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이브가 그런 방식, 곧 타자의 말하기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말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 P40

아카이브의 이면에서 전반적 지형을 읽어낼 수 있으려면 이렇듯 삶이 공권력과 충돌하는 지점에서 모종의 의미가 산출된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작업자의 과제는 이렇게 어쩌다 일어난 충돌을 통해서 조명된 상황을 차근차근 체계화하면서 모순되는 것들, 동떨어진 것들을 탐지해내는 것이다. - P41

아카이브 취향의 작업자는 되찾은 과거의 문장 조각 하나하나에서 의미를 끌어내고자 한다. 이때 감정은 과거라는 바위, 침묵이라는 바위를 다듬는 끌이다. - P43

이렇듯 그때그때 떠오르는 장면들을 짧게 나열하는 리드미컬하고 역동적인 여성의 진술들 속에서 작업자는 여성들의 삶이 어떻게 사회에 통합되는지를 감지하는 데서 한 발 더 나아가, 여성들 자신이 어떻게 온전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는지를 감지할 수 있다. - P48

여성들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은 직종에 따른 소속이라는 굳어진 틀너머에 존재하는 관계망과 이웃 망이다. 여성들이 전통적 공조를 작동시키기도 하고 갈등과 충돌을 조장한 뒤 훗날을 도모하기도 하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 P49

아카이브는 빛이 들지 않을 만큼 울창한 숲 같다. 그래도 한동안 숲속에 들어가 있으면, 두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면서 숲의 생김새를 어렴풋이 그려볼 수 있게 된다. - P89

아카이브 전체를 그냥 무질서하게 아무 목적 없이 읽어나가면서 경이를 느끼고 싶은 마음, 그저 아카이브의 맛을 느끼고 싶은 마음, 줄줄이 이어진 평범한 문장들 속에서 삶의 흘러넘침을 느끼고 싶은 마음은 시간이 없다는 사실 탓에 약해지기는 커녕 오히려 더 강해진다. (……) 여기서 함정은 아카이브에 매료된다는 것 자체가 아니라 아카이브에게 질문하는 법을 모르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 P89

역사가가 미리 세운 가설들 때문에 고를 자료와 버릴 자료가 미리 정해져 있는 경우도 있는데, 그럴 경우에는 유연성, 곧 당장은 필요하지 않은 자료 같아도 나중에 필요불가결한 자료로 밝혀질 수 있는 것들이 저장될 가능성을 잃게 된다. - P90

아카이브라는 아직 나지 않은 길에 들어서는 역사가는 동일화의 가능성을 항상 경계해야 한다. ‘동일화identification’란 자료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사건들, 생활 방식들, 사고방식들 중에서 자기가 미리 세워놓은 가설들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것들에만 주목하는 경향을 말한다. (……) 동일화는 왜 불가피한가. 역사가가 선택하는 연구 방향이 어느 정도는 역사가 본인의 반영무로가 대립물 사이의 변증법에 좌우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분별 있는 역사가라면 그 사실을 인정할 것이다. (……) 동일화한다는 것은 자료를 마비시키는 동시에 자료를 이해하는 힘을 마비시킨다. - P91

아카이브에서의 첫번째 작업은 텍스트가 감추고 있는 것들(사실 같지 않은 것들, 앞뒤가 안 맞는 것들, 나아가 편의적 해석들에 끼워 맞춰지지 않은 것들)을 찾아내는 것이다. (……) 아카이브의 지식은 기존 지식의 영토에 합병되는 지식이 아니라 기존 지식의 질서를 흐트러뜨리는 지식이다. (……) 아카이브를 알려면 먼저 아카이브에서 배운 것을 잊어야 하고, 한 번 읽어서 알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 P92

(……) 답변자는 자기의 답변을 통해서 자기도 모르게 (답변자의 개성에도 불구하고, 아니면 답변자의 개성으로 인해) 어떤 총체적 지평을 열어 보인다. 작업자가 주목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지평이다. 말은 현재를 담는 그릇(해당 시대에 통용되었던 평가들과 구별들의 구성요소)이기 때문이다. - P101

역사는 대립과 충돌의 결과를 공평하게 정리한 이야기가 아니다. 상호 이질적인 논리들의 충돌 속에 드러나는 실재의 불균질함을 감당하는 일, 그것이 역사다. - P106

"여러 역사les histoires를지지한다는 것," 여러 역사를 아우를 수 있는 한 역사l‘histoire를구상한다는 것은 각자가 자기의 역사적, 사회적 소여를 이용해 능동적 주체가 되는 과정을 보여주고자 한다는 것이다. - P114

사건에 대한 관심은 실은 지난날과 함께 오늘날을 읽어내겠다는 의지에서 비롯된다. - P115

아카이브는 과거라는 상징적, 학문적 구출물을 수리할 수 있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일종의 매트릭스다. 이 매트릭스는 이미 존재하는 하나의 진실"la" vérité을 근거 지어주는 것이 아니라 거짓에서 멀어지는 방식으로 진실에 가까워지는 담론을 세우는 과정(알고 있던 것이 착각이었음을 깨닫는 과정과 알고 있던 것이 맞았음을 확인하는 과정 둘 다)에 필요한 자료를 내준다. - P119

아카이브를 토대로 대중 행동의 역사를 세워나가는 역사가가 물화를 피하는 방법은, 사회 세력들의 감정적, 정치적 관행과 관련된 세부 정보들을 모으는 작업이 그들의 행동 논리와 언술 논리를 찾아내는 작업으로 이어져야 함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 P125

역사가가 이런 아카이브를 제대로 읽어내려면 (……) 사건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의 행동 방식을 직접 개척해가는 사건 당사자들의 길로 들어서야 한다. 지배층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사건 당사자들로부터 숨기고자 하는 사건의 의미를 쟁취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아카이브를 제대로 읽어낼 줄 아는 역사가는 사건의 구체적 양상에 주목한다. 사건을 구축하는 동시에 해체하지만 사건의 형체를 무너뜨리거나 망가뜨리지는 않으며, 사건의 의미를 끊임없이 모색하지만 사건에 ‘역사가 자신’의 의미를 덧씌우지는 않는다. 아카이브는 역동하는 인물들, 작용과 반작용, 변신과 충돌 사이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능동적 인물들을 엿보게 해준다. 아카이브에서 역사가가 할 일은 바로 그 역동을 포착하는 것, 이미 알려져 있는 사실들 안으로 파고 들어가 사회관계의 움직임을 이해하는 것, 추상적 범주에 집착하는 대신 그렇게 움직이고 시작되고 종결되면서 바뀌어가는 것들을 규명해내는 것이다. - P14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카이브는 한편으로는 해일처럼 작업자에게 덮쳐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 압도적이라는 점 때문에 오히려 작업자를 고독하게 한다. - P23

이런 시시하고 엉뚱한 일 속에서 또 하루가 지나가고 저녁이 오면, 역사가라는 이 피곤하고 강박적인 직업에 대해 자문해보게 된다. 이렇게 흘러간 시간은 그저 잃어버린 시간일까? 아니면 잃어버린시간을 되찾겠다는 이상에 바쳐진 시간일까? - P25

작업자는 답변의 표현이나 진술 방식을 통해서 우선 개인적, 집단적 행동과 공권력이 정한 제약들이 서로 얽혀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고(양자가 얽히는 방식은 적절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어 진술자 본인과 사회집단과 공권력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조율되었나를 확인할 수 있다(진술자의 취약한 답변은 기발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 P39

진실이 아닐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재를 간직하고 있는 이 강력함이 아카이브 작업자의 성찰을 불러일으킨다. - P3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냉혹한 이야기 아르망 가마슈 경감 시리즈
루이즈 페니 지음, 김보은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당신이 하는 일에서는 그냥 놔두어도 되는 일이 많으면 안 되잖소?"
"그렇죠. 하지만 일단 끝나고 나면 놓아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럼 여기는 왜 왔소?"
가마슈는 잠시 조용히 앉아 있다가 입을 열었다. "어떤 것은 다른 것들보다 놓기 힘드니까요."
뱅상 질베르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P56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정체성과 개인적 책임을 신비주의적이고 초자연적인 아우라를 지닌 대의명분 속에 감추도록 장려하는 그런 분위기가 분명 존재했다. (……) 전쟁을 그토록 참혹하게 만든 것은 현대적 무기와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공포 전술도 물론 한몫했지만, 그와 더불어 이처럼 적을 비인간화하는 경향도 중요한 원인이었다. - P730

정치적 신념의 양극화는 전쟁의 양 당사자 모두에게 자신들이 믿고 있는 모든 것이, 혹은 자신들의 존재 자체까지도 모두 전쟁 결과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바로 이것이 두려움을 자포자기적 용기로 바꾸었다. - P737

그러나 스페인 내전은 무엇보다 인간적 측면에서 가장 잘 기억될 것이다. 즉 신념의 충돌, 잔인성, 관용과 이기심, 외교관들과 장관들의 위선, 이상의 배신과 정치적 책략, 그리고 무엇보다도 두 진영에서 싸운사람들의 불굴의 용기와 자기 희생 등으로 말이다. 그러나 역사(역사는결코 깔끔하지 않다)는 항상 질문으로 끝나야 한다. 결론을 내리는 것은지나치게 편의주의적이다. - P740

프랑코는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별로 한 역할이 없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 공화군에게 크게 불리한 쪽으로 벌어진 차이를 더 심화하고, 공화군의 용기와 희생을 헛되이 낭비함으로써 전쟁을 패배로 몰고 간 것은 공화군 지도부였다. - P73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시기로부터 얻는 또 하나의 중요한 교훈은 대중의 자기 기만이 그들 스스로 현실을 직시할 수 없었던 지도자들이 처방을 내린 진정제에 다름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스페인 내전이 입증하듯이 전쟁의 첫번째 희생자는 진실이 아니라 진실의 원천인 각 개인의 양심과 정직함이었다. - P44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