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
정수일 지음 / 창비 / 2004년 10월
평점 :
“살다보면 옥담 너머의 사람들과 대화하거나 마음의 소식을 알리고 싶은 충동을 가끔 받곤 한다. 잊혀가던 추억이나 향수, 즐기던 명시나 잠언, 뜨락의 한포기 풀이나 꽃, 두둥실 떠 있는 달, 흘러가는 시간, 송구영신 등 극히 예사로운 일들이 이러한 충동의 계기가 되는 것이 또한 옥살이다. 잠깐의 옥살이에 무슨 넋두리가 그렇게도 지루한가 싶기도 하며, 충동의 계기마다 토출한 것이어서 각설로 말머리를 돌릴 정도로 따분한 장광설을 요량 없이 늘어놓기도 하였다.”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정수일 교수가 만 4년 동안 옥살이를 하면서 썼던 수많은 편지 가운데 90통을 추려 엮은 책이다. 한국에서 만나 뒤늦게 결혼한 아내에게 보낸 것들로 이루어진 이 서간집에서 그는 아내조차 ‘무함마드 깐수’(그의 아내는 남편이 당국에 붙잡히는 그 순간까지도 그를 외국인으로 알고 있었다.)인 줄로 알았던 자신의 살아온 삶을, 그가 일생 동안 가슴에 품었던 뜻과 꿈을 그가 감옥에서 좌우명을 삼았던 수류화개(水流花開)처럼 찬찬히 풀어놓는다.
“하나하나를 새로이 출발하고 새로이 쌓아간다는 심정과 자세로 과욕이나 성급함을 버리고 천릿길에 들어선 황소처럼 쉼없이, 오로지 앞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야 할 것이오. 잔꾀에 한눈 팔지 않고 속성(速成)에 현혹되지 않으면서 쉼없이 뚜벅뚜벅 걸어가는 길밖에 다른 길은 없소.”
동서문명교류학을 천착하고 아랍·이슬람학을 일구는 일에 인생의 전부를 걸었던 그의 고통은 무엇보다도 학문의 길이 중도에서 막혀버렸다는 것이었지만 다산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그랬듯이 그에게 있어 감옥은 또하나의 연구실이었다. 너무 오래 앉아 글을 써 엉덩이가 짓뭉개져 벽에 선반을 매고 일어서서 글을 썼다는 그는 갇힌 몸으로 실크로드를 쉼없이 넘나들며 옥중에서 전공인 문명교류학을 정립하는 데 힘을 쏟았다. 그 흔적들이 편지글속에서 역력한데도 개학을 하고 바빠 책읽기에 집중할 수 없었던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장단고저가 없이 연결되던 장문의 서간체라 중도에 접어 둘까도 했으나 영하의 추위속 언 손으로 일주일 내내 그 책을 들고 틈틈 보고 다녔다. 간이역이 없는 기차를 타고 가듯. 牛步千里...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책을 덮고 나니 뒷맛이 꽤 묵직하니 걸리던 책이었다. 재판장마저도 판결에 앞서 “피고인은 소설 같은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라 했을 정도의 중국에서 25년간, 북한에서 15년간, 해외에서 10년간, 남한에서 12년간(96년 당시)이라는 인생역정이 그 서간문 너머에 자리하고 있었고 학문의 총림(叢林)에서 무위(無爲)의 낙과(落果)가 되지 않으려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학문과 더불어 살겠다는 그. 곧 牛步千里였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