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명하지 않은 것도 선명하게 선명하지 않아야 한다.-14쪽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불안감에서 해방되려 한다. 위대한 선동가는 그것을 이용하여 우선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고 그것을 해소하는 가장 손쉬운 길을 제시한다. 그 길이 축제로 변할 수 있을 때 혁명은 완성된다.-19쪽
"원이 사변 철학의, 즉 자기 자신에만 집착하는 사고의 상징이자 문양이라면[거기에는 머리라는 하나의 중심점이 있으므로: 인용자], 타원은 감성적 철학, 즉 직관에 입각하는 사고의 상징이다[거기에는 머리와 가슴이라는 두 개의 중심점이 있으므로: 인용자]" 자스의 <<포이에르바하>>(문지,1985)에서 따온 두 개의 인용문 중 하나-20쪽
어떤 경우에건 자살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그것은 싸움을 포기하는 것이니까. 살아서 별별 추한 꼴을 다 봐야 한다. 그것이 삶이니까.-25쪽
엘리아드의 아름다운 문장 하나: "망명자는 누구나 이타카로 되돌아가고 있는 율리시즈이다. 모든 생활은 오딧세이, 이타카로 가는 길, 중심으로 가는 길의 모사이다. 망명자는 자기 방황의 감춰진 뜻을 통찰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이 중심으로의 한 입사적 시련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저마다 자신의 다리와 악으로 집으로 가고 있다."-26쪽
인천에서 뵌 그는 도시 산업 선교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에야 그의 염결성. 깨끗함이 청빈함. 정직함. 진지함의 다른 말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의 가난의 엄청난 도덕적 무게에 짓눌리곤 하였다. 나도 그와 같이 되리라.-48쪽
한창기의 귀담아들을 만한 주장 두 개(1986. 10. 6):
1) 사물놀이는 한국적인 것이 아니라 일본 것의 변형이다;
2) 아름답다의 아름은 알을알음의 알음, 앎의 대상이다. 아는 물건 같다가 아름답다의 어원이다. 고유섭은 아름을 앎이라고 생각했으나, 아름은 앎이 아니라 앎의 대상이다.-50쪽
황지우의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호>>(한마당, 1986)는 뛰어난 시인이 쓸 수 있는 좋은 산문집이다. 김수영. 정현종. 김지하의 산문집에 필적할 만하다. 지식 노동자로서의 부끄러움이 배어 있지만, 감성적이면서도 빠트린 것 하나 없는 것 같은 지적 문장, 뛰어난 분석력(분석은 분석을 벗어나는 것을 과감히 버리는 행위까지를 포함한다. 바보들만 하나도 안 버리려다가 다 버린다), 음흉한 자기 방어(그 반작용으로의 공격력)는 눈여겨볼 만하다. 좋은 산문가는 뛰어난 통찰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56쪽
<<천일야화>>에서 빠트릴 수 없는 것이 날으는 양탄자와 표주박 속에 갇힌 마신이다. 말보다 더 빠른 교통 수단에 대한 갈망이 날으는 양탄자를 낳았다면-날으는 양탄자를 만들어낼 만한 상상력을 갖지 못했던 중국인들은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피땀을 흘리는 말을 꿈꾸었었다-욕망의 거대함에 놀란 사람들의 무의식은 표주박에 갇힌 마신을 낳았다. 자기 속에 그토록 큰 욕망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그 절망감과 환희. 그것이 영원히 달성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 때의 절망감과 자기 존재를 뛰어넘을 수 있을 만큼 욕망이 크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환희가 표주박 속에 갇힌 마신을 낳은 것이 아니었을까? 그 마신은 대개 세 가지의 소원만을 들어준다. 소원은 한없이 많은데 셋뿐이라니! 그러나 그 셋은 만물을 낳은 모태로서의 삶이다. 도는 일을 낳고, 일은 이를 낳고, 이는 만물을 낳는다, 다시 말해 삶을 낳는다.-85쪽
정명환의 학문의 본질은 합리주의이다. 그가 비합리주의적인 모든 것이 날카로운 비난을 퍼붓는 것은 그것 때문이다. 그러나, 아니, 그렇기 때문에 때로 그의 생활은 비합리주의적인 것으로 채색된다. 그의 폭음. 폭설........은 그런 면의 표현이다. 인간은 무의식 중에 균형을 유지하려는 성향을 보인다.-86쪽
이 책(루카치의 <<역사와 계급 의식>>)을 프랑스에서 읽었을 때는 비-선동적으로 느껴졌는데, 여기서 읽을 때는 선동적으로 느껴지는 이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다가, 나는 책읽기가 단순한 활자 읽기가 아니라 그 책이 던져져 있는 상황 읽기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었다. 책읽기 역시 전술적이다. 프랑스에서는 루카치의 주장들이 이미 극복이 된 정황 속에 놓여 있었고-그의 과격한 볼셰비키적 태도에 대한 비판은 사회당의 집권으로 현실화되어 나타났다- 한국에서는 그것이 이제 심각하게 검토되는 정황 속에 놓여 있다. 그 정황의 차이가 그 책읽기의 차이를 부른 것이리라 생각한다.-89쪽
남들은 자기를 알콜중독자라고 말하지만 자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몸은 나른하고 세상은 계속 적막하다. 나는 이런 사람이 아닌데 이렇다라는 자기 기만. 그 자기 기만에 대한 기막힌 설창
비참을 에누리없이 비참대로 바라보자 했었지 그게 언제였던가 그땐 행복했을 때 바라보아도 그리 험악하지 않았을 때
- 김지하-104쪽
토도로프의 <<미국정복>>(1982)을 일주일에 걸쳐 천천히 읽었다. (.....) 그것은 타자의 문제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그의 의도는 두 문명의 만남을 통해 이타성-바흐친의 용어를 빌면 주체로서 타자를 인정하기exotopie-의 문제를 해결해보겠다는 것인데, 타자를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한, 이타성의 문제는 정복의 문제이지, 다시 말해 군사적 차원의 문제이지, 융화-사랑, 다시 말해 문화적인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 그의 전언이다.-110쪽
모든 진리는 자기확장적이다. 어떤 관념이 자기를 진리라고 믿을 때, 그것은 맹렬하게 팽창한다. 주먹만하게 줄어들었다가 크게 폭발한 우주처럼. 그러나 그 우주에도 끝은 있다.-113쪽
시에 있어서, 감각의 깊이란 결국 삶의 구체성에 대한 실감이 아니면 무엇일까?-132쪽
김정환의 <<세상 속으로 1,2>>(동광출판사, 1988)의 몇 개의 주장 중
4) "그대의 양키 고 홈 구호에서 느낌표를 떼라. 느낌표의 봉건성을 자기 투쟁으로 혁파하라.", "느낌표가 붙어 있다는 것은 언제나 시작임을 알리는 동시에,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을 표현한다." 재미있는 지적이다.-133쪽
사람은 두 번 죽는다. 한 번은 육체적으로, 또 한 번은 타인의 기억 속에서 사라짐으로써 정신적으로 죽는다. 그 죽음관은 프루스트가 정석화했고, 바르트가 그의 사진론에서 다시 환기시킨 죽음관인데, 그것을 그르니에의 에세를 읽다가 다시 읽게 되었다. 그의 글을 왜 좋아하는 척하는 것일까? 깊이도 고통도 없는 글들을.-136쪽
나는 항상 옳다라고 말하는 사람과 나는 항상 잘못한다라고 생각하는 사람. 앞의 사람은 투사고 뒤의 사람은 종교인, 예술인이다. 나는 항상 옳다라고 말하는 사람의 자부심 없이는 싸울 수 없고, 나는 항상 잘못한다라고 사유하는 사람의 원죄성이 없이는 느낄 수 없다.-1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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