어난 사람들에게 대화와 타협의 매너를 기대하기는 무리였다. 관대함과 현명함의 미덕은 굶주림과 인권유린이 없는 환경에서 훈련되는 것이다. S. 174-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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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론이나 참정권을 이야기하던 문과 체질의 조선 지식인들이 1031년 만주사변을 지나고 1937년 지나사변을 거치면서 점점 호전적으로 변해갔다. 일종의 군국주의 중독이었다. 일본 관동군이 6개월만에 만주를 해치웠다는 데 놀랐고, 그다음 중국 본토를 파죽지세로 먹어 들어갈 때 놀람은 찬탄으로 바뀌었다. ‘우리는본을 못 이긴다‘는 데서 독립 대신 자치론이 생겨났는데, 일본이생각보다 훨씬 강하다고 느꼈을 때 그들은 강한 형을 가진 행복한 동생이 되기로 했다. S.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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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여자 1 - 20세기의 봄
조선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1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유전자에 새겨진 모험과 자존과 충동의 강렬함이 그녀를 움직였을 뿐이다. 그래서 그녀는 마음에 안 들면 떠났다. 떠나는 건 쉬웠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가장 하책이었다. 이제는 머무르고 눌러두고 견디는 걸 배워야 한다. 인내는 나이가 주는 선물이다.
‘떠날 때와 머물 때, 버릴 때와 견딜 때를 알면 중년이 되었다는 뜻잉까. 그것을 성숙이라 부르는 걸까.’ S.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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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난 예수가 부활했다고 믿지 않는다. 나는 한 인간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돌아왔다고 믿지 않는다. 다만, 사람들이 그걸 믿을 수 있다는 사실이, 나 자신도 한때 그걸 믿었다는 사실이 날 궁금하게 만들고, 날 매혹시키고, 날 불안하게 하고, 내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다(어느 것이 가장 적합한 표현인지는 모르겠다). 내가 이 책을 쓰는 목적은 내가 더 이상 부활을 믿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믿는 이들보다, 그리고 그것을 믿었던 나 자신보다 더 잘 안다고, 더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나는 나 자신을 너무 두둔하지 않기 위해 이 책을 쓴다. (570)

자네는 자기가 믿지 않는다는 걸 미리부터 전제로 깔아 놓음으로써, 또 자신이 자네가 얘기하는 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알고 우월하다는 것을 분명히 해놓음으로써,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었으며 무엇을 믿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스스로 차단해 버리고 있어. 바로 그런 지식을 경계해야 해. 자네가 그들보다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하면서 시작하지 말라고. 그들을 가르치려 하기보다는, 그들로부터 배우려고 노력해 봐. 이것은 자네가 믿지 않는 것을 믿으려고 애쓰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문제야. (657)

그렇다면 내가 <기독교인>이라고 부르는 것, 나로 하여금 <그렇습니다, 나는 기독교인입니다>라고 대답하게 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간단히 그의 심연과도 같은 의혹 앞에서 <혹시 누가 알아?>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불가지론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른다는 사실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또 우리는 알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은 확정 지을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장클로드 로망이 그 영혼 깊은 곳에 도사린 그 거짓말쟁이 말고 다른 무엇과 관계하고 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는 것이다. 바로 이 가능성이 우리가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것이며, 내가 로망에게 나는 그리스도를 믿는다. 혹은 믿으려고 노력한다고 말한 것은 단순히 외교적인 방편만은 아니었다. 만일 그리스도가 이것이라면, 심지어 나는 아직도 그를 믿고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것이다. (702-703)

베드로는 모두가 알다시피 예수가 그 위에 자기 교회를 세우고자 한 바위였을 뿐 아니라, 또한 신발 속 돌멩이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는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바위, 그리고 삶을 엉망으로 만드는 돌멩이, 양쪽 다였다. 우리 모두가 그렇다. 우리가 신을 믿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나 신에게 든든한 바위이기도 하고, 한심하기 짝이 없는 돌멩이이기도 하다. (799)

내게 가장 놀랍게 느껴지는 것은 교회가 애초의 상태에서 이렇게나 많이 멀어졌다는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이 애초의 상태를 이상으로 삼고서,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을지라도 그것에 충실하려고 그토록 애써왔다는 사실이다. 교회는 단 한 번도 애초의 상태를 잊어 본 적이 없다. 한 번도 그 어린 시절의 우월성을 인정하기를 멈춰 본 적이 없다. 마치 진리가 거기에 있는 것처럼, 마치 어린 시절에서 남아 있는 부분이 성인의 최상의 부분인 것처럼, 거기로 돌아가려는 노력을 중단해 본 적이 없다. (......) 기독교는, 그것의 가장 맹렬한 비판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동일하게, 그것의 절대적 진실의 순간은 예수가 갈릴래아에서 말씀을 전하다가 예루살렘에서 죽게 된 그 2-3년 동안이라고, 그리고 교회는 거기에 가까워질 때만이 살아 있다고 믿는 것이다. (994-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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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그들이 찾는 것을 발견하면 - 그들은 거의 실패하지 않는다 - 편견이라는 코트를 버려 알몸의 이성을 남겨놓는 대신, 이성이 포함된 대로 편견을 지속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성을 지닌 편견은, 행동에 그 이성을 부여하는 동력을 보유하며, 행동에 영속성을 부여하는 애정을 지니기 때문이다. 편견은 위급시에 쉽게 이용할 수 있다. 편견은 정신을 미리 지혜와 덕성의 꾸준한 길을 따르도록 하고, 결정의 순간에 사람들을 회의하고 당황하고 미결상태에서 망설이도록 두지 않는다. 편견은 미덕을 습관으로 만들지, 서로 연결되지 않는 행위의 연속 상태로 버려두지 않는다. 정당한 편견을 통해 의무는 본성의 일부가 된다.
당신네 문필가들과 정치가들 그리고 우리나라의 이른바 계몽된 당파 전체는 근본적으로 이러한 점에서 다르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지혜를 존중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들의 지혜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확신함으로써 그를 벌충한다. 그들에게는 오래된 구조를 파괴할 충분한 동기가 되는 것이, 그것이 오래되었다는 이유다. 새로운것에 대해서는 졸속으로 지은 건물의 내구성에 관해 어떤 걱정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 시대 이전에는 거의 또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발견에 모든 희망을 거는 사람들에게는, 내구성이 목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영속성을 부여하는 모든 것은 해롭다고 매우 체계적으로 인식하므로 모든 기존제도에 대해 앙심을 품은 전쟁을 벌인다. 그들은 정부가 드레스 유행처럼 별 폐해 없이 변경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국가의 헌법에 대해 현재의 편의에 관한 감각을 제외하고는 애착의 원리가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견해를 지닌 듯이 말하고 다닌다. 즉 그들과 통치자들 사이에는 하나의 독특한 계약이 존재하는데, 통치자는 규제하지만 상호 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민중의 권위는 자신의 의사 이외에 어떠한 이유도 필요하지 않은 채 그 계약을 해지할 권리를 보유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자기 나라에 애착을 갖는 것은, 그들의 덧없는 기획들에 국가가 동의할 때뿐이다. 그 애착은, 그들의 일시적 의견과 합치되는 국가 설계와 더불어 시작하고 끝난다. (159-160)

그러나 프랑스에서 행해지는 그러한 사업에서는, 이러한 모든 보조적 감정과 방책들이 별로 쓸모가 없다. 정부를 세우는 일에는 대단한 신중함이 필요치 않다. 권력의 자리를 안정시키고, 복종을 가르치면 일은 완수된 것이다. 자유를 부여하는 일은 더욱 쉽다. 지도할 필요가 없다. 고삐를 놓아버리는 일만이 필요하다. 그러나 자유로운 정부를 형성하는 작업은, 즉 자유와 억제라는 이 반대 요소를 조정하여 하나의 일관된 작품 속에 가두는 일은 많은 사려, 깊은 성찰, 현명하고 강력하며 결합하는 정신을 필요로 한다. 그러한 정신을 국민의회를 지도하는 사람들 속에서는 찾을 수 없다. 아마도 그들은 보기처럼 실제로도, 그렇게 가련하게 능력 부족은 아닐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 편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을 보통 사람들 이해력보다 더 낮게 두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도자들이 대중 인기의 경매장에서 스스로 응찰자로 나서기로 했을 때, 그들의 재능은 국가 건설사업에서는 쓸모가 없을 것이다. 그들은 입법자인 대신에 아첨꾼이 될 것이다. 민중의 지도자가 아니라 민중의 도구가 될 것이다. 만일 그들 중 하나가 현명하게 한정되고 적절하게 제한된 자유 계획을 제안한다면, 그는 즉시 더 화려하게 민중에 영합하는 무언가를 만드는 경쟁자에게 뒤지고 말 것이다. 대의에 대한 그의 충성심에 의혹이 제기될 것이다. 온건함은 비겁한 자의 미덕이라고 낙인찍힐 것이며, 타협으 배반자의 현명함이라는 오명을 얻을 것이다. 끝내 그 민중 지도자는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을 조절하고 규제할지도 모를 명성을 유지하려는 희망에서, 그가 궁극적으로 지향했던 신중한 목표를 모두 결국 파괴시켜버릴 교리를 설파하고 권력을 수립하는 데 적극적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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