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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잘쓰는 방법 - 움베르토 에코의
움베르토 에코 지음, 김운찬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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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기 중에는 팀 프로젝트가 참으로 많았었다. 보통은 함께 수강하는 동기들과 한 팀을 이루곤 했지만, 가끔씩은 교수님께서 일괄적으로 팀을 만들어주시기도 하셨다. 가끔씩은 새내기들과 프로젝트를 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 때마다 겪었던 고충은 다름 아닌 레포트의 형식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어쩌면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할 것들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명시적으로 어떠한 합의도 하지 않은 체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시간이 부족한 경우에는 각자 부분별로 분담을 해서 자료를 조사하고 작성하고, 레포트를 작성한 후 마지막에 한 명이 통합하는 방식을 취하곤 했다. 많은 어려움들이 따르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괴로운 것은 다름 아닌 일괄성의 결여였다. 각자가 매긴 번호가 다르고, 각자의 문체가 다르고(심지어 레포트를 구어체로 써내는 사람도 있었다.), 참고문헌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아주 가끔은 인터넷 뒤지면 누구나 찾을 수 있는 자료를 그대로 복사해서 붙인 이들도 있었다. 누구나 처음부터 잘 하는 사람은 없다고 하지만, 우리에겐 기본이 없었다. 레포트를 처음 쓰던 그 순간의 당혹스러움은 나에게도 있었다. 어느 누구도 레포트는 이렇게 쓰는 거다 라는 말을 해주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도서관에 있는 논문들을 몇 개 접해보면서, 그렇게 하나하나 스스로 갖추어 나갔을 뿐이다. 졸업하기 전에 이 책을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나의 레포트를 한층 업그레이드 시킬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 책은 논문 쓰는 기본을 담고 있다고 생각된다. 물론 이탈리아와 우리나라의 실정은 다르다. 그리고 저자가 인용한 대부분의 것들은 유럽적인 요소가 짙다. 나로서는 저자가 예를 들었던 수많은 참고사항들이 너무도 낯설게만 여겨졌다. 하지만 그런 것에 연연해 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논문 잘 쓰는 방법에 눈 뜨고 싶은 것이지 유럽의 수많은 자료들을 검색하려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무엇보다도 돋보이는 것은 단순한 방법론에 그치고 있지 않은 저자의 열정이다. 많은 이들이 물리적, 시간적 문제들을 들면서 정당방어를 하기 마련이다. 시간이 없어서, 집근처에 도서관이 없어서 등등. 하지만 저자는 그런 핑계들이 그저 핑계에 지나지 않음을 스스로 증명해보인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이용하면서 그가 작성한 수많은 목록들은 읽는 이에게 감탄을 불러 일으킨다. 인용카드와 연결카드, 독서카드까지.. 어떻게 보면 굉장히 많은 시간을 잡아먹는 작업이지만 오랜 시간을 들인만큼 그의 카드들은 논문 작성을 위한 모든 기초적인 자료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물론 그는 세계적인 석학이다. 셀수 없이 많은 언어들에 익숙하며, 오랜 학문 경험은 그에게 자료정리 면에 있어서의 우위를 가져다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게으름을 정당화시켜주진 않는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겐 실력이 부족했음과 동시에 열정이 결여되었던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대학의 경우,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으레 거쳐야만 하는 통과의례 마냥 여겨지기 때문에 학문적 열정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을 듯 싶다. 시험기간에 그저 밤샘 반짝 공부가 존재할 뿐이니 스스로 논문 쓰는 법을 익히기 위해 도서관에 틀어박혀 학위논문들을 뒤적이고 있을 사람이 몇이나 될지…

동시에 그는 실질적인 논문 작성법까지 이야기한다. 각주와 참고문헌을 다는 법은 어떻게 보면 굉장히 단순하지만 늘 헤깔리는 법이다. 예전같았으면 각주 하나 첨가하기 위해 일일이 원고를 다시 작성해야 했지만, 누구나 컴퓨터를 이용하는 요즘 시대에는 손쉽게 작업을 할 수 있는 만큼 예전과 같은 어려움으로부턴 탈피했다고 생각한다. 이제 중요한 것은 기초가 되는 형식을 알고 그 형식에 알맞은 논문을 작성하는 것이다. 물론 내용면에 있어서의 독창성, 훌륭함도 중요하겠지만, 어떠한 형식도 갖추어지지 않은 논문 속에 담긴 독창성은 어느 누구에게도 어필할 수 없는 죽은 진리에 불과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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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nomadia > 발레 수사가 가르쳐 준 것
논문 잘쓰는 방법 - 움베르토 에코의
움베르토 에코 지음, 김운찬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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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학문적 성과를 기대하는 보통의 사람들에게 성과에 다다르기 위한 도구들은 전혀 일반적이지 않았다. 그들은 '무리' 속에 있는 여타의 선택받은 사람들과는 달리 자신이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것들을 이루어 내기 위해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에둘러 가는 길 위에 놓여 있곤 했다. 당황스럽게도 이러한 상태는 꽤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으며, 방치되었다. 학문과 성과 또는 그 방법론 간의 기능연관의 파괴는 대중지성에 대한 일종의 죄악이다. 움베르토 에코는 이 한권의 책을 통해 파괴된 이러한 기능연관을 대중들에게 돌려 주는 작업을 하고 있다.

제목이 암시하듯이, 이 책은  '논문작성법'에 관한 것이다. 이를테면, 이것은 학사/석사/박사(우리 기준에서 말하고 있다)과정 속에 있는, 또는 학문적인 연구를 통해 자기자신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그 결과물인 '논문'에 대한 '도구상자'의 역할을 자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단지 '도구상자'인 것만은 아니다. 마치, 도구에 대해 얘기하면서 능청스럽게 '정신'을 깨우쳐 주는 장인처럼 그는 논문과 방법간의 기능연관 속에서 가장 기본적이면서 엄밀한 '자세'에 대해서도 얘기한다. 그래서, 그가 학문적 겸손(4.2.4)이란 항에서 "이것은 윤리적인 설교가 아니다. 책읽기 및 카드 정리 방법들에 관한 것이다"(p205)라고 말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누구든지 우리에게 무엇인가 가르쳐 줄 수 있다"(p207)라는 정말 비도덕적인(?) 경구를 말하기 위한 것이 된다. 그리고, 발레 수사에 대한 이야기는 이 항의 긴 중반부를 아우르면서 교훈적 포석이 된다.

사실, 이 책은 '매우' 교훈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계몽주의적인 방식이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경험주의에 기우는 방식인데, 그러한 방식은 스스로의 경험에 부여하는 냉혹한 시선 만큼이나, 독자로 하여금 에코의 경험을 여러가지 변주로 읽어가게 하는 '즐거운 거리(distance)'를 부여한다. 변주될 수 있다는 것은 독자 스스로의 경험을 '환기'시키면서, 이 책의 어느 장과 절 또는 항에 중요성을 부여할 권리를 독자에게 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처음 '1장 졸업논문이란 무엇이며 어디에 필요한가'를 읽으면서 그동안 자신이 써왔던 글들이 얼마나 무책임한가 하는 것을 익살스럽게 깨달을 수도 있고, 반면에 1장을 시큰둥하게 보고나서 '2장 테마의 선택'을 보면서 스스로 잊어왔던 그래서 종종 머리속에서 뒤죽박죽이 되었고 결과적으로 쓰기에의 실패로 귀결되었던 논문의 주제선정에서 무릎을 탁 칠수도 있다.

필자가 보기에(물론 이것도 내 개인적인 변주다) 이 책의 가장 큰 도구적 장점은 3장과 4장에 있다고 보인다. 이 장에서 에코는 자료조사(3장)에서부터 그것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4장 작업계획 및 카드정리)라는 결정적이고 중요한 문제를 정말 무서울 정도로 섬세하게 펼쳐 보인다. 이 장과 절, 항들에서 '자료'들은 그 자체로 유기적인 연관을 형성하면서 테마 속에서 구성된다. 그런데, 이러한 자료선택과 그것의 배치에 관한 사항은 논문을 써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그 필요성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배치의 필요성만을 느꼈을 뿐 구성의 방법에 대해서는 넋놓고 기다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아마츄어적인 순진함으로 어떤 '직관'을 바라면서 독서를 하는 모든 사람들은 아이디어가 머릿속에서 마치 번갯불처럼 스쳐가기를 내심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에코는 이 장을 통해 그런 것들이 전혀 부질 없지는 않더라도, '천재'들에게만 허용된다고 말한다. 물론 이 '천재'에 대한 언급은 꽤나 시니컬한 문맥 속에서 튀어 나오지만 말이다. 결과적으로 모두가 '천재'가 아닌 것은 확실하고, 학문적 작업에 있어서 그러한 '천재의식'은 오히려, 논문을 보는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할 뿐만 아니라 쓴 사람 자신을 '바보'로 만든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앞서 말했듯이 '학문적 겸손'이다.

그러나, 학문적 겸손은 "많은 자부심을 감추고 있"(p208)다. 그 자부심은 바로 '원고쓰기'(5장)와 '최종적 원고작성'(6장)에 필요한 덕목이다. '누구에게 말하는가'(5.1), '어떻게 말할 것인가'(5.2)는 바로 '자부심'이 없이는 불가능한 작업이다. 스스로 소심해져서 구구한 변명을 늘여 놓거나 논문을 쓰는 이유에 대해서 심난하게 스스로를 옹호하거나 하는 건 "짜증나는 것"(p261)이다. 인용문(5.3), 그리고 각주(5.4)의 작성은 그러한 변명이 쓸모없다는 것을 논문을 쓰는 사람에게 확인시키고, '우는 소리'보다 한 마디의 논리적 명제나 권위있는 참고자료를 자신있게 제시하는 것이 더욱더 가치있는 것이라는 것을 명심할때 이루어진다. 그래서, 논문을 쓰는 사람은 그 자신이 "테마에 대해 언급된 모든 것에 대해 ...... [자신보다] ...... 더 잘아는 사람은 없다"(p263)는 것을 항상 마음에 담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논문을 제출하지 말라"는 것이 에코의 충고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모든 작업들은 "양심에 꺼리낌이 없도록"(p263) 해야한다. 여기서, 이 책이 가지고 있지만, 감추어져 있는 윤리적 '방침'이 나온다. 그것은 바로 '학문적 양심'이라는 덕목이다. 학문적 양심은 곧장 '엄밀함'이라는 근대적 학문자세(Descartes적인)와 연결되는데, 그것은 논문의 어떤 행과 paragraph에 대해서도 한치의 '거짓'이나, '지적 허세' 또는 '(의도적이든 아니든) 무지'를 거부하는 것에서 나온다. '2.5 필수적으로 외국어를 알아야 하는가'에서 에코는 외국어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는 대중들에게 조금은 무리일 성싶은 요구를 한다. 테마에 대해 1차적 원전은 꼭 그 원전의 언어로 읽으라는 것이 그것이다. "어느 외국작가를 원문으로 읽을 수 없다면 그 작가에 관한 논문을 쓸 수 없다"는 규칙은 에코에게나 가능할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규칙은 '엄밀함'이라는 덕목 아래서 정당화된다. 사실, 에코의 지적은 참으로 정당하다. 어떻게 우리가 '연구'를 하면서 '외국어'를 모르고 할 수 있겠는가? 한국적 상황은 더 비참해 보인다. 최소한 '영어'나 '영어권' 언어 둘은 알아야 서양철학에 관한 논문을 쓸 수 있다. 모든 번역은 미심쩍으며, "논문을 쓴다는 것은 바로 여러가지 종류의 번역이나 보급에 의해 잘못된 바로 그곳에서 원래의 사상을 재발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p52) 옳은 말이다. 그러나 얼마나 금욕적인가!

앞서도 말했듯이 에코는 이 책을 씀으로써 학문적 성취물에 대한 일종의 '도구상자'를 대중에게 선물한 셈이다. 그러나, 선물은 단지 기뻐하라고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도구상자'는 쓰는 사람에 따라 용도를 달리하면서 변주될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자신을 도구를 이용해 단련함으로써 가장 엄밀하면서도 유용한 지식과 아이디어를 생산한다면, 그것은 오로지 그의 성과물이지 도구상자의 성과물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정말 '즐거운 지식'(Nietzsche)일 것이며, 동시에 '힘들 뿐만 아니라 드'(Spinoza)문 것, 즉 '고귀한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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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늘빵 > 피디를 지망생이 꼭 읽어야 할 책
PD가 말하는 PD 부키 전문직 리포트 1
장기오 외 지음 / 부키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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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으로부터 1년전. 뒤늦은 나이에 제대하고 한참 이제 뭐 하고 살까 하고 후보 직업군을 선정해놓고 순위놀이를 하던 때였다. 난 글쓰기를 좋아해. 그럼 기자를 할까? 흠... 음악도 좋아하는데? 음악이랑 글이랑 짬뽕할 수 있는게 뭐가 있을까? 아하 피디. 라디오 피디. 정말이지 라디오 피디는 매력적이었다. 평소 라디오를 잘 듣진 않는 나지만-요즘은 아예 안듣는다- 라디오 피디는 음악과 글을 좋아하는 나에겐 매력적인 직업후보였다. 그러나 반면 티비 피디는 싫다. 티비 피디는 오락프로그램도 있고, 교양프로그램, 드라마 등 여러가지가 있지만 교양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내겐 매력적이지 않았다. 내겐 '끼'는 없으니까.

 그렇게. 난 소위 언론고시라고 불리우는 사실상 국가고시는 아닌 그 치열한 경쟁에 대해 조사를 시작했다. 에니아그램 5번인 나는 사전에 치밀하게 정보를 수집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방대한 량의 정보를 축적해놓고 이 직업에 대한 조사가 어느 정도 끝났다. 음. 생각보다 힘들겠군. 상식시험, 국어시험, 영어 토익점수, 면접, 최종면접 등등 관문이 꽤 많았다. 하긴 어느 직업을 하건 이 정도는 기본적으로 다 거친다. 그리고 영어를 제외하고는 모두 내가 공부하기 좋아할만한 것들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라디오피디는 한해에 5명정도 뽑는다는 것. 대개는 설대, 연대, 고대 출신들이 가져간다 한다. 뭐 그들이  실력이 있어서 가져간다면 할 말 없다만. 연줄이 좀 작용하지는 않을까 하는 의심. 괜히 덤벼들었다가 안되면 어카지? 라는 시작하기도 전에 쫄아버리는 소심함으로 결국 다른 쪽으로 눈을 돌렸다. 다른 쪽은 기자, 교사, 학자 등...

 이 책은 이 때 한창 조사작업을 할 때 찾아봤던 책이다. 2003년 12월 말에 나왔는데 당시 이 책은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서울 시내 대형서점에 가보면 이 책이 여기저기 전시되어 있었다. 그만큼 피디를 희망하는 이들이 많다는 말이다. 더불어 함께 나온 자매품 <기자가 말하는 기자>도 그만한 인기를 누렸다.

 현직에 종사하고 있는 피디들이 직접  쓴 피디에 대한 직업소개, 경험담, 피디가 되기 위한 준비는 어찌해야하는지를 설명하고 있는 책이다. 여러 사람들이 각자의 경험을 토대로 작성하고 그것들을 묶어서 책으로 만든 것이다. 필자들은 다양하다. 예능국 피디도 있고, 시사교양국 피디, 프리랜서, 라디오부장, 만화/영화, 외화, 콘텐츠 등 이들의 이력에서부터 피디도 참 가지가지가 있구나 하는 걸 느끼게 해준다.

 피디들은 정신은 자유롭다. 이들은 어디에 구속되거나 정형화된 틀에 맞춰살기 보다는 자유롭게 산다. 그래야 다양하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솟구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자유로움이 좋았다. 안정된 수입과 자유로운 활동은 피디의 매력이다. 반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작업, 밖으로 나돌아야하는 드라마 피디, 다큐멘터리 피디 같은 경우는 그것이 피디라는 직업의 단점으로 지적된다. 일과가 정해져있지 않고 들쑥날쑥하니 건강도 나빠질 수 있고, 사람들과 항상 부대껴야하니 술과 함께 한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야하는 강박관념으로 스트레스를 받아  술과 담배가 늘고 자연 건강악화로 이어진다. 이런게 피디의 단점이라면 단점이다.

 이들의 이야기는 각자 경험담에 나와서 솔직하다. 피디를 지망하는 사람들은 피디의 환상에 갇혀있기 쉽다. 이 책을 읽으면 오히려 피디가 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 의욕상실케하는 책이다. 하지만 어떤면에서는 도전의식을 갖게 만들 수도 있다. 이만큼 힘들고 어려우니 도전할만하다는 생각도 가능하다는 말이다.

 이 책을 낸 출판사 부키의 기획력을 칭송할만하다. 여러 직업에서 현지에 머무는 사람들의 체험담을 모아 책으로 만들어 직업을 미리 소개하고 간접체험하게 만드는 것이 책의 의도이고 목적이다. 그리고 그 기획은 성공했다. <피디가 말하는 피디> 뿐 아니라 <기자가 말하는 기자> 도 인기를 누렸으니 말이다. 이후로 또 어떤 직업에 대한 책이 나왔는지는 모르겠다.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직업, 하지만 인기있는 직업에 대해 '직업탐구리포트'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피디를 지망하는 이들이 한번쯤 읽어봐야할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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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인간아 > 섧고 떫은 삶을 위해
사는 게 거짓말 같을 때
공선옥 지음 / 당대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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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선옥은 오달지다. 민들레, 개방초, 쑥부쟁이, 엉겅퀴, 개달개비인 듯 작고 여린 들판의 빛나는 들풀 같으면서도 강단 있고 암팡지다. 돈벌이 수단이면서 밥 먹게 해주는 고마운 일인, 소설 쓰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 인정받기도 하거니와 가난하고 소외당하는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면서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삶의 성실함도 갖추고 있다. 일에 정성을 들이지 않고 건성으로 대강 하는 것을 어정이라고 하고 무슨 일을 정성껏 하는 손을 ‘살손’이라고 하는데, 일을 정성을 다해 힘껏 하는 것을 ‘살손을 붙인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일하며 써온 공선옥의 소설은 한결 같이 꾸준하고 바지런하다. ‘서릊는다’는 말은 좋지 못한 것을 쓸어 치운다는 뜻을 가진 말인데 ‘설거지한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공선옥이야말로 우리 문단에서 말끔하고 섬섬하게 설거지하며 살아가는 소설가임에 틀림없다. 한국문단의 씁쓸한 특성상 소설은 현실을 살게 해주는 예술의 영역이고 산문은 예술을 가능하게 해주는 밥벌이의 수단이거나 희번지르르한 단상의 기록으로 그치기 십상이기에 소설가의 소설과 산문은 문장의 깊이나 섬세함이 달라지기 일쑤이다. 그러나 적어도 공선옥의 산문은 그녀의 소설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목소리는 땅과 맞닿아 있으며 인간 중에서도 땅에 납작 엎드린, 땅에 빌붙어 사는, 땅만 바라보고 사는, 땅과 더불어 사는, 땅과 가까운 인간들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며 그녀의 삶 역시 땅과 힘껏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녀의 소설과 산문은 땅과 거기서 살아가는 인간의 이야기일 뿐 상상력이나 현실을 벗어난 느낌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이 책에 담겨 있는 글들은 가지런하고 예바르다. 섧고 떫은 삶의 여러 가지에 대해 말하는 말투는 따스하고 보드랍지만 단호하고 되똑스럽다. 그녀의 글은 수라와 진지보다는 입시, 강다짐과 매나니와 소금엣밥과 대궁밥과 눈칫밥과 드난밥을 먹는 사람들을 위한 글이다. 그렇다고 해서 잘난 것들, 힘을 가지고 그 힘을 올바르게 쓰지 못하는 것들을 욕하는 게 아니다. 비판과 비난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동시에 위로하고 격려해야 한다. 예술가로서, 소설가로서의 임무는 이 두 가지를 공정하고 치열하게 해내는 것이다. 끝나지 않은 여정에 대한 평가는 시기상조이지만, 적어도 지금까지의 행보는 가르마처럼 반듯하고 꾸준하다고 생각한다. 


  수록된 산문들에는 신문의 사회면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시사성이 강한 주제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공선옥의 관심은 삶과 현실에 관한 것이고 소설가로 밥 벌어먹고 있다는 준엄한 주제의식을 놓지 않고 있다는 의미로 다가왔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글은 개운하고 맛깔스럽고 시원하고 구뜰하다. 그러나 그녀의 글은 어렵지 않고 잘나지 않았다. 그게 문장의 투박함과 치우침을 감싸 안아주고 있다. 그래서 글은 낮고 작고 좁은 세계로 기울어져 있으나 이 척박한 세상에서는 분명 의미 있는 기울임이라고 꼭꼭 인정받아 마땅하다. 미주알은 똥구멍을 이루는 창자의 끝부분이다. ‘미주알고주알’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밥이 넘어가는 목구멍부터 똥이 나오는 똥구멍까지 샅샅이 캐내 밝히기를 좋아하는 사람인데 나는 개인적인 욕심으로는 낮고 약하고 땅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주는 공선옥 같은 목소리가 많이 나오길 희망한다. 그래서 ‘미주알고주알’ 꼼꼼하게 할 말 못할 말 없이 시원하게 밝혀내어 온당한 이치대로 세상이 돌아가기를 바란다. 이 산문집의 의미는 이러하니 이것만으로도 이 책의 존재가치는 충분하다. 뜬금없이 가슴이 먹먹해지는 건 왜인가.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가 판치는 시대다. 그냥 넘겨들으면 될 일, 하찮게 무시하고 이내 잊어버리고 나면 말 일, 양은 냄비처럼 불콰하게 달아올랐다가 잠잠해져서 다시 일상을 살아나가면 그만일 일들이라고 넘기기에는 세상은 그렇게 녹록치 않고 나와 그다지 멀지 않다. 내 일이 아니라고 흘려버리다가는 언젠가는 반드시 큰 코 다치며 후회하는 게 인생이더라. 더구나 ‘씻나락’이라는 말은 벼의 씨, 종자를 말하는 것이다. 종자는 흉년이 들어도 결코 먹지 않는 게 조상들의 지혜이자 금기였다. 삶의 극한의 순간에도 놓지 않았던 희망의 증거가 종자에 담겨 있는 것이다. 지금이야 ‘하찮게 넘길 희뜩한 소리, 우습고 가볍게 지나칠만한 사소한 농담이나 시덥지 않는 말’이라는 의미로 쓰이지만, 실상을 알고 보면 이렇게 섬뜩한 것이다. 얼마나 무서운 소리인가. 우리가 김선일이라는 죄 없는 인간의 죽음에 무관심하게 넘어가버리거나, 미선이와 효순이의 죽음에 들끓어올랐다가 다시 현실에 코박고 납작하게 살아가거나, 작고 여린 생명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고 단식을 하신 지율스님이나 종교의 자유라는 기본권을 지키기 위해 단식하면서 자신의 신념을 지켜낸 강의석군을 외면하거나, 비정규직 노동의 부당함을 자살로 부르짖은 노동자들이나 사회적인 약자들을 내 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왜면하거나, 사회적인 약자에 대해 관심과 애정을 가지지 않고 기억하지 않거나,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정부나 이를 옹호하는 가진 자들의 모습에 분노하지 않고 개인의 행복을 위해 공공의 정의와 선의를 내던지거나 하는 모든 행위들이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를 만들어내는 원인이다. 우리는 우리보다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 분명히 책임감과 죄책감과 애정을 가져야한다. 그게 사람의 도리이고 생명 가진 인간의 도리다. 이러게 갈수록 척박하고 냉정하게 세상이 돌아가다가는 인간들은 미래에 까먹을 씻나락마저 떨어져버리고 저주받은 에리직톤처럼 자신의 몸을 뜯어먹게 될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모든 생명의 어머니인 지구를 갉아대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동떨어지지 않고 그럴 턱이 없고 어처구니 있는 글을 읽어나가는 일은 분명 의미있는 시간이다. “나는 이런 산문을 좋아한다. 지나치게 사변적이지 않고 위압적이지 않으며 자신의 말을 자신의 어투로 담담하게 들려주는, 그러나 결코 쉽지 않은 그런 산문.”이라는 저자의 말대로 ‘사는 게 거짓말 같은 때’ 읽어나가면 할머니가 조곤조곤 들려주는 위안의 말처럼 느껴질 것이다. “나는 소설 쓰는 일만으로 생계를 꾸리고 싶다.”고 공선옥은 말한다. 자신의 일로 밥을 구할 수 있는 정당한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말 그대로 전해진다. 살아가는 사람들은 꿈이 뭔지, 옳은 게 뭔지, 좋은 게 뭔지 다 안다. 그러나 알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게 인생이다. 이러한 인생에 자신의 욕심만 채우는 건 염치 없는 일, 그래서 공선옥은 소설에만 몰두하지 못하고 이런 글을 쓴다고 말한다. 소설가로서의 예술혼을 방기하면서 나태를 부린다고 누가 그녀를 비난할 것인가. 이 시대에 필요한 존재는 할랑한 싸락눈 같은 소설 따위를 쓰는 소설가보다 꿈이자 일이자 삶인 소설을 포기하면서까지 현실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소설가이다. 이 산문집은 이러한 마음의 산물이다. 그러니 어찌 애달지 않으며 어찌 씁쓸하지 않으며 어찌 울컥하면서 어찌하여 이 난장판인가 화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도, 세상은 살만 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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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비연 > 영혼을 구하는 잠언집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류시화 엮음 / 오래된미래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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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시화가 두번째 잠언 시집을 내었다. 알라딘에 냉큼 주문하고 받아든 책은 표지의 도안이나 감촉부터가 마음에 꼬옥 들었다. 무엇보다 오리아 마운틴 드리머의 '초대'로 시작하여 같은 이의 시 '춤'으로 끝나는 이 시집은 읽는 이에게 알 듯 모를 듯한 행복감을 안겨주는 좋은 책이었다.

많은 시들이 실려 있지만 하나하나가 다 인생과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그냥 시시덥하게 누구를 사랑했네 누구를 그리워했네 라는 얘기가 아니라 산다는 건 생존 이상의 그 무엇이며 육체의 몸을 빌어 이 땅에 존재하는 영혼들은 그래서 삶을 잘 살아나가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잘 살아가는 건 무엇보다 자신을 사랑하고 타인에 대해 애정을 가지며 세상에 대한 열렬함을 마음에 지니는 것이라고도 한다. 어찌 보면 도덕경같은 이야기들이 운율을 따라 노래처럼 내게 다가와 심장을 에워싸고 머리에 향긋함을 더한다. 

내게 있어 시는 학교에서 시험치기 위해 배우는 것에 불과했다. 시인들이 말하는 건 너무나 천편일률적이고(조국을 노래하거나 연인을 흠모하거나 하는 것들 돌려 말하는 것에 불과한) 그걸 해석하는 것도 너무 진부해서 그다지 호감을 가지지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여기 실린 시들을 눈에 담아가면서 내가 시와 제대로 된 만남을 거의 못했었음을 깨닫는다. 아주 먼 옛날의 선조로부터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까지 방대한 스펙트럼 속에 살았던, 많이 알려졌거나 혹은 아예 몰랐거나 하는 사람들의 글들을 한데 모아 보니 그들이 느끼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같은 것이구나 생각된다. 시는 그렇게 사람들의 기반을 이루는 마음들을 표현하기에 매우 적절한 형식이로구나 하는 생각까지.

세상은 엄청나게 변화하는 것 같은데 나는 여전히 수십년 전의 삶을 살아가는 듯한 막막함으로 위축되고 늘 비슷비슷한 일상 속에 지루해하고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귀기울여볼 여유조차 없다며 불평하는 동안 시인들은 삶에 대한 애정과 나에 대한 소망,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그렇게 하자고 속삭인다. 나는 어느새 그들의 소리에 마음을 실어 그들을 닮아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 소리는 맑고 영롱했다. 오염되고 타락한 음성이 아니라 인생이 무엇인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한 수많은 사람들의 진심어리고 순수한 권고요 초대였다.

시를 외워보고 싶다고 생각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원래 책을 외우는 데에는 그다지 재주가 없는 나여서 얼마나 많은 시들을 외울런지는 모르겠지만, 목소리 높여 읽어가며 마음결 내가 원하는 것에 맞추어지는 공명소리를 느끼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한마디로, 팍팍한 삶에 나날이 지쳐가는 우리에게 한줄기 샘과 같은 글들이다. 그리고 시의 리듬에 맞추어 내 마음의 소리를 일깨우는 묘한 힘이 있는 책이고.

우리 모두를 존재 속으로 내쉬는 위대한 들숨과
그 영원한 정지 속에서
나와 함께 춤을 추라.
그 공허감을 바깥의 어떤 것으로도 채우지 말고
다만 내 손을 잡고, 나와 함께 춤을 추라.

<춤> 中 -오리아 마운틴 드리머-

살아가야 한다면 그 삶을 지탱하는 건 그 누구도 아닌 나임을 잊지 말자. 다른 무엇으로 자꾸만 나를 가리지 말고 내 안의 소리에 귀기울이고 그 장단에 맞추어 잠시 빌린 이 육체를 춤추게 하자. 그것이 행복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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