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난 예수가 부활했다고 믿지 않는다. 나는 한 인간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돌아왔다고 믿지 않는다. 다만, 사람들이 그걸 믿을 수 있다는 사실이, 나 자신도 한때 그걸 믿었다는 사실이 날 궁금하게 만들고, 날 매혹시키고, 날 불안하게 하고, 내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다(어느 것이 가장 적합한 표현인지는 모르겠다). 내가 이 책을 쓰는 목적은 내가 더 이상 부활을 믿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믿는 이들보다, 그리고 그것을 믿었던 나 자신보다 더 잘 안다고, 더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나는 나 자신을 너무 두둔하지 않기 위해 이 책을 쓴다. (570)
자네는 자기가 믿지 않는다는 걸 미리부터 전제로 깔아 놓음으로써, 또 자신이 자네가 얘기하는 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알고 우월하다는 것을 분명히 해놓음으로써,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었으며 무엇을 믿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스스로 차단해 버리고 있어. 바로 그런 지식을 경계해야 해. 자네가 그들보다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하면서 시작하지 말라고. 그들을 가르치려 하기보다는, 그들로부터 배우려고 노력해 봐. 이것은 자네가 믿지 않는 것을 믿으려고 애쓰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문제야. (657)
그렇다면 내가 <기독교인>이라고 부르는 것, 나로 하여금 <그렇습니다, 나는 기독교인입니다>라고 대답하게 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간단히 그의 심연과도 같은 의혹 앞에서 <혹시 누가 알아?>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불가지론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른다는 사실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또 우리는 알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은 확정 지을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장클로드 로망이 그 영혼 깊은 곳에 도사린 그 거짓말쟁이 말고 다른 무엇과 관계하고 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는 것이다. 바로 이 가능성이 우리가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것이며, 내가 로망에게 나는 그리스도를 믿는다. 혹은 믿으려고 노력한다고 말한 것은 단순히 외교적인 방편만은 아니었다. 만일 그리스도가 이것이라면, 심지어 나는 아직도 그를 믿고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것이다. (702-703)
베드로는 모두가 알다시피 예수가 그 위에 자기 교회를 세우고자 한 바위였을 뿐 아니라, 또한 신발 속 돌멩이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는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바위, 그리고 삶을 엉망으로 만드는 돌멩이, 양쪽 다였다. 우리 모두가 그렇다. 우리가 신을 믿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나 신에게 든든한 바위이기도 하고, 한심하기 짝이 없는 돌멩이이기도 하다. (799)
내게 가장 놀랍게 느껴지는 것은 교회가 애초의 상태에서 이렇게나 많이 멀어졌다는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이 애초의 상태를 이상으로 삼고서,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을지라도 그것에 충실하려고 그토록 애써왔다는 사실이다. 교회는 단 한 번도 애초의 상태를 잊어 본 적이 없다. 한 번도 그 어린 시절의 우월성을 인정하기를 멈춰 본 적이 없다. 마치 진리가 거기에 있는 것처럼, 마치 어린 시절에서 남아 있는 부분이 성인의 최상의 부분인 것처럼, 거기로 돌아가려는 노력을 중단해 본 적이 없다. (......) 기독교는, 그것의 가장 맹렬한 비판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동일하게, 그것의 절대적 진실의 순간은 예수가 갈릴래아에서 말씀을 전하다가 예루살렘에서 죽게 된 그 2-3년 동안이라고, 그리고 교회는 거기에 가까워질 때만이 살아 있다고 믿는 것이다. (994-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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