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는 인간이 이해하기 힘든 불가사의한 존재이다. 그러나 상대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오는 두려움은 상대방에 대한 믿음과 스스로의 노력과 투쟁에 의해서 사라지게 되고, 우리에게 고통만을 주는 것처럼 보이던 존재는 환희를 주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작품해설 중) - P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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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에서 리처드의 즉위는 그 주변에 있는 인물들이 다양하게 공모에 가담함으로써 가능해진다. 그러나 극장에서는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우리 관중들이 아주 독특한 형태의 협력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악당의 악행을 지켜보면서 저게 성공하면 안된다고 하는 마음 다른 한편으로 저게 성공하는 게 아닐까, 혹은 성공하면 그다음은 어떠헥 될까. 더 나아가 저게 성공했으면 하고 은근히 기대하는 마음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옮긴이). 우리는 악당의 잔인무도함, 예의 규범에 대한 철저한 경멸, 아무도 믿지 않지만 그래도 효력을 발휘하는 거짓말 등에 매혹되고 또 매혹된다. 무대에서 우리 관중을 바라보면서 리처드는 우리에게 그런 노골적인 경멸과 거짓말에 동참하라고 초청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혐오스러운 악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한번 굴복하는 생생한 체험을 해보라고 권유한다. - P113

독재자는 미래를 적으로 삼는 것이다.
유령의 출현은 독재자의 억압된 양심의 상징이라기보다는 심리적 타락의 상징이라고 보아야 한다. - P146

"리처드 3세"에서 셰익스피어는 자기애와 자기혐오 사이에서 번민하는 포위된 독재자를 묘사했다. "맥베스"에서 극작가는 그보다 더 깊게 들어간다. - P151

인생의 무의미에 대한 이런 허전한 체험은, 일부 부조리한 현대극에서처럼 인류의 실존적 조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드라마는 그런 무의미함이 정확하게 폭군의 운명에 해당하는 것임을 강하게 주장한다. - P151

독재의 효과는 권위의 전반적 구조를 전도시킨다. 적법성은 더 이상 국가의 중심에 있지 않다. 오히려 국가 폭력의 희생자에게 있다. - P175

그러니까 국가가 불안정하고 충동적이고 보복적인 독재자의 손아귀에 들어가면, 통상적인 국가의 견제 장치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 P177

셰익스피어는 독재자들이 권세를 오래 누린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이 권좌에 부상하는 방식이 아무리 영리하다고 해도, 일단 권좌에 오르면 그들은 아주 무능하다는 것이 밝혀진다. 그들이 통치해야 하는 국가에 대하여 아무런 비전을 갖고 있지 못하므로, 그들은 지속적인 지지를 끌어내지 못한다. - P192

셰익스피어는 평민들이 독재에 맞서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공허한 구호로 쉽게 조종되고, 위협에 겁을 먹고, 사소한 뇌물을 받아먹는 등 자유의 믿음직한 옹호자가 되기 어렵다고 보았다. 셰익스피어의 세계에서 독재자에 저항하면서 살해하는 사람은 결국 그 독재자와 같은 엘리트 계급에서 나온다. 그렇지만 셰익스피어는 "리어왕"에서 독재자에 대한 민중의 저항을 잘 보여주는 인물을 창조했다. - P195

그의 작품들은 기존 지도자들에 대한 폭력-특히, 이른바 원칙을 앞세운 폭력-에 깊은 혐오감을 표시한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정부가 승인한 진부한 아부의 말들에 대해서도 혐오감을 드러낸다. - P242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셰익스피어는 평생에 걸쳐서 공동체가 붕괴하는 방식들을 깊이 명상해 왔다. 인간성에 대한 예리한 통찰과, 민중 선동가들이 부러워할 만한 수사적 재능을 발휘하여 셰익스피어는 혼란한 시대에 군중의 저열한 본능에 호소하면서 그들의 깊은 불안을 자신의 동력으로 사용하는 사람(독재자)을 아주 능숙하게 묘사한다. 그가 볼 때 당파 정치에 깊이 함몰된 사회는 기만적인 포퓰리즘에 특히 취약하다. 독재적 야망을 부추기는 사주 세력이 언제나 있고, 독재적 야망의 위험을 잘 알면서도 그것을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집권에 성공한 독재자를 배후에서 통제하여 기존 제도를 적절히 공격하면서 그들의 사복을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극작가는 행정 능력도 없고 건설적 변화의 비전도 없는 독재자가 권력을 잡았을 때의 사회 혼란을 거듭 묘사한다. 비교적 건전하고 안정된 사회조차도 무자비하고 비양심적인 자를 물리치게 해주는 자원이 별로 없다고 셰익스피어는 생각한다. 또 그 사회는 불안정하고 비합리적인 행동의 징후를 보이기 시작하는 합법적 통치자를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는 장치도 별로 없다. - P244

그가 보기에 암살은 아주 절망적인 대책으로서, 흔히 그것이 의도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온다. 셰익스피어는 경력 말기에 집단생활의 예측 불가능성에 희망을 걸었다. 집단생활은 어떤 한 사람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생활을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 P245

그들 자신의 사악함과 민중들의 인간적 감정에 의해 파멸하고 마는 것이다. 민중의 감정을 일시적으로는 억압할 수 있을지 몰라도 아예 없애지는 못한다. 셰익스피어의 생각에, 집단적 올바름을 회복하는 가장 좋은 기회는 보통 시민들의 정치적 행동에서 나온다. 셰익스피어는 사람들의 세세한 움직임을 놓치는 법이 없고 그들을 자세히 묘사한다. - P247

네거티브 캐퍼빌리티는 곧 허구와 현실을 교묘하게 융합하여 그 둘의 경계를 허물어 버리는 능력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역자 후기) - P262

다시 말해 왜 악에 매혹될까? 그 이유는 우리가 드라마를 보는 동안에 비록 잠시나마 리처드 3세 같은 인물이 되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리처드 3세를 무대 위에서 봄으로써 우리 내부에 있는 악을 확인하고 그런 다음에는 그 악을 달래고, 억누르고, 씻어내는 효과를 느끼는 것이다. (역자후기) - P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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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관행을 따르되, 그 관행의 틀 안에서 침묵하거나 변화를 꾀하는 이들은 엄청나게 전복적인 진리를 알고 있어서, 혹은 그 침묵을 알아줄 미래의 명민한 독자를 기다려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기존의 관행과 권위에 정면으로 대결해봐야 소기의 성과도 거두기 어렵고,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가 크다고 판단한다. 오히려 대체로 관행을 따르면서, 그 안에서 관행을 비틀어야, 자신의 메시지가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기존의 권위를 공개적으로 공격하기보다는, 민감한 부분에서 침묵하거나, 생략하거나, 관행을 비트는 방식으로 에둘러 자신이 가진 이견을 표출한다. - P37

그러나 공자가 희망하였던 것은, 소리 없는 작은 행위가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그런 공동체였다고 할 수 있다. (......) 그래서 "논어" 속의 공자는 불필요한 과장(overstatement)을 비판하고, 침묵 및 삼가 말하기(understatement)를 옹호한다. - P60

특히 20세기 후반에 열정적으로 전개된 세계 학계의 사상사 연구 흐름은 천재적이고 뛰어난 사상가로 알려져 있던 과거의 사상가들이 황무지에서 느닷없이 솟아난 존재들이 아니라 그들의 생각을 가능하게 한 당대의 지적 담론의 소산이라는 것, 그리고 그들의 명성을 영속시킨 힘도 단순히 그들의 천재성 때문만이 아니라 그 이후 전개된 여러 역사적 맥락 때문이었음을 보여주었다. - P68

당대의 자료 속에 들어가 보면, 공자는 그가 속한 시대의 문제를 고민했던,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문제를 사유했던, 지성인의 한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 P72

누군가를 진심으로 동정한다는 것은, 그 순간 그 타인의 삶과 자신의 삶을 연결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를 죽음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뛰어드는 것이다. (......)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너를 살리겠다는 뜻인 동시에 너를 살리기 위하여 나도 존재해야만 한다는 이야기이다. - P82

그러나 일단 발명된 사랑은 이 세상에 남겨져 현실 속을 살아가야 한다. 그 현실은 사랑의 발명가들이 미처 던지지 않은 다른 질문들을 던지기 시작한다. - P84

즉, 공자에 따르면, 단순히 동정심에 휩싸여 무턱대고 행동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 P85

이러한 질문이 쏟아지는 복잡한 정치 현실 속에서, 동정과 사랑은 더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 혹은 동정심은 처지가 좀 더 나은 사람이 처지가 열악한 사람에게 베푸는 시혜이기에 결국 불평등을 조장하는 감정은 아닐까? 인간의 ‘사랑‘은 이러한 질문들로 가득한 복잡한 정치 현실 속을 헤쳐 나가야 한다. - P85

상대의 정확한 모습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환상을 사랑한 대가는 혹독하다. 사랑의 파국은 대개 상대와 자신에 대해서 부정확했던 사랑의 파국이다. - P89

미움의 파국은 대개 상대에 대한 부정확한 이해 속에서 자신의 막연한 앙심을 투사했던 미움의 파국이다 - P91

"논어"가 전하는 이러한 공자의 페르소나는 실로 삶이라는 유일무이의 이벤트에 집착했던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삶이라는 이벤트에서 끝내 욕망이 사그라들지 않았던 사람, 과잉을 찬양했던 사람, 노년에 이르러도 그치지 않는 배움이라는 긴 마라톤에 출전하기를 꺼리지 않았던 사람. "논어"는 그렇게 분투한 사람에 대한 재현이다. - P105

그러나 공자의 제자들이나 "논어"의 편집자는 유려한 예식의 집전자로서의 공자만큼이나 현실에서 실패한 선생의 모습을 사랑했던 것 같다. 결국, 기적과는 인연이 멀었던 사람, 신이 아니라 인간에 불과했던 사람, 결핍을 느꼈기에 과잉을 꿈꾸었던 사람,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을 사랑했던 것 같다. - P106

공자의 이 언명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임기응변이란, 규범에 맞추어 자신을 제대로 세울 수 있는 경지를 완수한 사람에게나 가능한, 최후의 경지라는 사실이다. - P124

반면 공자는, 예가 급격히 변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에 기반한 이상적 사회를 구상하다 보니, 예의 융통성을 강조하게 된 경우이다. - P126

예를 따르는 일에 관련하여 기존의 전통, 다수의 의견, 그리고 개인의 판단이라는 세 가지 잣대를 제시한 뒤에, 결국 공자는 개인의 판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고 있죠. (......) 우리는 외적인 행동 규범에 수동적으로 따르는 존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필요하다면 행동 규범 자체를 바꿀 수도 있는 존재들이라는 거죠. - P137

자신의 잘못을 인지하려면,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려면, 무능을 넘어 배우는 일 자체에 대해 배우려면, 메타 시선이 필요하다. 공자가 극기복례라고 했을 때, 거기에는 극복 대상이 된 3인칭의 자아 뿐 아니라, 대사오하된 자신을 바라보는 1인칭의 자아가 동시에 있다. 메타 시선을 장착한 사람은 대개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서는 발언을 삼가는 사람, 자신이 알 수 없는 큰 영역이 있음을 인정하는 사람이다. - P152

메타 시선이 있는 이는 무지를 그저 선언하기보다, 질문한다.
정교한 질문은,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훈련된 행위이며, 대상을 메타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나 가능한 것이다. - P153

메타 시선은 인생을 두 배로 살게 한다. 여행을 하는 동시에 여행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여행 체험을 곱절로 만들듯이, 행복한 삶을 누리는 동시에 행복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행복감을 곱절로 만들듯이. 그러나 메타 시선을 유지하는 일은 많은 심리적, 육체적 에너지를 요구하는 고된 일이기도 하다. (......) 자신을 끊임없이 다그쳐야 하는 전쟁같은 삶. 삶은 고단하기에, 떄로 죽음은 해방감을 가져온다. - P155

공자가 더 관심을 기울인 것은 집안에서 자기 부모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잘 섬길 것인가 혹은 자기 자식을 구체적으로 얼마나 효성스러운 살마으로 키울 것인가 하는 문제보다는, 앞서 말한 삶의 책임을 누가 어떻게 나누어 질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 P178

공자가 살았던 춘추시대에는 대규모 친족 조직이 지배층에게 그러한 생존의 터전을 제공했고, 지배층들은 국가보다는 자신이 속한 가문의 일원이라는 점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았다. 그 가문 속에서 생존에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제공받았다. 이러한 친족 질서를 효라는 가치와 예라는 메커니즘이 완벽하게 규율해준다면, 제삼자인 국가가 법률을 통해 개입할 여지는 크지 않다. 국가가 강해질 필요가 없다. - P179

공자는 친족 간의 유대와 효가 아직 꽤 중시되던 춘추시대에 살았다. 다른 한편, 그때는 친족 질서가 차츰 약화되고 국가의 힘이 점차 강화되기 시작하던 시대이기도 하였다. - P179

공자에게 그나마 새로운 점이 있었다면 공자는 효의 대상을 대규모 친족 조직이 아니라 소규모 가족 단위로 생각했다는 사실이다. - P180

대규모 친족 조직에 대한 헌신(효)은 국가에 잠재적 위협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효의 대상이 대규모 친족 조직이 아니라 소규모 가족이 되자, 효라는 덕성은 더 이상 통치자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 대규모 친족 조직과는 달리 소규모 가족은 통치자에게 도전할 만한 조직력을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 P181

비국가 영역이 많은 사회적 기능을 떠맡는다는 점에서, 공자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국가는 ‘작은 국가‘임에 틀림없다. 공자의 이상 국가는 구성원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덕을, 바람직한 성정을 기를 수 있는 공동체이지, 법이 삶의 국면마다 개입하는 ‘거대한‘ 조직이 아니다. - P182

텍스트에서 이러한 묘사적인 서술을 마주했을 떄, 우리는 그것이 단지 사실을 기술하는 문장인지, 아니면 사실 기술의 형식을 빌려 규범적인 주장을 하는 것인지 판단해야 한다. - P186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명령이 행해진 것임을 보여준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이 바른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 P189

"논어"에서 행정의 필요를 인정하는 발언은 있어도 명시적으로 관료제를 옹호하는 발언을 찾기는 어렵다. "논어" 주석사의 큰 아이러니는, 바로 행동의 침묵을 설파한 "논어"의 구절이 관료제의 적극적인 운용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재해석되어 갔다는 점이다. - P192

이 아이러니는 공자가 상상했던 이상적인 정치공동체와 후대 주석가들이 꿈꾸었던 바람직한 정치공동체의 모습이 달랐기에 발생하는 것이다. 후대 주석가들의 이러한 해석들은 공자가 꿈꾸었던 국가보다는 주석가들이 꿈꾸었던 국가의 모습에 대해 보다 많은 것을 말해준다. - P193

"논어"에 나오는 예에 관련된 여러 구절은, 예의 의미가 인간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몸짓까지 미시적으로 규율하게끔 확장됐음을 보여준다. 즉 신에게 바치는 제사에서 인간관계를 규율하는 행동거지로 예의 의미가 확장되고 변천하는 과정에서, 예의 ‘규모‘에 관한 한, 거시에서 미시로의 전환이 일어난 것이다. - P202

이렇게 하면 후대의 모범이 될 만한 모델을 주나라 문화라는 이름으로 재현할 것인가가 공자의 목적이었다. - P213

재현은 실증이 아니다. 재현은 드러내는 동시에 감춘다. - P214

즉 재현 행위는 해당 대상을 그대로 구현할 수는 없음을 인정한 상태에서 그 대상을 ‘대신‘하고자 하는 것이다. (......) 더 창의적인 재현은 현실‘을‘을 모사하고자 하는 집착을 버리고, 현실에 ‘대하여‘ 재현하려 든다. - P220

역사서가 얼마나 훌륭한지는 사료를 얼마나 핍진하게 반복하고 있느냐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대하여‘ 얼마나 잘 이야기 해주고 있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그 과정에서 사료는 필수 불가결한 밑바탕이지만, 역사 그 자체는 아니다. - P221

재현의 관점에서 진정으로 뛰어난 정치 행위는, 관련된 민의를 모사하는 것보다는 그 열망을 정책에 얼마나 입체적으로 잘 구현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 P222

민의가 정치의 명시적인 기반으로 인식되기 전에, 고대 중국의 정치는 무엇을 재현하고자 했나? 중국 고대 정치에서 최초로 재현해야 했던 것은 신의 뜻이었다. (......) 갑골문이 두 가지를 동시에 말해준다. 신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 그렇기에 이 땅의 사람들은 신의 뜻을 재현해야만 했다는 것. 신의 부재를 인정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게 되는 재현의 세계가 거기에 있다. - P222

"논어" 속의 공자는 신의 뜻을 재현하는 데 골몰하던 제사장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한 당시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러한 이들에게 이제 재현해야 할 대상은 신이라기보다는 그들이 상상했던 주나라 건국 시기의 문명이었다. 그리고 공자가 보기에 그 찬란했던 고대 문명은 이제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었다. 동시에 "논어" 속의 공자는 그 문명을 되살려 공동체에 구현할 수 있는 정치적 권력은 자기에게 결국 주어지지 않을 것임을 예감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전진한다. - P223

따라서 무리해서 유교의 본질을 규정하려고 들기보다는, 사람들이 어떤 때 어떤 이유로 유교라는 말을 환기하고 사용하려 드는가에 주목하는 것이 더 생산적이다. - P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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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들꾸들 물고기 씨, 어딜 가시나
성석제 지음 / 한겨레출판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나는 질세라 큰소리를 쳤지만 사실은 날씨에 유난히 영향을 받는 게 작가라는 족속이다. 알타미라 동굴에 벽화를 그린 사람을 포함해서 창작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럴 것이다. 오죽하면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할 사람 같소?>(이강백 작)라는 연극이 있을까. 날씨가 조금만 더워도 짜증 나서 못 쓰고 조금만 추우면 마음이 시려서 못 쓴다. 날씨가 좋으면 이런 좋은 날 놀지 않고 써서 뭘 하나 싶어서 못 쓴다. 바람 불어 좋은 날에 연인이라도 있으면 싱숭생숭해서 못 쓴다. 결국 아무 때도 못쓴다. 마감이 없으면. - 비야리카 화산의 좋은 시절 - P102

아득히 뻗은 눈길 위를 걷고 또 걷는 동안 머릿속에서 구름과 안개가 개었다. 열이 나고 땀이 났다. 그렇지, 이게 삶이라는 것이다. 아니, 이것이 삶이다. 앞뒤로 췌언이 왜 필요할까. 단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삶’이라고. 나는 내 문제가 풀린 것을 깨달았다. 앞으로 내게 다가올 삶이 이와 같을 것임을, 마주치는 존재들이 몸소 보여주었다. 삶 속에는 지옥도 극락도 있으리라. 비참함과 고상함은 인간 얼굴의 다른 표정일 뿐이다. -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시작된다 - P233

베를린에 3개월가량 체류하게 되면서 그가 말한 ‘고독’이 뭔지 뼈저리게 체감할 수 있었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고독할 수밖에 없었고 독립된 자아로서 일상을 꾸려나가야 하니 바빴다. 바쁜 순간이 지나면 모래밭에 판 구덩이 속에 물이 차듯 고독이 밀려왔다. 애초에 ‘도이칠란트’를 한자로 ‘독일’이라고 표기한 것도 워낙 고독이 일상화한 나라여서인가 싶을 정도였다. - 고독이 주는 선물 - P286

나는 그들을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임을 알았다. 아니, 나는 오래전부터 그들을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 그들을 이미 만났기 때문이다. 그들의 얼굴은 내 뇌리에 인쇄된 것처럼 강렬하고 선명하게 남아 있다가 다시 만남으로써 환기된 것뿐이었다. 그들은 또한 영원히 길 위에 환상처럼 나타나고 또다시 사라짐으로써 내 그리움의 보를 막고 터뜨리며 그 속을 채울 것이다. - 그 많던 뽕과 오디는 어디로 갔을까 - P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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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번역가가 선택하는 한국어는 실존하는 한국어가 아니기 십상이고—물론 일반적인 번역도 대개가 흉내낸 한국어라는 점에서 실존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지만, 이 경우는 흉내낼 대상조차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질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누구의 한국어도 아닌 한국어라고 말할 수도 있다—사실 외국어도 아니고 한국어도 아닌 제3의 언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실존하는 한국어는 이 제3의 언어를 흡수하면서 그 외연을 확대해나갈 수도 있다. 따라서 이 외연 바로 너머에 한국어의 가능성으로서 존재하는 제3의 언어를 만들어내는 것이 거창하게 말하자면 한국어에 대한 번역가의 임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언어적 선택이 번역가에게는 가장 근본적인 문화적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 누구의 한국어도 아닌 한국어 - P148

번역가는 다른 사람의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기본적인 능력을 갖추는 동시에, 번역가의 근본적 지위에 걸맞는 언어적 선택, 문화적 선택을 해야 한다. 스스로 좋은번역을 결정해나가야 한다. 이런 결정의 전제가 되는 공간, 실존하는 언어에 직접 의지할 수 없는 제3의 언어의 공간은 대단히 불안한 곳이다. 그러나 동시에 번역가가 가장 창조적으로 문화에 기여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 누구의 한국어도 아닌 한국어 - P150

결국 어법에 어긋나지는 않지만 자연스럽지는 않은 회색지대에 속하는 경우가 핵심적인 문제가 된다. 번역에서 두 언어의 차이를 문제삼는 것은 대개 이 회색 지대를 문제삼는 것이며, 그 의도는 대체로 회색 지대의 발생을 막자는 것이다. 그리고 회색 지대의 발생을 막는 방법은 번역가가 갖추어야할 중요한 기술에 속한다.

- 차이를 넘어서는 번역의 모색 - P154

(......) 번역에서 다름의 문제는 어디까지나 같음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파생된것이지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 차이를 넘어서는 번역의 모색 - P157

사실 의미는 텍스트를 읽어가는 과정에서 어떤 상호작용 가운데 동적으로 형성되어 나아가는것이고, 그나마도 끊임없이 흔들린다. 번역가가 이런 의미 형성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번역 과정에서 두 언어의 차이를 고려하는 과제 못지않게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 차이를 넘어서는 번역의 모색 - P158

(......) 번역가가 원문텍스트의 의미를 형성해나가는 과정에서 얻은 결과물이 목표언어의 규범적 표현법으로 감당하기 쉽지 않다면, 또는 그렇게 할 경우 손실이 너무 크다면, 그때 나타나는 일탈적 표현들은 오히려 목표 언어의 표현력을 확대하는 부분으로 볼 수도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즉 이 회색 지대를 목표 언어가 발전하고 변화하는 지대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만일 그렇다면 번역가는 회색 지대를 없애는 동시에 강화하는 모순된 과제를 떠맡게 되는 셈이다.

- 차이를 넘어서는 번역의 모색 - P159

베냐민은 기본적으로 현재의 언어들은 불완전하다고 전제하고, 번역은 원문의 언어가 번역의 언어를 만나 완전한 언어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본다.

- 차이를 넘어서는 번역의 모색 - P162

(......) 번역의 불가능성도 번역 자체의 불완전성이 아니라 각각의 언어의 불완전성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으므로, 번역은 완전한 언어를 찾아가는 번역의 과제 내에 번역의 불가능성 문제를 끌어안아 불필요한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다.

- 차이를 넘어서는 번역의 모색 - P163

이렇게 출발언어의 불완전성을 인식하면 번역가가 그 언어를 읽어나가며 의미를 적극적으로 형성해가는입장에 설 수 있고, 그와 함께 출발과 도착이라는 표현이 전제하는 일방통행성과 수동적 태도에서 벗어날 수 있다. (......)
이렇게 볼 때 양 언어의 회색 지대 또한 적어도 그 가운데일부는 불완전하고 유동적인 언어에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부분임과 동시에 어떤 의미에서는 양 언어가 통합되어완전한 언어로 나아갈 가능성이 배태되는 곳으로, 즉 제3의 언어 또는 번역의 언어가 자리잡는 곳으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 차이를 넘어서는 번역의 모색 - P164

충성의 대상이 양쪽 어느 한 항에서 제3항인 완전한 언어로 바뀌기 때문이다. (......) 적어도 그런 문제가 핵심의 자리에서는 물러날 것이고, 우리는 그 빈자리에서 번역논의의 새로운 지평을 바라보게 될지도 모른다.

- 차이를 넘어서는 번역의 모색 -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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