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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아라리오 > 진실 된 교육을 위한 나부터 교육 혁명
강수돌 교수의 '나부터' 교육혁명
강수돌 지음 / 그린비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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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교육계에서는 엄마 아빠가 달라져야 교육이 산다는 주제가 큰 의미로 대두 되고 있다.

그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정의 중요성이 강조 된다는 것이다. 가정의 주역인 우리들이 해아 할일에 대해서 강수돌 교수는 나부터 교육혁명을 강조 한다. 즉 가정의 일원인 우리 들의 인식이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육의 주체가 되고 있는 학교의 선생님의 인식도 또한 강조 한다. 가정은 우리들의 인식, 아이들이 해야 할일은 강조 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할수 일은 직업 의식을 강조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학교에서는 선생님의 의식은 아이들의 자아 의식을 발전 하는자아 발전에 포커스를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과거교육은 쓸모 있는 노동력을 양산하는 공장시스템을 강요 했다는 것이다.  20년의 과거 교육은 다양한 잠재력과 고유의 꿈과 소망을 가진 한 인격체가 아니라 오러지 일개 생산요소로 축소되는 경험이었다. 그리고 가정은 대부분의 이러한 학교 교육을 당연함으로 받아들여 우리 아이들은 직업이라는 전선에산업 전사로 양산되었다. 따라서 우등생 즉 학교에서 배우는 암기식의 교육과 적성에 맞지 않는 여러 과목들의 다양한 하지만 전문성이 결여된 교육을 강요받았다. 하지만 현시대 즉 세계화와 인터넷으로 연결된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아이들은 산업전사로서는 살아가기힘들게 되었다. 이러한 교육현실에 반기를 든우리 신 선생님들의 의식은 자아 발전을 그 모토로 삼았다. 우리 아이들은 좋아 하는 것에 항상 관심을 갖게된다. 그 러한 좋아 하는 문제 의식에 우리 현 교육은 너무나도 생각이 없었다. 따라서 신 교육자들은 아이들에서 좋아 하는 과목에 대한 심도 있는 교육의식을 그리고 더 깊은교육을 아이들에게 여과 없이 인식시킴으로 전문인으로 살아 갈수 있도록 인도 하였다. 이러한 현 교육을 강수돌 교수는 바람직한 교육의 방향으로 생각 하였다.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는 나타나게 되었다. 바로 아이들의 자아발전이 왜곡되어 사교육비 증가로 이어지게 되었다. 연간 우리 교육시장은 가정에서 가사 부담금에 상당한 부분을 차지 하고 있다. 여기에 강수돌 교수는 나부터 교육혁명을 주제로 가정에서 부모의 역할을 강조 하고 있다. 학원이나 사교육을 통해 아이들의 자아를 발전 시킬수 있는지 의심을 갖고 있다. 자아발전은 우리 부모부터 먼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모가 먼저 지식이나 기능 보다 우리 아이들의 실력개념을 확장한 지혜의 차원 으로 이끌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학교에서는 자아발전을

우리 가정에서는 지혜를 교육이념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의 그주제 이다. 사람은 최고의 자원이라고 한다. 또한 최고의 생산력은 사람 의 인식안에 대안교육으로 아이들이 원하는 것에 지혜를 가지고 그 지혜를 이용한 전문인으로 키워 그 생산력인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 바람직한 우리 교육의 목표 이다. 하지만 우리사회는 역이 항상 존제 한다. 그것은 사회의 잘못된 환경이 만들어진 문제아이다. 그것의 대한으로우리 사회의 조급증을 버리라는 것이다. 문제아는 하루아침에 우등생이 되는 것이아니다. 그조급증이 점점 문제아를 더더욱 문제아로 만드는 것이다.그 조급증을 버리고 ,  칭찬과 의욕을 심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강수돌 교수는 우리 아이들이변해야 한다는 입장을 지양 하고 우리 자체가 변하는 나부터 교육 혁명을 강조 하고 있다. 가정과 학교 그리고 우리 사회가 먼저 교육혁명을 이끌어내어 우리 아이들이 올바른 생각과 가치관으로 살아 가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의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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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쉬쏭 > 동서양 생각의 차이를 어떻게 줄일 것인가?
생각의 지도 - 동양과 서양, 세상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선
리처드 니스벳 지음, 최인철 옮김 / 김영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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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때 이런 질문들을 이 책을 읽으면서 재삼 떠오르고, 또한 책에서 저자도 거론하는 내용이다.
          - 동양인과 서양인은 다르게 생각한다. 왜 그럴까?
          - 과거 동양의 발달된 문물과 문화를 가졌으나 현재 왜 서양의 과학문명이 더 득세하고 있을까?
          - 동양인이 더 똑똑하다(?)고 하는데 왜 서양인 보다 뒤쳐지고 있을까?
          - 동양의 세계최초는 더 많은데 왜 현재의 서양이 과학문명에서 앞서가고 있을까?
          - 왜 동양인 보다 서양인이 노벨상 수상자가 더 많을까? 그것도 앞도적으로.

     이런 질문들은 숱하게 해 왔던 질문들이다. 상대적으로 못살고, 부강하지 못하고, 열세에 몰린 나라에 살고 있는 동양인의 원천적인 질문 내용일 것이다.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서의 내용으로 이 책이 참고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원론적인 질문에 대해 작가는 각종 실험과 설문을 통해 얻어진 현상에 대한 결과와 그를 통해 동양과 서양의 상호 강점을 도입하여 상호 취약점에 대한 보완을 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현상들에 대해 각종 실험과 설문을 통해 막연히 알려진 사실에 대해 과학적인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데, 책의 목차에 나와 있는 내용을 추려보면 동양은 도, 더불어 사는 삶, 전체, 상황론, 동사, 경험 등의 단어들이 나열되고, 서양에 대해서는 반대되는 개념의 단어들이 거론된다. 삼단논법, 홀로 사는 삶, 부분, 본성론, 명사, 논리 등의 단어들이다. 이런 단어들만의 내용을 봐서 동양은 전체 조직에서는 나를 찾고, 그런 상황에 연관되어 오는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내용이며, 서양은 개인적이고 논리적인 내용으로 보여진다. 이런 내용은 누구든 짐작이나 그럴 것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내용이나 보다 명확하고, 과학적인 탐구를 통해 밝혀내고 있다는 것이다.
     책의 뒷부분에서는 과연 동양의 사고체계와 서양의 사고체계 중에 어떤 것이 더 좋은 것이냐는 의견과 향후 나아갈 방향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절충형으로 서로의 강점을 도입하여 취약한 부분에 대해 보완해 가는 방향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실례는 우리 주변에서 많이 보아오고 있으며, 기업활동들의 내용을 보면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또한 해외 화재 등의 뉴스를 통해 서양에서 동양문화를 접목하는 방법에 대한 소개를 통해 단편적인 내용도 접할 수 있다.

     이런 동서양의 생각의 방법과 내용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은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또한 그 활용 방안에 있어 과거 이해되지 못했던 동양사회의 모습과 서양 기업의 진출과 그를 통해 직간접으로 접하게 되는 서양문화는 많은 오해와 사람들의 열등의식을 특히, 동양인에게 심어 왔다고 생각된다. 허나 이런 생각을 과감하게 탈피할 수 있는 근거를 이 책을 통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과학문명을 바탕으로 물질적인 풍요를 구가하는 서양문화와 이를 통해 동양세계에 힘과 권력을 행사하면서 상대적으로 동양인의 심적 위축을 주었던 과거의 역사를 보면서 동서양의 우월성과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평가가 간접적으로 행해져 왔고, 그런 생각이 잠재적으로 갖고 있었으나 이 책을 보면서 그런 우열의 내용은 동서양의 문명 발상지의 지형적인 특성과 그로 인한 삶의 패턴의 변화로 서로 다른 방법론을 통해 저자가 얘기하는 동서양의 생각의 방법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따라서 결코 누가 더 우월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며, 상호 특장점이 있는 내용이므로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 발전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을 보면 서양의 문물이 한국 내에서 좋은 것, 본받아야 할 것으로 강제적인 주입이 아니라 우리의 취약부분을 보완할 수 있는 내용을 찾아서 우리 것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이런 내용은 보다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내용의 강화와 핵가족화하는 사회환경 속에 혈연, 지연, 학연 등의 연고를 통해 공동체 의식을 키워오는 우리의 사회환경이 점차 변화되고 있다. 이런 내용이 소위 서구화되고 있다고 하는 내용일 것이다. 허나 저자가 얘기하는 내용으로 보면 이런 한국내의 의식의 변화가 결코 서구화의 내용으로 인지되지는 못하리라 생각한다. 따라서 어떤 방법이 좋고 나쁘고를 따지기 보다는 서로의 강점을 통해 생각하는 방법을 다양화하고 그 다양화 할 수 있는 방법론 적인 연구가 더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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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당신을 닮고 싶습니다. 김민기
김민기
김창남 엮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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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는 오마주(hommage)란 말이 있다. 창작자인 감독이 자신의 특별한 존경을 담아 다른 작품의 주요 장면이나 대사를 인용하는 것을 일컫는 말인 오마주는 불어로 존경과 경의를 뜻한다. 나는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보일 수 있는 최고의 오마주를 굳이 말로 표현하자면 영화를 통해 드러내는 오마주의 방식인 "나는 당신의 인생을 닮고 싶습니다."라고 생각한다. "닮지 않았다"는 말을 한자로 쓰면 "불초(不肖)"가 된다. '불초'란 말은 "맹자(孟子) 만장편(萬章篇)"에 나오는 말로 "丹舟之不肖 舜之子亦不肖 舜之相堯 禹之相舜也 歷年多 施澤於民久 요(堯) 임금의 아들 단주는 불초하고, 순(舜) 임금의 아들 역시 불초하며, 순 임금이 요 임금을 도운 것과 우 임금이 순 임금을 도운 것은 오래되었으며, 요와 순 임금이 백성들에게 오랫동안 은혜를 베푸셨다"에서 나온 말이다.

중국의 역대 최고 성왕으로 꼽히는 요순 두 임금은 그 자식들의 부족함을 알아 그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았다. 그 자식들은 부모를 닮지 못했기에 왕위를 물려받을 수 없었고, 요순임금이 친자식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아 그 덕으로 백성들은 편했다는 뜻이다. 자식이 부모를 닮지 않은 것은 불효이므로 우리는 부모님께 나아가 자신을 이를 때 불초자, 혹은 불토소생이라 한다. 이 책 "김민기"는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가수이자, 뛰어난 작사,작곡가, 그리고 엄혹했던 유신 시대 우리 가슴을 덥혀주었던 한 음악가의 작업들을 한 눈에 일목요연하게 살필 수 있다는 실용적인 미덕과 우리가, 김민기와 동시대를 살았던, 살고 있는 선배, 동기, 후배들이 수많은 시련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아름다운 노래들과 작업들을 멈추지 않고 해준 김민기에게 보내는 마음의 헌사, 즉 오마주라는 것이다.

한울출판사에선 동명의 책 "김민기"를 이전에도 출판한 적이 있지만, 이 책은 지금까지 현역으로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 김민기의 최근 행적과 민주화의 더딘 진전에 따라 이전엔 담을 수 없었던 내용을 보강한 책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결정판이자, 앞으로도 보강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책이기도 하다. "김민기"는 모두 7장(록 뮤지컬 지하철 1호선, 노래일기 연이의 일기, 노래굿 공장의 불빛, 소리굿 아구, 디스코프래피, 노래 일지와 악보, 비평)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4부의 구조를 갖고 있다. 우선 여는 글로 김창남(성공회대 교수), 김지하(시인, 소설가)의 글을 담고, 김민기의 작업들(지하철 1호선을 비롯한)을 살필 수 있는 악보와 대본, 그리고 김민기의 디스코그래피(노래일지와 악보, 연보를 포함해서), 김민기와의 대담 및 그에 대한 리뷰들을 담고 있다. 김민기의 세계적인 활약상을 보여주듯 이 책에는 김지하, 김창남을 비롯해 지하철1호선의 원작자인 폴커 루드비히, 중국의 쾅신니엔(청화대 교수), 미국의 카터 J. 에커트(하버드대 교수), 일본의 카라 쥬로(극작가, 배우) 등이 총망라되고 있다.

지난 연말(2004년)에 나는 지인에게서 록뮤지컬 "지하철1호선" 공연 티켓 2장을 선물 받았다. 이전부터 "지하철1호선"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막상 움직이는데 둔한 편이라 공연을 직접 본다는 건 생각도 못했다가 지인의 후의로 학전소극장에서 "지하철 1호선"을 볼 수 있었다. 공연에 대해 문외한 입장에서 공연의 질을 따질 수는 없을 것이지만, 이 뮤지컬을 통해 그간 배출된 배우들의 면면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그 공연이 어떤 것일지는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다. 설경구, 이미옥, 방은진, 나윤선, 오지혜, 황정민, 장현성 등이 이 공연을 통해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고, 그 시도 자체가 우리 뮤지컬 연극 공연사의 신기원으로 인식되고 있다. 지난 1994년 5월 초연 이후 10년여가 지난 오늘까지 끊임없이 우리 사회의 모습을 풍자와 해학, 애환을 담아 50여만 명의 관객이 관람했다.

68혁명을 거친 뒤 "밥 딜런"이 포크 기타를 버리고 일렉트릭 기타로 무대에 올라섰을 때, 대중들은 밥 딜런에게 야유를 보냈다. 그러나 70년대에 접어들면서 순수의 시대는 종말을 고하고, 서구는 일제히 우향우하며 보수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밥 딜런은 오랫동안 잊혀졌고, 그 와중에 청춘의 광폭한 질주를 노래했던 지미 헨드릭스, 짐 모리슨, 제니스 조플린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한국엔 김민기가 나타난다. 김민기란 이름 석자는 70년대 우리 사회의 청춘문화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의 청춘은 오래지 않아 창살 아래 갇혀버리고 만다. 그는 갇혔지만 그의 노래들은 자유를 노래했고, 그 어느 때보다 자유를 갈구했던 시대의 요청 속에 노래를 널리 퍼졌다.

어두운 공기 속에서 노래는 널리 퍼졌고, 우리는 교과서를 배우듯 "아침이슬"에서 "상록수""늙은 군인의 노래"에서 운동가로 넘어갔다. 운동가로 넘어간 사람들은 김민기의 노래들이 선명하지 않다고 비판했다. 김민기는 그렇게 잊혀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김민기는 1979년 노래극 "공장의 불빛"을 통해 다시 돌아온다. 그러나 80년의 봄은 김민기의 봄이 아니었다. 그는 다시 오랫동안 잊혀졌다. 광주 학살로 등극한 정권은 정권대로, 그리고 이에 대항하기 위해 더욱 날카로운 무기를 갈고 다듬어야 했던 이들은 이들대로 김민기를 불러낼 수 없었다. 그리고 90년대 김민기의 투명한 불투명을 지탄했던 이들은 다시 김민기로 돌아왔다. "길은 다시 다른 봉우리로 ... 봉우리란 그저 넘어가는 고갯마루"였을 뿐이란 걸 우리들은 그제사 알 수 있었다.

재일 작가 김중명은 김민기의 작업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절규가 아니라 속삭임이다. 도취가 아니라 생명에 대한 자비에 넘친 슬기인 것이다. 사랑스런 사람의 살갗의 온기가 느껴지고, 심장의 고동이 들려오고 머리카락의 향내가 풍겨오는 그 알맞은 거리에서 들을 수 있는 노래야말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김민기의 노래는 그러한 노래의 하나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실, 김민기의 노래는 무엇이라 정의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의 노래들은 가두 시위 장소에서, 운동장에서, 예배당에서, 불시에 세상을 떠난 친구의 마지막길을 애도하는 장례식 장에서 불렸다. 그가 애초에 이 노래들을 어떤 장소에서 어떻게 쓰이길 바라고 만든 노래들이 아님에도, 아니,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노래들은 그 어떤 장소에서도 불릴 수 있었다. 김민기는 사랑이란 낱말 이전에 사랑이란 감정이 존재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말은 그 뒤에 등장한 표현기구일 뿐이라고 말한다. 김민기에게 사랑은 구체적인 느낌이자 실천이지, 표현의 문제가 아니었다. 구태여 입 밖으로 사랑이란 낱말을 뱉아내야만 사랑의 실체를 느낄 수 있다는 믿음은 어쩌면 진정으로 사랑을 신뢰할 수 없는 이들의 궁핍한 변명이다.

* 김민기는 여전히 많은 실험들을 하고 있으며, 그의 실험들 하나하나가 우리 문화사의 중요한 씨앗들이 되고 있다. 어쩌면 그 실험들은 자본과 기술의 우월을 앞세워 들이닥치고 있는 서구의 상업 뮤지컬들에 맞선 다윗의 고독한 돌팔매질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거의 3만원에 가까운 책값이지만 판형이나 지질, 안에 담고 있는 내용들은 그 값어치를 충분히 하고 있다. 김민기 전집은 네 장짜리 CD로 나와 있으니 기왕지사 이 책을 사서 읽고 싶은 이들은 그 CD들과 함께 차분하게 가라앉은 청명한 밤공기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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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하이드 > 나는 '행운아'
행운아 - 어느 시골의사 이야기 존 버거 & 장 모르 도서
존 버거 지음, 장 모르 사진, 김현우 옮김 / 눈빛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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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와 장 모르의 '사샬' 이라는 어느 시골 의사 이야기.

책은 평화로운 영국의 어느 시골의 풍경 사진으로 시작된다. 뒤로는 나즈막한 산이 보이고, 들판이 있고, 앞에는 할아버지와 손자, 혹은 아버지와 아들이 잔잔한 강물위의 조각배위에서 낚시대를 드리우고 있다.

그리고 옆 귀퉁이에 써 있다.

' 풍경은 기만적일 수 있다. 종종 풍경은 거기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이 펼쳐지는 무대라기보다는 하나의 커튼처럼 보인다. 그 뒤에서 사람들의 투쟁, 성취 그리고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는 그런 커튼... '

그리고 다음장 . 흑백사진이지만, 왠지 개와 늑대의 시간처럼 보이는 하늘과 산과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집 일고여덟채.

' 그 주민들과 함께 커튼 뒤에 있는 이에게. 풍경은 더 이상 지리적인 대상에 그치지 않고 전기傳記적이고 개인적인 그 무엇이 된다'

다시 페이지를 넘기면 '어떤 무게나 견고함도 모두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는' 안개가 자욱한 숲 속. 그리고 아마도 아래에는 도로가 있는 듯 삐죽 윗부분만 겨우 모습을 드러낸 전봇대와 전깃줄. 한 벌목꾼이 나무 밑에 깔리고, 의사에게 연락한다. 의사는 클락션을 계속 울리며, 벌목장으로 서둘러 간다. 앞에 오는 차들에게 경고를 주기 위해서일뿐만 아니라 나무에 깔린 사람이 클락션 소리를 듣고 의사가 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책의 주인공인 닥터 사샬이다.

나무에 깔려서 고통받고 있는 환자와 어쩔줄 몰라 하는 동료들에게 의사가 가고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해, 클락션을 계속 울리는 사샬 박사. 짙은 안개 속의 당황한 그들에게는 다가오는 클락션 소리만큼 반가운 소리는 세상에 없을 것이다. 이야기는 이 에피소드에서 시작된다.  처음에 읽을 때는 별 생각 없이 지나쳤으나, 이 작지만 무거운 '행운아'라는 책을 다 읽고 리뷰를 쓰려고 다시 첫 페이지부터 뒤적이니, 닥터 사샬의 환자를 대하는 마음을  잘 나타내주는 이야기이다.

이 책. 좀 특이하다.  존 버거는 시골의사의 생활과 가치관을 쫓고, 장 모르는 시골의 환자들, 그리고 의사의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제목은 '행운아' (A Fortunate Man)이다.

첫페이지에서 작가는 사진 속의 평화로운 시골 풍경과 그 풍경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할 것임을 암시한다.  그 중심에는 물론 ' 사샬 박사' 가 있다.

사샬 박사는 작은 마을의 모두를 안다. 처음 시작은 전쟁중의 해군 군의관이었다. 사람을 구하는 사람이 된 것에 크게 보람을 느끼고 그에게 의존하는 사람들에게 권위 있는 존재로 받아들여지고 동시에 그들에게 봉사하고 있다는 느낌도 받았다. 전쟁 후에 그는 결혼을 하고 ( 존 버거는 여기에서 그의 직업적인 삶에 대한 것만 이야기 할 것임을 밝히고 있다.) 국민건강보험 소속의 시골 의사의 길을 택한다. 늙은 의사의 보조의사로 시작했는데, 움직이기 싫어하는 늙은 의사덕분에(?) 젊은 의사는 직접 현장에서 환자를 대할 수 있음을 기뻐했다. 그는 항상 과로했고, 또 그것을 자랑스러워했다. 시골에서의 제2기는 삼십대 중반즈음에 찾아왔다. '이십대처럼 자발적으로 자기 자신이 되는 대신, 스스로를 직시하고 제 2의 위치에서 판단을 내리는 것이 필요한 삶의 시기였다.'  그리고 그는 나이를 먹는 자신의 모습 뿐만 아니라, 그의 환자들도 같이 나이들고 변해가는 것을 본다.

늙은 파트너가 죽고, 사샬은 수술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진다. 환자의 육체적인 병만 볼 뿐 아니라, 환자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자기 자신과 그리고 환자들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그는 마을에서 특권을 지닌 존재가 된다.  마을 사람들이 사샬을 특권을 가지는 사람으로 여기는 것은 자신들은 상식에 의존하는 데에 반해, 그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상식은 절대 스스로를 가르칠 수 없으며,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 상식은 탐구하려는 정신, 즉 철학과 구별되는 한에서만 하나의 범주로 존재할 수 있다.'

존 버거는 사샬의 '의사'라는 직업과 직업관 등을 관찰하고 고통과 질병, 두려움, 죽음. 그리고 '의사' 에 대해 사유한다.

'몸이 아플 때는 많은 관계들이 단절된다. 질병은 무언가를 분리시키는 것으로, 왜곡되고 분열된 자의식을 형성한다. 의사는 환자와의 관계를 통해서, 그리고 그에게 허락된 특별한 친밀감을 사용해서 그 깨진 관계를 보상해 주고, 환자의 악화된 자의식에 다시 사회적인 성격을 불어넣어 주어야 한다.'

사샬은 마을에서 특권을 가진 존재라고 앞서 말했다. 여기에서 '특권'은 우리가 생각하는 비리나 뇌물, 권력과는 관계 없다. 그의 특권은 마을 사람들 누구이건 그를 가족의 하나로 여기고, 자신을 맏기고, 그에게 의존하고, 그를 존중하는 등의 마음에서 얻어지는 ' 특권'이다.

그런 사샬의 지금의 고민은 환자들의 더 나은 삶이다. 숲의 사람들은 그가 가진 것-일, 가족, 가정-을 유지하기를 기대하고, 자기가 누리고 있는 즐거움-잠자리에서 마시는 한 잔의 차, 주말판 신문, 주말의 술집, 이런저런 게임, 농담 등-을 계속 유지하기를 기대한다. 그들은 최소한의 것에 안주해야 한다고 배웠고, 그렇게 자라왔다. '사는 게 그런 거죠' 라고 말한다.

그러나 숲사람들과 달리 사샬은 삶에서 최대치를 기대한다. 숲사람들에게 특히 아버지의 어머니의 것을 물려받아 역시 삶의 최소한의 것에 만족하는 젊은 세대들에게  때로는 직업학교에 연결해주거나 , 그들의 고민을 들어주면서 숲에서의 삶이 더 이상의 기회를 주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 고민한다.

이야기는 현재 진행형이다. 결론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존 버거는 여기까지는 말할 수 있다.

'사샬은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고 있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자기가 추구하고 싶은 것을 추구하고 있다. (...) 사샬은-우리 사회의 끔찍한 현실에 비추어볼 때- 행운아이다.'

존 버거는 시골 마을 의사인 사샬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원하는 일을 하지(알지) 못하는 우리의 끔찍한 현실을 비추고 있다. 그 과정에서 말로 표현 못하는 것조차도  그의 관찰을 벗어나지 않고 차근차근 이야기 된다. 우리가 의사에게 의존하는 이유,  몸이 아플 때 관계의 단절과 그 단절을 이어주는 의사의 역할, 의사와 환자간의 변증법적 관계에 이르기까지. 그는  풀어낸다.

한 편의 고요한 풍경 사진으로 시작한 이 글의 마침은 사샬이 일을 할 때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말의 인용이다. 그 논리는, '그 금욕적인 특징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긍정적 비전의 씨앗을 그 안에 담고 있다. '

" 죽음을 떠올릴 때마다 - 매일 누군가 죽어가죠- 나는 나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는데, 그 생각이 더 열심히 일하도록 만들어줍니다."

나도 리뷰를 이 인용으로 마치고 싶지만, 사샬박사의 직업관과 같은 그의 다짐은 가장 투박하고, 거칠면서도 죽음만큼 강력한 말이라는 사족을 달지 않을 수 없다.

늦게나마 존 버거를 만나게 된 나는 또 다른 의미에서 '행운아' .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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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
정수일 지음 / 창비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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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옥담 너머의 사람들과 대화하거나 마음의 소식을 알리고 싶은 충동을 가끔 받곤 한다. 잊혀가던 추억이나 향수, 즐기던 명시나 잠언, 뜨락의 한포기 풀이나 꽃, 두둥실 떠 있는 달, 흘러가는 시간, 송구영신 등 극히 예사로운 일들이 이러한 충동의 계기가 되는 것이 또한 옥살이다. 잠깐의 옥살이에 무슨 넋두리가 그렇게도 지루한가 싶기도 하며, 충동의 계기마다 토출한 것이어서 각설로 말머리를 돌릴 정도로 따분한 장광설을 요량 없이 늘어놓기도 하였다.”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정수일 교수가 만 4년 동안 옥살이를 하면서 썼던 수많은 편지 가운데 90통을 추려 엮은 책이다. 한국에서 만나 뒤늦게 결혼한 아내에게 보낸 것들로 이루어진 이 서간집에서 그는 아내조차 ‘무함마드 깐수’(그의 아내는 남편이 당국에 붙잡히는 그 순간까지도 그를 외국인으로 알고 있었다.)인 줄로 알았던 자신의 살아온 삶을, 그가 일생 동안 가슴에 품었던 뜻과 꿈을 그가 감옥에서 좌우명을 삼았던 수류화개(水流花開)처럼 찬찬히 풀어놓는다.
하나하나를 새로이 출발하고 새로이 쌓아간다는 심정과 자세로 과욕이나 성급함을 버리고 천릿길에 들어선 황소처럼 쉼없이, 오로지 앞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야 할 것이오. 잔꾀에 한눈 팔지 않고 속성(速成)에 현혹되지 않으면서 쉼없이 뚜벅뚜벅 걸어가는 길밖에 다른 길은 없소.”
동서문명교류학을 천착하고 아랍·이슬람학을 일구는 일에 인생의 전부를 걸었던 그의 고통은 무엇보다도 학문의 길이 중도에서 막혀버렸다는 것이었지만 다산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그랬듯이 그에게 있어 감옥은 또하나의 연구실이었다. 너무 오래 앉아 글을 써 엉덩이가 짓뭉개져 벽에 선반을 매고 일어서서 글을 썼다는 그는 갇힌 몸으로 실크로드를 쉼없이 넘나들며 옥중에서 전공인 문명교류학을 정립하는 데 힘을 쏟았다. 그 흔적들이 편지글속에서 역력한데도 개학을 하고 바빠 책읽기에 집중할 수 없었던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장단고저가 없이 연결되던 장문의 서간체라 중도에 접어 둘까도 했으나 영하의 추위속 언 손으로 일주일 내내 그 책을 들고 틈틈 보고 다녔다.  간이역이 없는 기차를 타고 가듯. 牛步千里...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책을 덮고 나니 뒷맛이 꽤 묵직하니 걸리던 책이었다. 재판장마저도 판결에 앞서 “피고인은 소설 같은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라 했을 정도의 중국에서 25년간, 북한에서 15년간, 해외에서 10년간, 남한에서 12년간(96년 당시)이라는  인생역정이 그 서간문 너머에 자리하고 있었고 학문의 총림(叢林)에서 무위(無爲)의 낙과(落果)가 되지 않으려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학문과 더불어 살겠다는 그. 곧 牛步千里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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